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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을 끝까지 읽었어야 했다-22화 (22/184)

22화

신입 시녀의 하루는 고됐다. 트리샤는 처음 시침 시녀였다는 사실이 소문이 난 탓에 시녀들 사이에서도 따돌림을 당했다. 잠시 관심을 주는 것 같던 루카스도 디아나에 대한 새로운 소식이 없다는 것을 알자 너무 쉽게 트리샤를 잊었다.

“앗!”

신발이 낡아 뒤축이 무너진 탓에 중심을 잃은 트리샤가 옆의 시녀를 앞길을 막았다.

“뭐야, 저리 못 비켜?”

다른 시녀들은 대개 중위 귀족은 되는 집안의 출신이었다. 그들은 결혼 전에 궁중의 예법을 익히고 더 좋은 혼처를 찾기 위해 시녀가 된 아이들이었다. 시녀라고 해도 모여 있으면 영애들의 사교계를 보는 듯 고운 드레스가 너울거렸다.

“아, 진짜…….”

툭툭, 시녀가 트리샤와 살짝 닿을 뻔했던 어깨를 털었다. 닿은 것도 아니고 닿을 뻔했다는 이유만으로도 불쾌한 표정이 만면에 가득했다.

그 소리에 두 명이 다가와 그 시녀를 위로했다. 서로 속삭이며 트리샤를 보는 눈엔 경멸이 적나라했다. 그들은 한참 트리샤라는 존재의 천박함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저들끼리 사라졌다. 남은 일은 언제나 그렇듯 트리샤의 몫이었다.

“……괜찮아.”

트리샤는 이골이 났다는 듯이 차분하게 자신을 타일렀다. 그래 봐야 또래 영애들이었다. 그들은 블랑 남작처럼 무차별적인 폭력을 행사하지도 않았고, 텃세라고 해 봐야 시침 시녀를 고르던 시녀장처럼 지독하지 못했다.

온갖 꼴을 다 본 열일곱의 트리샤가 겨우 또래 아이들의 시샘에 눈썹 하나 까딱할 리가 없었다.

“어차피 다 갚아 줄 테니까.”

트리샤의 붉은 눈동자에 또렷한 결심이 담겼다. 비록 지금은 세간의 시선 때문에 디아나를 만나지 못했지만, 곧 황태자비로 입궁하면 만날 수 있었다. 지금 둘의 만남을 막은 것은 아마 주위의 어른들일 거다. 그건 디아나가 황태자비가 되면 자연히 해결되는 문제다.

“디아나가 오면…… 저것들은 경을 치게 될 거야.”

화병을 닦는 트리샤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때 가선 아무리 빌어도 안 봐줘.”

지금 트리샤는 유일한 친구인 디아나의 존재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여태 어렴풋이 알았던 우정의 진실을 확실히 깨우친 덕이다.

비록 귀족의 끝자락에 있는 트리샤였지만, 디아나가 얼마나 고귀한 신분인지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여태 트리샤가 잠시라도 누릴 수 있던 꿈같은 순간은 모두 디아나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카를 공작저에서 함께 놀았던 어린 시절도, 겨우 시침 시녀의 신세에서 벗어나 루카스와 말이라도 섞을 수 있었던 것 모두 디아나의 친구라는 사실 덕이었다. 애초에 트리샤 자신의 힘만으로는 평생을 가도 만날 수 없는 것이 황태자였다.

“안 돼.”

트리샤의 기민한 머리가 빠르게 결론까지 도달했다. 만일 트리샤가 디아나를 잃는다면, 아니 이미 잠시간은 그렇게 됐지만, 앞으로 트리샤의 삶에 희망은 없었다. 그러니 다시 기회가 오면 놓치지 말아야 한다.

“내가 자리를 잡을 때까진, 디아나가 필요해…….”

그것은 본인도 예전부터 직시하고 있었던 사실이다. 디아나가 없는 트리샤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디아나의 친구라는 이름으로 티파티에 참여했고 공작저에서 호사를 누리곤 했다. 어렸을 때 디아나를 만나지 못했다면 평생 모르고 살았을 것들이다.

“절대, 잃어버릴 수 없어.”

트리샤의 눈동자가 석양보다 더 붉게 타올랐다.

***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외출하기 좋은 날씨는 아니었다. 하지만 디아나는 이미 외출 복장을 한 채, 마지막으로 장갑을 꼈다.

그레이가 우산을 들고 디아나를 마차까지 배웅했다. 마차가 관청가에 멈추고, 시종이 빠르게 문을 열자 기다리던 제롬이 디아나를 보고 살짝 예를 갖췄다.

“이런 날씨에 영애를 행차하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정해진 일정인데요.”

제롬은 묘한 미소를 지었다. 여태 수많은 의뢰인을 만났지만, 이런 날씨에도 약속을 지키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귀족들은 기본적으로 특권 의식이 철저했다. 그들은 날씨가 마음에 들지 않거나 그저 기분이 별로라는 이유로 아무렇지도 않게 제롬과의 약속을 깼다.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도 영애뿐이지만요.”

