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
디아나는 미루고 미루다 황태자의 편지를 뜯었다. 루카스의 자필은 눈에 익었다. 그의 성격처럼 대범하고 굴곡이 컸다. 익숙한 만큼, 숨이 막히는 서찰이었다.
「디아나 영애에게.
국혼을 앞두고 감기라니, 우선 쾌유를 바란다.
영광스러운 일을 앞두고 너무 긴장한 탓이니 마음을 편히 갖도록.」
이 대목에서 디아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루카스는 자기중심적인 것까지 그대로다. 하긴, 태생부터 루카스는 굳이 남을 이해할 필요가 없었다. 그렇게 태어나서 그렇게 자란 것뿐이다.
「마침, 그대의 절친한 친구라는 트리샤에게 들으니, 실은 정원 산책을 즐긴다지.
쾌유했을 때는, 더 멋진 정원을 보여 주겠다.
- 루카스 파렐」
편지는 거기까지였다. 디아나는 인상을 찌푸리고는 편지지를 확 구겨 버렸다. 이제 트리샤와 만났으면 됐지, 자신에게 뭘 더 바라는 건지 성가시기만 했다.
“이제 난 상관없잖아.”
열일곱에 어울리지 않는 차분하고 냉소적인 말이었다. 아무리 트리샤라도 첫 만남에서 루카스를 홀릴 수는 없었나 보다. 당장 장난감이 없으니 루카스가 허전할 만도 했다. 하지만 곧 트리샤가 그 자리를 채워 줄 테니 디아나가 걱정할 바는 아니었다.
“그보다…… 앞으로 어떻게 할지가 문젠데.”
디아나는 냉정하게 자신의 상황을 직시했다. 디아나를 지켜 줄 부모님은 없고 텅 빈 공작저와 카를가의 이름이 디아나가 가진 전부였다.
물론 재산도 조금 있었다. 디아나는 딱히 물욕이 없었으니 평범하게 살아간다면 죽을 때까지 돈 때문에 고통받진 않을 것이다.
“아무리 귀족이라도 누구와 결혼할지 정할 수 없다면…… 그건 의미가 없어.”
현대에선 비혼이 가능했지만, 이 시대의 귀족 영애에겐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특히나 디아나처럼 가문이 좋고 그 덕을 보고자 하는 숙부 내외가 있는 한은 무리였다. 고귀한 영애로 자랐지만, 정작 자신의 인생을 결정할 수 없는 것이 아이러니였다.
“저, 아가씨?”
부드러운 샬롯의 목소리가 상념을 끊었다. 돌아보자, 언제부터 있었는지 반듯한 자세로 샬롯이 미소를 지었다.
“죄송합니다. 여러 번 노크했는데 못 들으신 것 같아서요.”
“아, 괜찮아.”
샬롯이 따스한 김이 올라오는 차를 테이블 위에 올려 뒀다.
“아가씨가 좋아하시는 밀크티예요.”
디아나는 잠시 찻잔을 물끄러미 봤다. 자신이 밀크티를 좋아했던가. 잘 모르겠다. 황후인 디아나는 좋아하는 것도 없었고 싫어하는 것도 없었다. 새삼, 기호라는 것이 나타나자 낯설게 느껴질 정도다.
“따뜻할 때 드세요.”
“고마워.”
샬롯의 친절에 마지못해 한 모금을 머금자 부드러운 우유의 풍미가 느껴졌다. 그러면서도 뒷맛을 약간 쌉쌀한 차의 향이 잡아 줘서 깔끔했다. 디아나는 저도 모르게 입가에 미소가 번지는 것을 느꼈다.
“정말…… 맛있네.”
달콤한 밀크티는 모든 것이 딱 디아나의 입맛에 맞았다. 너무 달지도 않았고 너무 쓰지도 않았다. 그제야 디아나는 천천히 깨달았다. 자신은 밀크티를 좋아한다는 것을.
“아가씨가 가장 좋아하시는 거잖아요.”
샬롯이 아는 디아나는 아니더라도, 지금의 자신도 밀크티가 좋았다. 그건 작지만 새로운 충격이었다.
“응, 나 밀크티가 좋아.”
새삼스러운 말을 하는 디아나를 보면서 샬롯이 온화한 미소를 머금었다.
어릴 때부터 말수가 적은 아가씨는 사실 속이 깊고 다정한 아이였다. 거의 부모처럼 디아나를 양육해 온 샬롯이기에 자부할 수 있는 사실이다.
최근 들어 조금 낯설게 느껴지긴 했지만, 아이가 성장하며 그럴 때도 있는 법이다. 이제 디아나는 열일곱이었다. 이미 어른에 가까운 것이다.
“아가씨가 요즘 고민이 많아 보여서 준비해 봤어요.”
“내가?”
“네, 최근엔 항상 골똘히 생각에 잠겨 계시잖아요. 감기 끝이라서 그랬을까요?”
아니라는 것은 둘 다 알고 있었다.
“혹시…… 고민이라도 있으세요?”
