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책을 끝까지 읽었어야 했다-26화 (26/184)

26화

“허…….”

루카스는 항상 상상을 뛰어넘는 디아나의 모습에 할 말을 잃었다. 디아나는 그런 루카스를 남겨 둔 채 이미 알고 있는 미로의 끝을 향해 걸었다.

이제 디아나가 연회에 참석한 목적은 이미 다 이루었다. 루카스도 참는 데 한계가 있을 것이다. 그는 디아나를 포기하거나, 죽일 수 있었다. 하지만 어느 경우라도 디아나를 얌전한 황태자비로 삼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래, 기회는 주지 않을 거야.”

디아나가 혼잣말했다.

“너희도 그랬잖아.”

지금은 억울한 마음이 들지 모르지만, 디아나는 조금의 후회나 미안함이 없었다. 오히려 자신이 겪었던 그 모진 세월에 비하면 이렇게 간단히 끝내 주는 것이 자선이나 다름없었다.

“난 행복해질 거야.”

시시한 감정 다툼에, 언제나 자기중심적인 루카스의 의향에 휘둘리며 보내기엔 너무 귀중한 시간이었다. 그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는 것을 이미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행복해지려고…… 내가 여기에 온 거야.”

어떻게 그 책으로 들어왔는지는 알지 못한다. 앞으로 평생을 살아도 모를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책의 결말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이렇게 되고 나니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책에 들어온 것도, 하필 이 책이 회귀물이라는 것도.

그리고…… 모두의 인생이 그러하듯이, 결말을 모른다는 것도.

“나를 위한, 내 인생이야.”

디아나가 매듭을 지었다. 황후 디아나의 인생은 불행했지만, 지금 디아나에겐 선택의 여지가 있었다. 실제로 책의 내용과는 달리 카를가의 재산을 온전히 제 손에 넣었고 트리샤와 절교를 선언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에드윈이 있었다.

또한 그 책의 밖에서 다리를 쓸 수 없던 외로운 자신을 떠올리면…… 이건 정말 기회였다. 처음으로 행복해질 권리와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디아나는 앞을 똑바로 볼 수 있었다.

***

화려한 연회장 뒤에선 시종들과 시녀들이 눈코 뜰 새도 없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중엔 트리샤도 있었다. 트리샤는 평소 궂은일을 자주 한 덕분에 하녀들 틈에서도 위화감이 없었다.

그 핑계로 가장 바쁜 일감을 받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오히려 잘된 일이다. 오늘 연회엔 디아나도 참석했을 테니, 만날 기회가 있었다.

“얘, 은쟁반은 아직이니?”

“그보다 과일부터 내가야 해.”

그래도 영애라 불리는 신분에 시녀인데 하녀들 틈에 섞여서 일을 한다는 것은 큰 수치였다. 하지만 지금의 트리샤에겐 그런 것을 따질 여유가 없었다. 디아나를 만날 절호의 기회를 잡으려면 이보다 더한 일도 할 수 있었다.

“오리구이가 모자라!”

“아니, 우선 샴페인부터 보충해.”

“아니야, 과일부터 내가라니까?”

주방은 전쟁터나 다름없었다. 트리샤는 이 전쟁통에서 자신의 기회를 낚아채야 했다.

“제가 내갈게요, 과일!”

트리샤가 나섰다. 일부러 아침부터 곱게 기름칠을 해서 단정하게 묶은 머리와 시녀라는 신분은 연회장에 음식을 내갈 자격이 충분했다. 하녀들을 지휘하던 시녀는 트리샤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과일은 원래 있던 단상에 올려 두고, 빈 은쟁반은 바로 가져와.”

“네!”

“연회의 시녀는 그림자처럼 움직이는 법, 알고 있겠지.”

“……네.”

연회의 주인공은 초대받은 손님들뿐이다. 나머지는 그 뒤에서 분주하게 일을 해야 했다. 연회의 주인공들이 미처 부족함을 느끼기 전에 음식과 술을 채워야 했고, 결코 연회를 즐기는 사람들의 눈에 뜨여선 안 됐다. 그야말로 그림자라는 말이 딱 맞았다.

“주방장이 장식한 거니, 절대 흐트러트리지 마.”

“네.”

트리샤가 무거운 은쟁반을 간신히 들었다. 시녀장은 조금 못 미더운 표정을 지었지만, 지금 이 전쟁터 같은 주방에선 달리 내보낼 일손이 없었다.

“어서, 어서 갖다 놓고 돌아와.”

그러나 시녀장은 몰랐다. 그것이 트리샤에게 내린 마지막 명령이 될 줄은.

