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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을 끝까지 읽었어야 했다-21화 (21/184)

21화

카를 공작저는 겉으로 달라진 점이 없었지만, 그 내부에선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디아나는 신중하고 현명한 태도로 자신의 유산을 운영하기로 했다. 선대부터 오랜 시간 함께해 온 집사장 그레이와 샬롯이 부족한 부분을 거들었다.

“이렇게나 새는 돈이 많은 줄은 몰랐어.”

종일 서류와 씨름을 하던 디아나가 마지막 장을 덮고 말했다. 소문엔 실비아가 자리를 펴고 누웠다고 했다. 막상 자신의 유산 내역을 보니 그럴 만도 했다.

“그러니 공작부인이 그리…… 신경을 쓰신 모양입니다.”

샬롯이 묘한 한마디를 뱉었다. 지금의 공작은 재산엔 영 관심이 없었고 집안 살림에도 마찬가지였다. 죽은 형님의 유지를 잇는다는 정의감으로 움직인 남자였다. 그러나 정작 생활을 꾸려 가야 하는 공작부인으로선 이 막대한 수입원이 사라진 것이 최악의 한 수였다.

“하늘에 계신 부모님도 아가씨의 성장을 기뻐하실 거예요.”

“그렇죠, 암요.”

샬롯과 집사장 그레이의 의견이 일치했다. 디아나 본인은 잘 모르는 일이었지만, 부모님은 좋은 사람이었다고 하니 디아나의 행복을 원했으리라.

“이제부터 더 잘해야지.”

디아나가 앞을 응시했다. 아버지의 편지를 가장해서 썼던 말 대부분은 스스로 다짐하듯 전한 말이었다. 자신의 인생을 선택하고 개척해 나가는 자유야말로 가장 큰 유산이 될 것이다.

디아나 스스로가 만들어 낸 유산이었다. 그것을 어떻게 사용할지는 앞으로의 자신에게 달려 있었다.

***

황태자인 루카스의 자비로 또 휴가를 얻은 트리샤는 신이 나서 공작저로 향했다. 황태자와의 티타임부터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다. 디아나를 만나고 돌아가면 또 루카스가 불러다 그 사실을 물을 것이다.

“이게 전부입니다.”

하지만 트리샤는 대문에서 더 들어갈 수 없었다. 샬롯이 엄격한 표정으로 꾸러미를 건넸다. 디아나는 이미 트리샤보다 먼 곳을 보고 있었다.

특히 트리샤가 루카스와 만났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더욱 그 사이에서 빠지고 싶어 했다. 결심은 어렵지 않았다. 그걸 받아들이는 트리샤에겐 아니었겠지만.

“이건, 아가씨의 호의예요. 이제 황실의 시녀가 되었으니 너무 자주 왕래하는 것은 남 보기에 안 좋을 것 같다는 조언이 있었거든요.”

“아니…… 난 시녀이기 전에 디아나의 친구인데.”

샬롯은 묵묵히 답을 주지 않았다. 그저 꾸러미를 한 번 더 내밀 뿐이었다.

자존심을 지키려면 받지 않을 수도 있었다. 아니, 사실은 트리샤도 안다. 자신에게 그런 방법은 없다는 것을. 트리샤가 꾸러미를 받자마자 쾅, 하고 대문이 차갑게 닫혔다.

“하…… 내가 거지야?”

비참함은 꾸러미가 무거운 만큼 가슴을 세차게 파고들었다. 길에서 구걸했대도 이보다 비참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친구라고 했잖아. 친구잖아.”

트리샤의 꽉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여태까지 날 뭐로 본 거야…… 대체 날 뭐라고 생각한 거야…….”

우정인 줄 알았다. 천사 같은 디아나, 아름다운 디아나. 그것이 트리샤의 가장 큰 자랑이었다. 트리샤는 디아나를 꿈꿨고, 트리샤의 인생에서 달콤한 부분은 전부 디아나가 내어 준 따스한 온정에서 피어났다.

“친구가 친구를 이렇게 비참하게 할 수 있는 거야……?”

트리샤의 쓸쓸한 목소리가 처연하게 울렸다.

“친구라며.”

그래서 디아나가 자신의 잘못된 생각을 깨닫고 후회하길 바랐다. 친구의 상처를 이해하고 다시 트리샤를 찾아서 사과라도 해 주고, 처음처럼 친하게 지내자고 해 주길 바랐다.

그러나 트리샤는 그럴 수 없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트리샤와 디아나는 달랐다.

***

이제 트리샤를 만날 일은 없을 것이다.

그 사실 하나로 디아나의 마음은 편안해졌다. 가을에 접어들면서 줄곧 비가 내려 에드윈을 만나기 어려워진 것 외에는 전부 괜찮았다.

