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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을 끝까지 읽었어야 했다-20화 (20/184)

20화

「불행한 일이 생긴다면 공작령은 아론에게 넘어갈 것이다. 그는 잘 해낼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다만, 우리 부부의 재산은 오롯이 네가 상속받아 스스로 움직이며 생의 배움을 얻기를 바란다.

내가 너에게 남길 수 있는 유산은 그 배움이 포함된 것이다. 자신의 것이라도 자신이 직접 활용하지 않으면 배움을 얻을 수 없다. 나는 네가 영애라는 이유로 그 배움을 포기하지 않기를 바란다.」

이것은 명확한 자신의 생각이었다. 아마 디아나의 부모님도 지금은 그 생각에 동의할 것 같았다. 그들은 딸을 사랑했다. 누구라도 사랑하는 아이가 피폐한 삶을 사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 그러니 디아나는 지금 부모의 뜻을 대신 전하는 셈이었다.

「카를 공작가의 후계자로서 너에게 주어진 재산을 운영하고, 또한 너의 삶 역시 그리 운영할 수 있길 진심으로 바란다.

디아나, 너는 스스로 원하는 삶을 살아라. 인생의 수많은 선택도 모두 네 몫이란다. 이 아버지가 너에게 남기는 것은 바로 그 선택의 자유다. 디아나, 네가 스스로 선택한 행복으로 살아간다면 아버지는 더 바라는 것이 없다.」

아론은 그 구절을 보며 눈시울을 붉혔다. 마치 형님이 살아 돌아와 말하는 것과 똑같다는 말을 연신 하면서.

실제로 디아나의 아버지는 일지에 종종 딸을 향한 사랑의 문구를 남겼다. 이렇게 구체적인 문장은 아니었지만, 디아나는 충분히 사랑받고 있었다.

「만일, 이 편지를 읽을 때 나와 네 어머니가 세상에 없고 아직도 네가 가진 것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면…… 그땐 가장 믿을 수 있는 나의 아우 아론에게 이 편지를 들고 찾아가렴. 그는 나의 뜻을 대신해 널 지켜 줄 소중한 나의 아우이며 내 유지를 맡길 만한 현명한 사람이란다.」

그 부분에서 아론은 기어이 눈물을 한 번 훔쳤다.

「사랑하는 디아나의 행복을 바라며.」

편지는 그렇게 끝났다. 그 문장은 아버지의 일지에 있던 것을 그대로 베껴 쓴 구절이었다. 왠지 그 문장을 적을 때 가슴 한군데가 콕콕 찌르는 것처럼 아팠다. 그러다 이내 가슴 전체가 쓰라린 것도 같았다.

어째서인지 무척이나 애달픈 기분이 들었다. 한 번도 내 부모라 여겨 본 적 없는 사람이 남긴 사랑의 문장에 가슴이 아팠다.

“형님은 속이 깊은 분이셨다. 남들 앞에선 좀처럼 칭찬을 해 주지 않으셨지만, 항상 든든하게 내 뒤를 지켜봐 주셨어. ……이렇게나 못난 아우를 믿고 계셨단 말인가. 정작 이 아우는 못나 빠져서 어린 널 들여다보지도 않았는데.”

디아나의 불행에 아론의 무관심도 일조했다. 그가 관심을 가졌다면 실비아의 손에 정치적인 도구로 팔려 가진 않았을 거다. 적어도 디아나 개인의 의견에 조금이라도 힘이 생겼겠지.

“난, 이제라도 형님의 기대에 부응하려고 한다.”

아론이 굳은 얼굴로 맹세의 말을 뱉었다.

“디아나. 앞으로는 내가 형님을 대신해서…… 형님이 원하셨던 대로, 너의 유산을 전해 주마. 그게 못난 아우로서 할 수 있는 일이다.”

아론이 떨리는 손으로 디아나의 작은 손을 잡았다.

“이제 안심해라, 디아나.”

그 손은 따스한 온기가 배어 있었다.

“내가 반드시 형님의 뜻을 따르마.”

아론의 말이 무겁게 떨어졌다. 아직 물기가 남은 그의 눈가에서 진심을 읽을 수 있었다.

책에 빠져 자신의 자식조차 몇 살인지 기억하지 못하는 아론의 굳은 마음이 흔들렸다.

그렇게 디아나는 자신의 인생을 바꾸기 위한 첫 번째 계획에 성공했다. 자신이 품었던 기도였고, 에드윈이 보여 준 희망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디아나 스스로 만들어 가는 미래이기도 했다.

***

마침, 아론과 디아나가 공작저에 도착했을 때 실비아가 와서 난리를 쳐 대고 있었다. 이 또한 디아나의 계획에 꼭 맞는 일이었다. 아마 오늘만큼 실비아가 반가운 적은 없었을 거다.

“디아나…… 어머, 당신? 여기서 뭐 하는 거예요?”

“당신이야말로 뭐 하는 거지?”

아론의 무뚝뚝한 목소리에 실비아는 목소리를 한 톤 내렸다.

“그야, 디아나를 보살피려고 왔죠. 바쁜 당신을 대신해서요.”

