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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을 끝까지 읽었어야 했다-17화 (17/184)

17화

트리샤가 집에 도착했을 무렵엔 소나기가 내리고 있었다. 가을이 다가오는 시기라 저녁 무렵 내리는 비가 유난히 찼다. 트리샤는 부은 뺨보다 귀한 드레스가 젖는 것을 걱정하며 후다닥 집 안으로 들어갔다.

“어디서 뭘 하다가 이제 기어들어 오는 거야?”

이곳은 카를 공작저와는 달랐다. 블랑 남작의 집은 저택이라고 할 수 없는 수준이었다. 오히려 부유한 평민의 집이 이보다 나을 것이다. 지붕에선 물이 새기 일쑤였고, 어둡고 칙칙한 분위기는 습기처럼 온 곳에 만연했다.

“아버지, 저 이제 황실에서 시녀로 일한다고 말씀 드렸잖아요. 오늘은 휴일을 받아서 출궁한 거고요.”

“뭐? 내 말이 말 같지가 않아?”

언성을 높이는 블랑 남작은 벌써 거나하게 취해 있었다. 트리샤는 한숨을 삼키고는 제 아버지가 있는 곳에 가서 꾸벅 인사를 했다.

“어디, 쓸 만한 건 얻어 왔냐?”

트리샤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블랑 남작은 미간을 구겼다.

“쓸모도 없는 년 같으니라고. 지금 입은 옷은 네가 지어서 만들었나 보지?”

“이건 받은 게 맞지만…….”

“네년 몸뚱이 치장할 것 말고 돈이 되는 것을 가져오란 말이다!”

블랑 남작은 돈이 생기는 대로 술을 마셨고 노름판에 끼었다. 유감스럽게도 그는 노름판에서 영 힘을 못 썼다. 그럴 때마다 더 거나하게 취하려고 했고, 집 안의 돈이 될 만한 물건은 하나씩 사라졌다.

“쯧쯔, 아무튼 제 어미만큼이나 쓸모라고는 없어. 썩 꺼져, 술맛 떨어진다.”

트리샤는 이 정도에서 그친 걸 다행으로 생각하고 얼른 블랑 남작의 시야에서 모습을 감췄다. 겨우 받은 휴일이지만 집에 오면 트리샤를 기다리고 있는 일이 산더미같이 남아 있었다.

트리샤는 삐걱이는 계단을 올라 자신이 사용하는 다락방에 드레스를 곱게 걸어 둔 후에 평상복으로 갈아입었다. 벌써 복도 끝에서 어머니의 마른기침 소리가 끊이질 않았다. 트리샤는 들어 있는 게 별로 없는 수프를 다시 데워서 어머니의 방에 가져갔다.

“어머니, 저 오늘 휴일을 얻었어요.”

“그럼, 집으로 바로 오지 않고…… 니콜라가 벌써 잠들었잖니.”

아무도 수고했다는 말 따윈 해 주지 않았다. 트리샤의 부은 뺨을 위로하는 이도 없었다.

“좀 드세요.”

사라는 고개를 저었다. 트리샤는 하는 수 없이 그릇에 뚜껑을 덮어 머리맡에 두었다.

“황실에서 주는 봉급은 얼마나 되니? 카를 공작가에서 받은 것만큼은 되어야 할 텐데.”

트리샤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자신이 입궁을 해서 당했던 일을 생각하면 울컥 서러운 마음이 북받쳤지만, 그것을 들어 줄 이는 없었다. 어머니는 병상에 누운 지 오래됐고, 자신이 아니면 보살펴 줄 사람이 없는 데다 오랜 병치레로 마음마저 쇠한 것 같았다.

“항상 디아나 영애에게 감사하고, 잘해야 해. 시녀가 된 것도 영애 덕분이잖니.”

트리샤의 부은 뺨과 터진 입술을 보고서도 어머니는 그 말밖에 할 줄 몰랐다. 이따금 블랑 남작의 심기를 거스르면 손찌검을 당하던 트리샤니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것이다.

트리샤는 부모에게조차 어딘가에서 맞고 와도 아무렇지 않은 자식이었다. 그런 어머니에게 나신이 되어 다리를 벌리고 처녀 검사를 받은 이야기를 해 봐야 소용은 없었다. 트리샤는 단지 이 집에 가득 찬 습기에 자신의 삶마저 곰팡이가 스는 것 같아서 참을 수가 없었다.

“우린 친구예요. 난 디아나의 하녀가 아니고요.”

트리샤가 고집 어린 말을 뱉었다. 그게 소녀의 자존심이었다.

“그래. 고마운 친구라는 거다, 내 말은……. 그래도 네가 시녀가 되어 다행이다. 모처럼 왔으니 잊지 않도록 책이나 외우렴.”

시녀로서의 생활은 어떤지, 힘들진 않은지, 그런 격려는 기대도 안 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말이 고작 저 지겨운 필사라니 아무리 트리샤라도 허탈했다.

“늘 말하잖니……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라고.”