최근 유산 문제로 공작저에 사건이 많았으니 조심하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머리로 아는 것과 마음은 조금 달랐다.

“답답하네…….”

디아나의 입에서 시무룩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렇다고 공작 영애가 외출할 핑계는 많지 않았다. 그게 젊은 대공을 만나는 것이라면 아예 안 될 말이었다.

하지만 에드윈은 자유로울 것이다. 디아나는 대공으로서 세상을 누비는 에드윈이 부럽기도, 왠지 조바심이 나기도 했다.

“바보 같은 생각이야.”

이내 디아나가 제 마음을 가다듬었다. 에드윈이 즐거운 세상을 누비느라 디아나를 잊을 리 없었다. 그의 진심 어린 시선을 의심하는 것이야말로 어리석은 짓이었다. 적어도 디아나가 봤던 에드윈은 그렇게 가벼운 남자가 아니었다.

“아가씨, 손님이 왔어요.”

샬롯이 다가와서 차분하게 고했다.

“오늘 손님이 있었나. 누구지?”

“제롬 하이든 경입니다.”

기억에 없는 이름이었다.

“그런 사람을 알았던가?”

“공작가와는 왕래가 없지만, 소문은 들은 적 있어요.”

샬롯이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소문으로 알 정도라면 꽤 유명인사란 뜻이었다.

“관청가의 변호인이에요. 그런데 변호보다 더 많은 걸 한다더군요. 맡은 일은 완벽히 처리하는 대신, 수임료가 가히 악마적이라고…….”

그제야 호기심이 들었다. 유산 상속 문제의 냄새를 맡고 찾아온 걸까.

“이것을 보여 드리라고 하던데요.”

샬롯이 검은 손수건을 건넸다. 손수건에선 익숙한 향이 풍겼다. 잊을 수 없는 에드윈의 기척이었다. 손수건의 가장자리에는 그의 이니셜이 수놓아져 있었다. 그제야 디아나는 제롬을 보낸 사람이 누군지 알았다.

“뭔가 일을 찾아서 온 모양인데…… 돌려보낼까요?”

“아니.”

에드윈의 징표를 가지고 온 사람이었다. 누군지는 몰라도 만나 볼 가치는 있었다.

“응접실에 자리를 마련해 줘.”

“네, 아가씨.”

디아나가 응접실에 들어서자, 갈색 머리카락에 금빛 눈동자가 인상적인 남자가 일어나 예를 갖췄다. 그의 눈동자는 영리하게 빛나고 있었고, 입가에 머금은 짓궂은 미소가 평범한 귀족 같진 않았다.

“공작 영애를 뵙습니다. 제롬 하이든입니다.”

디아나가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 앉자, 제롬도 제 자리에 앉았다.

“그래요, 제롬 경.”

일부러 검은 손수건을 손에 쥔 디아나가 말했다.

“무슨 용건으로 날 찾아왔나요?”

“우선, 제 소개부터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제국 관청가의 변호인. 그 외에도 많은 의뢰를 받는다지요?”

“오, 영애께서 절 아신다니 영광입니다.”

제롬이 금빛 눈동자를 빛냈다.

“어느 고귀하신 신사분께서 영애를 도우라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그 말에 디아나는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귀한 신사라면, 디아나가 잘 아는 이였다. 어쩐지 가슴이 따스해지는 것 같았다.

에드윈은 공작저에 오지 못하는 동안 수없이 고민하고 방법을 찾았다. 그 결과가 지금 눈앞의 제롬이었다.

“지금 영애께서 처하신 유산 분쟁에 대해서 알아보고 오는 길입니다.”

“하지만 그건 숙부님께서…….”

“예, 동의하셨다지요. 하지만 그건 시작에 불과합니다. 법적인 절차를 밟아서 확실히 모든 유산을 영애의 것으로 못 박아 둬야 합니다.”

막연히 생각했던 부분이다. 숙부인 아론이 맡아 줄 거라고 예상했지만, 제롬은 다른 방향을 제시하고 있었다.

“그 모든 일과 절차, 영애나 카를 공작님조차 잊으신 숨어 있는 재산까지 샅샅이 찾아낼 자가 필요하지 않으십니까?”

“……괜찮은 생각인 것 같군요.”

그 필요성엔 확실히 끌렸다. 나머지는 제롬을 신뢰할 수 있느냐였다. 하지만 제롬의 유능함은 샬롯이 알 정도로 유명했고, 에드윈이라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 보내 줬다. 그보다 더 든든한 검증은 없을 것이다.

“제 수임료는 다소 비싸지만,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영애의 경우 그 수임료는 어느 고귀한 신사분이…….”

