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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을 끝까지 읽었어야 했다-28화 (28/184)

28화

“너무 놀라지 마세요.”

샬롯이 다정하게 디아나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딱히 트리샤에 대한 동정이 이는 것은 아니었다. 디아나가 놀란 것은 진짜로 원작의 내용이 바뀌어 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하긴, 이건 단순한 빙의물이 아닌 회귀물이다. 내용이 변하지 않는다면 회귀를 할 이유가 없었다.

“샬롯…… 나 잠시 혼자 생각하고 싶은데.”

“네, 이따 점심 식사는 하셔야 해요.”

“응.”

디아나의 대답을 듣고 마음이 놓였는지 샬롯은 문을 나섰다.

“아마…… 사고가 아닐 거야.”

겨우 냉정해진 디아나가 중얼거렸다. 사고였다면, 원작에서도 일어났어야 한다. 굳이 디아나가 회귀한 후에 없던 사고가 생겼다면 그건 사고가 아니라 고의라는 것이다.

“설마…….”

블랑 남작은 적이 많았다. 도박판의 빚쟁이들이 항상 독촉해 댔다는 표현이 있을 정도다. 하지만 그들은 굳이 남작을 살해할 이유가 없었다. 죽은 사람에게 빚을 받을 수는 없는 일이니까.

“하지만 그 아이는 열일곱이야.”

그리고 디아나는 아니었다. 산전수전을 다 겪은 후의 성인인 트리샤라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지만, 어른의 내면을 가진 것은 디아나지 트리샤가 아니었다.

또한, 디아나가 섣불리 확신할 증거는 없었다. 게다가 디아나는 이미 자신의 인생에서 트리샤의 존재를 지우기로 했다. 트리샤의 처지에서도 굳이 그런 짓을 할 필요는 없었다. 이미 시녀로 입궁해 루카스와 만남을 가졌으니 원하는 건 다 가지지 않았는가.

“그래, 그보단 내 인생에 집중할 때야.”

디아나는 무도회에서 봤던 광경을 떠올렸다. 모두 화려하게 치장하고 한껏 귀족적인 모습을 뽐내고 있었지만, 각자가 달랐다. 조금만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신분이 비슷한 사람끼리 모여서 담소를 나누고 있었고, 갑과 을의 관계가 작은 행동에서도 확연히 보였다.

“그런 인생이 행복할까.”

한때 황후였기에 가장 잘 아는 귀족 계급의 일이었다. 아무리 외면을 받아도 황후는 황후였고 디아나를 시기하는 이와 견제하는 이, 어찌 됐든 관심을 받아 보려고 발버둥 치는 이까지…… 그중 디아나가 친구라고 여길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이곳은 나와 맞지 않아.”

디아나가 원하는 것은 그저 에드윈의 다정한 눈빛과 따스한 손길이었다. 그 외의 사람들은 어떻게 되든 아무래도 좋았다. 젊은 대공과의 왈츠 때문에 자신을 주목하는 사람들은 더욱 그랬다.

디아나는 상류층의 답답한 가치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적어도 에드윈이 있다면 괜찮을 것 같았다.

“자유부터 찾아야 해.”

원작의 디아나가 불행했던 것은, 무엇 하나 제 뜻대로 할 수 없는 무력함 때문이었다. 디아나는 황실에서 가장 고귀한 여성이었지만 어떤 색의 옷을 입을지조차 정할 수 없이 무능했다.

그 책에 들어와 자신이 황후라는 것을 알았지만, 그런다고 달라지는 건 없었다. 무력감과 외로움은 이미 충분히 체험했다.

“이 사건이 루카스의 귀에 들어가면, 둘은 틀림없이 더 가까워지겠지.”

세상 물정을 모르는 루카스에게 이 비극은 트리샤를 더욱 불쌍하게 여길 이유가 될 것이다. 그 점은 디아나에게 썩 나쁘지 않았다.

“제국 통치하에 있는 열일곱의 영애.”

그것이 지금의 자신이었다. 나이는 계속 많아질 테지만, 여인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것이다. 이 시대의 상식을 포함한 세 가지를 받아들이는 것이 지금 디아나에게 주어진 숙제였다.

***

샬롯은 너무 태연한 디아나의 태도에 내심 놀랐다. 디아나는 본래 감정 기복을 잘 드러내지 않는 성격이었다. 샬롯이 평소 트리샤의 존재를 싫어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최근 직접 트리샤를 밀어낸 것은 디아나였다.

“아가씨가 벌써 이렇게 자라신 건가.”

아마 동요는 컸을 거다. 그것을 묵묵히 숨기고 일부러 혼자만의 시간을 달라고 했으니 샬롯은 한층 마음이 아팠다.

평생 디아나를 돌봐 왔던 샬롯으로선 요즘의 디아나를 이해하기 어려울 때가 많았다. 디아나는 변했다. 샬롯으로선 전적으로 긍정적인 변화였다. 카를가의 재산을 찾아온 것부터가 전환점으로 느껴졌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역사책이라니…….”

