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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을 끝까지 읽었어야 했다-12화 (12/184)

12화

공작저로 돌아온 디아나는 좀처럼 마음이 가라앉지 않았다. 식사도 먹는 둥 마는 둥 했고, 온통 생각이 에드윈과의 밀회로 쏠려 있었다.

샬롯이 그런 디아나를 걱정했지만, 디아나는 오히려 피곤하다는 핑계로 고용인을 물렸다. 그리고 홀로 침실에 남자 조용히 창문을 열었다. 아직은 싸늘하지 않은 밤바람이 살랑이며 디아나의 머리카락을 흩트렸다.

“아, 촛불…….”

이미 방에 촛불은 켜 뒀지만, 혹시나 에드윈이 찾지 못할까 걱정이 됐다. 디아나는 일부러 창가 바로 앞의 탁자로 초를 옮겼다. 고용인들의 눈치가 있어 잠옷으로 갈아입긴 했지만, 그 위에 가운을 걸치고 단단히 여몄다. 그래도 시간이 잘 가지 않았다.

“밤이라는 건…… 정확히 언제지?”

지금도 캄캄했다. 하지만 에드윈은 밤이라고만 했지, 언제라고 하진 않았다. 기약 없는 기다림에 디아나는 잠도 오질 않았다.

물론 이 만남은 비밀스러워야 했고 세간의 이목을 끌어선 안 됐다. 밀회가 필요한 것은 이성적으로 봤을 때 정당했다.

“굳이…… 밤에 침실이어야 하나.”

디아나가 괜히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남이 보지 않을 때 몰래 만나면 되는 거지만, 에드윈은 굳이 한밤중에 창문을 통해 디아나의 침실로 오겠다고 선언했다.

그것은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이 시대에 어둠을 틈타 영애의 침실을 넘는 것은 꽤 깊은 의미가 있었다.

“아냐. 이제 겨우 만났는걸.”

더 이상한 생각이 들기 전에 디아나가 자신을 타일렀다. 첫 만남에서 자신을 보던 에드윈의 눈빛을 본 순간 디아나도 무언가를 느꼈다.

그때 에드윈의 시간은 정지한 것 같았다. 바닥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깊은 그의 눈동자에 오직 디아나 자신만이 각인됐다. 책에서 수도 없이 나오는 소위 ‘첫눈에 반했다’라는 것을 디아나는 그때 처음 실제로 봤다. 그렇게 강렬한 운명은 보는 순간 저절로 알게 되는 것이었다.

똑똑.

열린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디아나는 상념을 끊고 창가로 다가갔다.

“쉿.”

낮은 목소리만 들어도 에드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는 대체 어떻게 온 건지 디아나가 놀라지 않도록 여유 있게 노크까지 한 후에, 훌쩍 그 커다란 몸을 가볍게 놀려 창가를 넘었다. 창문을 닫은 후 얼떨떨한 표정의 디아나를 보는 에드윈이 또 짙은 미소를 머금었다.

“정말로…… 오셨군요.”

“난 약속은 반드시 지킨다.”

그 말에 믿음이 갔다. 그의 눈을 보고 있으면 절로 그런 확신이 들었다.

“침실 문은 잠갔나?”

“네…… 혹시 몰라서. 고용인들에게도 일찍 쉬겠다고 했어요.”

에드윈이 고개를 끄덕였다.

“잘했다.”

그 눈빛에 묘한 기색이 어린 것은 기분 탓일 거다.

“이건 아무도 모르는 비밀이니까.”

유독 낮은 목소리로 말하는 비밀은 디아나의 가슴 한구석을 간질였다. 디아나는 손짓으로 에드윈에게 자리를 권했다. 괜히 어색한 기분이 들어서다.

에드윈은 디아나를 빤히 보고 싶은 만큼 응시하다가 느긋하게 자리에 앉았다. 가까이서 제대로 보자 그의 훤칠한 체격이 훨씬 돋보였다.

“날 위해 준비한 건가?”

“……네.”

테이블 위의 차를 보고 한 말이었다.

“고맙게 마시지.”

에드윈의 긴 손가락이 유연하게 찻잔을 들었다. 차를 머금는 그의 행동 하나하나에서 귀족적인 풍모가 풍겼다. 다만 평소 디아나가 알던 것보다 찻잔이 무척 작아 보이는 것이 신기했다.

“그럼, 영애의 기도에 대해서 들어 볼까.”

흑안에 호기심과 알 수 없는 감정 몇 가지가 함께 서렸다. 디아나도 차를 한 모금 머금은 후에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전 황태자비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여전히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모르겠지만, 에드윈에겐 그 어떤 말재주보다 솔직하게 다가가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 전 황태자 전하를 알현했을 때도 그 말씀을 드렸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더군요.”

“루카스 전하에게 그 이야기를 했다고?”

“네.”

디아나가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도 이 자리에서 멀쩡히 살아 있다니, 에드윈은 속으로만 경악했다. 루카스의 성정을 고려하면 아마 디아나가 무척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그 생각까지 미치자 에드윈은 알 수 없는 감정이 불쑥 치솟는 것을 느꼈다. 여태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었다. 어쩐지 안달이 나고 루카스를 향해 적대심이 일었다. 자신에게 그럴 자격은 없었으나, 그것은 이미 중요하지 않다는 듯이.

