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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을 끝까지 읽었어야 했다-11화 (11/184)

11화

이 만남은 우연이었다. 적어도 에드윈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이 또한 그 책의 큰 흐름이라는 것을 디아나는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용기를 내서 제 본심을 말했다.

에드윈은 잠시 말이 없었다. 그저 검은 눈동자로 디아나를 응시했다. 그 바닥을 헤아릴 수 없는 깊은 흑안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나는.”

에드윈은 말을 꾸미는 법이나 본심을 숨기는 법을 잘 몰랐다. 아니, 알았다고 해도 디아나 앞에서 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어째서인지 그게 운명이라는 느낌이 드는군.”

그의 진심은 낮고 뜨겁게 귓가를 울렸다. 한 자락, 안도의 마음과 가느다란 희망이 보였다.

“그리고 그대를 도울 사람이 바로 나라는 것을 확신한다.”

에드윈이 디아나를 똑바로 응시했다. 이유를 늘어놓는 것은 나중이어도 된다. 그러나 지금 에드윈의 가슴에 각인되듯 꽂힌 굳건한 확신은 바로 이 순간에만 전할 수 있었다.

“전하를 보내 주신 신께 감사드려요.”

그건 에드윈도 마찬가지였다. 디아나를 만나지 않았으면 절대 느낄 수 없는 감각이었다. 반드시 이 여자여야 한다. 디아나가 아니라면, 다른 누구도 마찬가지였다. 그랬다면 에드윈은 평생 누군가를 사모하는 마음을 깨닫지 못했을 거다.

“나도 마찬가지다.”

에드윈이 손을 뻗어 디아나의 한 손을 조심스레 잡았다. 다소 뜨거운 체온이 맨살에 닿자 그의 박동하는 생명력이 물씬 느껴졌다. 기다란 손가락은 반듯하게 뻗어 있었고 마디가 제법 굵은 남자의 손이었다.

“내 확신은 틀리지 않아.”

그것은 에드윈이 타고난 성정이자 인생이었다. 그는 결정이 빨랐고, 그것을 번복하는 일이 없었다. 그의 운명은 모두 때가 되면 절로 알 수 있는 것들이었다. 고귀한 신분과 스물의 나이에도 그에게 반려가 없는 까닭이었다.

“그리고 내겐 그 확신을 실현시킬 의지가 있지.”

에드윈은 제국에서 유일하게 황태자란 신분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였다. 대공으로서 그는 어엿하게 자리를 잡았고, 미성숙한 루카스는 내궁에 갇힌 채로 의회에도 나서 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체스터 대공가는 대대로 제 의지를 관철하라는 가르침을 내렸다. 그 상대가 누구라 해도, 대공가의 주인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가져야 했다.

“그대의 기도가 이루어진다면, 내게 올 수 있나.”

무척이나 직설적인 요구였다. 그러나 디아나는 전혀 놀라지 않았다. 이미 그의 눈빛과 체온이 아까부터 그리 말하고 있었다. 에드윈이 처음으로 자신을 보던 시선에서부터 시작된 감정이었다.

“기도가 이루어진다면…….”

디아나가 말을 흐리며 살짝, 에드윈에게 잡힌 손을 빼냈다. 에드윈의 입가에 약간 아쉬운 미소가 서렸다.

“그때 가서 결정해도 좋다. 난, 그대가 내게 오도록 할 자신이 있으니.”

확신에 찬 에드윈의 눈매가 깊고 강인했다. 디아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에드윈의 미소가 한층 짙어졌다.

“그럼, 이제 기도의 이유를 들어 볼까.”

에드윈이 대담하게 접근했다.

“그래야 내가 그 기도를 실현시킬 방법을 찾을 수 있을 테니.”

디아나가 이 상황을 빠져나갈 돌파구가 바로 눈앞에 있었다. 아직 그 젊은 생이 끝나지 않은 에드윈이었다. 디아나는 그 죽음을 막을 것이다. 그리고 에드윈은 디아나의 기도를 들어주면 된다.

***

그 무렵, 디아나가 미처 예상하지 못한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

지금의 디아나는 원작의 내용을 일부밖에 몰랐다. 그조차도 끔찍한 꼴을 더 보기 싫어서 죽음을 앞당겨 버렸다. 뭐, 디아나의 죽음까지는 확실히 내용을 알고 있었기에 더 버틸 의지가 없었던 것도 컸다.

“카를 공작부인, 또 이렇게 번거로운 걸음을.”

“선대공비 전하를 뵙는 것은 제 기쁨이지요.”

우아하고 인자한 선대공비의 말에 실비아가 무릎을 살짝 굽혔다.

사실, 디아나가 순서대로 제 죽음을 기다렸다고 해도 이 부분까지 알 수는 없었다. 이것은 책에 적히지 않은 부분이자 보이지 않는 흐름이었다.

“어찌, 기침은 좀 나아지셨나요?”

실비아가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안부를 물었다. 대공저 특유의 고풍스러운 실내 장식을 배경으로 선대공비 그레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전에 기침에 좋다는 차를 얻어서 가져왔답니다.”

“또, 그런 선물을…….”

체스터가는 제국 유일한 대공가였다. 아무리 카를가가 유구한 귀족가이며 공작위를 갖고 있어도 대공가엔 비할 수가 없었다.

제국의 수도에선 대공이었지만, 체스터가의 영지에 가면 왕이 되는 위치였다. 즉, 하나의 왕국을 가진 것이나 다름없었다. 비록 그 당사자인 대공이 일찍 유명을 달리해서 어려움이 컸지만, 선대공비는 에드윈이 장성할 때까지 체스터 대공가의 인장과 권리를 지켜 냈다.

“카를 공작부인은 참으로 섬세하군, 그래.”