샬롯은 디아나의 요청대로 열심히 서재를 뒤졌다.

“이렇게라도 잠깐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시는 게 낫겠지.”

샬롯의 추리는 늘 애매하게 빗나갔다. 지금 디아나가 트리샤 일가에 벌어진 사건을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은 맞았지만, 굳이 역사책을 끄집어 오라고 한 이유는 달랐다.

“아가씨, 일단 이 정도로 찾아왔어요.”

“응, 고마워.”

디아나는 열린 창문 틈으로 가을의 청명한 바람을 느꼈다. 샬롯은 디아나를 위해 준비한 차를 두고 혼자만의 시간을 주기 위해 그대로 방을 나섰다.

“제국의 역사라.”

산더미 같은 책이 눈에 들어오자 마음이 약간 답답해졌다.

“적어도 이 중에 한 줄 정도는 날 위한 게 있겠지.”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디아나가 원래 독서를 좋아했다는 거다. 사실 유일한 취미라고 할 것이 독서뿐이었다.

이 이야기의 디아나가 되기 전에는 다리를 못 쓰는 채 시설에서 보살핌을 받았고 당연히 돈도 없었다. 어쩌면 그래서 더 빨리 황후였던 디아나에 적응할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한없는 고독과 무력함은 시대를 초월한 둘의 공통점이었다. 디아나가 세상을 접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도 책이었다.

책은 디아나에게 경멸이나 무시의 시선을 주지 않는다. 그저 판에 찍어 낸 반듯한 글자로 책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그것을 읽는 것도, 그만두는 것도 전부 디아나의 선택이었다.

“……그것 때문에 그 책의 결말을 모르는 게 안타깝지만.”

후회는 늦었다. 설명할 수 없는 신비한 힘으로 디아나가 되었고, 원작대로 회귀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디아나가 자신의 길을 개척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원작의 불행이 다시 디아나를 삼킬 수 있었다.

“이건 이제 내 인생이야.”

디아나가 자신을 다독이듯 차분하게 말했다.

“이제부터 모든 선택도, 그 선택에 따른 책임도 전부…… 내 것이야.”

디아나는 더는 독자가 아니었다. 이것은 온전히 자신의 인생이었다. 그것을 깨닫자 무엇을 해야 할지 명확해졌다. 우선 이 산더미 같은 책에서 디아나와 비슷한 경우를 찾아야 했다. 제국의 법 안에서 귀족 여인이 자립할 수 있는 사례가 필요했다.

“불가능하진 않아. ……그때, 트리샤도 여인이면서 단독 후작위를 받았으니.”

그리고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차가 완전히 식었을 때 디아나는 한 문장을 손가락으로 짚어 갔다.

[타이라 공작은 여인으로서 공작위를 가진 인물로, 드물지만 제국의 법령이 평등하다는 것을 보여 준 사례였다.]

수십 년 전의 기록이었다. 하긴, 전례가 있었으니 루카스도 트리샤에게 작위를 부여하겠다고 나섰으리라. 그 아픈 기억이 지금의 디아나에겐 힌트가 되어 준다는 것이 아이러니했다.

[그녀는 타이라 공작가의 여식으로 태어나 훗날 자비에르 후작과 혼인한다. 남편의 때 이른 죽음으로 혼인 생활은 몇 년이 채 되지 못했고 그녀는 자신이 태어난 영지로 돌아간다.]

디아나의 짐작이 맞았다. 이 제국은 의외로 여성 인권이 홀대당하지 않았다. 현대와 같은 수준은 될 수 없겠지만, 신분 체계인 나라에서 자신이 기회를 쟁취할 수 있는 예도 있었다.

[무려 3년에 걸친 소송과 정계, 재계, 사교계에 큰 영향을 휘두르던 그녀가 성공한 것은 놀랍지 않은 사실이다. 그녀는 방계로 빼앗겼던 자신 몫의 영지와 작위를 다시 탈환했다.]

그러나 이 간단한 문장처럼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애초에 그녀가 남자로 태어났다면 거칠 필요도 없는 과정이었다. 그런데도 그녀는 성공했으니 디아나에게도 희망이 있었다.

“유산을 받은 건 시작이야.”

디아나는 잠시의 승리에 취할 생각은 없었다. 원작의 디아나도 똑같은 것을 갖고 있었지만, 그 결과는 어땠던가.

“이제 도망치는 건 그만두겠어.”

디아나는 그제야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정확하게 깨달았다.

“난 아직 열일곱이야.”

그러나 가진 것은 본래 세계의 자신보다 훨씬 많았다. 우선 디아나에겐 자유롭게 걸을 수 있는 다리가 있었고, 부모님이 남겨 주신 유산과 자신을 지지해 주는 샬롯과 같은 사람까지.

