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화
다음 날, 드물게 공작저의 아침이 부산했다. 디아나는 외출을 위해서 새 드레스를 꺼내 입었고, 격식에 맞춰 하얀 장갑을 꼈다. 모처럼 공작저의 대문 앞에 모두가 모여서 어린 주인을 배웅하고 있었다. 마차에 오르는 디아나의 모습은 햇빛에 반짝였다.
“다녀오십시오, 아가씨.”
그레이를 필두로 한 고용인들이 모두 모여 고개를 숙였다. 디아나는 샬롯의 시중을 받아 우아하게 마차에 탑승했다. 목적지는 디아나의 숙부가 근무하는 공관이었다. 에드윈의 도움만 받으며 수동적으로 기다릴 생각은 없었다. 무엇보다, 디아나 자신이 움직여야 했다.
“오늘 오신다고 했던 공작부인이 헛걸음하시겠네요.”
샬롯은 약간 고소한 표정을 했다. 디아나도 따라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숙모님은 아침잠이 많으셔서 아직 일어나지도 않으셨을 거야.”
“그렇다더군요.”
디아나는 살짝 긴장된 표정을 지었다. 곧 도착할 공관은 문자 그대로 제국의 공공기관 중 하나였다. 숙부인 아론 카를도 공작이자 제국 의회의 일원으로서 그곳의 집무실에서 긴 시간을 보내곤 했다.
“숙부님이 날 만나 주실까?”
어떤 약속도 예고도 없이 찾아가는 길이었다. 샬롯은 그런 디아나의 걱정을 덜어내듯 고개를 끄덕여 줬다.
“지금의 공작님은 선대 공작님과 우애가 아주 깊으셨어요. 무척이나 형님을 따르셨지요.”
즉, 그 피를 물려받은 디아나에게 후할 것이란 뜻이었다. 공작으로서의 아론은 무심함이 무능함에 가까울 정도였지만, 숙부로서는 가능성이 있었다.
주위에서 듣기론 아론은 전형적인 연구원의 성격을 갖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가문의 일에도 나라의 일에도 별다른 관심이 없고, 실비아가 그 틈을 타서 활개를 치고 있었다.
“공작님께서 집무실로 들어오라고 하십니다.”
다행히 디아나의 기다림은 길지 않았다. 디아나는 샬롯에게 괜찮다는 눈인사를 하고선 혼자 시종장을 따라 집무실로 들어갔다.
집무실은 꽤 넓었고 햇빛이 쏟아지는 너른 창가엔 커다란 마호가니 책상이 있었다. 디아나의 숙부인 아론 카를 공작은 그 책상 앞에 서서 디아나가 인사하는 것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이구나, 디아나.”
“네. 오랜만에…… 뵙습니다.”
사실상 자신에겐 초면이었다. 하지만 디아나의 어린 시절에는 몇 번 등장했을 인물이었다. 아론은 디아나에게 손짓으로 자리를 권했다. 디아나는 우아하게 드레스 자락을 거두며 자리에 앉았다.
“아, 그래. 네가 황태자비로 책봉된 건 들었다. 널 찾아가야겠다고 생각은 했는데…… 다른 데 골몰하다 보니 또 잊어버렸구나. 미안하다.”
“괜찮아요, 숙모님께서 자주 챙겨 주세요.”
“그래, 집안일은 다 그 사람에게 맡기고 있지.”
그것이 조카의 불행을 가져온다는 생각은 못 했을 것이다. 아론은 전형적으로 집안일에 관심이 없는 남자로 자랐고 특유의 학문에 파고드는 기질이 현실의 삶에 소홀하고 무심한 인간으로 만들고 말았다.
“무슨 일로 여기까지 온 거냐. 전령을 보냈다면 내가 저택으로 찾아갔을 것을.”
“연락도 없이 와서 죄송해요.”
“아니, 꾸짖는 것은 아니었다. 오랜만에 자란 널 보니 기쁘구나. 갈수록 형님을 닮아 가.”
시작은 나쁘지 않았다. 디아나는 살며시 미소를 지은 채 마호가니 책상을 짚고 선 아론을 응시했다.
“저희 집에도 똑같은 책상이 있어요.”
“아, 그래! 이 책상은 본래 한 쌍이란다. 형님과 내가 나누어 가졌지. 오래된 마호가니로 만든 명품이란다. 한 나무를 베어서 만들었기에 무늬가 이어지는 멋진 한 쌍이야.”
아론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자신이 흥미를 느끼는 주제가 등장하자 말수도 퍽 늘어났다. 아론에게 있어 그 책상은 소중한 보물이자 형과의 추억을 상징하는 것이다. 디아나는 그것을 내심 짐작해서 일부러 언급했다. 덕분에 분위기가 아주 부드러워졌다.
“실은, 오늘 숙부님을 찾아온 것도 그 책상에 관련된 일이에요.”
“책상에?”
