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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을 끝까지 읽었어야 했다-27화 (27/184)

27화

트리샤의 붉은 눈동자가 불길하게 빛났다.

“후, 고작 시녀로 시작한 입궁이라니. 아무리 어린 나라지만, 너무 순진하잖아?”

트리샤의 한쪽 입꼬리가 비틀렸다.

“이제 뭘 해야 하는지 똑바로 알았으니 됐어.”

모든 것이 자신의 것이었다. 디아나가 아닌 트리샤의 것이다.

“그렇지, 리샤?”

소리도 없이, 그러나 격렬하게 트리샤의 머릿속에 과거가 흘러들어 왔다.

***

트리샤는 아픈 몸을 이끌고 겨우 집에 도착했다. 시녀가 하나 없어졌다고 난리가 날지는 몰라도, 그게 트리샤라면 딱히 걱정할 사람도 없었다. 집까지 오는 내내 걸어야 했기에 자연히 생각을 정리할 시간도 충분했다.

트리샤가 도달한 결론은 역시 디아나도 자신과 같은 것을 봤다는 것이다.

어쩐지 하루아침에 사람이 변했다고 생각했다. 그래, 그런 과거이자 미래를 봤으니 자신을 친구로 여기기는 어려웠을 테다.

“그래, 충분히 그럴 수 있지.”

아는 것은 곧 권력이었다. 가능성이기도 했고 능력이기도 했다.

“나도 쳐내야 할 것들이 있으니까, 이해는 해.”

트리샤의 혼잣말을 이제 열일곱 소녀의 것이 아니었다. 차갑고 냉소적이며 비틀린 입매로 미소를 짓는 건 리샤라고 불리며 황실을 누비던 여인의 것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것도 디아나 너 때문이지만.”

묘한 혼잣말이었다. 만일 처음대로 디아나가 자신을 친구로 여겨 줬다면 무리 없이 루카스에게 접근할 수 있었을 거다.

그다음엔 자신만의 비법이 있었다. 항상 트리샤를 옭아매던 어머니의 미천한 신분이 유일하게 도움이 된 경우였다. 또한, 그 비법이 있는 한 루카스는 트리샤를 외면할 수 없었다.

“열일곱…… 아직은 때가 아니지만.”

트리샤는 공교롭게도 며칠 전 어머니께 받았던 붉은 책을 떠올렸다. 당시엔 그 책의 의미를 몰랐지만, 지금은 확실히 안다. 그건 마녀들이나 쓰는 주술이라고 일컬어지는 내용이 담긴 책이었다. 미신이라고 치부하기엔, 너무 정교한 내용이었다.

“자식에게 그런 걸 숨기다니, 내 부모란 것도 참.”

한심한 부모였다. 아버지는 말할 필요도 없었고, 어머니도 무책임했다. 아마 원래의 전개대로 흘러갔으면 어머니의 병세가 악화되며 죽기 직전, 트리샤에게 비밀을 고백한다.

“어머니.”

“트리샤. 오늘은 휴일도 아닌데 어떻게 왔니? 니콜라는 오늘 옆집에 맡겼는데.”

“후, 지금 니콜라 따위가 중요한 게 아니에요.”

사라가 딸의 목소리에서 이질감을 느낀 것은 당연했다.

“트리샤?”

“아무튼, 어머니한텐 고맙게 생각해요.”

“너 갑자기…….”

“어머니가 비천한 신분이라 내 발목을 잡는다고 여겼는데, 아니었어. 그렇죠?”

사라가 힘겹게 몸을 일으켜 자신의 딸을 봤다.

“너, 누구니.”

사라는 육감이 유난히 발달한 사람이었다. 제 자식의 안에 다른 누군가가 들어 있다는 직감은 틀리지 않았다.

“난 트리샤예요. 하지만 현재의 트리샤는 아니죠.”

“무슨…….”

“무슨 뜻인지 어머니가 알 필요는 없어요.”