디아나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자신은 자각하지 못했지만, 디아나는 공작 영애라는 고귀한 신분에도 특권 의식이 없었다. 그것은 디아나의 정체에 깃든 비밀 때문이었지만, 내막을 모르는 다른 이의 눈에는 그것이 무척이나 관대하고 올곧게 보였다.

“서기관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서류 준비는 마쳤고요. 카를 공작님의 허가도 받았습니다.”

제롬의 눈에는 카를 공작인 아론도 흥미로운 대상이었다. 그는 정말 귀족이 아니라 학자로 태어났어야 했다. 아무리 제 연구 외에 무심한 남자라지만, 이리 큰 재산이 오가는 것을 단번에 결정하다니 어떤 의미에선 무척 대단했다.

“난 확인하고 서명하면 되는 건가요?”

“예.”

제롬의 일 처리는 언제나 깔끔했다. 과연, 서기관의 사무실에 들어서자 디아나를 위한 서류가 가지런히 준비되어 있었다. 꼼꼼히 서류를 살펴봤지만 문제는 없었다. 디아나는 날씨 때문에 다소 눅눅해진 종이에 유려한 필체로 서명을 했다.

“이렇게 일부 영지와 재산은 정리됐습니다.”

디아나가 살며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제롬의 말처럼, 어떤 영지나 재산은 아론의 위임만으로 넘겨받을 수 있었지만, 어떤 것은 법적인 절차를 밟아야 했다.

“혹시 다른 일정이 있으십니까, 영애.”

제롬의 질문에 디아나는 고개를 저었다. 굳이 이런 날씨에 외출 시간을 늘리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니다. 그때, 제롬의 조수가 다가와 제롬에게 귀엣말을 하고 물러갔다.

“……저런.”

“무슨 일이죠?”

“마차 사고랍니다.”

그 말을 뱉은 즉시, 제롬의 금빛 눈동자에 당혹감이 서렸다. 그로선 드문 일이었다.

“……실례를 용서하십시오.”

디아나의 선친은 마차 사고로 유명을 달리했다. 그녀가 다섯 살 때의 일이니 무척 괴로운 일일 테다.

“신경 쓰지 마세요.”

“관대함에 감사드립니다.”

역시, 디아나에게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었다. 호기심과 의문은 전부 풀어내야 직성이 풀리는 제롬으로선 구미가 당기는 수수께끼였다.

“벨포크 후작가의 마차 바퀴가 빗길에 미끄러지면서 빠졌다고 합니다. 원인 제공은 말이 했다는군요. 갑자기 발작적으로 날뛰었다고.”

“다친 사람이 없어야 할 텐데요.”

“크게 다친 사람은 없지만…… 그 바람에 카를가의 마차가 망가졌습니다.”

“내…… 마차 말인가요?”

“예, 유감스럽게도.”

이 시대에도 교통사고라는 것은 종종 일어났다. 마차라는 것은 변수가 많았다. 우선 살아 있는 말이 끄는 것이며, 자칫하다간 바퀴가 망가진다. 그럼에도 귀족들은 그 마차에 탈 수밖에 없었다. 평민들처럼 걸어 다닐 수는 없으니 말이다.

“지금, 벨포크 후작부인이 영애께 사죄를 청하고 있습니다만.”

아마 후작부인은 지금 안달을 하고 있을 것이다. 하필, 카를가의 마차를 쳤다. 그나마 디아나가 그 안에 없었다는 것이 천운이었다. 지나가던 평민 아이를 쳤다면 눈 하나도 깜박하지 않았을 테지만, 상대가 카를가라는 것은 문제가 됐다.

“사고라면서요.”

“어쨌든, 벨포크 후작가의 마차가 감히 카를 공작가의 마차를 상하게 했으니 그럴 만한 일입니다.”

“다친 사람이 없다면, 됐어요.”

디아나가 차분히 정리했다. 사람이 다치지 않았다면 별로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마차는 수리하면 그만이다. 후작부인의 사죄를 받으며 앉아 있는 것이 더 고역일 거다.

“흐음, 후작부인은 운이 좋군요.”

“네?”

제롬의 말이 너무 작았던 나머지 디아나가 듣지 못하고 되물었다.

“아닙니다. 그보다 귀가는 어찌하시겠습니까.”

“아, 그렇지……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공작가에 전령을 보내서 마차를 다시 부르는 게 가장 좋지만, 이 날씨로 봐선 좀 오래 걸리지 싶습니다.”

그건 내키지 않았다. 용무를 다 마쳤는데 비 오는 날 관청에서 보내는 오후라니, 생각만 해도 지루했다.

“다른 방법은 없나요?”

“영애께서 다른 가문의 마차를 타기엔 곤란하실 수도 있지만…….”

