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책을 끝까지 읽었어야 했다-13화 (13/184)

13화

다음 날, 공작저에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디아나는 그 말을 전해 듣자마자 고운 미간을 찡그렸다. 샬롯이 내심 놀랄 만큼 노골적인 거부감이었다.

“그러니까…… 트리샤가 황태자 전하가 보내신 시녀의 신분으로 왔다고?”

디아나는 샬롯의 말을 재차 확인했지만, 사실이었다. 방금 전까지 에드윈의 생각으로 가득 찼던 머리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시녀라니, 그건 예정에 없던 전개다. 트리샤는 그대로 조용히 제 삶을 살아갈 줄 알았는데, 또다시 디아나의 삶에 끼어들고 있다.

“……만나 봐야겠어.”

“네, 아가씨. 데려올게요.”

곧 디아나의 앞에 나타난 트리샤의 얼굴은 한층 화색이 돌았다.

“디아나!”

수수한 드레스였지만, 평소보단 훨씬 멀끔해진 모습이 디아나의 시선을 끌었다.

“나, 황실 시녀가 됐어!”

“그렇다고 들었어.”

디아나는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트리샤의 붉은 눈동자가 칭찬이라도 바라는 것처럼 빛나고 있었다.

“그렇게 멋진 곳은 처음이었어. 황실이니 당연하겠지만…… 모든 게 내 상상보다 더 대단하고 아름다웠어.”

“그래. 그런데 갑자기 시녀라니?”

디아나의 무심한 대답에도 트리샤의 뺨에 어린 생기가 쉬이 사라지지 않았다.

“아…… 사실은, 공작부인께서 나중에 네가 입궁하면 쓸쓸할지도 모른다며 추천장을 써 주셨어. 내가 먼저 시녀가 되어서 황실에 적응하고 있으면 너에게 도움이 될지도 모르잖아.”

트리샤의 입에선 사실을 조금 비튼 말이 나왔다. 이건 그냥 듣기 좋게 포장을 하는 것뿐이지, 거짓말이라고 생각지는 않는 거다.

“아니, 왜 그걸 숙모님과.”

“아…… 그야 공작부인은 널 걱정하시는 데다, 나도 늘 네 도움이 되고 싶었거든. 너한테 말하면 내가 고생할까 봐 말릴 테니…… 깜짝 놀라게 해 주려고.”

트리샤가 손을 꼼지락거리며 수줍은 표정을 지었다. 확실히 깜짝 놀랄 일이긴 했다. 겨우 치웠다고 생각한 존재가 버젓이 또 눈앞에 나타나는 것은 썩 유쾌하지 않았지만.

“나 황태자 전하도 알현했어! 황태자 전하도 좋은 분이셨어. 동갑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의젓하고 멋진 분이던걸.”

뭔가 수상했다. 아무리 루카스가 한가하다고 해도 일개 시녀와 말을 섞을 일은 없었다.

“……어떻게?”

디아나의 당연한 물음에 트리샤는 괜히 더 환한 미소를 지었다. 시침 시녀에 대한 비밀을 보장하지 않으면 죽임을 당할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 그런 계기로 루카스를 만나 디아나의 이름을 대고 겨우 위기를 벗어났다는 말을 하기 자존심이 상했다.

“으응, 우연히…… 내가 공작부인의 추천서로 입궁해서 그런지. 네 친구라는 걸…… 아셨나 봐.”

“그렇구나.”

담담한 말에도 트리샤는 계속 미소를 쥐어짰다. 지금 디아나는 결혼을 앞두고 심란할 때였다. 하지만 입궁해서 트리샤와 지내다 보면 다시 예전의 우정을 기억해 내겠지. 이 정도쯤은 친구를 위해 참을 수 있었다.

“디아나, 네가 감기에 걸렸단 소식을 들으시고 전하께서 직접 날 보내셨어.”

황태자비로 공표된 후 사교계의 초대가 물밀 듯이 쏟아졌다. 디아나는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 감기라는 무성의한 변명을 내세웠다.

“정말…… 너그럽고 어른스러운 분이셔.”

그건 아니다. 루카스는 황제가 되어서도 썩 어른스러운 성격이 아니었다. 의젓과는 거리가 더 멀었다. 트리샤가 반한 것은 루카스 뒤의 황태자라는 후광일 것이다.

“아, 그리고…… 이거.”

트리샤가 황실의 인장이 찍힌 봉투를 내밀었다. 루카스가 굳이 뭔가를 적어 보낸 모양이었다.

“나중에 볼게.”

호기심에 가득 찬 트리샤의 눈에 살짝 실망이 스쳤다. 디아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문득 트리샤와 루카스의 조합이라는 것이 새삼스레 떠올랐다.

“트리샤, 다시 돌아가면 또 황태자 전하를 뵙겠네?”

“응, 그럴 거 같아.”

디아나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시녀들은…… 복장에 따로 규정이 있니?”