“착한 내 딸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트리샤가 검지를 들어 입술 앞에 댔다. 조용히 하라는 뜻이었다. 그건 도저히 열일곱의 딸이 어머니에게 할 행동이 아니었다. 붉은 눈동자는 차갑게 타오르고 있었다.

“하, 어머니가 마녀였다니. 감쪽같이 숨겼네요?”

“너 그걸 어떻게…….”

“대대로 숲에 살았던 붉은 머리카락의 사악한 마녀 일족. 어떻게 그런 대단한 걸 숨길 생각을 했어요?”

사라는 말을 멈췄다. 흔들리는 눈동자로 자신의 딸을 봐도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긴, 죽기 전에 알려 줬죠. 내가 베꼈던 책은 사실 다 의미가 있었던 거야.”

사라는 순간 오한이 일었다.

“하지만…… 유감이네요.”

사라가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도망칠 곳은 달리 없었다.

“선대가 죽어야 그 힘을 물려받을 수 있다니. 그럼 내가 모든 걸 알아도 어머니가 살아 있는 한은 주술을 쓸 수 없다는 거잖아요?”

트리샤의 얼굴엔 표정 하나 없었다. 사라는 이미 손끝을 달달 떨고 있었다.

“걱정 마요, 어머니.”

트리샤는 싸늘하게 말했다.

“곧 아버지도 같이 보내 줄게요.”

어차피 결말은 같았다. 그렇다면 시기를 앞당기는 게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트리샤는 지금 당장 주술의 힘이 필요했고, 부모의 존재는 방해밖에 되지 않았다.

“너, 설마…… 힘을 얻기 위해서 나를…… 무슨 짓을…….”

“쉿.”

트리샤가 다시 한 번 검지를 입술 앞에 댔다.

“그럴 수는…… 그런 법은 없는 거다.”

“왜요? 어차피 똑같은데. 게다가, 어머니도 그래서 사실을 숨긴 거 아니었어요?”

사라의 직감은 맞았다. 트리샤에게 사실을 알려 주지 않은 것은 혹여나 남에게 떠들까 두려워서도 있었지만, 대부분 그들 일족의 역사가 부모 살해로 끝나는 것을 염려한 탓이 컸다.

“그래도 기뻐하세요. 어머니의 딸은 황실에 들어가서 황태자 전하의 사랑을 듬뿍 받을 테니까요.”

“주술은 그런 데 쓰라고 있는 게 아니야!”

“어머니한테나 그렇겠죠.”

그러니 아버지같이 한심한 사람과 결혼을 해서 그 고생을 한 거다.

“내게 힘이 있다면, 어머니처럼은 안 살아요.”

이 습기 차고 눅눅한 곳에서 당장 벗어나 아름다운 황실로 갈 것이다. 루카스를 한 번 만날 기회를 얻는다면 그다음은 자연스럽게 이어질 수 있었다. 아주 가벼운 주술이었지만, 상대는 그것을 호감으로 해석하게 된다.

“그럼, 안녕히 주무세요.”

트리샤가 강한 힘으로 사라를 밀쳤다. 병약한 사라는 비명 한 번 내지르지 못하고 벽에 부딪혔다. 아마 트리샤를 쫓아와서 말릴 힘은 없을 것이다.

트리샤는 아무 감정 없이 그 광경을 흘깃 보고 걸음을 옮겼다. 취한 채 곯아떨어진 아버지가 남았다.

“너무 쉽네…….”

바깥에서 번개가 번쩍 치자 트리샤의 얼굴이 잠시 비쳤다. 아버지는 손가락 하나 가눌 수 없을 정도로 취해 있었다. 이렇게 무방비인 남자에게 그동안 맞고 살았다는 것이 우습게 느껴질 정도였다.

“후.”

트리샤의 손이 떨렸다. 하지만 사라가 정신을 차리고 나와서 자신을 막기 전에, 해내야 했다.