“이제는 그럴 필요 없어.”

“……네?”

실비아는 제 귀를 의심했다. 제 자식, 제 부인에게도 관심이 없는 고목처럼 무뚝뚝한 남자가 아론이었다. 그런 아론이 이 시간에 자신의 집무실을 떠나서 디아나의 손을 잡고 있다는 것 자체가 놀라웠다.

“이제부턴 내가 형님의 유지를 이어서 디아나를 직접 돌보겠어.”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예요?”

“말한 그대로야.”

디아나는 잠자코 둘의 언쟁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뒤늦게 형님의 유지를 깨달았으니 지금이라도 안심시켜 드려야지.”

“그러니까 그게 무슨 꿈나라 같은…….”

“디아나 몫의 유산을 전부 정리하겠어.”

실비아가 눈을 깜박였다. 무슨 소린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탓이었다.

“그걸 도울 서기관을 데려왔어. 법무관도 함께.”

실제로 근엄한 얼굴을 한 일행들이 몇 있었다. 카를 공작가의 일인 만큼 제국의 내로라하는 전문가가 한걸음에 달려왔다.

“정리한다니, 갑자기 뭘 어떻게…… 아니, 디아나는 곧 황실에 입궁할 몸이에요.”

“그런다고 개인의 재산이 없어지나? 제자리를 찾아 줘야지.”

“아니, 곧 입궁할 아이에게 재산이 무슨 소용이에요. 당신 지금 뭔가 잘못 생각했나 본데…….”

“이건 카를가의 일이야. 당신은 빠져.”

“당신!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거예요?”

아론의 말에 실비아가 새된 소리를 질렀다. 직후 주위의 시선을 의식해 입을 다물긴 했지만, 아직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그러나 아론은 눈길도 주지 않고 디아나의 손을 잡고 층계를 올랐다. 두꺼운 법률 서적을 든 일행들도 따라서 걸음을 옮겼다. 실비아만이 그 자리에 못 박힌 채로 서 있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홀로 남은 실비아가 중얼거렸지만, 한번 결심한 아론을 막을 수는 없었다.

***

디아나는 법적으로 제 몫의 유산에 대한 권리를 인정받았다. 아론의 승인이 있었기에 성인과 동등한 행사를 할 수 있도록 규정을 덧붙였다.

이젠 제국의 법이 디아나의 권리를 보장했다. 디아나는 공작령을 제외한 부모님의 모든 유산을 완전히 장악했다.

“아가씨.”

그러나 실비아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서류의 법적 절차가 끝난 후에도 아론을 설득하다가 여의치 않자 저택에 들이닥쳐서 디아나를 찾아 댔다. 문밖에서 실비아가 고래고래 소리치는 것이 1시간째였다. 샬롯은 디아나의 눈치를 살폈다.

“이제 들어오시라고 해.”

“괜찮으시겠어요?”

“응, 소리 지를 기운은 사라지셨겠지. 그리고 샬롯이 동석해 줘.”

“알겠습니다.”

곧 실비아가 퉁퉁 부은 얼굴로 들어왔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디아나를 노려보는 폼은 공작부인의 체면이 다 무색했다. 늘 우아한 체 부채로 입가를 가리며 호호 웃던 실비아의 민낯이었다.

“디아나! 숙모가 밤새 걱정이 돼서 한숨도 못 잤어.”

걱정되긴 했을 것이다. 실비아의 자식은 셋이나 되고 디아나의 재산은 상당했다. 한 명만 공작령을 받을 수 있으니 이 저택과 조카의 유산이 얼마나 탐났을지는 자명했다.

“지금 네 숙부가 뭔가 단단히 착각하시는 것 같다. 자꾸 형님의 유지 타령을 하시는 게…… 무슨 꿈이라도 꾸셨는지, 아무튼 그 양반은 책이나 볼 줄 알았지, 실생활엔 아무 도움이 안 되신다니까.”

틀린 말은 아니었다. 디아나는 차분하게 열변을 토하는 숙모의 얼굴을 응시했다.

“넌 아직 열일곱이란다. 그 많은 재산을 관리하긴 너무 어린 나이야. 그리고 얘, 너는 곧 입궁을 하잖니. 황태자비에게 개인적인 재산은 아무런 필요가 없단다. 아니, 필요해진다고 해도 내가 도우면 되지. 응? 네가 숙부께 말해서 다시 내가 널 도와 관리하도록 하는 게 좋은 거야.”

실비아의 뻔뻔한 말에 헛웃음이 나올 뻔했다.

“숙모 걱정은 하지 말고…… 복잡한 건 다 이 숙모가 처리해 줄게.”

실비아는 간절한 듯 디아나의 팔을 잡았다. 디아나는 부드럽지만 단호하게 그 팔을 뿌리쳤다. 그러자 실비아의 시선이 흔들렸다.

“네, 저는 숙모님 걱정 안 해요.”

“그래, 그러니까 내게 다 맡기고 너는 입궁해서 행복하게 살 생각만 하면 돼. 얼마나 편하니? 혹시 숙부가 싫어하시면, 네가 관리하는 거로 해 두고 숙모가 전부 알아서 할게.”

