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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을 끝까지 읽었어야 했다-24화 (24/184)

24화

야속한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어느새 황태자비 공표를 축하하기 위한 황실의 무도회가 열렸다. 디아나도 마음이 타들어 갔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어쩔 수 없이 연회에 참석해 아무것도 모르는 체를 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자, 아가씨. 다 됐습니다.”

은은하게 빛나는 하얀 원단이 너울거리며 꽃잎 같은 실루엣을 연출했다. 그 위로는 옅은 장밋빛의 리본이 화려하게 수놓아져 있었다. 목 근처엔 귀하다는 은사로 자수를 놓아 더욱 요정 같은 인상을 줬다. 과연, 마담 헤일리 회심의 역작이었다.

“너무…… 아름다워요.”

거울 앞에 선 디아나가 한 바퀴를 핑 돌자, 드레스 자락이 꽃잎처럼 피어났다. 장밋빛 뺨과 푸른 눈동자에는 사람의 것이 아닌 듯한 신비로운 기운이 깃들어 있었다.

“아가씨는 정말 마님을 많이 닮으셨어요.”

“그래?”

샬롯은 그 후로 꽤나 자주 부모님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덕분에 멀게만 느껴졌던 가족의 존재가 조금씩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특히 디아나의 어머니는 굉장한 미인이면서 독서가였고, 자애롭고 현명한 여성이라고 했다. 지금은 곁에 없지만, 이야기 속에서라도 그런 부모님을 가질 수 있는 건 생경한 경험이었다.

“그럼, 아가씨. 오늘 연회에서 즐거운 시간 보내시길 바랄게요.”

“……응.”

저택 고용인들 모두가 대문에 모여 디아나의 외출을 배웅했다. 디아나가 본격적으로 카를가의 후계자를 자청한 후 생긴 변화였다.

공작저에서 가장 화려한 마차에 오른 디아나는 흔들리는 차창 밖을 응시했다.

***

무도회의 손님이 하나둘 도착하고 있었다. 루카스는 예복을 입은 채로 손님이 도착할 때마다 노골적으로 두리번거렸다. 에드윈은 곁에서 그 속내가 뻔하다고 생각했지만, 굳이 입 밖으로 내진 않았다.

“손님은 이게 전부인가?”

“아직 남았습니다. 귀부인들은 조금 늦게 등장하는 게 예의잖습니까.”

“흐음.”

분명 루카스는 지금 디아나가 귀부인에 포함되는지 아닌지를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영애들도 그렇지요.”

“역시 그렇지?”

“네, 특별한 레이디는 파티의 마지막에 등장하기 마련이죠.”

그제야 루카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아왔다. 에드윈의 예측대로 잠시 후, 시종장이 새로운 손님이 도착했음을 알렸다. 무도회엔 워낙 인파가 많아 집중하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소식이었다.

“카를 공작가의 디아나 영애 드십니다.”

그러나 두 남자 모두 시종장의 말을 똑똑히 들었다. 쿵쿵, 시종장이 들고 있던 봉으로 바닥을 두드리자 문이 열렸다. 그 사이로 등장한 디아나의 모습은 두 사람 모두 잠시 말을 잊게 만들었다. 에드윈은 그 순간, 무심한 표정을 유지하려고 엄청난 인내를 발휘했다.

디아나의 은은하게 광택이 도는 하얀 드레스는 장밋빛 리본으로 장식되어 있었고, 디아나 뺨의 생기와 정확히 같은 색이었다. 방금 피어난 장미의 요정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로 디아나의 자태가 고아했다.

“제가 먼저 가서 말을 터 보지요.”

에드윈의 말에 루카스는 고개만 끄덕였다. 때마침 디아나는 선대공비에게 인사를 올리던 참이었다. 에드윈은 자연스럽게 어머니 곁으로 다가가는 체하며 디아나의 앞에 섰다. 고급스러운 검은빛의 예복은 에드윈의 탄탄한 몸을 멋들어지게 감싸고 있었다.

“디아나 영애, 듣던 대로 무척 아름답군.”

에드윈이 뻔뻔하게 모르는 체를 했다. 무척 신사다운 그의 태도를 보면 마차에서의 농밀한 시간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네…… 전하.”

둘은 그저 마주친 것만으로도 이미 동요하고 있었다. 그날의 사고는 쉬이 잊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에드윈은 밤마다 제 몸을 혹사하고 온 힘을 뺀 다음 찬 물을 끼얹어야만 열기를 해소할 수 있었다. 그래도 매일 밤 꿈에 나오는 디아나의 모습은…… 야속하리만치 선명했다.

“전하도 멋지십니다.”