디아나가 잠시 일어서 작은 봉투를 책상 위에 올려놓고 도로 자리에 앉았다.
“얼마 전에 부모님 생각이 나서…… 유품을 모아 둔 방을 둘러봤어요. 본래 아버지께서 집무를 보시던 공간이라고 시녀장이 가르쳐 줬거든요.”
여기까진 딱히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래, 그랬지. 형님은 저택에 집무실을 두시고 수시로 가족을 돌보셨단다. 네가 벌써 자라서…… 아, 디아나 네가 몇 살이었지?”
“열일곱이요.”
“세월이 빠르구나. 벌써 열일곱이 되어서 아버지의 자취를 다 살펴볼 나이가 되다니.”
아론은 이상한 곳에서 감상을 느끼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좋았다. 일단 그의 관심을 끄는 것이 디아나의 목적이었다. 실비아를 배제하고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공작부인인 실비아보다 힘을 가진 사람은 현재로서 눈앞의 공작뿐이었다.
“네, 부쩍…… 아버지의 서책이나 책상에 관심이 생겨서요.”
“아주 기특하구나.”
다만 그는 제 자식에게도 무심한 독서광이자 천생 연구원의 성격이었다. 이런 식으로 접근하는 것이 최선이란 판단이었다.
“그래서 둘러보던 와중에 그 편지를 찾았어요.”
디아나가 봉투를 보며 말했다. 그제야 아론은 제 손에 들린 봉투를 차분하게 응시했다.
“아버지가 남기신 편지예요.”
디아나가 덧붙이자 아론은 감격한 듯이 천천히 봉투를 쓸어 보다 조심스럽게 내용물을 꺼냈다.
“하루라도 빨리 숙부님께 보여 드리고 싶어서 이렇게 찾아왔어요. 전 아직 어려서 편지의 내용을 다 이해할 수가 없어서…… 숙부님의 도움을 받으려고요.”
이것은 꽤 대담한 수였다. 디아나의 내면은 황실에서 고초를 겪던 황후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아론은 디아나를 닮은 푸른 눈으로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중간중간 그의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이 느껴질 정도였다. 확실히 그 편지는 아론을 동요시켰다. 디아나가 밤을 새워서 쓴 그 편지 말이다.
“……세상에. 아직 형님이 남기신 것이 또 있었다니.”
아론의 물기 어린 눈동자가 형님을 닮은 조카를 봤다.
“잘했어. 잘했다, 디아나. 어떻게 이런 발견을.”
“그냥…… 아버지가 알려 주신 것 같아요. 꿈에서 책상을 열어 보라고 하셨거든요. 그랬더니 비밀 서랍이 있어서.”
“그래! 이 책상엔 비밀 서랍이 있어. 그래, 그렇지……. 하마터면 형님의 유지를 잇지 못할 뻔했어. 못난 아우가…… 걱정되어 네 꿈에 나타나신 모양이다.”
목이 메어서 더듬더듬 말하는 아론에게는 미안하지만, 그런 꿈은 없었다. 비밀 서랍이 있는 것은 샬롯이 말해 줘서 안 것이고 편지는 디아나가 직접 쓴 것이다. 다만, 종이와 봉투는 아버지의 집무실에 있던 것을 사용했다. 적당히 낡고, 적당히 세월을 보여 줄 것으로.
“전 아직 어려서 내용을 잘 모르겠어요.”
디아나는 순진한 푸른 눈동자로 숙부를 올려 봤다.
“그래서 편지에서 아버지가 당부하신 대로 숙부님을 찾아왔어요.”
“아주 잘했다. 형님을 닮아서 어린데도 아주 영특하구나. 나머지는 내가 다 알아서 하마.”
과연. 디아나는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이는 아론을 보며 침착하게 다음 말을 기다렸다. 디아나는 모든 실마리를 그에게 건넸다. 이제 선택하는 것은 그의 몫이었다. 실비아가 아닌 아론의 선택이다.
“무슨 뜻인지…… 가르쳐 주실래요?”
적어도 그는 옳은 선택을 할 기회가 있다. 바로 지금, 디아나가 마련해 준 기회다.
“그건 말이다.”
아론은 모든 것을 은폐하고 어린 조카를 돌려보낸 후 자신의 배를 불릴 수도 있었다. 아니면 전적으로 실비아에게 모든 것을 위임할 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그에게는 손쉬운 일이었다.
“디아나, 네가 이해하기는 어려울 수도 있겠지만…….”
하지만 디아나는 아버지와 아론이 무척 우애가 깊었다는 말을 믿고 싶었다. 아론은 무심해서 디아나를 방치한 것이지, 욕심을 품고 이용한 것이 아니라고 믿고 싶기도 했다. 그 답은 곧 그의 입에서 듣게 될 것이다.
“아니, 그래도 넌 영특하고 이제 열일곱이니 알아도 될 것 같구나.”
