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책을 끝까지 읽었어야 했다-25화 (25/184)

25화

루카스는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하지만 디아나는 이걸로도 부족했다. 디아나가 연회장에 도착해서 루카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한 것은 잠시였다. 황후로 살았던, 트리샤의 그늘로서만 숨 쉬어야 했던 디아나의 삶에 비하면 찰나인 것이다.

“그래? 지금은 왈츠 타임도 끝났으니 정원이라도 산책하는 건 어떨까.”

이것마저 거절하면 루카스의 자존심이 와르르 무너질 것이다.

“그리고 에드윈, 황후 폐하께서 찾으셨다.”

루카스가 피할 수 없는 카드로 에드윈을 배제시켰다. 에드윈의 눈동자가 한층 검어진 것은 아무도 눈치챌 수 없었다. 그 틈을 탄 루카스가 디아나의 손을 멋대로 제 팔에 얹은 채, 정원으로 향했다. 풍요제를 맞아 곳곳에 등불을 밝힌 정원은 현실이 아닌 것처럼 신비로웠다.

“이 정원은 작은 미로다. 손꼽히는 정원사들이 설계하고 만들었지.”

루카스는 정적이 어색한지 말을 꺼냈다. 디아나는 정원수 사이를 걸으며 잠시나마 옛 시절을 떠올렸다.

디아나가 유일하게 마음을 주었던 장소가 바로 황실의 정원이었다. 그 장소를 루카스와 걷다니, 회한과 감상이 함께 몰려왔다.

“그대는 정원을 좋아한다고 들었다.”

그 이야기의 출처는 뻔했다. 디아나는 가지런한 정원수에 시선을 주며 루카스로부터 한 발짝 자연스럽게 떨어졌다. 따라서 루카스의 일방적인 에스코트도 끝났다.

옆얼굴 너머로 루카스의 원망스러운 시선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우스운 일이다. 디아나는 무수한 시간, 이보다 더한 무시와 괄시를 받으며 살았는데. 정작 가해자였던 루카스는 이 잠시를 견디지도 못한다니.

“디아나, 그대는 혹시…… 날 싫어하는 건가?”

제대로 전해졌다니 다행이다. 디아나는 무심한 얼굴로 루카스를 돌아봤다. 그걸 이제야 알았으니 참으로 어이가 없었다.

“네.”

순간, 디아나가 예상하지 못했던 우수가 에메랄드빛 눈동자에 맺혔다. 기억에 없는 표정이었다. 루카스는 단 한 번도, 저런 눈빛으로 자신을 본 적이 없었다. 마치 디아나에게 버림이라도 받은 것처럼 미련과 서운함이 묻어나는 시선이었다.

루카스는 디아나에게 곁을 내준 적이 없었다. 항상 트리샤만을 싸고돌았고, 트리샤와 함께하는 시간을 즐겼다. 그곳에 디아나의 자리는 존재하지 않았다.

과거로 돌아왔다고 해도 루카스에게 변화는 없을 터였다. 그런데 왜 저렇게 안타깝게 눈썹을 기울이며, 버림받은 강아지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걸까.

루카스가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디아나를 주시했다.

“이제 시작이 아닌가.”

지금까진 그랬다. 하지만 지금의 루카스는 나이를 먹어 감에 따라 디아나가 아는 루카스가 될 것이다. 그러니 디아나에겐 루카스의 존재 자체가 달가울 리 없었다. 에메랄드빛 눈동자는 보는 것만으로도 마지막 기억을 떠올리게 해서 고통스러웠다.

이전의 생에서 루카스와 몸을 섞었다는 사실은 항상 디아나에게 기묘한 기분을 들게 했다. 둘은 무척 가까웠으면서도 가장 먼 사이였다.

“저는 황태자 전하에게 어울리지 않습니다.”

“왜, 그것을 멋대로 정하는 거지?”

“사실이니까요. 전 황태자 전하가 찾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디아나의 담담한 대답은 루카스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디아나의 눈동자엔 뭔가 강한 확신이 있었다.

“그걸 어떻게 벌써 알고, 속단하지?”

미래를 알기 때문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 디아나는 쓴웃음을 삼키며 루카스의 에메랄드빛 눈동자를 똑바로 봤다.

“예감이죠. 제 예감은 틀리지 않거든요.”

“하, 그대의 예감이 나를 싫은 인간으로 분류했다는 건가?”

디아나는 답하지 않았다. 때에 따라선 황족 능멸 죄가 될 수도 있었다. 문제의 소지는 피하되, 루카스의 감정의 저변을 살살 긁는 것이 오늘 디아나의 목표였다.

어차피 디아나는 요양을 핑계로 수도를 떠날 생각이었다. 나쁜 인상을 마지막으로 남겨 두고 한동안 시야에서 사라진다면 금세 루카스의 곁을 트리샤가 꿰찰 것이다.