***

트리샤는 눈치를 살폈다. 어깨에 걸친 은쟁반은 뼈가 시릴 정도로 무거웠다. 아직 열일곱이니 어른들도 힘들어하는 궁중의 일은 버거웠다. 그럼에도 트리샤가 마지막 자존심까지 버리고 이곳에 온 이유가 있었다.

“……어디 있는 거야.”

초조한 혼잣말을 하며 트리샤가 주위를 살폈다. 아까 살짝 내다봤을 때 분명 단상 근처에 있던 디아나가 보이지 않았다. 트리샤는 하는 수 없이 과일을 자리에 두고 빈 은쟁반을 들었다.

“안 되는데…….”

지금 기회를 잡지 못하면 다시 연회장에 나올 수 있을지도 장담할 수 없었다. 그러면 모처럼 제 자존심을 버린 이유도, 고된 일을 한 이유도 수포로 돌아간다.

“아!”

계속 두리번거리던 트리샤의 시야에 드디어 디아나가 포착됐다. 그녀는 혼자서 창밖의 정원에서 돌아오는 길이었다. 평소보다 조금 더 어두운 표정이었다. 마침 트리샤가 말벗이 되어 주면 좋을 것이다. 트리샤는 걸음을 재촉해서 정원의 디아나를 향했다.

“잠깐.”

트리샤가 막 정원으로 나서려는 순간, 귓가에서 섬뜩한 목소리가 들렸다. 불길한 예감과 함께 돌아보자 완전무장을 한 근위병이 투구 너머로 트리샤를 노려보고 있었다.

“어딜 가는 거지?”

“아, 저는…… 잠깐 정원에…….”

“정원은 아무나 들어갈 수 없다.”

트리샤는 초조한 나머지 은쟁반을 옆에 내려놨다.

“저는 황실 시녀고, 무엇보다 디아나 카를의 절친한 친구예요. 지금 말벗이 되어 드리는 게 제 일이고요.”

“뭐?”

속삭이는 트리샤와 달리 근위병이 큰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주위의 시선이 일부 집중됐다.

“감히, 황태자비가 되실 분의 존함을 함부로 담다니.”

“아니, 그게 아니라.”

“끌어내라.”

근위병의 지시에 부하 둘이 와서 트리샤를 붙들었다. 발버둥을 쳤지만, 완력의 차이는 너무도 컸다. 코앞에 디아나가 있는데, 자신을 보면 알아볼 텐데 여기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니 트리샤로선 커다란 절망이었다.

“오해예요, 난 정말 디아나 영애의 절친한 친구예요!”

“망상에 빠진 것은 늘 그렇게 말하지.”

모두 트리샤 따위의 말은 가볍게 무시했다. 오히려 정신이 나간 여자라고 생각하는 것이 분명했다. 억울한 나머지 붉은 눈동자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망상이 아니야, 아니라고요! 디아나를 만나게 해 줘요, 그럼 오해를 풀 수 있…….”

“시끄럽다, 감히 그 존함을 자꾸 더럽히다니.”

근위병 한 명이 트리샤가 더 소란을 피우지 못하도록 옆구리를 무릎으로 찼다. 폭력에 상시 노출된 트리샤였지만, 주정뱅이에 나이 든 아버지의 손길에 비하면 근위병의 훈련된 폭력은 바윗덩어리처럼 무겁게 느껴졌다. 절로 억, 소리가 나면서 숨이 가빠지고 눈앞이 어지러웠다.

“당신들…… 후회할 거야.”

“아직도 입은 살아서.”

“다 일러바칠 거야! 당신들 목은 다 떨어질 거라고!”

연회장의 손님 일부가 이 불미스러운 광경에 살짝 눈길을 줬다. 근위병들로선 문책을 당할 일이었다.

“어서.”

근위병이 말하자, 부하 둘이 트리샤를 번쩍 들어서 연회장 뒤로 끌고 갔다. 그곳에서 트리샤를 기다리는 것은 폭력이었다.

특별한 의미가 없는 관습적이고 해소적인 폭력. 열일곱의 트리샤가 견디기엔 어려운 완력이었다. 우선 땅바닥에 내팽겨진 채, 배를 몇 대 걷어차이자 의식이 희미해졌다. 그럼에도 트리샤를 향한 발길질은 멈추지 않았다. 쿨럭, 기침과 함께 비린 피가 뱉어졌다.

“……됐어, 이제 가자.”

“그래, 이 정도면 됐겠지.”

멀어지는 의식 사이로 근위병들의 목소리가 멀리 들렸다.

폭력은 멈췄지만, 통증은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까무룩, 트리샤는 정신을 잃었다.

***

온몸이 시큰거리고 아팠다. 트리샤는 무의식중에 근위병에게 끌려가던 마지막 순간을 떠올렸다. 자신을 보던 귀족들의 경멸스러운 시선. 마치 거리의 미친 사람을 보는 것처럼 그들과 트리샤 사이엔 보이지 않는 선이 있었다.