디아나의 푸른 눈동자에 이채가 서렸다.
“형님께선 카를 공작으로서 분기별로 유언장을 작성하셨다. 미연의 문제를 방지하기 위해서였지.”
그것도 이미 알아본 사실이었다.
“이 편지는 마지막 유언장을 작성하신 이후에 쓰인 것이구나. 아마 갑작스러운 사고라서 다시 고치지 못하셨던 게야.”
그 또한 디아나가 만들어 낸 설정이었다.
“편지에 따르면, 형님께선 악몽을 꾸셨던 모양이다. 그리고 바로 이 편지를 써서 혹여나 하는 마음에 비밀 서랍에 넣어 두신 것 같다. 형님께선…… 참으로 현명한 분이셨다. 어쩌면 그 불행을 본능적으로 예감하셨던 것처럼.”
아론의 눈가에 추억과 회한이 함께 어렸다. 우애가 깊었다는 말은 거짓이 아니었던 것 같다. 디아나는 아버지를 향한 추억과 사랑이 지금의 자신을 도울 수 있길 바랐다.
“디아나. 비록 공작령은 내가 이어받았지만, 그 외에도 네가 상속받은 재산이 많단다.”
적어도 그는 디아나를 속이지 않았다.
“네가 어리다고 생각해서 그동안 네 숙모가 관리했지만…… 분명히 네 것이지.”
아론이 책상을 넘어서 디아나 앞에 섰다. 눈이 부신 햇살 앞에 그의 커다란 체구가 서자 그늘이 만들어졌다. 본래 디아나의 것이어야 했을 그늘이다.
디아나는 그제야 아론을 가까이서 봤다. 디아나의 탄생을 축복하고 사랑해 주었던 선친의 유산이 모두 아론의 결정에 달려 있었다. 디아나가 혼자서 서기 위해 필요한 것이었다.
“황실에선 지참금을 받지 않는다고 했지만, 개인의 재산을 지니는 것은 문제가 없다.”
희망적인 말이었다. 디아나는 황태자비의 굴레에서 벗어나면 자립할 생각이었다. 에드윈의 예상과는 조금 다른 방향이었다.
우선 한 사람으로서 바로 서고 싶었다. 에드윈을 향한 마음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먼저 스스로 선 후에 에드윈과 나란히 마주 볼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미래는 없을 것이다.
“형님께서는 네가 어엿한 카를가의 후계자로서 강하게 서길 바라셨다.”
디아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편지에 담긴 내용은 정확하게 전해졌다. 밤을 꼬박 새워 아버지의 일지를 살펴본 보람이 있었다.
사실 이 편지를 만들어 낸 것은 일생일대의 도박이나 마찬가지였다. 계략을 들키면 완전한 실패고, 아론의 마음이 움직이지 않아도 실패였다.
「나의 하나뿐인 딸 디아나에게.
이 세상의 행복을 모두 네게 주고 싶지만, 혹여나 악몽 같은 일이 일어날지도 모르는 부모의 어리석은 기우에 이 편지를 적는다. 이 편지가 필요치 않다면 내게 그보다 기쁜 일은 없을 것이다. 내 악몽이 단순한 악몽이었다면 이 편지는 곧 내 손으로 없앨 테니 말이다.
아름다운 디아나.
우리 부부는 너를 가지고 나서야 인생의 진정한 기쁨을 알게 되었단다.」
그 구절은 진실이었다. 아버지의 일지에 그렇게 적혀 있었다. 처음으로 장수를 빌었던 것도 어린 딸이 성장하는 것을 보기 위해서였다고 담담히 부정을 드러내는 글이었다. 불행히도, 그들 부부는 디아나의 성장을 지켜볼 수 없었지만.
「문득 어린 너를 홀로 남겨 두는 악몽을 꿨단다. 꿈속에서도 후회스러웠던 일이라 이렇게 기우인 줄 알면서도 글을 적어 본다.」
이 부분은 창작이었다. 다행히 들키진 않은 모양이다.
「만일 어린 네가 이 세상에 혼자 남는 불행이 생긴다면, 그때는 나의 듬직한 아우 아론이 너를 보살펴 주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또한, 저택의 고용인들도 우리 부부를 대하듯이 너를 아껴 줄 것이라고 믿는다.
한 가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다면 네가 어린 나이에 혼자 남겨지면 어리다는 이유로 네 것을 찾지 못할까 하는 걱정이었다. 그것은 내가 바라는 카를의 후계자의 모습이 아니다.
디아나, 너는 비록 영애로 태어났지만 무한한 삶의 가능성이 있음을 알면서 자신의 주체적인 삶을 살 수 있기를 바란다.」
황후로서 디아나의 삶을 살았기에 그게 얼마나 소중한지 알았다. 어쩌면 황후였던 디아나가 지금 새로운 기회를 찾은 열일곱의 디아나에게 전하는 메시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