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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을 끝까지 읽었어야 했다-23화 (23/184)

23화

마차 안에선 달리 그 시선을 피할 곳이 없었다. 디아나는 조금 곤란한 듯, 에드윈이 없는 허공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아, 이제 괜찮아진 것 같아요.”

마침 마차가 움직였다. 에드윈은 아쉬운 표정을 애써 감췄다. 디아나의 숨결이 코앞에 있었다. 좁은 공간에서 둘의 숨결이 섞이는 채였다.

마치 에드윈의 비밀스러운 꿈에서나 있을 법한 상황이었다. 젊은 대공은 한창 혈기왕성할 나이였다. 만나지 못한 날은 꿈에서 나올 정도의 여인이 좁은 공간에서 무릎이 닿을 정도의 거리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몸 안에서 후끈한 열기가 올라왔다.

“마차 사고에 영애가 휘말리지 않아 다행이군.”

신사적인 말과는 달리 그의 목소리가 유난히 나른하게 울렸다.

디아나는 아까부터 자신을 감싸는 낯선 체취와 분위기에 내심 당황하고 있었다. 귀족가마다 사용하는 향유나 향수가 달랐지만, 그것 때문은 아니었다. 에드윈의 눈매처럼 깊고, 그 미소처럼 어딘가 나른한 체취였다. 동시에 왠지 뺨이 붉어지는 것 같기도 했다. 괜히 가슴이 소란스러워졌다.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벨포크 쪽 마차의 말이 갑자기 난동을…… 일으켰다나 봐요.”

마차가 덜컹거리면서, 슬쩍 무릎이 닿았다. 디아나는 태연을 가장하려 했지만, 그 순간 저도 모르게 말을 흐리고 말았다. 에드윈도 그 공백과 움찔하는 디아나의 입꼬리를 놓치지 않았다.

그저 무릎이 닿은 것뿐이었지만, 디아나의 뺨에 도는 혈색이 한층 짙어진 것 같았다. 무엇보다 그 사랑스러운 혈색을 닮은 디아나의 향기가 아까부터 에드윈의 체온을 미칠 듯이 올리고 있었다.

“난동이라.”

지금 에드윈의 심장이 그리 격렬하게 뛰고 있었다. 침착하고 낮은 목소리에도 약간의 열기가 배어날 정도였다. 그때 마차가 다시 크게 덜컹였다. 체중이 가벼운 디아나가 자세를 흐트릴 만큼 큰 진동이었다.

“앗…….”

앞으로 기운 디아나에게 에드윈이 본능적으로 손을 뻗었다. 디아나의 양팔을 받친 에드윈의 손이 뜨거웠다. 디아나는 자신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이제는 자신도 느낄 정도로 뺨이 화끈거리고 있었다.

“이런, 실례.”

에드윈의 낮은 목소리가 바로 귓가에서 울렸다. 그러면서도 손을 놓지는 않았다. 에드윈은 커다란 손으로 디아나의 양팔을 잡은 채로 부드럽게 제자리에 앉혀 줬다. 그러느라 살짝 에드윈의 상체가 디아나 쪽으로 기울었다. 손수건에서 나던 체취가 훅 짙어졌다.

“어디 다친 데는…….”

“아, 아뇨.”

디아나는 방금 제 목소리가 살짝 떨리지 않았는지 걱정됐다. 그러나 다음 순간, 야속하게도 마차가 쿵, 무언가와 충돌했다. 그 바람에 상체를 디아나 쪽으로 기울이고 있던 에드윈이 중심을 잃고 디아나 위로 무너졌다.

밖에선 말이 미쳐 날뛰는 소리가 들렸다. 에드윈의 심장도 미쳐 날뛰는 중이라 미처 들리진 않았지만, 후작가의 말이 다시 발작을 시작한 것이다.

침묵이 감돌았다. 에드윈은 제 팔로 디아나의 머리 위를 짚어서 간신히 둘의 충돌을 막았다. 본능적인 행동이었지만, 좀 후회스러운 면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 에드윈의 코끝에 디아나의 새하얀 목덜미가 놓였다. 그대로 숨을 들이마시자, 온몸의 피가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어떤 이성이 개입할 여지도 없었다. 디아나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제 손을 꾹 쥔 채로, 하필 제 무릎 사이에 파고 든 에드윈의 무릎을 어쩌지 못하는 중이었다. 갑자기 마차가 기울면서 순간적으로 취해진 자세였지만, 너무도 절묘했다.

“저…… 전하.”

디아나가 간신히 말을 꺼냈다. 조금만 더 있다간 다리에 힘이 풀려 에드윈의 무릎을 감싸게 될 것 같았다. 상상만으로도 이미 얼굴이 달아오르는 광경이었다.

게다가 아까부터 목덜미에 닿는 에드윈의 숨결이 간지러웠다. 짙어진 그의 체취만큼이나 뜨거운 숨이었다. 그가 숨을 뱉을 때마다 온몸의 솜털이 곤두서는 것 같았다. 간신히 에드윈이 팔로 지탱하고 있을 뿐, 이대로면 거의 그에게 안기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전하.”