“당신은 아버지도 아니었어.”

그러나 선뜻 해칠 수가 없었다. 그때, 블랑 남작이 뒤척이며 잠꼬대를 중얼거렸다. 바보같이 그 모습에 움찔거리던 트리샤의 발에 기름 램프가 걸려 넘어졌다.

“아…….”

흩뿌려진 기름 위로 불이 화르륵 붙었다. 이 조악한 목조 주택은 화재에 취약했다.

“이건 내가 한 게 아냐.”

트리샤가 중얼거렸다. 만일을 대비해 품에 숨겼던 칼을 쓸 필요가 없어졌다.

“그래, 이건 모두 우연히 일어난 사고…….”

트리샤가 아버지 옆에 칼을 내려놨다. 그리 증오했던 아버지였는데 막상 아무런 감정도 들지 않았다. 그저 정해진 시나리오대로 움직이는 연극처럼 느껴졌다.

어차피 과거에도 있었던 일이다. 그게 또 미래가 되는 것이 이 연극의 특징이었다. 연극에 죄책감은 필요치 않다.

“드디어 이 집을 떠나는구나.”

트리샤는 차분히 내뱉고는 불길이 붙기 시작한 곳에서 멀어졌다. 이 조악한 목조 주택이 불에 전소되는 것은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다.

“으음…….”

불길이 매캐한 연기를 자아내자 블랑 남작이 얼굴을 찌푸렸다. 트리샤는 아버지가 완전히 깨기 전에 도망치듯 집 밖으로 나갔다.

“나 때문이 아니야.”

트리샤는 이미 이 연극을 받아들였다. 그녀의 머릿속에선 이 연극의 악역이 따로 있었다.

“전부…… 디아나 때문이야.”

트리샤가 이런 역할을 맡게 된 것은 다 디아나의 변한 태도 때문이다.

“디아나만 아니었으면 우리 부모님이 이렇게 일찍 돌아가시지 않아도 됐을 텐데.”

아직 돌이킬 수 있었다. 그러나 트리샤는 현관문에 등을 기대고 선 채로 되뇌듯 주문을 걸었다. 이것은 내 잘못이 아니라고.

마지막으로 트리샤는 현관을 밖에서 막았다. 가끔 아버지가 화가 나면 이런 식으로 통나무를 덧대서 문을 열지 못하게 했었는데, 이제는 처지가 바뀐 것이다.

“……이걸로 된 거야. 이건 불행한 사고였어.”

창문을 통해 본 집엔 아직 불길이 거세지 않았다. 트리샤는 주머니에서 성냥을 꺼내 불을 당겼다. 창문 너머로 툭, 불씨를 던지자 그곳에서도 화르륵 불길이 타올랐다.

“안녕, 내 비참한 인생.”

트리샤의 붉은 눈동자에 화마가 가득했다.

“……그래. 다 디아나가 나쁜 거야.”

증오와 욕망을 가득 담은 붉은 눈동자가 불길을 따라서 일렁거렸다.

모든 것을 집어삼키는 무자비한 붉은빛이었다.

***

무도회에서 긴장을 했던 탓인지 디아나는 평소보다 늦게 일어나서 일과를 시작했다. 지난밤에는 아무런 꿈 한 조각도 꾸지 않았다. 마음이 고요해지고 파문 하나 없는 연못 같았다.

“정말 아무것도 아니었어.”

그동안 루카스를 증오하고 한심하게 생각하면서도 내심 어떤 긴장이나 두려움이 있었다. 그러나 막상 직접 겪은 루카스는 디아나가 두려워할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무언가 마음의 짐이 하나 홀가분하게 사라졌다.

“샬롯?”

오늘은 디아나의 늦잠을 방해하지 말라는 지시가 있어 디아나의 방엔 아무도 없었다. 살짝 배가 고파진 디아나는 먼저 방을 나서 샬롯을 찾았다.

“세상에 그런 끔찍한 일이…….”

