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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을 끝까지 읽었어야 했다-18화 (18/184)

18화

비 내리는 오후는 마음을 차분하게 해 준다. 디아나는 간만의 평온한 일상을 즐기고 있었다. 샬롯은 그런 디아나를 위해 따스한 밀크티를 내왔다.

“참, 아가씨께서 부탁하신 건 곧 집사장이 가져올 거예요.”

“고마워.”

디아나가 고개를 끄덕이자 샬롯이 물러갔다. 잠시 후, 디아나가 독서에 집중하고 있을 무렵 노크 소리가 두 번 울렸다.

“들어와.”

집사장은 초로에 접어든 남자였다. 회색으로 센 머리카락이 썩 잘 어울리는 고풍스러운 외모를 갖고 있었다. 여태 공작저를 절도 있게 이끌어 온 장본인이기도 했다. 샬롯과 집사장인 그레이가 없었다면 디아나의 생활은 퍽 어려워졌을 거다.

“아가씨께서 요청하신 것들입니다.”

그레이가 두툼한 봉투를 테이블에 내려놨다.

“고마워.”

디아나의 말에도 그레이는 움직이지 않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마치 뭔가 할 말이라도 있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갑자기 이런 걸 가져오라고 해서 놀랐지?”

“네, 조금 놀랐습니다만…….”

디아나의 작은 손이 봉투를 열었다. 장부처럼 엮인 노트가 몇 권, 자잘한 서류 꾸러미가 뭉치로 쏟아졌다. 전부 카를가의, 아니 정확히 말하면 디아나 카를의 재산에 관한 서류였다.

“솔직히 기쁜 마음도 있습니다.”

그레이의 답에 디아나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이내 그의 입가에 푸근한 미소가 어렸다. 하인들을 교육할 때는 단호한 그였지만, 내면은 따뜻한 사람이다.

“아가씨께서 그만큼 자라셨다는 증거니까요.”

“……그런가.”

어쩐지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황후가 된 디아나는 끝내 자신의 몫을 이해하지도 찾지도 못했다. 이렇게 많은 것을 가지고 있었는데, 다른 기회가 있었는데, 너무도 외롭고 비참한 죽음을 맞아야 했다.

“하지만 난 아직 모르는 게 더 많아.”

디아나가 시선을 들어 그레이를 바라봤다.

“처음이니까, 많이 가르쳐 주지 않을래?”

그레이는 감격에 어린 표정으로 어리기만 한 줄 알았던 영애를 봤다. 자신이 어릴 적부터 모시던 선대 공작 내외의 소중한 여식이었다. 그녀의 미래를 지키는 것이 곧 선대의 은혜를 갚는 길이라는 그의 믿음이 적당한 때를 맞이한 것이다.

“영광입니다.”

디아나가 손짓하자 그레이가 옆의 의자에 앉았다. 그리고 서류를 순서대로 정리해서 배치했다.

“우선, 아가씨가 소유하신 재산부터 아셔야 합니다.”

“응.”

그레이가 몇 가지 문서를 옆으로 빼냈다.

“이것들은 모두 부동산에 관한 것입니다. 부동산이라는 것은…….”

“알고 있어. 토지나 건물 같은 거지?”

“네, 정말 어른스러워지셨군요.”

열일곱엔 조금 이른 이야기였다. 하지만 지금의 디아나에겐 아니다. 한시라도 빨리 상황을 파악해야 여생을 바꿀 수 있다.

그때 찾은 실마리가 샬롯이 알려 준 자신의 상속분이었다. 결혼이 아닌 디아나 한 명의 사람으로서 설 가능성.

“가장 큰 것은 이 공작저입니다. 나머지는 교외의 별장이나 사소하게는 농장이나 목장 같은 것도 있습니다. 여태 공작저의 생활은 소유한 토지를 운영해서 나오는 수입으로 충당해 오고 있었습니다.”

“그렇구나.”

공작령은 숙부 내외가 가져갔지만, 그 외에도 남은 재산이 꽤 있었다. 이 또한 예전의 디아나는 몰랐다.

“여태 내가 어떻게 생활하고 있는지도 몰랐네.”

“아가씨는 아직 어리셨으니까요.”

공작저에선 숙모인 실비아가 눈을 가렸고, 결혼이 일생의 중대사라는 관념을 따라서 황태자비가 되고 황후가 되었다. 디아나 자신이 먼저 찾지 않는 이상 이런 문제를 알려 줄 사람은 없었던 거다.

“그럼, 이 토지들에서 나오는 수익은 모두 공작저의 생활비로 쓰인 거야?”

디아나의 당연한 질문에 그레이는 잠시 쓴맛을 삼켰다.

“일부는 그렇습니다.”

“나머지는?”