“아, 그렇긴 한데…… 아무래도 난 아직 월급을 받기 전이라.”

트리샤가 수수한 제 복장을 의식한 듯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황실의 시녀들은 계급에 따라 차이는 있었지만, 보수도 좋은 편이었고 더 높은 분을 모실수록 치장도 화려했다. 트리샤는 이제 막 입궁한 시녀였지만, 이미 루카스와 인연이 닿았다.

“마침 너한테 잘 어울릴 드레스가 있는데.”

“아냐!”

트리샤가 손사래를 쳤지만, 디아나는 샬롯을 불러 몇 마디를 전했다. 곧 샬롯이 썩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드레스를 내왔다. 은은한 녹색의 드레스는 척 보기에도 꽤 값이 나가 보였다.

이 정도면 황실의 복장 규정에도 맞출 수 있었고, 그러면서도 확 눈에 띌 것이다. 트리샤는 손사래를 쳤던 것과는 달리 드레스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걸로 갈아입고 가.”

“하지만…….”

“괜찮아. 나한텐 이 색이 안 어울리는 것 같아서. 네가 입으면 예쁠 거야.”

그리고 그 예쁜 모습으로 루카스를 유혹해 줬으면 했다. 어차피 둘은 천생연분이니 애초에 둘이 눈이 맞는다면, 다른 희생자가 헛된 희망을 품을 필요가 없었다. 그렇게 루카스의 관심에서 멀어지면 디아나의 계획에도 좋을 거다.

“어서.”

“정말…… 너한테 너무 받기만 해서.”

디아나가 슬쩍 등을 떠밀자, 트리샤가 태피스트리 뒤로 돌아가서 드레스를 갈아입었다.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트리샤의 붉은 눈동자 가득 빛나는 물욕을 살짝만 부추기면 됐다.

“정말 예뻐, 트리샤. 잘 어울린다.”

“진……짜?”

예전, 멀어지기 전의 디아나 같았다. 그때도 이렇게 디아나의 옷장을 열어 드레스를 입고는 소꿉장난을 했다. 트리샤의 눈에 감격과 애정이 그렁그렁했다. 그래. 최근의 디아나는 결혼으로 마음이 소란스러운 것이다. 둘은 여전히 친구였다.

“그럼, 트리샤. 너도 오늘은 이만 돌아가.”

“응? 하지만 널 간호해야지.”

“보다시피 난 괜찮아.”

디아나는 침대가 아닌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차분히 독서를 즐기는 것을 봐선 감기는 그냥 핑계였다. 트리샤도 모를 리는 없을 텐데 가소로운 수작이다.

“그동안 누워서만 지냈더니 조용히 혼자 책을 읽는 시간을 갖고 싶어.”

“아…… 그랬었지.”

트리샤가 멋쩍게 웃었다. 디아나는 조용히 손을 들어 책장 앞의 다른 테이블을 가리켰다.

“참, 저것도 가져가.”

“으응, 뭔데?”

“보면 알아.”

고급스러운 새틴으로 만들어진 꾸러미였다. 트리샤는 빠른 손길로 그 꾸러미를 풀었다. 그 안에는 정교하게 세공된 머리핀이 들어 있었다. 루카스의 눈동자 색과 같은 에메랄드빛이 영롱했다. 트리샤의 붉은 머리카락에선 더 돋보일 것이다.

“이걸…… 내가 가져가라고?”

“응. 날 위해 시녀가 됐다는데, 뭔가 선물을 하고 싶어서.”

“이미 드레스도 받았는걸.”

“별것 아니야.”

이것은 평범한 친구 사이와는 거리가 멀었다. 디아나는 그것을 확실히 해 두고 싶었다. 대가를 받으면 순수한 우정이 될 수는 없다. 디아나에겐 필요치 않은 패물이지만, 트리샤에겐 보물처럼 여겨질 거다. 그런 것을 트리샤가 거절할 수 있을 리가 없다.

“무척 비싸 보이는데…….”

“내가 괜찮다고 하잖아.”

디아나가 재차 확인해 주자 트리샤는 냉큼 그 핀을 손에 꼭 쥐었다.

“물론, 전하께는 내가 아직 감기로 고생 중이라고 전해 줄 거지?”

대가 없는 선행은 아니었다.

“내가 혼자 생각할 시간이 필요해서 그래.”

“그럼, 난 다 이해해. 정말 고마워, 디아나.”

“아냐, 너도 내 부탁을 들어주잖아.”

디아나가 묘한 미소를 지었다. 자신의 부탁을 들어줬다는 것은 우아하게 포장한 말이고 실은 사람을 부리고 대가를 지불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게 나았다. 친구니 우정이니 하는 말로 트리샤와 엮이고 싶지 않았다.

“넌, 정말 좋은 친구야…… 내가 더 잘할게, 앞으로. 뭐든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있으면 말해 줘.”

