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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을 끝까지 읽었어야 했다-16화 (16/184)

16화

평소에 굳게 잠긴 문을 열자, 예상보다 더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여긴?”

“자, 보시면 알아요.”

샬롯이 디아나의 손을 부드럽게 이끌었다. 방은 밖에서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넓었다.

디아나는 눈을 크게 뜨고 주위를 둘러봤다. 커다란 마호가니 책상이 창가에 놓여 있었고, 참나무로 짜인 수납장엔 빼곡히 반짝이는 물건이 가득했다.

“공작저에서 특히 귀중한 것들을 모아 두는 방이랍니다. 본래는 선대 공작님께서 집무실로 쓰셨지요.”

디아나는 천천히 걸음을 떼서 책상 앞에 섰다. 오래된 마호가니 책상은 먼지 한 점이 없이 잘 관리돼 있었다. 손을 뻗어 책상을 쓸어 보자 오랜 물건 특유의 깊이가 느껴졌다.

“역시 아가씨는 보석보다 책상을 더 좋아하시네요.”

보통의 여자아이였다면 벌써 장식장에 달려가서 보석들을 만지느라 정신이 없었을 거다. 하지만 샬롯은 이 의젓한 영애가 더 좋았다.

“저건 다 어……머니가……?”

어머니란 단어가 입에서 나오는 것이 어색했다. 샬롯이 고개를 끄덕이며 장식장을 열어 줬다.

칸마다 자리를 잡은 보석은 아무 지식이 없는 디아나의 눈에도 귀해 보였다. 그런 장식장이 켜켜이 늘어선 것을 보면 상당한 수준이다.

“천천히 둘러보세요. 전부 아가씨의 것이니까요.”

디아나는 샬롯의 말대로 늘어선 장을 따라 걸었다. 여러 빛으로 반짝이는 보석, 엄청나게 섬세한 레이스로 짜인 장갑, 무엇에 쓰는지 알 수 없는 장식품들까지. 모두 각각의 찬란함을 뽐내면서 고요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아…….”

문득 디아나의 걸음이 멈췄다. 제 주먹만 한 다이아몬드를 볼 때도 그냥 지나쳤던 디아나가 멈춰 선 곳은 이곳에서 가장 단순하고 어찌 보면 소박한 물건 앞이었다.

“아가씨는 정말 마님을 닮으셨군요.”

어느새 샬롯이 다가와서 다정히 말을 걸었다. 어머니는 모르지만, 적어도 디아나로선 지나칠 수 없는 물건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저건 디아나가 직접 제 목을 찔러서 자결했던 검이다. 몰라볼 수 없었고, 착각했을 리도 없다. 저 검이 제 목을 찌르던 감각은 잊을 수가 없었다.

“이건 은으로 만든 평범한 단검으로 보이지만, 실은 티어스 가문에서 대대로 내려오는 보물이라고 해요.”

단검은 디아나의 작은 손에 쥘 수 있을 정도로 작았다. 직접 만지자 그 촉감이 생생히 전해져서 머리가 어지러웠다.

낡은 은으로 된 단검엔 아무런 장식이 없었고, 뜻을 알 수 없는 문양이 칼집에 새겨져 있었다. 그저 그게 다였다.

“이 단검엔 가진 사람을 지켜 주고 소원을 이루어 준다는 전설이 있대요.”

그것까지는 모르겠지만, 이 단검이 회귀의 계기가 된 것은 분명했다. 원작에서도 그런 내용이었다. 그때는 이 물건의 출처를 몰랐지만, 본래는 디아나의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것이었다.

아마도 황후가 되면서 어머니의 유품을 가져가고 싶었겠지. 그리고 고른 게 하필 이 단검이었다.

“이거, 내가 꺼내 가도 될까.”

디아나는 어쩐지 이 검을 손에서 놓고 싶지 않았다.

“말씀드렸잖아요. 전부 아가씨의 것이라고.”

이 검엔 분명 어떤 힘이 있었다.

“실은 마님께서도 늘 이 검을 몸에 지니셨답니다. 아직 어린 아가씨께 검이란 물건은 위험해서 권하지 않았지만…… 어쩌면 이 물건이 아가씨의 곁을 찾았는지도 모르겠네요.”

이 단검이라면 그렇다고 해도 놀랍지 않았다.

디아나는 작은 단검을 손에 꾹 쥐었다가 소중히 품에 집어넣었다. 어쩐지 마음이 가라앉는 것 같았다.

샬롯이 해 준 이야기와 자신이 가진 것을 확인하고 유일하게 중요한 물건을 찾았다. 그것만으로도 오늘 하루는 진전이 있었다. 디아나는 자신의 삶을 바꿀 것이다.

***

어둠이 내리자, 디아나의 마음이 설레기 시작했다. 오늘은 미리 창문을 열어 두는 것으로도 모자라 내내 시선을 창밖에 둔 채였다.