다시 한 번, 디아나가 에드윈을 불렀다. 평소와는 확연히 다른 목소리였다. 마치 목소리에 분홍빛이 묻어나는 것 같았다. 에드윈은 저도 모르게 입가에 나른한 미소를 머금었다.

이게 우연이든 사고든 아무래도 좋았다. 실은 이대로 1초라도 더 시간을 보내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곤란한 사정이 있었으니, 에드윈의 인내심이었다.

한창 나이의 젊고 건장한 대공의 몸은 당장이라도 디아나를 끌어안고 싶어서 격렬하게 들끓었다. 성적인 충동을 모르는 그는 아니었지만, 이토록 강렬하고 치명적인 유혹을 느끼는 것은 처음이었다.

“전하, 이제 그만…….”

그 말을 듣는 순간 오히려 유혹이 짙어졌다. 에드윈은 참지 못하고 코앞의 목덜미에 제 입술을 묻었다.

“아.”

디아나의 입술 사이로 묘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에드윈은 디아나에게 키스했을 때처럼 목덜미에 제 입술을 묻은 채 혀로 농밀하게 목덜미를 간질였다.

“전…… 하…….”

디아나의 작은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에드윈은 그런 디아나의 목덜미를 더욱 진하게 핥았다. 마음 같아선 그대로 한입 베어 물고 싶었지만, 차마 흔적을 남길 수는 없다는 마지막 이성이 살아 있었다.

“언제쯤 되면, 내 이름을 불러 줄 건가.”

간신히 입술을 뗀 에드윈의 목소리가 나직했다.

“그건…….”

말을 하느라 벌어진 디아나의 입술을 놓치지 않은 에드윈이 그 위로 제 입술을 겹쳤다. 뜨거운 숨결과 함께 에드윈과 혀가 엉키자 온몸의 힘이 빠지는 것 같았다. 마차라는 한정된 공간이 그 열기를 가둬서 더욱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에드윈의 말캉한 혀가 디아나의 입을 헤집는 사이로도 계속 뜨거운 숨결이 뱉어졌다. 몸 안의 어딘가가 간지럽고 애가 타는 느낌이 들었지만, 설명할 수가 없었다. 에드윈은 대담하게 디아나의 가슴을 손에 쥐고 살짝 힘을 가했다.

“아앗…….”

이젠 낯설지 않은 손길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무릎 사이에 놓인 에드윈의 무릎이 신경 쓰였다. 에드윈이 격렬한 입맞춤을 선사하느라 몸을 디아나에게 밀착시킬 때마다 그 무릎도 같이 허벅지 사이를 파고들었다.

단단한 에드윈의 무릎이 다리 사이를 꾹 누르자 하반신으로 자꾸 피가 쏠렸다. 디아나는 아랫배가 간질거리는 느낌을 참지 못하고 에드윈의 목을 끌어안았다. 그러자 에드윈은 기다렸다는 듯이 더 디아나에게 제 몸을 붙였다. 그의 무릎이 반쯤 의도적으로 디아나의 다리 사이로 더 깊이 들어왔다.

“전하, 그만…….”

그러나 에드윈은 디아나의 가슴을 어루만지다 중심 부분을 손가락으로 지분거렸다.

“앗……!”

디아나는 그만 눈을 감았다. 반사적으로 에드윈을 안은 팔에 힘이 들어갔다. 나른하고 달콤한 쾌락이 에드윈의 손끝에서 디아나의 전신으로 퍼지고 있었다.

에드윈의 커다란 손이 디아나의 가슴에서 조금씩 내려가기 시작했다. 가느다란 허리를 지나서 풍만한 엉덩이에 다가갈 때쯤, 다시 한 번 무릎이 디아나의 다리를 살짝 벌렸다.

“도착했습니다, 전하.”

그 순간, 마차가 멈췄다. 에드윈은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입술을 핥고는 아주 어렵게 디아나에게서 제 몸을 일으켰다. 그의 새카만 눈동자에서 식지 않은 열기와 미련이 뚝뚝 떨어졌다. 아직 디아나의 뺨도 붉었다.

“잠깐.”

에드윈이 마차 밖을 향해 말했다. 디아나는 그사이 엉망이 된 드레스 자락을 펴고, 뺨의 열기가 식기를 기다렸다. 그래도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에드윈의 새카만 시선이 디아나의 작은 행동마다 따라붙었다.

한순간, 그래…… 한순간만 더 끌었다면. 에드윈은 태어나 처음으로 제 인내의 끝을 봤다.

“공작저가 너무 가깝군.”

에드윈은 간신히 그 말을 뱉었다. 다시 태연한 표정을 가장한 채였다. 그러나 심장박동은 정직하게 가슴을 찢고 나올 것처럼 뛰고 있었다.

“……그러게요.”