샬롯은 다정했다. 어머니가 있었으면 이런 느낌일까. 디아나로서는 알 수 없었다. 예전 그 책으로 들어오기 전의 자신도, 지금 디아나로 사는 생에도 어머니는 없었다.
“그냥, 좀.”
아무래도 전과 행동이 달라졌을 것이다. 샬롯은 가까운 사람이었으니 이상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본래 디아나는 어떤 아이였는지 모르는 채라 더 그랬다.
“저, 샬롯.”
“네, 아가씨.”
어쩌면 혼자 고민하는 것만이 방법은 아닐 것이다. 디아나는 자신을 향한 선의로 가득한 샬롯의 눈매를 보며 처음으로 타인의 존재를 크게 느꼈다.
“요즘 뭔가 생각이 많아졌어. 그럴 시기잖아.”
이 정도 변명으로 통하려나. 디아나는 최대한 지금 상황에서 열일곱이 할 법한 고민에 근접한 말을 지어냈다. 다행히 샬롯은 인자하게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래서 궁금해진 건데.”
디아나가 살며시 눈치를 살폈다. 샬롯은 그런 디아나를 사랑스럽게 보고 있었다. 샬롯은 황후로 살 때 디아나의 주위에 있던 그 누구와도 달랐다. 그 모진 삶을 겪어 본 디아나기에 이 사람은 믿어도 된다는 확신이 들었다.
“내 부모님은 어떤 분들이었어?”
그나마 자연스럽게 과거로 연결될 수 있는 질문이었다. 샬롯은 디아나를 잠시 응시하다가 맞은편의 자리에 앉았다.
“무척이나 훌륭한 분들이셨답니다.”
모범적인 답변이었지만, 디아나에겐 부족했다.
“어렸을 때 일은 잘 기억이 나질 않아. 왠지 모르게…… 요즘 아픈 후로는 더 머리가 아파서.”
“오래된 기억은 희미해지기 마련이죠. 너무 무리하실 필요 없어요.”
“그냥 문득 궁금해졌어. 우리 부모님은 어떤 분들이었는지…… 그리고 부모님이 살아 계셨을 때, 나는 어떤 아이였는지.”
샬롯의 눈에 애수가 어렸다. 여전히 사랑과 온기를 머금고 있었지만, 슬픈 빛이 감도는 것을 감출 수는 없다. 열일곱밖에 안 된 디아나가 이미 죽은 부모와의 추억을 잊고 싶지 않아서 제게 묻는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아플 수밖에.
“그럼, 오랜만에 옛날이야기를 들려 드릴까요?”
디아나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가씨가 더 어리실 땐 자주 옛날이야기를 들려 드렸는데, 그것도 기억 안 나세요?”
“……잘 모르겠어.”
“괜찮아요, 제가 다 기억하니까.”
샬롯의 온화한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했다. 디아나는 처음으로 타인 앞에서 느긋하게 등을 기대고 앉았다. 샬롯은 반쯤 빈 디아나의 찻잔에 밀크티를 따라 주고는 미소를 머금었다.
“아가씨의 부모님, 그러니까 선대 공작님 내외는 아주 훌륭한 분들이셨어요. 저는 아가씨의 어머님을 결혼 전부터 모시던 사람이었죠.”
자질구레한 일을 하는 하녀와는 달리, 샬롯의 위치는 특수했다. 드물게 지체가 아주 높은 귀족이나 황족은 자신의 곁에 보좌를 맡길 사람을 두곤 했다. 그들은 대부분 같은 귀족가 출신이지만, 조금 신분이 낮거나 이유가 있어 혼인하지 못한 여성이었다.
“두 분은 아주 금실이 좋으셨어요. 아가씨가 태어나셨을 땐 두 분 모두 어찌나 기뻐하셨는지 몰라요. 아가씨는 갓난아기 때부터 아주 예쁘셨거든요. 공작님을 닮기도 하셨지만, 무엇보다 마님을 많이 닮으셨어요. 빛나는 머리카락도, 푸른 눈동자도…… 자랄수록 마님의 모습이 보여요.”
처음엔 남의 이야기를 듣는 것 같았는데, 샬롯의 눈가가 촉촉해지는 것을 보자 조금씩 실감이 났다.
디아나는 사랑받는 존재였다. 부모가 사랑해서 낳은 아이였다. 그것이 왠지 먹먹하게 다가왔다. 원래 그 책에 들어오기 전의 자신은 부모가 누군지도 몰랐고, 다리를 쓰지 못한다는 이유로 시설 앞에 버려진 아이였으니까.
“아가씨의 존재는 온 공작저의 기쁨이었답니다.”
“내가?”
“그럼요. 매일 축제 같은 기쁨이었답니다. 아가씨의 모든 것이 다 경사였어요.”
자신이 누군가에게 그토록 사랑받는 존재였다니, 낯설었다. 황후인 디아나로 살았을 때도 느끼지 못한 감정이었다. 그땐 에드윈의 구애도 알고 있는 사실이었을 뿐, 체감하진 못했다. 그가 이미 전선에서 유명을 달리한 후였기 때문이다.