“그대의 각오는 알겠다.”

하긴, 보통의 각오로는 에드윈에게 그런 말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황태자비로 간택된 것은 그저 한없이 영광스러운 일이지, 감히 디아나가 의견을 제시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유는?”

에드윈은 단순하게 반문했다. 디아나는 천천히 숨을 고르고 입술을 열었다.

“제 불행한 미래를 봤기 때문입니다.”

디아나에게 있어 가장 정직한 답이었다. 에드윈은 그 답을 다른 방식으로 받아들였지만, 그것도 사실이었다.

“상대가 루카스 전하라서?”

“그 이유가 가장 큽니다.”

“루카스 전하에 대해서 잘 아나?”

디아나는 대답 대신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엔 차마 말로 담을 수 없는 회한이 스쳤다.

루카스의 곁에서 황후로 보냈던 2년의 세월은 지울 수 없는 흉터를 남겼다. 기계적으로 자신을 범하던 루카스, 디아나에게 인간의 감정이 있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은 루카스, 그런 주제에 트리샤를 보며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미소를 지으며 디아나의 영혼을 살해했던 루카스.

“표정을 보니, 나만큼 잘 아는 것 같군.”

에드윈은 쉽게 수긍했다. 그도 루카스라는 인간을 잘 알고 있었다. 누가 됐든, 루카스의 반려는 행복해질 수 없을 것이다. 루카스는 제 반려를 행복하게 해 줄 위인이 아니었다. 그에겐 태생부터 인간적인 면모가 부족했다. 그것은 가르치거나 달라질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결과적으로 그 생각은 맞다. 황태자비는 행복해질 수 없다는 데 동의하지.”

“전 평화로운 삶을 보내고 싶습니다. 그게 제가 바라는 전부입니다.”

디아나가 차분하게 말했다. 에드윈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고요한 푸른 눈동자에 어울리는 삶이었다. 무엇보다 이미 만나게 된 이상, 이런 디아나를 루카스의 곁으로 보내는 게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아름답고 차분한 영애는 루카스에게는 너무 과분한 상대다.

“나의 대공저는 조용한 곳이다. 평화로운 삶을 보내기 충분하지.”

에드윈의 진심이 비어져 나왔다. 어떻게든 황실과의 결혼만 무를 수 있다면, 에드윈이 디아나를 가질 작정이었다. 그 정도 결심이 아니고선, 오늘 이곳에 올 수 없었다.

“저는…….”

“대답은 그때 해도 좋다고 했다.”

디아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에드윈은 찻잔을 소리 없이 내려놨다.

마침 테이블 위에 두 사람의 손이 모두 올려져 있었다. 그 거리를 좁히는 것은 간단했다. 에드윈은 살짝 팔을 뻗어 디아나의 손을 쥐었다.

디아나가 놀란 눈으로 에드윈을 봤지만, 그의 체온을 뿌리칠 정도는 아니었다. 무엇보다 크고 따스한 그의 손이 자신의 손등을 전부 덮자, 그동안 누구에게도 기댈 수 없었던 마음이 안정되는 것이 느껴졌다.

“그대는 솔직한 사람이군. 난 그게 좋다.”

“전하도…… 솔직한 사람이기 때문인가요.”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에드윈은 묘한 대답을 흘리며 손끝으로 디아나의 손가락을 가만히 만지작거렸다. 작고 여린 손은 예상보다 차가워서 마음 한편으로 안쓰러운 생각이 들었다.

“방법은 이제부터 찾아보겠다. 어떤 방법이든…….”

“저도…… 생각해 볼게요.”

이야기가 끝날 무렵인데도, 에드윈은 디아나의 손을 놓지 않았다. 오히려 더 완전히 디아나의 손을 감싼 채였다.

“전하…….”

약간 당혹감이 서린 디아나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그의 검은 눈이 진득하게 디아나를 응시했다. 그러자 디아나도 어쩐지 말을 잊어버렸다.

“거절하고 싶으면 언제든 뿌리쳐도 좋다.”

이 한마디엔 큰 의미가 있었다. 에드윈과 루카스가 결정적으로 다른 부분이었다. 루카스는 복종을 강요했고, 에드윈은 디아나의 마음을 원한다. 그는 디아나가 제 손을 뿌리치는 것보다, 억지로 참고서 견디는 것이 더 싫었다.

“기억……해 두겠습니다.”

“그래.”

에드윈의 입가에 미소가 피었다.

“그대의 이야기를 들었으니, 내 이야기를 해 볼까.”

디아나는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직 밤은 깊었고, 그에 대해서 알고 싶었다. 그 책에서 존재하는 디아나의 첫사랑으로서가 아닌, 지금의 디아나에게 다가온 에드윈이란 남자에 대해서.

“난, 아무래도 그대에게 첫눈에 반한 것 같다.”