책을 외우라 강요하면서도 일은 멈추지 않았다. 트리샤의 작은 손은 노동으로 벌써 부르텄다. 디아나를 만나기 전까진 그게 당연한 줄 알았다. 보드랍고 새하얀 디아나가 자신의 손을 잡았을 때 느꼈던 감정은 부러움보다 수치심에 가까웠다.

“왜 대답이 없니. 콜록…… 이 아픈 어미가 몇 번을 말해야, 콜록…….”

“알았어요.”

트리샤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귀족이어도 가난은 별수 없었다. 어렸을 땐 어머니가, 지금은 트리샤가 생계를 꾸려 가야 했다.

아니, 오히려 어머니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트리샤의 어머니는 평민 출신이었다. 아버지가 워낙 변변치 않은 귀족이었기에 대신 살림을 꾸릴 여자를 얻은 거다.

……하지만 트리샤는 어머니처럼 평민이 아니었다. 적어도 스스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도 소용없었다. 그나마 입에 풀칠하게 해 준 약재들 덕분에 트리샤는 귀족이면서도 수치를 모른다며 자주 손가락질받았다. 트리샤가 어머니를 닮아 붉은 머리카락이라는 것에 빗대어 마녀의 딸이라고 놀림받은 적도 많았다.

이 시대에 여자가 약초학을 알고 약재를 다룬다는 것은 결코 고귀한 직업이 아니었다. 귀족가의 여식이 그런 일을 한다는 것 자체가 트리샤의 삶이 얼마나 바닥인지를 알 수 있게 하는 대목이었다.

“저, 어머니. 제가 황태자 전하를 알현했어요.”

“……뭐?”

그나마 황실에서 기뻤던 일이었다. 시침 시녀라는 비루한 존재에서 루카스의 눈에 뜨이는 존재가 된 것이다. 적어도 이 이야기를 하면 어머니가 기뻐할 거다.

“전하께서 제가 디아나 영애의 친구라는 걸 아시고…… 편지를 전하라고 출궁시켜 주신 거예요.”

“그래? 영애가 수고비를 챙겨 주진 않으시던?”

그러나 돌아오는 것은 병과 가난에 지친 어머니의 민낯이었다.

“……아뇨.”

실제로 받긴 했지만, 공작부인에게 빼앗긴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디아나 영애는 관대하니까 곁에 있다 보면 또 뭔가 떨어지겠지.”

어머니를 상대론 더 말해 봐야 소용이 없었다. 이 또한 예상한 대로였다. 트리샤는 어깨를 늘어트린 채 부엌으로 향했다. 그래도 지금은 빛나는 기억이 있었다. 트리샤는 디아나의 친구였다. 비록 어머니의 출신이 다르기는 해도 귀족가의 영애라고 할 수 있었다.

“그래, 난 여기 있으면 안 돼.”

트리샤는 약재를 넣은 냄비를 저으면서 혼잣말을 했다.

“난 이런 데서 어머니처럼 살 운명이 아니야.”

눅눅한 습기와 기분 나쁜 냄새. 가만히 있기만 해도 병의 기운이 숨을 쉴 때마다 들어오는 것 같은 불쾌한 환경. 트리샤는 이 집이 싫었다. 이 집에 있는 모든 것이 자신을 옭아매고 있었다.

“나도 디아나처럼 될 수 있어.”

그 증거로 디아나는 자신을 친구라고 말해 줬다. 공작부인은 그리 생각하지 않았지만, 당사자의 의견이 가장 중요한 것 아니겠는가.

게다가 황태자 전하께서 보내는 서찰을 자신의 손에 들려 보냈다. 그거야말로 트리샤가 특별하단 뜻이었다.

“그래. 똑같은 거야.”

트리샤는 오늘도 주문을 건다.

“친구니까, 우린 똑같아.”

그 주문은 이 지긋지긋한 집에서 트리샤를 벗어나게 해 준다. 카를 공작저에서 디아나와 함께 아름다운 영애의 환경을 누리고, 황태자 전하와 잠시 꿈을 꾸게 해 줄 것이다.

“나도, 똑같다고.”

트리샤는 그 꿈을 자신의 미래로 만들고 싶었다.

***

환궁한 트리샤는 처음 받는 대우에 어쩔 줄 모르고 눈만 깜박였다. 루카스의 명령으로 디아나에게 서신을 전달한 후기와 답장을 받을 셈으로 부른 것에 불과했지만, 황태자궁의 응접실에 앉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신분이 달라진 기분이 들었다.

“기다리면, 전하께서 오실 거다.”

엄격한 표정의 시종장이 이르고 갔다. 응접실은 어찌나 화려한지 아무리 봐도 질리지가 않았고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갔다.

“이런 게 같은 세상이라니…….”

어젯밤에 잠을 청했던 제 집이 떠올랐다. 평생 거기서 태어나 자랐는데도 음습한 습기와 쥐들이 지붕 아래를 뛰는 소리는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았다. 오히려 다시 환궁하자 제자리를 찾은 기분이 들었다. 이건 예전 디아나의 공작저에서 느낀 것보다 훨씬, 비교할 수 없는 호사였다.

