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책을 끝까지 읽었어야 했다-14화 (14/184)

14화

디아나가 좋아하던 정원은 사시사철 푸른 잎으로 채워져 있었다. 정원은 작은 미로처럼 오솔길이 나 있었고, 그 옆으로 정교하게 가꾸어진 정원수들이 푸르름을 뽐냈다.

디아나가 황후로서 내린 명령은 단 하나, 산책할 때만큼은 시종들이 먼발치에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그리 넓은 정원은 아니었다. 그런데도 세 번을 오갈 때쯤이면 시녀장이 눈치를 주었다. 천천히 녹음 속에서 숨을 쉬며 제 발로 걷는 느낌을 간직한 채, 궁으로 돌아가 인형이 될 시간이라는 뜻이었다.

“그 정원조차 없애 버렸지.”

명목은 황후를 위해 정원을 새로 단장한다는 것이었지만, 그 진두지휘는 하나부터 열까지 트리샤에게 맡겨졌다. 트리샤는 기존의 녹음을 죄 치우고 화려한 장미로 정원을 가득 채웠고, 커다란 조각상과 분수대를 설치했다.

분명 훌륭하고 멋진 정원이었지만, 디아나가 사랑했던 고요한 녹음은 사라진 후였다. 디아나가 유일하게 마음을 내려놓고 숨을 쉴 수 있는 공간을 없앤 것이다.

“괜찮아, 이젠 내 발로 숲에 갈 수도 있어.”

디아나가 자신을 위로하듯이 말했다. 그건 사실이었다. 황후가 되는 운명을 피한다면 평생을 혼자 산다고 해도 꽤 풍족한 상태로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그렇게 되면 자신에게는 최선의 해피엔딩이었다.

“그래. 좋은 점도 있구나…….”

그동안 마음이 너무 황폐해진 탓에 몰랐다. 그 책 속으로 들어와 버린 것은 반드시 불행한 일은 아니었다. 적어도 지금 기회가 있는 디아나에게는 그랬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또 오겠다.’

지금의 디아나에겐 에드윈이 있었다.

‘……나머지는, 그때.’

아직 디아나는 불행하지 않았다. 오늘도 여전히 그가 찾아올 밤이 기다려졌고, 이 상황을 빠져나갈 방법이 있을 거라고 믿고 싶었다.

황후로 2년을 보냈던 자신은 그 책에 나온 에드윈의 존재를 알기만 했지, 느껴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막상 만나게 된 에드윈은 자신의 상상을 뛰어넘는 매혹적인 남자였다.

아직 기회가 있었다. 에드윈이 헛되게 목숨을 잃지 않고 디아나는 황태자비가 되지 않는 결말이 있을 수도 있었다.

소중한 희망이었다.

***

화려한 마차가 지나가자 길을 가던 사람들이 모두 비켜섰다. 카를 공작가의 문양이 박힌 마차는 무려 네 마리의 말이 끌 정도로 크고 호화로웠다. 공작위 이상을 가진 가문에만 허락되는 호사였다.

“잠깐.”

마차 안의 쿠션에 등을 기대고 있던 실비아 공작부인이 손에 쥐고 있던 부채를 탁, 접었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시녀장이 재빠르게 눈치를 채곤 마부에게 전달해서 마차가 멈췄다. 실비아의 시선은 창 너머를 향하고 있었다.

“저건…… 얼마 전에 내가 디아나에게 보낸 드레스 중 하나가 아닌가?”

“아, 맞습니다. 당시 헤일리 부인에게 특별히 주문하셨던 것 중의 하나입니다.”

실비아의 미간이 찌푸려 들었다.

“분명 하나밖에 만들지 않겠다고 했을 텐데? 헤일리 부인이 다른 이에게도 같은 드레스를 팔았다는 거야?”

“그럴…… 리가요. 헤일리 부인은 특별 주문품은 늘 한 벌밖에 만들지 않는데.”

“그럼,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건 뭐지?”

실비아의 못마땅한 시선 끝에는 분명 디아나에게 줬던 실크 드레스를 입은 뒷모습이 보였다. 꽤 가까운 거리였고 평소 패션에 조예가 깊은 실비아였기에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무엇보다 헤일리 부인의 드레스와 견줄 만한 물건은 아주 드물었다. 이런 길에서 혼자 걸어 다니는 소녀가 입을 수 있는 것이 아니란 말이다.

“가만.”

탁탁, 실비아의 손바닥에 부채가 내리쳐졌다.

“저 붉은 머리카락…… 황실의 시녀로 입궁했던 아이가 아닌가?”

“아, 트리샤 블랑이라고 합니다.”

“그래, 내가 그딴 것들엔 관심이 없어도 그 천박한 붉은 머리카락은 잊을 수가 없지.”

실비아가 창문 밖으로 지나가는 강렬한 트리샤의 붉은 머리카락을 노려봤다.

“그보다 어떻게 된 거야? 내가 듣기로는…….”