“싫어요.”

“네 숙부는 이상한 고집이 있어서 문제야, 하필 이런 시기에 뭣하러. 그래. 이 숙모가 디아나 불편할 일 없도록…….”

“싫다고요.”

디아나가 차분하게 같은 말을 반복했다. 그제야 실비아의 귀에 거절이 들린 모양이다.

“디아나?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네가 이해를 못 해서 그래.”

“아뇨, 전 다 이해했어요.”

“네가 가진다고 해서 무조건 좋은 게 아니야. 잘못하면 정말 큰일이 난단다?”

그렇다. 재산을 잘못 굴리면 실비아 같은 사람의 손에 넘어가고 무력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그것은 이미 황후로서 아주 많이 겪어 봤다. 황후라는 존귀한 신분에도 제 마음대로는 산책조차 할 수 없는 삶. 그 얼마나 허망하고 초라한 결말인가.

“알아요.”

“그래, 알아들었지? 그럼 숙모가…….”

“아뇨. 이제 숙모님 도움은 필요 없어요.”

“디아나!”

실비아는 황당한 나머지 말을 잇지 못했다. 실비아가 얼굴을 붉힌 게 무색할 정도로 어린 디아나는 차분했다.

“부모님이 남겨 주신 유산은 부모님 뜻대로 제가 관리할 거예요. 그러니까 숙모님 도움은 필요 없어요.”

“디아나, 네가 잘못 생각하는 거야. 숙모 말 들어야지?”

“싫어요. 싫다고 몇 번이나 말씀드렸잖아요. 전 이미 결정했어요.”

실비아는 거의 넋이 나간 표정으로 불과 열일곱의 조카를 봤다.

“이제 저택에 오지 마세요. 제 유산도 제 인생도 제가 알아서 해요.”

“나는…… 널 위해서…….”

“네. 이제 절 위해선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디아나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정말로 절 생각하신다면 이제 절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시면 안 돼요. 아셨죠?”

실비아는 믿기지 않는 광경을 보듯 어린 디아나를 봤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말수가 적고 다루기 쉬운 아이였는데, 한순간에 어른이 된 것처럼 매정한 태도가 현실 같지 않았다.

“디아나…… 나는, 아니 숙모는…….”

“네, 싫어요. 숙모님의 생각, 숙모님의 계획, 숙모님이 지금부터 하고 싶은 말, 전부 다 싫어요.”

디아나는 미리 기다리고 있던 샬롯의 손을 잡았다. 이제야 실비아와 대등하게 맞설 힘이 생겼다. 그리고 혼자가 아니었다. 그 사실을 똑똑히 보여 주고 싶었다. 일개 고용인이라고 해도 디아나 자신에게 권리가 있다면 누구도 얕잡아 볼 수 없었다.

“그리고 사실은 숙모님도 싫었어요.”

싱긋, 디아나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피었다.

***

카를가를 감시시킨 측근에게서 오늘 밤엔 외출을 삼가라는 조언을 들었다. 오후에 카를가의 재산에 관해 큰 소란이 있었다는 말과 함께였다.

그렇다고 해서 에드윈은 쉽사리 잠을 청할 수 없었다. 눈이, 가슴이, 온몸의 감각이 디아나를 떠올리고 있었다.

휙휙, 허공을 가르는 검의 소리가 살벌했다. 달빛 아래에서 상의를 벗은 채 검을 휘두르는 것은 에드윈이었다. 밤바람이 제법 쌀쌀했지만, 그의 상반신엔 땀이 맺혀 있을 정도였다.

“후…….”

상념을 쫓는 데는 몸을 움직이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그 효과가 미미하게 느껴졌다. 에드윈은 재차 허공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딱 벌어진 어깨와 쇄골에 땀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평소 입는 예복을 벗어 던진 그의 몸은 남들의 추측보다 훨씬 건장했다. 너른 가슴을 따라 적절히 근육이 붙은 몸엔 빈틈이 전혀 없었다. 그 아래로 자리한 탄탄한 복근과 골반 근처의 두드러진 뼈에서 물씬 남자의 냄새가 풍겼다.

“……그만.”

그런 에드윈도 제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아무리 검을 휘둘러도 디아나의 모습이 사라지지 않았다. 마치 눈꺼풀에 새겨진 것처럼, 반짝이던 백금발과 장밋빛 뺨, 푸른 눈동자가 떠올랐다.

에드윈은 정직했다. 그렇기에 제 감정을 똑바로 직시할 수 있었다. 에드윈은 디아나를 떠올릴 때, 여인의 향기를 느꼈다.

이미 첫눈에 그 가느다란 손목을 끌어 이 품에 안고 싶었다. 그 생각만 하면 시도 때도 없이 몸 안에서 열기가 솟구쳤다.

“하.”

다시 에드윈의 검이 달밤을 갈랐다. 열기를 억지로 가라앉히려면 몸을 혹사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야, 결코 상상도 해서는 안 될 꿈을 꾸지 않을 것이다. 에드윈은 밤마다 자신을 찾아오는 달콤한 꿈과 디아나의 미소를 떠올리곤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밤이 야속하게도 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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