“황태자 전하 납십니다!”

문가에서 시종장이 말하는 소리에 트리샤는 일어서 예를 갖췄다. 곧 고개 숙인 트리샤의 시야에 루카스의 신발이 들어왔다.

“고개를 들라.”

루카스는 건성으로 말하곤 아무렇게나 자리에 앉았다. 곧 시녀들이 따스한 김이 오르는 차와 쿠키를 내왔다. 전부 트리샤가 구경도 할 수 없을 만큼 호화로운 것들이었다. 심지어 이번에는 트리샤의 몫도 있었다. 루카스의 지시로 응접실의 소파에 부른 탓이었다.

“마셔도 좋다.”

“황공하옵니다.”

루카스가 다리를 꼰 채로 눈치를 살피는 트리샤를 봤다.

“지금 꼴이 훨씬 낫군.”

지금 입은 드레스는 디아나가 직접 골라 준 것이다. 디아나의 높은 안목대로 은은한 초록빛의 드레스는 트리샤의 붉은 머리카락과 매력을 더 살려 줬다.

“디아나 영애가…… 선물로 줬어요.”

“그래? 쌀쌀맞은 줄 알았더니, 그런 면도 있었군.”

루카스는 에메랄드빛 눈동자로 트리샤를 훑었다. 풍성한 붉은 머리카락이 인상적이었다. 뭐, 트리샤의 운이 안 좋게 풀렸다면 이미 트리샤를 한 번 범한 후에 잊었을 것들이다. 하지만 이제 트리샤는 디아나의 친구였다. 하찮은 시녀 하나에서 특징이 생긴 것이다.

“줘라.”

트리샤가 붉은 눈동자를 동그랗게 떴다. 그러고는 한발 늦게 그 말뜻을 이해했다.

“송구하오나, 전하…… 디아나 영애는 아직 감기가 심하여서.”

“쯧, 그리 몸이 약해서야.”

루카스는 못마땅한 듯이 혀를 찼다. 어제부터 내리는 비에 영 기운이 나질 않았다. 그나마 디아나에게서 답장이 오면 좀 기분이 나아질까 했지만, 트리샤는 빈손으로 왔다.

“디아나가 줬다면, 본래는 영애가 입던 옷인가?”

무심코 물은 말에 트리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에 루카스의 눈빛이 조금 묘하게 변했다.

신기한 일이었다. 황후가 준비한 시침 시녀들을 범하며 정사의 즐거움에 눈을 떴지만, 뭔가 부족했다. 시침 시녀들은 하나같이 루카스를 두려워하며 인형처럼 움직이지 않았고, 그 구멍을 들여다보거나 박아 대는 것도 나중이 되니 비슷해졌다.

“……아무래도, 신분이 고귀한 영애는 다르겠지.”

루카스의 기대는 이상한 곳으로 향했다. 황태자비는 모두가 우러르는 존귀한 여인이다. 그런 여인의 몸은 다를 것 같았다. 특히 그 상대가 디아나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 더욱 기대가 커졌다.

첫눈처럼 새하얀 피부를 물어도 보고 싶고 빨아도 보고 싶었다. 매사에 초연하고 고요한 디아나가 제 아래에서 흐느낄 때 어떤 표정일지도 궁금했다.

“됐다, 그만 물러가라.”

휘휘, 루카스가 손을 내저었다. 트리샤는 드레스 자락을 쥐며 일어섰다. 마침 그때 루카스의 시선이 그 드레스를 다시 향했다. 디아나가 입던 옷이라. 그건 묘한 상상력을 불러 일으켰다.

“잠깐.”

“예……?”

“다시 앉아라.”

트리샤는 영문도 모른 채 지시를 따랐다.

“넌 디아나의 친구라고 했지? 그것도 어릴 때부터.”

“그렇사옵니다.”

씩, 루카스의 입가에 짓궂은 미소가 떠올랐다.

“그럼, 알몸도 자주 봤겠구나.”

“예…….”

나쁜 호기심이 발동했다. 마침 비가 내리는 차에 할 것도 없었고, 디아나의 드레스가 관심을 끈 덕분이었다.

“자세히 말해 봐라.”

“예? 무엇을…….”

“디아나의 알몸은 어떠냐.”

그제야 트리샤는 루카스의 욕망을 읽었다. 감히 공작 영애의 알몸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은 있어선 안 될 발칙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것을 지시하는 사람은 황태자였다. 트리샤의 고민은 길지 않았다.

“디아나 영애는…… 온몸이 눈처럼 하얗습니다.”

“호오, 그리고?”

“여린 체구로 보이지만, 가슴이…… 풍만하고요.”

“계속해라. 비 오는 날의 한담도 좋지.”

오늘 내리는 비는 트리샤의 편이었다. 지금 트리샤는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집은 까맣게 잊었다.

습기로 가득한, 불결하고 불쾌한 장소는 트리샤의 것이 아니었다. 그윽한 차 향기가 맴돌고 창밖의 아름다운 정원에 내리는 비를 보고 있는 지금이 바로 트리샤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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