“아가씨께서 어리시니 공작부인께서 관리하겠다고 하셔서……. 저와 샬롯은 만류했지만요.”

예상대로였다. 아마 디아나가 예정대로 입궁한다면 남은 재산은 또 당연하게 실비아가 관리할 것이다. 황후에게 사유 재산은 딱히 의미가 없었고 어차피 갇혀서 지내는 신세에 세상 물정을 알았을 리 없으니 디아나는 참 손쉬운 먹잇감이었다.

“이 중에서 특별히 수익이 더 나는 것은 뭐야?”

“음…… 선대 공작님이 아끼셨던 목장의 말과, 포도 농장입니다.”

“말과 포도?”

“예. 말은 우수한 종마가 되어 제국에서 높은 가격에 거래가 되고, 포도 농장은 유명 주조장이 많은 지방이라 좋은 와인이 되지요.”

하긴, 단순히 땅을 임대하는 것보다 부가적인 가치를 창출하는 것이 더 돈이 될 것이다. 그것은 어느 시대에도 변하지 않는 진리였다.

“법적으로 이 재산을 움직이는 데 내가 결정권을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그레이는 의외의 질문에 내심 놀랐다. 열일곱의 나이에 재산을 파악하기도 쉽지 않은데 그것을 어떻게 운용할지 묻는 디아나의 발상이 놀라웠다.

“지금은 아가씨의 숙부님께서 후견인의 위치에 계십니다. 물론 상속자는 아가씨 본인이지만요.”

“그리고 숙모님이 결정하신다…… 그런 거야?”

“……예.”

원초적인 문제는 디아나의 부모가 일찍 세상을 떠났으며 달리 기댈 곳이 없는 디아나가 당시에 너무 어렸다는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그 두 가지는 디아나가 바꿀 수 없었다.

“알았어. 이건 두고 가. 더 생각해 볼게.”

“너무 무리하진 마세요, 아가씨.”

“응.”

혼자 남겨진 디아나는 그레이가 남겨 둔 서류를 자세히 살폈다. 그레이의 말대로 공작저의 생활뿐 아니라 더 많은 돈을 벌어들이는 재산이었다. 그리고 분명 자신의 것이다.

“이것부터 되찾아야 해.”

결론은 확실했다. 디아나는 푸른 눈동자로 앞을 응시했다. 에드윈의 조력을 얻어 황태자비에서 탈출하는 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자신의 것을 찾지 못한다면 암울한 미래는 반복될 것이다. 그것만은 피하고 싶었다. 그게 아니라면 회귀는 의미가 없다.

***

트리샤가 쿠키에서 눈을 떼지 못한 것을 본 루카스는 하찮다는 듯이 그것 모두를 하사했다. 트리샤는 시녀의 처소로 돌아와서 그 쿠키를 몇 겹의 천으로 싸서 몰래 다락 천장에 숨겨 두었다.

이 작은 보물을 다른 누군가와 나누고 싶지 않았다. 먹기도 아까울 정도로 예쁜 쿠키만이 황태자와의 티타임을 증명해 주는 증거였다.

“정말…… 꿈같았어.”

트리샤는 행복했던 시간을 떠올렸다. 루카스는 트리샤의 이야기에 흥미를 보였고, 매사에 빈정대는 투이긴 해도 대꾸를 하며 몇 시간을 떠들어 대도 관심 있게 들어 주었다.

디아나가 안다면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그게 제 알몸에 대한 이야기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트리샤에게 그런 건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워낙 입이 험한 아버지 아래에서 자란 데다, 시침 시녀가 될 뻔하면서 그런 건 대수롭게 여겨지지 않았다. 트리샤에겐 황태자가 자신을 봐 줬다는 것만이 의미 있었다.

“그래, 디아나도 아무것도 없는 날 마음에 들어 했잖아.”

트리샤는 활발하고 재기가 넘치는 소녀였다. 비록 가진 것은 없었지만, 폭언을 일삼는 아버지 덕분에 눈치가 재빨랐고 나이보다 똑똑했다.

“마침, 전하와 디아나와 나는…… 동갑이고.”

이대로면 트리샤의 꿈은 금세 이루어질 것 같았다. 디아나가 입궁하고, 이미 대화를 자주 나눠 온 루카스와 함께 시간을 보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땐 아무도 트리샤를 모욕할 수 없을 거다. 그 지긋지긋한 집엔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 아니, 어쩌면 디아나를 따라서 이곳 황실이 트리샤의 집이 될 수도 있었다.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어.”

디아나에게도 그랬다. 이번에는 루카스의 마음에 들지 말라는 법이 없었다.

다행히 루카스는 디아나보다 적극적인 성격이었다. 트리샤가 재잘거릴 때면 루카스는 호기심이 가득한 눈초리로 ‘그래서?’를 연발하곤 했다.

“나는…… 그 집에서 벗어날 거야.”