하필 비까지 내리기 시작했다. 트리샤는 입안에 고인 핏물을 토해 냈다. 아직도 머리가 어지러웠다.

순간 과거와 현재가 엇갈렸다. 자신을 경멸의 시선으로 보던 사람들…… 아, 그곳에 디아나도 있었던가. 그랬을 수도 있다. 아니야. 그런 것 같아. 분명히 날 조롱하는 눈으로 보고 있었던 것 같다. 그 푸른 눈동자.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자신을 한없이 초라하게 만드는 디아나만의 깊고 푸른 눈동자.

“날…… 어디까지 비참하게 하는 거야…….”

겨우 눈을 뜨고 비를 피해 나무 그늘로 기어가던 트리샤가 다시 한 번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에서 꿈같은 환상이 빠르게 스쳐 갔다.

환상 속에서 트리샤는 웃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앞에는…… 루카스가 있었다. 똑같이 자신을 다정하게 바라보는 루카스와 마주 웃고 있었다.

“내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환상인지 알 수 없었다. 더는 몸이 아프지 않았다. 트리샤는 관찰자의 입장에서 환상을 지켜보고 있었다.

트리샤와 루카스가 점점 자라는 것이 확연히 보였다. 둘은 행복해 보였다. 서로를 보며 까르르 웃음을 터트렸고, 손을 잡은 채 정원을 누비고, 둘만의 숨바꼭질을 하는 장면이 연속해서 지나갔다.

“꿈?”

그러나 트리샤의 목소리는 울리지 않았다. 그저 루카스와 행복한 트리샤가 있었다. 너무도 선명한 광경이 꿈이나 환상일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꿈이…… 아니야.”

막연히 확신이 들었다. 이리도 선명한 것이 그저 꿈일 리 없었다. 하지만 이게 미래라면 디아나는 어떻게 된 거지.

그 의문에 답을 주기라도 하듯이 환상 속 둘을 바라보는 디아나가 보였다. 어른이 된 디아나는 여전히 아름다웠지만, 생기가 없는 시든 꽃과 같았다.

그리고 트리샤는 분명히 보았다. 미래의 자신과 루카스가 뛰어노는 모습을 창가에서 비참하게 바라보는 디아나를.

“……정말인가?”

그 순간, 환상 속의 디아나와 눈이 마주쳤다. 지금의 트리샤는 유령 같은 관찰자였는데 디아나만은 자신이 보이는 것 같았다.

“넌 내 남편을 빼앗았어.”

그러자 세상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했다.

“내 모든 것을 빼앗았어, 내 아이를 내 인생을 잃어버렸어……. 처음부터 널 친구로 삼는 게 아니었어.”

시야가 어지러웠다. 트리샤는 질끈 눈을 감고 말았다.

“난 과거로 돌아갈 거야. 그리고 이 잘못된 미래를 고칠 거야.”

알 수 없는 디아나의 목소리는 그래도 귓전을 울렸다.

“안녕, 트리샤. 너랑은 이제 끝이야.”

디아나의 목소리가 이별을 고하자마자 깊은 구멍으로 끌려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아무리 허우적거려도 어둠에서 헤어날 수 없는 것 같았다. 그리고 드디어 어둠의 바닥에 도착한 순간, 트리샤는 강한 충격과 함께 머릿속에서 파노라마처럼 흩어지는 영상을 보았다.

“아…….”

역시 환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트리샤의 과거이자 미래였다.

“그건 실제로 있었던 일이야.”

트리샤가 천천히 눈을 떴다. 온몸이 다시 욱신거리기 시작했지만, 트리샤는 마치 정신이라도 나간 양 웃고 있었다.

“그래…… 나였어!”

빗속에서 트리샤의 외침이 공허하게 울렸다.

“하, 그래. 난 과거로 돌아온 거야.”

잠들어 있던 트리샤의 기억이 깨어났다. 트리샤가 알아야 할 것은 확연했다. 그 환상은 자신의 미래가 아닌 과거였다.

“……디아나도 알고 있었어.”

그러나 자신에겐 가르쳐 주지 않았다. 이 사실만으로도 트리샤의 세계가 바뀌었다. 그 사실을 안 이상, 미래도 같아질 수 있었다.

“하하…… 그래, 그랬던 거야…….”

트리샤는 스쳐 지나갔던 기억을 하나둘 떠올리며 이해해 나갔다.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지?”

비틀거리는 몸을 겨우 일으킨 트리샤는 아직도 웃고 있었다. 이제 비참함이나 수모는 없었다. 어차피 모든 것을 가진 트리샤다. 미래도 그렇게 만들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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