처음엔 그 책에 들어온 것이 사고라고 생각했다. 황후인 디아나는 정중한 보살핌을 가장한 강요와 압박에 시달렸다. 기뻤던 일은 없었다. 슬픈 일은 이미 무뎌진 가슴에 새로운 생채기를 내진 못했다. 그냥 그렇게 살아만 갔다. 자신은 어디를 가도 무력하다는 것을 상기하면서.

“내 길을…… 걸어야지.”

사고였지만, 불행한 사고는 아니었다. 오히려 전에 가지지 못한 무수한 기회가 있었다. 늘 책을 통해서 접하던 일들이 이젠 디아나 본인의 현실이었다.

그것만으로도 디아나가 된 가치가 있었다.

그 가치와 기회가 아쉽지 않도록, 이제부턴 자신의 길을 찾을 것이다.

***

디아나는 다음 날까지도 책에 푹 빠져서 살았다. 불과 10여 년 전에도 백작의 지위를 받은 여인이 있었다. 즉, 제국법령에서 여인이라고 해서 작위를 받을 수 없다는 규정은 없었다.

그렇지만, 그 여인들은 특별했다.

정계, 재계, 사교계에 큰 영향을 행사했다는 기록은 꽤 자주 나왔다. 자신의 재산을 시작으로 사업을 불려서 제국에 일정 기부를 하고 작위를 받은 여인도 있었다. 그들 모두 한 번은 혼인했지만, 제자리를 찾았을 때 남편의 존재는 없었다.

“……어차피 그럴 거라면, 굳이 혼인할 필요 없잖아.”

이건 달가운 사실이었다. 디아나가 한 번 겪었던 혼인은 비참했다. 차라리 혼자인 것이 자유로웠다.

그 혼인으로 아무리 지위가 높아진다고 해도 자신의 삶이 불행하다면 의미가 없다. 무엇보다…… 책에 적힌 그 어떤 여인보다 특별한 것이 지금 디아나의 상황이었다.

“루카스가 아니더라도, 행복한 결혼 생활이 되리라는 보장도 없고.”

디아나가 결혼에 관해 부정적 시야를 갖게 된 것은 루카스의 탓이 가장 컸지만, 본래 무심한 성격도 일부분 작용했다. 지금 에드윈에 대한 감정을 갖는 것과 결혼은 별개의 문제일 수도 있었다.

디아나는 자신의 세계를 찾아가는 것을 즐겼고, 존재가치를 남에게서 찾는 성격은 아니었다. 완벽한 파트너를 만난다고 해도 그게 언제까지 지속될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애초에 그 책의 성격이 두 남녀가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고 끝날 것 같지는 않았다. 적어도 그런 동화는 아니다. 오히려 처절한 현실에 가까웠다.

“지금으로는 부족해.”

그것이 디아나가 내린 결론이었다. 유산이 있었지만, 큰 판을 바꿀 정도로 충분한 것은 아니었다. 카를 공작가의 실권은 여전히 아론과 실비아에게 있었다.

“어느 시대나 중요한 것은 돈이려나.”

그나마 디아나가 현재 가진 것이 유산이었다. 잠시 골똘한 생각에 빠진 사이 또 샬롯이 가져다준 차가 식었다.

사이가 틀어지긴 했지만, 한때는 친구였던 트리샤의 불행에 모두 디아나의 심기를 살피려 애쓰고 있었다. 디아나는 굳이 그 오해를 정정하지 않기로 했다.

계속 생각에 빠진 사이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곧 하늘엔 석양이 내릴 것 같았다. 그때 문에서 똑똑, 두 번의 노크 소리가 울렸다. 디아나가 짧게 답하자 언제나 차분한 샬롯이 부드러운 몸짓으로 다가와 디아나의 곁에 섰다.

“오늘도 독서에 푹 빠지셨군요.”

“……응, 책을 읽다 보면 뭔가 배우는 게 많은 것 같아서.”

“아가씨다운 말씀이에요.”

샬롯은 말을 마치고도 계속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용건이 따로 있는 것이다. 디아나는 책에서 눈을 떼고 샬롯을 바라봤다.

“무슨 일 있어?”

“어제 아가씨가 지시하신 대로 적절한 부조금을 블랑가에 보냈습니다.”

“그래.”

설령 이름만 아는 사이라도 이런 사소한 의전을 지키는 것이 귀족의 책무였다. 하물며 한때 두 사람이 친구였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 많으니 딱 기본적인 금액만 보낸 것이다.

트리샤는 영리한 아이였으니 디아나의 뜻을 알았을 거다. 자로 잰 듯한 액수와 아무런 메시지도 없는 의례적인 위로는 트리샤의 불행이 이 관계를 바꾸지 못한다는 것을 명시했다.

“그리고…… 그와 관련해서인지, 체스터 대공 전하께서 오셨습니다.”

“대공 전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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