“아뇨, 내 일에 관한 수임료는 내가 내겠어요.”

“흐음.”

제롬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디아나를 봤다. 보통, 이런 걸 거절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게 아직 열일곱의 영애라면 더욱 그랬다. 신분이 높은 귀족가의 영애들은 항상 받는 것에 익숙하기 마련인데도.

“저야 액수만 맞으면 상관없지만요.”

싱긋, 제롬이 간단한 답을 내놨다. 곧 밖에서 기다리던 제롬의 조수가 들어와서 디아나에게 몇 가지 서류를 건넸다.

“보시다시피…… 카를 공작님의 선의는 확실합니다만, 법으로 따지기엔 아직 모호한 부분이 좀 있지요?”

제롬의 말대로 법적인 재산의 주인이 되려면 절차가 필요했다. 물론 숙부인 아론이 해결해 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아론을 믿을 수만도 없는 것이, 그는 자신의 연구에만 몰두하느라 가정까지 잊은 사람이다.

디아나에겐 아론을 기다릴 시간이 없었다. 그사이, 실비아가 수를 쓰지 않는다는 보장도 없었다.

“그렇군요.”

“영애께선 이제 제 의뢰인이 되셨으니 전 카를 공작님과의 협상을 거쳐서 정식으로 관청의 인가를 받으려 합니다. 그런 식으로 영애에게 권리가 있는 모든 재산의 명의를 확실히 해 두겠습니다.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공작령에 대해서도.”

그 말에 디아나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공작령은…….”

문자 그대로였다. 공작령의 주인이 공작이 된다.

“선대 카를 공작님의 유지를 해석하면, 공작령도 영애의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충분히.”

그 말은 디아나가 공작이 될 수도 있다는 의미였다. 생각지도 못한 가능성에 디아나의 가슴이 뛰었다.

“물론, 쉽지 않을 겁니다.”

“그렇겠지요.”

디아나도 수긍했다. 애초에 이 공작저밖에 가진 게 없다고 생각했던 디아나였다. 그러나 실은 모든 것이 디아나의 것이었다. 그러니 지난 생이 더 허망하고 슬프게 느껴졌다. 디아나 카를은 부모의 축복 속에서 태어났고, 사랑받았으며, 행복해질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가능성을 안 것으로도 충분해요. 차차…… 내 것을 찾을 수 있다면.”

“영애는 현명하시군요.”

제롬은 디아나를 보며 싱긋 미소를 지었다. 매사에 말수가 적고 감정을 쉬이 드러내지 않는 대공 에드윈이 처음으로 대공가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의뢰를 맡겼다.

처음 디아나를 봤을 땐, 대공도 어쩔 수 없는 사내라고 여겼다. 저 미모에 마음이 약해졌으리라고. 그건 제롬의 속단이었다.

“보통은 더 조급하기 마련인데요.”

“그러다 일을 그르치면 곤란하니까요.”

디아나에겐 도저히 열일곱의 영애라고 생각할 수 없는 차분함과 현명함이 깃들어 있었다. 대개 제롬을 하대하는 귀족부인들과는 달리 제롬에게도 똑같이 예를 갖추는 모습엔 신중함도 있었다. 여러모로, 신기한 인물이었다.

“지당하신 말씀입니다. 그러면 제가 카를 공작님의 집무실에 한 번 방문해 보겠습니다.”

디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롬은 용건을 다 마쳤다는 듯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디아나는 자신도 모르게 작은 기대가 무너지는 기분이 들었다. 에드윈이 무언가를 전할 줄 알았는데, 아무것도 없는 모양이다. 하긴, 에드윈은 신중한 것뿐이다.

“곧, 영애께서 직접 관청에 나오셔야 할 겁니다. 때가 되면 연락 드리겠습니다.”

“그래요.”

“보수를 영애께서 내시겠다는 마음은 여전히 같은가요?”

“네, 내 일을 해결하는 데 드는 돈은 내가 내겠어요.”

“음, 저는 일에 관한 대화를 나누는 데도 보수를 받습니다만.”

현대의 변호사에겐 당연한 일이었지만, 제롬은 이 시대에선 드물게 상담에 대해서도 수임료를 받았다. 가히 시대를 초월하는 금전감각이었다. 디아나는 솔직하게 원하는 것을 밝히는 자가 낫다고 생각했다. 그게 돈이라면, 더 나았다.

“내 집사장에게 받아 가도록 해요.”

“감사합니다, 영애.”

제롬이 부드럽게 예를 갖추고 응접실에서 나갔다.

“변호인이라.”

적절한 시기에 찾아와 준 적절한 인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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