그때 나무 근처에서 무언가가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주의를 집중하지 않았으면 바람에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광경으로 보였을 거다.

그다음엔 금세였다. 검은 로브를 쓴 에드윈은 어둠에 몸을 숨기고 있다 커다란 체구에 믿기지 않는 날랜 몸짓으로 창틀을 가볍게 넘었다.

“기다리고 있었나?”

에드윈이 로브를 벗으며 은근한 말투로 물었다.

“……네.”

디아나는 제 감정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 짧은 한 마디가 에드윈의 입가에 금세 미소를 번지게 했다.

또 디아나가 눈짓으로 자리를 권했고 에드윈은 은근히 의자의 위치를 바꿔 어제보다 가까운 곳에 앉았다. 디아나의 대각선에 앉은 에드윈과 금방이라도 무릎이 닿을 것 같은 거리였다. 디아나는 그 간격에 그저 뺨을 살짝 붉혔다.

“오늘따라 좀처럼 해가 저물질 않더군.”

그럴 리는 없었다. 하지만 에드윈도 디아나 이상으로 이 밤이 오기를 기다렸다. 하루가 이렇게 길게 느껴지는 것은 처음이었다.

에드윈은 하루 종일 자신의 뇌리를 떠나지 않았던 디아나의 부드러운 손을 잡았다. 가볍다면 가벼운 접촉이었지만, 우선 서로의 맨살을 맞대면 입가에 따스한 미소가 번지고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간 무슨 일은 없었냐고 물으면, 내가 너무 가벼이 느껴질까.”

고작 하루였다. 하지만 디아나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매일이 새롭게 느껴졌다.

“오늘 시녀장에게서 돌아가신 부모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어요.”

“아…… 그대는 일찍 선친을 잃었지.”

“네, 제가 다섯 살 때 마차 사고로 돌아가셨대요.”

에드윈이 입을 굳게 다물었다. 대신 디아나를 잡은 손에 조금 힘이 들어갔다.

“그런데 제가 모르던 게 있었어요. 사실, 부모님의 유산엔 제 권리가 있다고…….”

“나도 그 부분에 대해서 알아본 참이었는데, 우린 마음이 잘 통하는군.”

사소한 것에도 의미를 부여하는 에드윈이 어쩐지 무척 친숙하게 느껴졌다. 그의 날카로운 이목구비에서 풍기는 귀족적이고 강인한 인상은 위압적이었지만, 실은 디아나와 같은 마음이라는 것이 신기했다.

“그래도 황태자비가 되면 아무런 소용이 없겠죠.”

“황실은 지참금을 받지 않으니, 아마 그대의 숙부 내외가 가져가겠지.”

실비아의 의도가 보다 확연히 보였다. 권세와 재산, 두 가지를 모두 가질 수 있는 방책이었다.

“사실, 유산은 그리 중요하지 않아요.”

“아니. 중요해질지도 모른다.”

디아나의 눈동자에 의아함이 서렸다. 에드윈은 진중한 목소리를 이어나갔다. 꽤 조심스러운 주제였다.

“아무리 찾아봐도 간택을 거절하는 방법은 없었다.”

“그렇……죠.”

디아나가 씁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간택이 취소된 예는 있었다.”

“네?”

“국혼을 치르기 전에 황태자비 후보에게서 중대한 결함……이 발견되는 경우엔 혼담이 깨진다.”

공작 영애에게 스스로 흠집을 내라는 말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에드윈은 이미 디아나의 눈에서 강렬한 의지를 읽었다. 그녀는 망설이지 않을 것이다. 물론 에드윈은 디아나에게 어떤 흠이 생겨도 그녀를 받아들일 마음이 굳건했다.

“단, 결혼이 이루어질 수 없을 정도의 결함이어야 한다.”

“저는 그 길을 피할 수만 있다면 뭐든 할 수 있어요.”

에드윈이 고개를 끄덕였다. 둘의 뜻은 같았다.

“하지만…… 정확히 어떤 이유여야 할지.”

“실은, 내가 알아봤다.”

디아나가 눈으로 에드윈을 채근했다. 에드윈은 어렵게 입을 뗐다.

“그대가 후사를 생산할 수 없는 몸이라고 밝혀지면, 황실에선 혼인을 파기할 수밖에 없어.”

“그야…….”

황실과의 혼인은 고귀한 핏줄을 잇겠다는 뜻이었다. 즉, 후계자를 생산할 수 없다면 아무런 의미가 없어진다. 아무리 고귀한 신분이라도, 두 번 없을 절세미인이라도, 후계자를 낳지 못하는 황후는 필요 없었다.

“이건 어디까지나 내 생각이었다. 자세히 알아보려면 의원을 끌어들여야 하는데, 그건 그것대로 위험한 일이라.”

에드윈의 제안은 불임을 가장하라는 것이다. 순간 디아나가 또렷하게 눈을 떴다.