“아가씨도 아셔야 하는 일이 아닐까요?”

“샬롯이 알아서 하시겠죠. 일단 우리에겐 함구령을 내렸으니.”

계단 아래에서 하녀들이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디아나는 살며시 벽에 등을 기대고 숨을 죽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무서운 일이에요.”

“그러게요, 단순한 살인도 무서운데…….”

그때 하녀들의 목소리가 뚝 끊겼다.

“허튼 말 할 시간이 있으면 먼지나 더 닦도록. 내가 주의사항을 준 걸 잊었나?”

샬롯의 목소리였다. 그리고 이내 하녀들이 조용해지더니 샬롯이 계단을 올라오는 소리가 났다.

이대로 방에 들어가 모르는 체를 할까. 디아나는 잠깐 고민했지만, 왠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사소한 일은 쌓여서 그 사람의 행동 양식이 된다. 최근의 디아나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결정하는 것이 얼마나 큰 의미인지 새삼 깨달았다.

“아가씨?”

샬롯이 층계를 올라와 디아나를 보며 당황한 기색을 고스란히 보였다. 그에 비교해 디아나는 침착한 표정이었다. 디아나는 제 손으로 방문을 열고 들어갔다. 곧이어 샬롯도 따라서 들어왔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아가씨…… 함구령을 내린 것은 아가씨를 속이려고 한 게 아니라는 것을 믿어 주실 수 있을까요?”

디아나는 샬롯을 보며 살며시 미소 지었다.

“무서운 일이라고 하던데, 샬롯이 직접 말해 주려고 한 거지?”

샬롯은 고개를 끄덕였다. 디아나는 창문을 열고 그 앞의 의자에 앉았다.

디아나는 한때 다른 사람이었다가 그 책으로 들어와 디아나가 되었고, 비참한 황후의 삶을 살다가 시간까지 거슬렀다. 이젠 무슨 이야기를 들어도 그리 놀랍지 않을 것 같았다.

“아가씨, 침착하게 들으세요.”

디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샬롯이 어두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무도회 날 밤에…… 블랑 남작가에 무서운 일이 있었답니다.”

“무서운 일?”

딱히 트리샤에 관한 이야기를 더 듣고 싶지는 않았다.

“크게 중요한 게 아니라면.”

“아뇨, 꽤 화제에 오를 일이라…… 아가씨도 미리 아셔야 할 것 같아요.”

“뭐지?”

“그…… 그날 밤에 트리샤 영애가 집에 돌아왔을 때 집이 전소됐다고 해요.”

“전소라면…… 불이 났다고? 아니, 트리샤는 시녀잖아. 집에는 왜?”

“그건 잘 모르겠어요.”

샬롯은 꽤 심각한 표정이었다.

“아무튼 사건이 일어난 후, 곧장 지역구의 경비관들이 조사하다 심상치 않은 낌새가 있어 황국 근위대에 정식으로 위임됐대요. 그 이유는…….”

디아나는 그 말이 끝나기 전에 이미 결론을 알 것 같았다. 단순한 화제로 황국 근위대가 나서진 않는다. 그들이 나설 때는 이름처럼 황국이나 황실의 일일 때다.

예외가 하나 있다면 사건의 배후가 명확하지 않고 온 나라의 화제가 될 정도로 그 내용이 끔찍할 때다.

“2층은 완전히 무너지지 않았는데, 근위병들이 도착했을 때 그…… 영애의 어머니가 계단에서 채 도망치지 못한 채 쓰러져서 그, 남은 시체가…… 그을려 있었다더군요.”

그 대목에서 디아나는 잠시 숨을 멈췄다.

“트리샤 영애는 시녀라 집에 없어서 화를 면한 것 같아요. 블랑 남작의 유해도 1층에서 발견됐대요.”

“그……런 일이.”

디아나의 기억엔 없는 일이었다. 즉, 원작에선 일어나지 않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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