디아나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은 채 트리샤를 봤다. 트리샤는 그것을 긍정의 뜻으로 받아들였는지 두런두런 혼자서 몇 마디를 하다가 이내 침실을 나섰다. 그제야 디아나는 편안히 숨을 내쉴 수 있었다.

“그 물욕은 원래부터 있던 거구나.”

혼자 남은 디아나가 한심한 투로 뱉었다. 트리샤는 반짝이는 것을 유난히 좋아했다. 지금 돌이켜서 생각해 보니, 본래의 자신은 쉬이 가질 수 없는 것들이었기에 탐했던 것 같다.

어느 쪽이든 디아나로선 이해할 수가 없었다. 디아나는 어머니로부터 수많은 패물을 물려받았지만, 물건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았다. 하긴, 트리샤의 욕망을 단순한 물욕으로 표현하기는 어려웠다. 무엇도 그 욕심을 채우지 못하는 것을 직접 봤으니.

“자, 이제 어떻게 한다…….”

디아나가 잠자코 혼잣말을 했다.

루카스의 소식을 들은 후, 고요한 시간을 보내고 있자니 예전이 떠올랐다. 처음 디아나가 되었을 때는 이미 황후였고 트리샤에 치여서 제자리를 찾을 수조차 없었다.

서툰 신혼은 너무 짧아서 디아나에게 기회를 주지 않았다. 루카스는 쉽게 웃고 쉽게 화를 내는 사람이었지만, 그 감정은 모두 진실과 거리가 멀었다. 그는 태생부터 마음이 얼어붙은 사람일 거다.

무관심 속에서 디아나는 메말라 갔고 무언가 제대로 생각을 할 겨를도 없었다. 오직 그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제 죽음을 앞당긴 것은 그래서였다.

“우선…… 이것부터인가.”

디아나는 앉은 채로 제 두 다리를 들었다. 허공에서 물장구를 치듯이 발을 흔들자 작고 귀여운 발이 달랑거렸다.

디아나에겐 당연한 일이었다. 대부분 사람이 그렇듯이. 하지만 디아나가 되기 전의 자신에겐 아니었다. 그 책에 들어오기 전, 자신은 다리를 쓸 수 없었다.

“그래. 찾아보면 좋은 점도 있어.”

자리에서 일어선 디아나가 천천히 자신의 침실을 걸었다. 두 발로 걷는다는 기분이 이렇게나 자유로운 것이라는 걸 그 책 속의 디아나가 되기 전엔 몰랐다.

읽고 있던 소설 속의 주인공이 된다는 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을 때, 빠르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제 다리가 움직인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것은 이미 마법이었다.

“이젠 내 발로 어디든 갈 수 있어.”

그랬다. 예전의 자신이 책에 파묻힐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다리를 쓰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한정된 공간에서 남의 도움이 없으면 움직이지조차 못하는 무력한 사람. 그게 자신이었다. 가족도 친구도 없었고 의무감 혹은 봉사 정신으로 방문해 주는 타인이 전부였다.

“어디든지…….”

처음 디아나가 되었던 순간이 떠올랐다. 황후인 디아나가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안 된다는 말이었다. 두 발로 걸을 수 있게 되었는데, 그리 지체가 높다는 황후인데도, 디아나의 삶은 원래 제 삶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황후 폐하, 햇빛을 쏘이시면 몸에 해롭습니다.’

‘그것은 불가합니다. 체통을 지키셔야 합니다.’

‘아니 됩니다. 옥체를 보전하셔야지요.’

그것은 생활의 모든 곳에 따라붙었다. 디아나는 스스로 옷을 입거나 몸을 씻을 권리도 없었다. 황실의 법도는 굉장히 지엄했고 지체가 높은 신분은 스스로 뭔가를 하는 것을 수치스럽게 생각했다.

‘오늘은 이 드레스에 진주 장식을 걸지요.’

디아나는 아름다운 궁에 갇힌 인형이었다. 가만히 서 있으면 시녀들이 와서 속옷부터 장신구까지 모든 것을 몸에 맞게 걸쳐 줬다.

‘정말 아름다우십니다.’

오직 디아나만을 위한 드레스와 보석들이 한 방을 메우고도 남았다. 우습게도 디아나는 자신이 옷을 골라 본 적이 없었다. 한 번 용기를 내서 붉은색이 싫다는 말을 꺼냈다가 의전에 대한 설교를 들은 후로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그때부터 디아나에겐 모든 것이 똑같이 느껴졌다. 황실에 존재하는 것은 디아나가 아닌 황후였다. 황후는 때와 장소에 맞는 옷을 입어야 했고, 장신구 하나에도 격식이 있어야 했다.

‘황후 폐하, 산책하실 시간입니다.’

디아나가 유일하게 좋아하는 시간이었다. 오전의 모든 일과를 마치고 점심 만찬이 끝난 후, 시녀장이 판단하기에 햇빛이 너무 따갑거나 날씨가 나쁘지 않으면서, 오후의 일정에 무리가 없을 때만 정원을 산책하라는 권유를 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