“그런 건 개의치 않아요. 경도 내 성정을 알 텐데요.”

디아나는 귀족 영애이면서 제롬 앞에 효율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린 최초의 인물이었다.

“제가 어리석었군요. 괜찮으시다면, 제 마차를 이용하시죠. 어차피 전 관청에서 할 일이 남아 있으니 말입니다.”

“그게 좋겠어요. 고맙게 쓰죠.”

“천만의 말씀입니다.”

제롬이 부러 예를 갖추듯이 팔을 벌렸다. 하급 귀족이자 온갖 일의 해결사를 맡은 제롬의 마차는 영애가 타기엔 너무 거칠고 조악할 것이다. 하지만 이 영애는 시간을 낭비하는 것보단 기꺼이 그 마차를 타기로 했다.

“카를가의 마차는 제 조수가 정리해서 돌려보내겠습니다. 물론, 이건 서비스입니다.”

“좋아요.”

디아나가 희미하게 미소를 띠었다. 비 내리는 관청은 조용하고 인적이 적었다. 제롬은 마부를 부르러 갔고, 디아나는 관청의 이모저모를 관찰하던 차였다.

“마차가 도착했습니다!”

관청의 문지기가 외쳤다. 과연 제롬은 발이 빠른 자였다. 디아나가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자 문지기가 우산을 씌워 마차로 인도했다. 아까보다 세찬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우산 안으로도 빗물이 튀길 정도였다.

디아나는 비를 피해 고개를 숙인 채 드레스 자락을 쥐고 마차의 계단을 빠르게 올랐다. 이내 마차의 문이 닫히고 빗소리가 조금 멀어졌다.

“디아나.”

그러나 마차엔 이미 선객이 있었다. 디아나는 고개를 들기도 전에 그 상대를 알아차렸다. 에드윈의 목소리는 무척 낮고 울림이 풍부해서 도저히 착각할 수가 없었다.

“전하……?”

고개를 든 디아나의 얼굴에 당혹감과 의아함이 함께 서렸다.

“어떻게…….”

디아나의 의아한 말에도 에드윈은 느긋하게 디아나를 봤다. 디아나는 그제야 자신이 올라탄 이 마차가 지나치게 크고 화려하다는 것을 느꼈다. 이건 제롬의 마차가 아닐 것이다.

“아무리 기다려도 비가 그치지 않으니.”

애가 타는 것은 에드윈이 더 했다. 에드윈은 빗방울이 튄 디아나를 보고선 재킷 안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건넸다. 그 묵묵한 호의에 디아나는 살짝 고갯짓 하고 손수건을 받았다.

물건은 주인을 닮는다고 했던가. 검은색의 손수건엔 에드윈의 이니셜이 자수로 새겨져 있을 뿐, 별다른 장식이 없었다. 그러나 그 손수건으로 뺨에 튀긴 빗방울을 닦아 내자 에드윈 특유의 진한 체취가 물씬 풍겼다.

“이런 우연이라도 만들어 낼 수밖에.”

그의 입가에 살짝 짓궂은 미소가 서렸다. 그리고 디아나가 뭐라 답할 사이도 없이 디아나의 손을 잡았다.

“우연이 맞나요?”

“그럼. 비 오는 날의 우연이다.”

에드윈은 태연한 얼굴로 잘도 거짓말을 했다. 디아나는 그런 에드윈을 곱게 흘겼다.

“카를 공작저가 조금 더 멀었으면 좋았을 텐데.”

디아나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아까부터 어디를 봐야 할지 모르겠다. 이렇듯 좁은 공간에서 함께 있는 것은 처음이다. 축축한 공기에 에드윈 특유의 체취가 강하게 풍겼다. 평소 디아나와는 거리가 없던 남자의 짙고 묵직한 체취였다.

“마차 사고가 있어서, 제가 타고 온 마차가 망가졌다고…… 그래서 다른 마차를 타기로 했는데.”

묻지 않은 말이었다. 디아나는 괜한 변명을 하는 것 같지만, 자신의 처지에 대해서 어느 정도 설명을 하고 싶었다. 에드윈은 그런 디아나를 보다가 입가에 희미하고 나른한 미소를 머금었다.

“난, 이 우연이 아주 마음에 드는데.”

에드윈은 늘 직선적이었다. 지금도 도저히 모른 체할 수 없는 새카만 눈동자로 디아나를 보고 있었다. 그때, 마차가 멈추는가 싶더니 다시 마부가 창가에 와서 에드윈에게 뭐라 고했다.

“이런, 벨포크 후작가의 마차가 아직도 말썽이라는군. 정리를 마칠 때까진, 이 골목에서 나갈 수가 없다고 하는데.”

전혀 유감스러운 표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의 입가에 머금었던 미소가 조금 짙어졌다. 새카만 눈동자도 여전히 디아나를 주시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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