디아나가 작게 답했다. 곧, 마차의 문이 열렸다. 디아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시종의 부축을 받아 마차에서 내렸다.

그렇게 긴 오후는 두 사람 모두에게 처음이었다.

***

밤이 돼서야 비가 멎었다. 에드윈은 그 반가운 소식에 야행을 나설 작정이었지만, 선대공비가 부르는 바람에 계획이 틀어졌다.

할 수 없이 에드윈은 열기를 식히기 위해 찬물로 목욕을 마친 후에 제 어머니의 부름을 받아서 알현실로 향했다. 그레이스 선대공비는 아들을 보며 조용히 미소하고는, 손에 들린 서신을 마저 읽어 내렸다.

“아직 어린데도 필체가 참 유려하구나.”

에드윈의 귀엔 그런 말이 들어오지 않았다. 그 순간 이후로 매분, 매초 디아나의 하얀 목덜미만이 떠올랐다. 피가 끓어서 죄 증발할 것 같았다. 비가 오는 오후임에도 찬물에 몸을 담그고서야 그나마 나아졌을 정도다.

“카를가의 디아나 영애라…….”

그레이스의 작은 읊조림에 에드윈이 깜박, 눈을 감았다가 떴다. 다른 말은 몰라도 그 이름은 흘려들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어머니 앞에서 내색할 수도 없다. 그는 평소처럼 무심한 대공의 가면을 썼다.

“보겠느냐?”

바라던 바였다. 에드윈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곤 그레이스의 손에서 편지를 가져갔다.

“아, 카를 공작가의 영애로군요.”

새삼스러운 연막이었다. 최근엔 매일 밤마다 꿈에 나오는 그녀 때문에 잠을 설쳤다. 오늘의 사고는 머리에서 한순간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래. 카를 공작부인이 직접 가져왔단다. 아마, 자랑을 하고 싶었던 게지.”

확실히 유려한 필체였다. 에드윈은 글자마다 디아나의 모습을 떠올렸다. 다른 영애였다면 상상이 되지 않았겠지만, 에드윈이 봤던 침착하고 고아한 디아나에겐 정말 잘 어울리는 필체였다.

“완벽한 황태자비로구나.”

그 말이 에드윈의 심기를 거슬렀다.

“국혼이 끝나면 너도 비를 맞아야지. 이젠, 장성한 네 모습을 널리 보여 줄 때가 됐어.”

선대공비는 제 아버지를 꼭 닮은 에드윈을 사랑스럽게 응시했다. 체스터가는 대대로 기골이 장대하고 무예에 능했다. 그러면서도 유서 깊은 대공가답게 관대하며 여유가 있는 성정이었다. 에드윈도 그 혈통을 증명하듯 이렇게 장성해 스물이 됐다.

“따로 마음에 둔 영애는 없느냐?”

있다. 이미 에드윈의 마음은 결정됐으니. 하지만 지금 입에 담을 수 있는 이름은 아니었다. 선대공비는 굳게 닫힌 에드윈의 입을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하긴, 넌 여인에 통 관심이 없으니. 뭐, 루카스 전하처럼 너무 넘치는 것도 곤란하지만 말이다…….”

그레이스의 말엔 늘 가시가 있었다. 아무리 황태자라도 제 아들보단 못하다는 거였다.

“우리도 국혼이 지나면 바로 네 반려를 들여야겠다.”

“……그럴까요.”

에드윈의 애매한 답에 선대공비는 조금 답답한 표정을 지었다. 에드윈은 이미 비를 맞이할 나이가 지난 지 오래였다. 당연히 선대공비가 여러 영애를 선보였지만, 그는 무관심으로 일관했다.

그는 무도회장보다 기사들과 어울리는 것을 즐겼고, 아직은 여인에게 조금도 흥미가 없다고 했다.

“국혼은 아주 확정된 겁니까.”

에드윈이 문득 물었다. 어리석은 질문이었다. 선대공비는 픽, 실소하고는 제 아들을 봤다. 검은 공단 부채가 너울거리며 선대공비에게 선선한 바람을 불어 줬다.

“이미 공표됐잖니.”

에드윈은 필사적으로 실망감을 눌렀다.

“천지를 흔들 이변이라도 없는 한은 그리될 거다. 황후 폐하의 선택이다.”

“……그렇군요.”

그레이스는 황후의 언니였다. 제 동생이 어떤 인간인지는 충분히 잘 알고 있었다. 선친을 여읜, 외척이 없는 공작가의 영애. 그렇게 좋은 황태자비는 없었다.

“아름다운 영애였습니다. 그럴 만하지요.”

에드윈은 묻지도 않은 말을 덧붙였다.

“마치 직접 본 것처럼 말하는구나.”

“아뇨, 그냥…….”

그레이스는 그 모습이 조금 걸렸지만, 그냥 흘려보냈다. 그사이 에드윈은 조급함을 느꼈다. 어서 이 국혼을 멈춰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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