“그대는 참 이상하다.”

의외의 말에 디아나의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황태자비로 내정된 것은 가문의 영광이다.”

그는 여전히 자기중심적이었다.

“그러나 그대에겐 아무런 표정이 없다. 그리 아름다운데, 부족한 것도 없을 진데.”

루카스에게 이런 면이 있었던가. 그저 과거로 돌아왔을 뿐인데, 사람이 이렇게 변하는 게 가능한지 모르겠다. 그가 타인에게 관심을 갖고 이해하려고 든다는 게 퍽 기이했다.

“그래, 그 눈이다.”

푸른 눈동자는 고요했다. 그러나 시렸고, 냉혹했다. 더러 감정의 파도가 있을 때는 더 읽기가 어려웠다. 루카스는 디아나 내면의 폭풍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감히 그 눈으로 나를 모욕하고, 능멸했지.”

“그러니 벌을 내리십시오.”

디아나는 망설이지 않았다.

“그것은 내가 정할 일이다.”

루카스는 왠지 초조한 기분이 들었다. 아까 에드윈과 춤을 추는 디아나의 모습은 너무도 아름다웠고, 그림같이 잘 어울렸다. 영애들이 보기만 해도 얼굴을 붉히는 에드윈이 상대라고는 하지만, 희미한 미소까지 보여 줬다. 그 사실이 늘 에드윈에게 못 미치는 부분이 있다 여기던 루카스를 자극했다.

“어째서지.”

근원적인 물음이었다.

“내게 대들고 능멸하려 든 것은 치기라고 여길 수 있다.”

그것까지는 관대하게 보면 신선한 매력이기도 했다. 결혼하면 달라질 문제이니 큰 상관은 없었다.

“하지만 그 눈동자는…… 내가 모르는 것이었다. 무슨 감정인지조차 알 수가 없어.”

루카스 따위가 알 리 없었다. 한때 제 남편이었던, 그리고 2년 동안 인형 취급을 당하고 기만당했던 디아나의 심정을 어찌 가늠할 수 있겠는가. 디아나는 그 과정에서 존재도 몰랐던 아이까지 잃었다.

그런데 루카스는 자신을 범하려고 하며 태연히도 트리샤의 이야기를 꺼냈다. 온몸의 피가 전부 빠져나가는 기분을, 루카스는 죽어도 모를 것이다.

“다른 이들은 모두 나의 관대함을 구걸하거늘, 그대의 눈동자는 서늘하고 차갑다. 그러면서도 어딘가…… 더 깊은 뭔가가 있어서 자꾸 떠올리게 된다.”

이것은 회귀 전의 인연인가, 그저 루카스가 가진 낯선 여인에 대한 흥미인가. 어느 쪽도 디아나에겐 달갑지 않았다. 디아나는 루카스를 떠나기 위해 목숨을 끊었으니, 더 바랄 것도 없었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아니, 모든 건 내가 결정한다.”

고압적인 말이었다. 루카스의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디아나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지금도 바로 그 눈으로 날 보고 있군.”

루카스의 눈에 어떤 모습이 비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디아나가 품은 감정은 단순한 원망이나 미련이 아니었다. 슬픔도 회한도 아니었다. 그저 디아나가 느꼈던 그 모든 감정이 혼재된 상태였다. 그것이 푸른 눈동자에 묻어나는 것이다.

“마치, 미로 같아. 이 정원처럼.”

이 정원은 루카스의 명령으로 가꿔졌다. 과거의 디아나도 그랬다. 이제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디아나. 그대의 푸른 눈동자는 확실히 아름다워. 그러나 동시에…… 어째서인지 모든 것을 꿰뚫어 보는 것만 같다. 그리고 그 사실이 나를 무척 불편하게 만든다.”

처음 아는 사실이었다. 루카스가 디아나를 불편하게 여긴다니. 그는 타인을 신경 쓰는 성정이 아니었다. 아니면, 적어도 열일곱의 루카스에겐 그런 마음이 있었던 것일까. 아무래도 좋았다.

“그러니 전 물러나겠습니다.”

“안 돼.”

성큼, 루카스가 다가왔다. 디아나는 본능적으로 경계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을 본 루카스는 마치 상처라도 받은 듯이 후, 한숨을 쉬었다.

“난 무엇이든 결론을 지어야 하는 성미다.”

왜 아니겠나. 디아나는 입을 다문 채 루카스를 봤다.

“그대가 품은 감정도, 그 감정의 이유도…… 난 차차 알아낼 작정이다.”

“전하, 전…….”

“디아나, 그대의 의견을 묻는 게 아니다.”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디아나가 모르는 방식으로 번뜩였다. 다음 순간, 루카스가 뒤로 물러서려는 디아나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그대는 이 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내가 그렇게 정했어.”