아무리 저돌적인 에드윈이지만, 이 순간 디아나는 진심으로 놀랐다. 그 놀라움이 고스란히 푸른 눈동자에 전해져서 이채가 일었다. 에드윈에겐 그 모습조차 사랑스러웠다.

“전하, 우린 아직…….”

“그래, 오늘 만났지. 하지만 난 이 감정을 달리 정의할 수 없다.”

에드윈의 다부진 입가가 확신을 더욱 굳히고 있었다.

“나는 그대에게 구애할 작정이다.”

깜박, 디아나의 속눈썹만이 움직였다.

“그대가 내게 올 때까지, 계속할 거다.”

“전하께 해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한다. 내 몸 하나 건사하지 못할 한심한 이로 보이는가?”

“아뇨.”

에드윈이 디아나의 손을 살짝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오랫동안 잡고 있던 손에 온기가 적절히 배었다. 이 접촉이 더는 낯설게 느껴지지 않았다.

에드윈은 거부하지 않는 디아나를 잠시 보다가 손을 끌어서 제 입술에 갖다 댔다. 곧 에드윈의 입술이 디아나의 손등에 닿았다. 부드러운 입술의 감촉이 손등에 닿자, 디아나의 눈동자에 동요가 일었다.

하지만 끝내 뿌리치진 않았다. 오히려 디아나의 뺨에 장밋빛의 혈색이 돌았다. 심장이 쿵쿵, 일정한 간격으로 세차게 뛰었다.

“디아나.”

그가 이름을 부르자, 손등에 닿은 입술이 움직이며 숨결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에드윈은 고개를 들어 디아나의 손을 더 끌어당겼다. 그러다 쉬이 좁혀지지 않는 간격에 답답했는지, 직접 몸을 일으켜 디아나의 코앞에 섰다.

디아나는 그런 에드윈을 올려다봤다. 손을 놓은 에드윈은 살짝 디아나의 뺨을 감쌌다. 그 손이 어찌나 컸는지, 디아나의 반쪽 얼굴이 다 파묻힐 정도였다. 어딘지 안심이 되는 온기였다.

“난, 이제 그대에게만 사랑을 구할 것이다.”

에드윈은 제 마음의 연인으로 디아나를 택했다. 디아나는 무슨 답을 해야 할지 망설였다.

에드윈은 한번 제 마음을 확인한 순간, 두 번 생각하지도 않고 그대로 디아나에게 돌진하고 있었다. 마치 사냥감을 포착한 맹수처럼 끝을 볼 때까지는 단념하지 않을 집념이 느껴졌다.

“내가 혹시 그대를 두렵게 하는 건가.”

“아뇨, 전 전하가 두렵지 않아요.”

디아나는 정말로 두려운 것이 뭔지 이미 알고 있었다. 에드윈은 저돌적으로 틈을 주지 않고 디아나에게 다가왔지만, 그 시선엔 항상 뜨거운 체온과 진심이 배어 있었다. 무엇보다 그는 디아나에게 언제든 거절하라는 말을 미리 주었다.

“이래도?”

에드윈이 상체를 숙였다. 디아나의 코앞에 에드윈의 반듯한 이목구비가 놓였다. 그의 더운 숨결이 바로 뺨에 느껴졌다. 디아나는 순간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가슴이 얼마나 뛰는지 곧 터질 것 같았다. 그러나 눈을 감진 않았다. 에드윈의 눈동자에 담긴 감정을 보고 싶었다.

“네…….”

분홍빛 입술에서 수줍은 답이 흘렀다.

“그렇다면, 이건?”

입술이 거의 닿기 직전이었다. 디아나가 답을 하려 입을 열면 그대로 스칠 것 같은 거리다. 디아나는 대답 대신 그저 눈을 감았다. 그러자 에드윈의 입가에 짙은 미소가 배었다.

에드윈은 망설이지 않고, 그대로 디아나의 입술에 제 입술을 맞췄다. 부드럽고 따스한 촉감이 서로의 입술에 닿았다. 에드윈은 그 상태에서 살짝 입을 벌리고 더 깊은 입맞춤을 시도하려 했다.

똑똑.

그 순간 야속하게도 노크 소리가 들렸다. 화들짝 놀란 디아나가 저도 모르게 에드윈의 어깨를 밀어냈다.

“아가씨, 아직 안 주무세요?”

샬롯의 목소리였다. 디아나가 다급한 눈짓을 하는데도 에드윈은 어째서인지 여유가 있는 것 같았다. 에드윈은 아쉬운 듯 디아나의 입술을 보다가 그녀의 귓가에 바싹 다가섰다.

“내일 밤, 또 오겠다. ……나머지는, 그때.”

디아나의 뺨이 붉어졌다. 그러나 두 번째로 노크가 울렸다.

“아가씨? 들어갈게요.”

“잠, 잠깐만!”

당혹스러운 말을 뱉은 디아나가 뒤를 돌아봤을 때, 에드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후였다. 열린 창문 사이로 커튼만이 펄럭이고 있었다.

“아가씨, 안 주무시고 뭐 하세요. 어머…… 창문은 다 열어 두시고.”

샬롯의 목소리가 멀리 들렸다. 에드윈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는데 아직도 가슴이 쿵쾅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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