실비아가 눈살을 찌푸렸다. 천한 신분을 가진 어미 때문에 시침 시녀로 분류됐다고 해서 괜히 실비아까지 꺼림칙한 기분이 들게 했던 아이다. 명색이 공작부인인 실비아의 추천장을 받아 갔는데 그런 꼴이 되다니, 꼭 자신에게도 흙탕물이 한 방울 튀긴 것 같아서 못내 화가 나던 차다.

“뭐 하고 있어?”

애꿎은 화가 시녀장에게 튀었다.

“예? 아, 어서 데려오겠습니다.”

“마차엔 태우지 마, 불쾌하니까.”

“하오면…….”

“그런 것 하나 알아서 못 해?”

실비아의 히스테리에 시녀장이 어쩔 줄 모르며 고개를 숙였다. 시녀장은 제게 더 불꽃이 튀지 않도록 서둘러 마차에서 내려 트리샤의 뒤를 쫓았다.

잠시 후, 마차가 인적이 드문 골목에 잠시 멈췄다. 시녀장은 트리샤를 데리고 마차의 창문 앞에 손을 모으고 섰다. 트리샤는 미소를 띤 채 공작부인에게 예를 갖췄다.

“카를 공작부인을 뵙습니다.”

그러나 실비아의 표정은 확연히 떫었다.

“넌 시녀로 입궁한 게 아니었어? 내가 듣기론…….”

실비아가 말끝을 흐렸다. 굳이 그 일을 입에 담을 필요는 없었다.

“맞습니다. 아, 저희 어머니께서 공작부인의 은혜에 감사드린다고…….”

“됐고, 시녀가 됐는데 여기서 뭘 하고 있지?”

실비아의 매서운 태도에 트리샤는 주눅이 들어 제 두 손을 꼭 모은 채 붙들었다.

“그게, 황태자 전하의 명령으로 카를 공작저에 갔는데 디아나가…… 오늘은 혼자 있고 싶다고 해서요.”

“디아나가?”

그 말에 실비아는 헛웃음을 뱉으며 제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짜증이 밀려올 때의 습관이었다.

“네, 디아나가 직접 부탁해서 어쩔 수 없었어요.”

“아니, 얘…….”

어처구니가 없는 헛웃음이 실비아의 입가에서 다시 터졌다. 그제야 트리샤는 마차에 앉아서 자신을 내려 보는 실비아의 눈에 경멸이 배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도대체 네가 뭐라고 생각하는 거니?”

“저는…….”

“순진한 디아나가 친구라고 했다고 그걸 곧이곧대로 믿으면 어쩌자는 거야, 응?”

화끈, 트리샤의 뺨이 달아올랐다. 디아나와 자신의 신분 차이가 크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형편은 말할 것도 없었다. 자신의 아버지는 겨우 남작이란 작위 하나만 물려받고 사는 한량이었고, 아버지의 도박 빚에 재산은커녕 살림살이도 궁색했다. 심지어 어머니는 성도 없는 평민 출신이었다.

“저어, 그게…… 디아나가…….”

“하, 그 천박한 입에 디아나의 이름을 담아도 된다고 생각하니?”

이름만 남작의 딸이었지 하녀나 다름없는 생활을 했던 트리샤였다. 그리고 그런 트리샤를 유일하게 동갑내기 친구로 봐 준 것이 디아나였다. 그러나 실비아의 눈엔 시침 시녀로 내몰렸을 정도로 천박한 것이었다.

“그렇지만, 친구라고…….”

“주제를 알아야지, 주제를.”

수치심에 트리샤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디아나의 기분을 맞추는 건 알아서 하고, 밖에서는 영애님이라고 불러야 할 거 아니니? 너희 집도 명색은 귀족이라면서 그런 기본적인 법도도 안 배운 거야? 그 아인 곧 황태자비가 될 몸이라고!”

트리샤는 말없이 드레스 자락을 꾹 쥐었다. 부드러운 실크 원단이 그 손에 확 구김살이 일어났다.

그때, 실비아는 트리샤의 머리에 꽂힌 핀을 보고 말았다. 드레스와 달리 실비아가 아는 물건은 아니었지만, 심증은 확실했다. 블랑 남작가에 저런 것을 살 돈은 없었다.

“아무래도 네게 배움이 필요한 것 같구나.”

실비아는 사나운 눈빛으로 트리샤를 쏘아봤다. 아무래도 제 분수를 알려 줘야 할 것 같다.

“당장 그 손 떼지 못해? 너 같은 것이 구기라고 만든 옷이 아니야!”

영문을 모르는 트리샤는 겁에 질려 손을 떼고 어쩔 줄 몰라 마차 안의 공작부인을 바라봤다.

“하…… 친구? 우리 디아나가 순진하게 자라서 그럴 수는 있다지만, 알 거 다 알아야 하는 너까지 그걸 좋다고 덥석덥석 받고 있으면 어떡하니? 시녀가 될 마음이 있긴 한 거야?”