독선적인 목소리가 디아나의 귓가에 울렸다. 확실히 디아나는 특이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하루가 지날수록 어쩐지 그 시선만이 내내 뇌리에 맴돌았다. 물기 어린, 헤아릴 수 없는 깊은 호수 같은 그 눈동자.

루카스는 그런 디아나에게서 이유를 찾고 싶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느끼는 감정이었다. 그러면서도 전혀 가닥을 잡을 수 없었다.

“제게는 그럴 가치가 없습니다.”

디아나가 루카스의 말을 잘랐다. 감정이라고는 한 톨도 느껴지지 않는 서늘한 목소리였다.

“결정은 내가 한다.”

루카스는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디아나의 손목을 조여 오는 힘이 강해졌다. 특유의 소유욕을 건드리게 될 줄은 몰랐는데, 디아나는 잠시 자신의 행동을 후회했다. 어차피 트리샤와 좋은 나날을 보내게 될 거라고 알려 줄 수만 있다면 모두가 만족할 텐데.

“아까 대공과 왈츠를 추는 것을 보니, 웃을 줄도 아는 모양이던데.”

확실히 등을 따갑게 했던 건 루카스의 시선이었다.

“내게도 그런 성의를 보여 주지 않겠나. 설마, 초면인 대공이 나보다 낫다는 말을 할 생각은 아니겠지?”

충분히 가능했다. 하지만 디아나는 에드윈의 처지를 생각했다. 그에게 괜한 피해를 끼칠 수는 없었다.

“이유는 없습니다.”

“그 점이 이해가 안 된다는 것이다. 디아나, 그대의 정혼자는 나다.”

루카스에게도 눈치라는 게 있긴 했나 보다. 그런 인간이 트리샤와 놀아나며 제 억장을 무너트린 것을 생각하니 오히려 더 화가 치밀었다. 경험은 쉬이 잊을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을 좋아하는 데 이유가 없고, 사람을 싫어하는 데 이유가 없다는 말이 있죠.”

디아나는 전부터 하고 싶었던 말을 뱉었다. 늘 트리샤와만 시간을 보내는 루카스에게 주위에서 조언하자 저런 대답을 했다던가. 그 말을 전해 들어야 했던 디아나는 비참함으로 마음이 부서지는 것을 느꼈다.

남들이 모두 디아나를 멸시하고 무시해도 루카스는 그래선 안 됐다. 적어도 자신의 남편인 루카스만큼은.

“참으로 오만하군.”

“네.”

루카스가 그리 가혹했다. 자신의 부인이 된 디아나에겐 기회조차 주지 않았고, 트리샤와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면서도 죄책감 한 번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

차라리 미움받을 이유가 있었다면 디아나가 그렇게 괴롭고 비참해지지는 않았을까.

“답답하구나. 난 이유를…….”

“이유는 없어요. 사람의 마음은 그런 거죠.”

디아나는 과거에 자신이 전해 들었던 말을 무심하게 내뱉었다. 이런 순간이 온다니, 회귀물도 나쁘지 않았다.

“그냥.”

“그냥이라고?”

“네, 아무 이유 없이 그냥요.”

그 말을 전해 들은 후로 디아나는 메마른 가슴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갔다. 그냥. 그냥 디아나가 싫었고 그냥 트리샤가 좋았던 것이다. 그래서 가장 잔인한 말이었다. 이유가 없다면, 그냥이라면…… 노력할 기회조차 없다는 뜻이다. 루카스는 자신의 부인에게 당연한 기회조차 빼앗은 것이다.

“그렇지만 막상 결혼하면 모든 게 달라질 것이다.”

그러는 루카스는 디아나에게 시간을 주었던가. 디아나는 처음부터 황후의 관을 쓰기 위한 인형에 불과했다. 유구한 명문가의 혈통을 가진, 정작 친부모가 죽어 외척이 없으면서 여느 여인처럼 불만을 표출하기엔 너무도 고귀하고 기품을 지켜야 했던, 그런 인형.

“굳이 그러고 싶지 않습니다.”

“디아나!”

루카스가 버럭 언성을 높였다. 인내도 슬슬 한계였다.

“난 황태자다. 그리고 그대는 나의 비가 된다. 그것은 번복되지 않는 사실이지.”

“계획은 언제라도 무산될 수도 있습니다.”

디아나가 루카스의 손을 쳐냈다.

“다시 말씀드리겠습니다. 전 전하의 비가 되느니 죽겠습니다. 죽이시려거든, 언제든 하명하십시오.”

“나를 이 이상 도발하지 마라.”

루카스의 기세가 자못 살벌해졌다. 여태 참은 것이 그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이쯤 되면 두려움이 서릴 법도 한데, 디아나는 루카스를 그저 덤덤하게 바라봤다.

“지금 저를 참하실 게 아니라면, 물러가겠습니다.”

디아나가 차분하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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