“아뇨. 의원은 없어도 돼요.”

의원의 말을 참고하지 않아도 됐다. 불임의 증상이라면, 이미 디아나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이 세계의 의학 수준을 고려하면, 본래 그 책 밖의 그녀가 살던 세계에선 상식적인 일도 여기선 큰 파장을 줄 수 있을 것이다.

“제가…… 알아요.”

아무리 황실의 전의라고 해도 과학적으로 검증할 방법은 없었다. 이 세계의 의료는 어디까지나 임상적인 증상을 관찰하는 것에 의존했다. 불임의 징조만 있어도 황실은 이 혼사를 꺼릴 것이다. 그 정도는 디아나도 쉽게 지어 낼 수 있었다.

“연극은 언제든 할 수 있어요. 무대와 관객만 모인다면…… 말이에요.”

“그건 내가 도울 수 있을 것 같군.”

디아나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에드윈은 자세히 묻고 싶었지만, 애써 호기심을 눌렀다. 지금은 둘의 목적이 우선이었다. 그리고 만일 디아나가 진짜 후사를 갖기 어려운 몸이라고 해도 에드윈은 디아나를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그대에게 위험한 다리를 건너게 하는 것이 마음에 걸린다.”

“제가 해야만 하는 일인걸요.”

열일곱의 디아나는 에드윈의 예상보다 의연했다. 에드윈은 디아나의 손을 잡지 않은 나머지 한 손으로 흘러내린 백금발을 살짝 정리해 줬다.

디아나는 갑작스런 접촉에 작게 움찔했지만, 이내 편안한 기색을 되찾았다. 둘의 눈이 마주쳤다. 그다음은 쉬웠다. 에드윈이 디아나의 손을 끌어당기고 서로의 상체가 기울어졌다.

입술이 맞닿았다. 이번에 에드윈은 망설이지 않았다. 그는 제 입을 벌려 디아나의 입술 사이로 뜨거운 혀를 밀어 넣었다. 움찔, 잡고 있는 디아나의 손이 떨렸지만 이내 좁고 달콤한 디아나의 입안으로 혀가 미끄러졌다.

뜨겁고 말캉한 것이 둘의 입안에서 얽히고설켰다. 디아나의 입술이 벌어지자 에드윈이 한층 깊이 그녀의 입안을 탐했다.

어느새 에드윈은 디아나의 목을 끌어안고 있었다. 숨이 차면서도 입안이 끈적하게 녹아내리는 것처럼 달콤했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보다 깊은 곳을 탐하고 있었다. 디아나의 벌어진 입술 사이로 뜨거운 숨결이 새어 나왔다.

“아…….”

어쩔 줄 모르는 한숨이었다. 에드윈은 그 소리에 본능적으로 더 깊은 곳을 탐했다. 그의 팔이 디아나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맞닿은 둘의 상체에서 디아나의 굴곡이 느껴졌다.

이번에는 에드윈의 숨이 뜨거워져 가눌 길이 없었다. 에드윈은 본능을 따라 조심스레 디아나의 가슴으로 손을 뻗었다. 차마 손에 쥐지 못하고 그 곁을 맴도는 커다란 손이 안쓰러울 정도였다.

입술에선 이미 촉촉한 타액이 흐르고 있었다. 에드윈은 그 열기에 힘을 입어 디아나의 한쪽 가슴을 살며시 제 커다란 손에 담았다.

자신의 가슴을 감싸는 온기에 디아나는 자신도 모르게 더운 숨을 뱉었다. 그러자 에드윈이 한층 손아귀에 힘을 넣었다. 물컹, 그의 손안에서 야릇하고 자극적인 감촉이 느껴지자 체온이 확 올랐다.

“전……하.”

입술이 벌어진 사이로 디아나가 간신히 에드윈을 불렀다. 에드윈의 손은 여전히 디아나의 가슴을 담은 채로 어루만지듯이 살살 자극을 주고 있었다.

야릇한 감각이 퍼지자 디아나는 저도 모르게 제 아랫입술을 물려고 했지만, 에드윈의 입술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고 혀를 더 깊이 밀어 넣었다.

“흐읍…….”

절로 디아나의 입이 막혔다. 입맞춤과 에드윈의 손짓이 너무 달콤하게 녹아내려서 시야가 하얗게 바래지는 것 같았다. 서로의 타액마저 달콤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디아나는 처음으로 사내의 손짓에 환희를 느낄 수 있음을 깨달았다. 에드윈의 모든 몸짓은 디아나가 알던 것과 달랐다. 절로 몸 안에서 열기가 치솟고 맞닿은 곳이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두렵지도 아프지도 않았다. 에드윈이 디아나를 원하는 만큼, 디아나도 이 접촉이 끝나지 않기를 바랐다.

첫 키스였다.

태어나서 처음 느끼는 환희가 온몸으로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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