힐난의 목소리가 날카로웠다. 트리샤는 고개를 푹 숙인 채, 골목길 끝에서 자신을 손가락질하는 행인들의 모습까지 묵묵히 견뎠다.

“설명해 봐. 왜 네가 그 옷을 입고 있는 거지? 내가 디아나에게 직접 지어 준 옷이니 거짓말할 생각은 말고.”

“디아나가…… 아니, 디아나 영애가 선물로 줬어요.”

“그 머리핀까지?”

실비아의 목소리가 한껏 비틀려 올라갔다. 트리샤는 심장이 터질 것같이 쿵쾅거렸지만, 애써 입술을 꾹 깨물었다. 술에 취한 아버지가 폭언할 때처럼 이 폭풍이 지나가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아, 내 골치야…….”

공작부인으로선 황당한 상황이었다. 트리샤는 한낱 도구에 불과했다. 시침 시녀가 됐다고 해서 잊고 있었는데, 버젓이 디아나의 드레스를 입고 돌아다니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도나.”

실비아가 이름을 부르자 시녀장이 즉각 트리샤의 머리에서 거칠게 머리핀을 빼냈다. 그 틈에 머리카락이 쥐어 뜯겼지만, 트리샤는 찍 소리도 내지 못했다.

“명심해, 넌 디아나의 기분을 맞춰 주는 역할이라는 거.”

차가운 현실이 트리샤의 가슴에 박혔다.

“네 주제를 알아야지. 난, 널 디아나의 장난감으로 고용한 거야. 디아나가 친구 놀이에 질릴 때까지만 사용할 장난감으로. 입궁해서도 마찬가지야. 넌 디아나를 따라 움직이는 부속이라고.”

칼보다 날카로운 경멸의 말에 트리샤가 눈을 들어 실비아를 봤다.

자기 주제라니. 당사자인 디아나가 친구라고 해 줬는데, 이 모든 것은 디아나가 원해서 준 것인데, 왜 이런 수모를 겪어야 하는지 열일곱의 트리샤로서는 이해하기가 어려웠다.

“어머, 저 눈빛 좀 봐. 어디서 저리 천박한 붉은색을 해서는…….”

실비아가 질색하더니 부채를 펴서 얼굴을 반쯤 가렸다.

아직도 보수적인 성향이 있는 사람들은 붉은 머리를 천박하다고 말했다. 특별한 이유 없는 차별이었다. 선천적으로 붉은 머리카락을 타고나는 사람이 아주 드물기도 했고 온갖 이상한 이야기가 붙어서 꼬리표같이 된 것이다.

“도나, 저 아이 제대로 교육해서 보내.”

“네, 알겠습니다.”

“드레스는…….”

차가운 눈빛이 다시 트리샤를 위아래로 훑었다.

“됐어, 이미 저런 게 입었으니.”

“예.”

실비아는 할 말이 다 끝났는데도 가지 않고 트리샤를 보고 있었다. 눈치 빠른 시녀장은 그것이 뭘 의미하는지 알았다.

시녀장은 망설임 없이 작은 아이를 향해 매서운 손을 들었다. 이내 철썩하는 마찰음이 트리샤의 뺨을 올렸다. 실비아는 그 광경을 아무런 감흥 없이 보고 있었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트리샤의 뺨에 따귀가 쏟아졌다. 입술이 터져서 피가 흘렀고 눈앞이 자꾸 번쩍거려서 똑바로 서기가 어려웠다. 그렇게 몇 대를 맞았을까. 어느새 따귀가 멈추는 것이 느껴졌다.

“……그만 돌아가자.”

“예, 마님.”

마차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골목을 벗어났다. 트리샤는 태어나 처음 입어 본 아름다운 드레스 자락을 꾹 쥔 채 한참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입술에서 피 맛이 났다. 뺨은 이미 불이 난 것처럼 화끈거렸다.

“내 주제…….”

그러나 눈물만은 흘리지 않았다. 트리샤는 멀어지는 마차를 노려봤다.

“내 주제가 뭔데?”

디아나도 트리샤도 귀족 영애였다. 나이는 열일곱으로 동갑이었고, 심지어 자신 역시 디아나처럼 황태자 전하와 단둘이 접견하는 영광을 가졌다. 작위가 초라하다고, 가문이 형편없다고 해서 공작부인이 길바닥에서 하녀처럼 매우 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나랑 디아나가 뭐가 달라.”

디아나의 드레스를 입은 트리샤는 마치 디아나처럼 빛났다. 짧은 시간, 황태자 전하와 독대도 했다. 그런데 공작부인이라고 해서 자신을 이렇게 업신여기다니, 말도 안 된다.

“다르지…… 않아.”

트리샤가 피 맛이 나는 입술로 되뇌었다.

“친구는 똑같은 거야.”

그것은 처음 디아나를 만났을 때 들은 말이었다. 그 말이 있었기에 트리샤는 지금 울며 주저앉는 대신 무거운 걸음을 떼서 남들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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