디아나의 예쁜 미소를 보자 에드윈은 또다시 충동을 억누르기 위해 애써야 했다. 그러나 남들은 그 내막을 알 수 없었기에 멀리서 훈훈한 둘의 모습을 보고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어색한 디아나의 대답 후에 잠시 정적이 찾아왔다. 연회장은 무척 넓었지만, 어째서인지 그 마차처럼 둘만의 거리가 좁게 느껴졌다.

“연회에서 만나는 건 처음이군.”

그걸 의식한 것같이 에드윈의 목소리가 낮게 울렸다.

“네, 사실 전…… 이번이 첫 사교계 데뷔예요.”

뜻밖의 말에 에드윈의 눈동자에 이채가 서렸다.

“어릴 때 요양을 하느라, 이런 자리가 없었거든요.”

어째서인지 디아나의 처음이라는 단어는 에드윈의 귀에 무척 달콤하게 들렸다.

“그럼, 오늘 나와 출 왈츠도 처음인가?”

“네.”

디아나가 살짝 뺨을 붉혔다. 에드윈의 말에 담긴 둘만이 아는 비밀이 달콤했다. 디아나의 입가에 약간 어색한 미소가 서렸다.

에드윈은 저도 모르게 그 미소에서 하얀 목덜미로 시선을 빼앗겼다. 그때 바로 자신의 코앞에 있던 향긋한 목선이었다. 한시도 잊은 적이 없는데 이렇게 눈앞에서 다시 보니 기분이 더 이상했다.

“비 오던 날에…… 감기라도 걸리진 않았는지.”

에드윈의 목소리가 낮게 디아나에게만 들릴 정도로 울렸다. 그 안엔 어떤 묵직한 감정이 느껴졌다. 디아나는 살짝 수줍은 눈빛을 했다.

“괜찮아요.”

잠시 침묵이 고였다. 그저 서로 눈을 마주친 채였다. 마치 서로를 탐색하듯이 조심스럽고 약간의 설렘이 깃든 눈빛이었다.

“실은, 아까부터 황태자 전하께서 초조해하며 한 영애를 기다리는 모양이지만.”

“……그런가요.”

왤까. 에드윈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오다니 디아나는 가슴 한구석이 쓰라렸다.

“난 보내 줄 생각이 없다.”

디아나는 미소를 지운 채로 살짝 턱을 끄덕였다. 에드윈이 있어 두렵지 않았다. 그의 커다란 등은 루카스의 시야에서 디아나를 완벽히 숨기고 있었다.

에드윈의 검은 눈동자에 담긴 것은 그때와 똑같은 종류의 감정이었다. 반짝, 디아나의 눈동자가 함께 빛났다. 조금 전 느꼈던 감정이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대는 내 차지니까.”

그의 목소리는 유난히 낮으면서도 약간 나른하게 울렸다. 그의 느긋한 눈빛과 당당한 태도에 어울리는 음성이었다. 디아나는 대답 대신에 에드윈을 올려다보며 분홍빛 미소를 머금었다.

아까부터 루카스가 있는 연단에서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하지만 이 순간, 디아나는 다른 무엇에도 관심이 없었다. 루카스의 생각 따위, 어차피 곧 트리샤에게 전부 넘어갈 테니 뭐라고 생각하든 디아나의 소관이 아니다.

“전하라면, 제 처음을 맡겨도 좋을 것 같아요.”

디아나가 작게 속삭였다. 금방이라도 녹아내릴 것 같은 달콤한 목소리였다. 에드윈은 그 분홍빛 입술이 움직이는 걸 보자 어쩐지 갈증이 느껴졌다.

“아…… 왈츠 말이에요.”

제 말의 뉘앙스를 뒤늦게 깨달은 디아나의 뺨이 다시 붉어졌다. 그걸 보는 에드윈은 저도 모르게 소리 없는 미소를 머금었다.

“뭐든, 그대가 주는 거라면 기꺼이 받지.”

에드윈의 유독 낮은 목소리는 수많은 사람이 섞인 연회장에서도 디아나에게 분명히 전해졌다. 디아나는 남의 시선을 의식해서 눈길을 살짝 돌리려고 했지만, 눈동자는 이내 에드윈을 향하곤 했다.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에드윈의 모습은 단연 눈에 띄었다. 건장한 체격과 그야말로 준수하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이목구비, 기품이 밴 태도는 가장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전하께선 관대하시군요.”

“솔직한 것뿐이다.”

그 말에 디아나가 희미하게 미소했다.

둘은 서로를 그저 잠시 바라봤다. 그저 담담한 시선과 표정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만은 그 사이의 묘한 기류를 읽고 있었다. 그때 오케스트라가 왈츠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신사와 숙녀가 손을 잡고 발을 맞추며 음악을 즐길 때였다.

“왈츠……군.”

“네.”