항상 눅눅한 습기와 곰팡이가 가득한 남루한 집. 아버지는 늘 취해서 욕설하고 어머니는 누워서 기침하며 트리샤의 정신을 좀먹었다.

이런 집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건 트리샤가 꿈을 가졌기 때문이다. 모두가 알면 비웃을 정도로 헛된 꿈이었지만, 지금은 차츰 현실이 되고 있었다.

“두고 봐. 디아나와 내가 다르지 않았다는 걸 증명할 거야.”

트리샤의 붉은 눈동자가 결연히 빛났다.

***

비가 거세게 내렸다. 아마 오늘은 에드윈이 올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기로 미리 약속을 정해 둔 터였다. 에드윈은 상관없다고 했지만, 디아나의 마음이 불편했다. 안 그래도 대공이나 되는 에드윈에게 나무를 타고 몰래 침실로 들어오는 일을 시키는 것이 부담스러웠다.

“오늘은 이걸 해 봐야겠어.”

디아나는 자신만의 노트를 만들어 그레이가 준 서류를 나름 정리해 봤다. 눈으로 보는 것보다 훨씬 일목요연했고, 무엇보다 그것을 정리하는 동안 더 분명히 이해되는 부분이 있었다. 다행히도 실비아가 오늘의 방문을 미뤄서 시간은 충분했다.

“이렇게 하면…… 맞는 걸까?”

그레이가 직접 수첩을 들어 서류와 대조를 시작했다. 늘 딱딱하고 중후했던 그레이의 눈매가 촉촉이 젖어 가고 있다는 것은 아무도 몰랐다.

잠시 후, 디아나가 한참이나 대답이 없는 그레이를 올려 봤을 때 그 애수 어린 눈빛에 깜짝 놀랄 정도였다.

“뭔가 잘못됐어?”

하지만 잘못됐다고 해서 저렇게 슬픈 표정을 지을 일인가. 디아나의 의아한 눈빛을 받으며 그레이는 잠깐 감정을 추스르고 수첩을 내려놨다.

“잠시, 선대 공작님이 생각나서 그만.”

“아……버지가?”

디아나에겐 낯선 존재였다. 너무 어릴 때 돌아가셨다는 부모님은 사람들의 증언 속에나 있을 뿐, 애초에 갑작스럽게 디아나가 된 자신으로서는 멀기만 했다.

“예. 아가씨의 훌륭한 필적을 보니 마치 공작님께서 살아 돌아오신 것 같습니다.”

수첩 속 자신의 필적은 익숙했다. 황후 디아나가 됐을 때도 이미 이런 필적이라서 딱히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아가씨께서 글을 배우실 때, 공작님의 필적을 따라 쓰게 하셨죠.”

“아버지의 필적을?”

“예. 선대 공작님의 필체가 워낙 유려했기 때문에 마님께서도 신경을 쓰셔서 아가씨의 글자 교본은 선대 공작님의 필적에서 따왔답니다. 지금 보니 아주 똑같군요.”

부모님이 남긴 것이 또 있다는 게 신기했다. 여태 아무 생각 없이 쓰던 글자가 얼굴도 기억하지 못하는 아버지의 것이라니.

“정리도 아주 잘하셨습니다. 정말 선대 공작님 내외를 잘 닮으셨습니다.”

디아나는 조금 쑥스러워 고개를 끄덕였다. 모두가 입을 모아 훌륭한 사람이었다고 칭하는 부모님이었다. 정작 자신은 기억에 없지만, 반이라도 닮았다면 큰 칭찬이었다.

“……잠깐.”

그 순간 디아나의 뇌리에 어떤 생각이 스쳤다.

“정말로 똑같아? 내 필적이 아버지의 필적과 똑같아?”

“네, 저도 깜짝 놀랐습니다.”

“그럼 보여 줄 수 있어? 아버지의 필적 말이야.”

“아…… 찾아보겠습니다.”

잠시 후, 그레이가 선대 공작이 쓰던 일지를 가져왔다. 일지 위에 수첩을 펼치자 한 사람이 쓴 글자처럼 모든 필적이 일치했다. 마치 불꽃이 튀듯, 디아나는 똑같은 글씨 위에서 엄청난 발상을 떠올렸다.

“정말 똑같네.”

그레이를 보내고 혼자 남아 한참 일지와 수첩을 비교해 봤다. 몇 문장은 따라서 써 보기도 했다. 어떻게 봐도 둘의 글씨는 똑같았다. 애초에 글을 배울 때 아버지의 글자를 따라 쓰도록 했다고 하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마치 아버지가 쓴 것 같아.”

그리고 그것은 디아나가 선대에게 받은 가장 큰 유산 중 하나였다. 여태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디아나 본인조차도 몰랐던 엄청난 유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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