“두 분 모두 아가씨를 무척이나 사랑하셨어요. 아마 지금도 하늘에서 아가씨를 지켜보며 행복을 바라고 계실 거예요.”
디아나는 태어났을 때부터 사랑받는 존재였다. 그게 사실이라면 더 슬펐다. 디아나가 황후로서 살았던 생을 돌이켜 보면, 그리고 부모님이 정말 디아나를 사랑했다면, 하늘에서도 편히 눈을 감지 못했을 테다.
“아가씨가 다섯 살 되던 해에 불행한 마차 사고가 일어나지만 않았어도…….”
열일곱은 아직 어린 나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디아나는 벌써 어린 생의 대부분을 부모를 잃은 채 살고 있었다.
샬롯이 지금의 자신을 의심하지 않는 것도 어쩌면 당연했다. 디아나는 말수가 적고 속이 깊은 아이였다고 했으니까. 그것은 어렸던 디아나가 어땠는지 짐작하게 했다.
“그래도 아가씨가 이렇게 어엿하게 자라신 걸 아실 테니, 틀림없이 행복하실 거예요.”
“그럴까? ……잘 모르겠어. 그 사고 후에는 어떻게 됐어?”
“저는 당연히 아가씨를 모시기 위해 남았지요. 공작위는 숙부님께서 이어받으셨고요. 이 공작저는 아가씨와 선대 공작님 내외를 기리기 위해서 남겨 두셨어요.”
그런 핑계로 어린아이를 텅 빈 저택에 내버려 뒀던 거구나. 디아나는 속으로만 쓴맛을 삼켰다. 그러다 황실과의 결혼에 이용할 수 있게 되자, 집요하게 찾아와 디아나를 괴롭혔다.
“물론, 아가씨께서 유일한 상속자시기도 하니까요.”
의외의 사실이 디아나의 눈을 커다랗게 만들었다.
“내가?”
“그럼요. 아가씨는 선대 공작님 내외의 유일한 자제분이셔요.”
모든 것은 작위에 포함됐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보통 공작령을 받은 자가 공작위를 갖는다.
“이 저택의 전부는 다 아가씨의 것인데…… 모르셨나요?”
텅 비었다고 표현하긴 했지만, 공작저 자체는 아주 컸다. 그 주인이자 실제로 거주하는 사람이 어린 디아나 혼자라 드나드는 사람이 없을 뿐이지 아직도 그 위엄은 거대한 존재감을 자랑했다.
“난 숙부님이 공작이 되셨으니까 당연히 전부 숙부님 것인 줄 알았어.”
“예? ……하긴, 아가씨는 아직 어리시니까 잘 모르셨군요.”
샬롯은 인자한 미소로 디아나를 봤다. 열일곱은 샬롯의 기준에선 어린 나이였지만, 디아나는 영명하고 조숙했다. 게다가 이젠 자신에 대해서 알아 갈 나이였다.
“숙부님께서 공작위를 받으신 건 사실이에요. 따라서 공작령도 숙부님의 것이 되었죠. 하지만 아가씨의 부모님께 속한 재산은 공작령만이 아니었어요.”
현재의 공작부인인 실비아는 샬롯에게 노골적으로 어린 디아나가 많은 것을 알 필요 없다고 강조하곤 했다. 어느 정도는 샬롯도 동의했지만, 디아나 본인이 알고자 하면 숨길 이유는 없었다. 그것이 샬롯의 가장 중요한 역할이기도 했다.
“우선 이 공작저는…… 본래 공작령에 속한 저택이 아니랍니다. 그래서 숙부님 내외가 지금 계시는 공작저에 살고 계신 거죠. 그쪽이 공작령에 속한 저택이거든요.”
디아나가 와닿지 않는 이야기에 눈을 깜박였다.
“아가씨의 어머님 되시는 선대 공작부인께선 유구한 티어스 가문 출신이셨어요. 혼인하실 때 꽤 많은 지참금과 보석을 가져오셨죠. 그 또한 당연히 아가씨의 몫이랍니다.”
영애로서 자신에게 무언가 힘이 있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당연히 권세를 위해 황실에 시집을 가야 하는 존재라고 여겼는데, 지금 보니 그렇지만도 않았다. 원작의 디아나는 이 사실을 몰랐던 걸까.
“정말 아무것도 모르셨군요.”
샬롯은 약간 안타까운 마음을 담아서 말했다. 본래 이런 것은 더 어른이 된 후에 부모에게 직접 배워야 하는 것들이었다. 그런 역할을 해 줄 사람이 없으니 디아나가 모르는 것도 당연했다.
“아가씨, 저와 함께 가실래요?”
딱히 거절할 이유가 없는 제안에 디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샬롯은 디아나를 데리고 긴 복도를 지나 층계를 내려가 평소에는 굳게 잠긴 방문 앞에 섰다. 샬롯은 목에 걸고 있던 열쇠 중 하나로 그 방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