에드윈이 손을 내밀었다. 그러나 막상 디아나가 망설였다. 그러면서도 거절을 하진 않았다.

“저, 실제로 연회에서 춤을 추는 것은 정말 처음이라.”

“괜찮다. 내 발은 아주 튼튼하거든.”

디아나가 그 말에 생긋 웃었다. 에드윈은 그 미소에서 용기를 얻어 손을 뻗었다. 장갑을 낀 에드윈의 손에 한참 작은 디아나의 손이 올려졌다. 은사로 자수를 놓은 디아나의 장갑이 유난히 빛났다.

“그럼, 전하를 믿고 맡길게요.”

에드윈은 능숙하게 리드하며 왈츠에 박자를 맞췄다.

그때 맡았던 체취가 다시 풍겼다. 디아나는 살짝 현기증을 느꼈다. 크고 뜨거운 에드윈의 손과 그의 숨결은 마차 안의 순간을 떠올리기 충분했다.

디아나는 일부러 자신의 발에 온 신경을 쏟았다. 처음 추는 왈츠였다. 디아나는 조금 헤매는 듯하더니 에드윈의 리드대로 유려하게 움직이며, 때론 핑그르 돌아서 제 미모와 드레스의 화려함을 온 연회장에 과시했다.

“겸손이 지나친데?”

“정말, 처음인걸요.”

따로 왈츠를 배우기는 했지만 연회장에서 남자와 춤을 추는 것은 처음이었다. 왈츠 특유의 동작 때문에 때론 에드윈의 품에 안기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디아나는 제 뺨이 붉어지지 않도록 애써야 했다. 물론 에드윈은 그보다 더한 인내로 태연함을 가장하고 있다는 걸 모르는 채였다.

에드윈의 커다란 손은 믿고 체중을 싣기에 충분했다. 그의 단단한 팔은 그 자체로 의지가 된다.

무엇보다, 잠깐씩 시야에 루카스의 모습이 비쳤다. 그는 불편한 심기를 숨기지 않고 미간을 구긴 채였다.

지금 연회장의 주목은 모두 에드윈과 디아나의 왈츠에 쏠려 있었다. 눈길을 주지 않으려고 해도 쏠릴 수밖에 없는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항상 주인공이었던 루카스로선 이 상황 자체가 무척 불쾌할 것이다.

참으려고 했지만, 디아나는 어느새 환한 미소를 띠었다. 루카스가 지금 느끼는 감정을 상상하자 기분이 좋아졌다. 루카스가 디아나에게 화를 낼수록 제 목적에 가까운 일이니 안 그래도 상쾌한 왈츠의 스텝이 한층 경쾌하게 느껴졌다.

“이런…… 아쉽군.”

디아나가 완벽하게 적응할 무렵 왈츠가 끝났다. 에드윈은 진심으로 실망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디아나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대신, 디아나는 에드윈을 바라보며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런 에드윈의 커다란 어깨 뒤로 루카스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청을 하나 드려도 될까요?”

디아나가 입을 열었다.

“물론.”

“황태자 전하께 인사드리는 것을 도와주시겠어요?”

“물론이지.”

에드윈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디아나의 의도를 읽은 것이다. 대담하게도 디아나는 에드윈의 에스코트를 받아 루카스에게 인사를 할 작정이었다. 에드윈과 왈츠를 선보인 직후에 그의 에스코트를 받아서 인사를 올리는 자신을 볼 루카스의 표정이 못내 궁금했다.

“전하, 디아나 영애를 모셔 왔습니다.”

에드윈의 말에 디아나가 살짝 무릎을 굽혔다.

“그래, 참 오래도 걸리더군.”

루카스는 비아냥대는 말투를 숨기지 못했다. 본래가 자기중심적인 인물이다. 세상이 자신을 중심으로 돈다고 생각하는 루카스로선 방금 당한 무시가 무척이나 화가 났을 테다.

“다음 곡은 물론 나와 출 테지?”

참으로 루카스다운 오만한 제안이었다.

“죄송합니다. 막상 왈츠를 춰 보니 너무 어지럽네요.”

디아나는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대응했다.

“방금 그 왈츠가…… 제 첫 왈츠였거든요.”

그러면서도 정확한 부분에서 신경을 긁었다. 대번에 루카스의 미간이 찌푸려 들자 에드윈은 곤란해 보였지만, 애초에 디아나의 목적은 이거였다.

“대공은 좋겠군, 영애의 첫 왈츠 상대라니. 평생 기억에 남을 일이 아닌가?”

“네, 아마 잊지 못할 첫 왈츠의 추억으로 남을 것 같네요.”

에드윈이 뭐라 수습하기도 전에 디아나가 한 방을 더 날렸다. 그 순간, 에드윈은 속으로만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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