대공이 없는 대공가를 지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세월이 고스란히 선대공비의 눈동자에서 고요하게 빛나고 있었다.

선대공비에겐 아들인 에드윈이 있었고, 본인도 현 황후의 친언니였다. 외척으로 득세하는 가문과 아직도 큰 권력을 휘두르는 아버지가 있어서 간신히 지켜 낸 권력이었다. 그것도 이제 에드윈이 장성했으니 안심할 수 있었다.

“부디 사양치 말아 주세요. 전 전하와 함께 차를 나눌 수 있는 것만으로도 무궁한 영광입니다.”

실비아는 꽤 야망이 있는 여자였다. 정무는 물론 학문 외엔 그 어떤 것에도 무심한 남편과는 달리 가문의 영달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이번에 저희 가문의 디아나가 황태자비로 간택되는 영광, 모두 전하의 보이지 않는 자비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비단 선대공비만이 아니었다. 디아나가 황태자비 후보로 자리매김을 한 데는 실비아의 물밑 활약이 크게 작용했다.

“디아나 영애에게 자격이 있었을 뿐, 내가 무얼 했다고. 카를가라면 유구한 명문가에, 듣기로 디아나 영애는 무척 아름답다지?”

“예, 제 조카딸이라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로 심성이 곱고 아름다운 아이지요.”

선대공비가 고개를 끄덕이자 실비아가 조심스레 눈치를 살폈다.

“그래도 어찌 황실 웃전의 눈에 찰까 싶어서 염려됩니다.”

“좋은 영애라 하지 않았나. 카를가의 여식이니 훌륭한 황태자비가 될 거다.”

“그리 어여삐 봐 주신다면 다행이지만요……. 황태자 전하와 두 분 폐하께서도 그리 봐 주실지 모르겠습니다.”

실비아가 수줍은 듯이 입을 가리고 웃었다. 그 말의 뜻을 읽지 못할 그레이스는 아니었다.

“뭐…… 나는 모르네만.”

그레이스가 천천히 입을 뗐다. 실비아의 온 촉각이 그레이스의 다음 말을 향했다.

“황후 폐하는 카를가라면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하시니.”

“어머, 그런 영광이!”

실비아의 안색이 대번에 환해졌다. 그레이스는 그런 실비아를 묘한 눈빛으로 보며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마음에 드셨으니 간택을 하신 게 아니겠나.”

“제가 괜한 걱정을 했군요.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어차피 황후는 정략적으로 디아나를 택했다. 카를가만큼 유구한 명문가도 드물었고 디아나가 아름다운 영애인 것도 사실이었지만, 절묘하게 부모가 세상을 떠났다는 점이 가장 큰 메리트였다. 물론 그 부모의 역할을 대신 꿰찰 욕심을 품은 실비아는 모르는 속내였다.

“가여운 조카를 생각하는 마음이 오죽하겠는가.”

“너른 마음으로 이해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실비아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저어, 약소하지만…… 차와 함께 시종장에게 전한 것이 있으니 나중에 봐 주시어요.”

“또! 내가 받기만 하는 게 마음이 편치가 않아.”

“아닙니다. 그러시면 제가 너무 민망해집니다.”

그레이스는 손사래를 치면서도 더 만류하지 않았다. 온화하고 자애로워 보이는 이 선대공비도 과연 황후의 혈연이었다. 계산으로 따지면 눈앞의 실비아 따위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것이다.

그리 내키는 일은 아니었지만, 대공가를 꾸려 가는 데 실비아 같은 눈먼 자들의 돈이 무척 도움이 되긴 했다. 어찌 됐건, 돈은 많을수록 좋으니까.

“곧 제국의 경사가 있겠군.”

“예, 카를가의 영광입니다.”

실비아는 디아나가 입궁하기도 전에 자리매김하기 위해서 오만 곳에 줄을 대고 있었다.

“다만, 가여운 디아나는 어릴 때 선친을 잃어서…… 입궁 후에 잘 할 수 있을지 걱정입니다.”

드디어 본론이 나왔다.

“그대 같은 숙모가 있으니, 후견인으로서 모자라지 않지.”

“제가…… 황태자비의 후견인이 될 수 있을지, 이런 선례가 없던 터라서 전하의 지혜를 구하고 싶었습니다.”

그레이스는 쓴웃음을 삼켰다. 어차피 그걸 목적으로 찾아왔으면서 모르는 체하는 모습이 가소로웠다.

“디아나 영애가 몇 살이지?”

“열일곱입니다.”

“루카스 전하와 같군.”

제국에서 이미 성인으로 인정하는 나이였다. 만일 디아나가 황실과 혼인하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귀족과 혼인했어도 저리 정성으로 후견인을 자처했을지, 우습단 생각이 들었다. 공작부인이 하고 싶은 것은 후견인이 아니라 그 명분으로 황실과 사교계를 누비는 것이겠지.

“이제 성인이기는 하나, 저택에서만 자란 디아나라서 아무래도 저어되옵니다.”

“그럴 수도 있겠군. 조만간 입궁하면 황후 폐하께 말씀드려 봐야겠다.”

그레이스의 말에 실비아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게 바로 오늘 만남의 목적이었다.

“선대공비 전하의 자비에 감사드립니다.”

“우리 사이에 그 정도야…….”

실비아는 연신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당사자인 디아나는 선대공비와 실비아의 은밀한 거래를 까맣게 모르고 있었다. 이내 만족한 실비아가 돌아가자마자 혼자 남은 선대공비가 낮게 읊조렸다.

“벌써 욕심이 덕지덕지 붙었군.”

실비아는 영악했지만, 황후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애초에 디아나를 고른 이유도 외척의 득세를 막기 위함인데 숙모 따위가 무슨 힘을 쓰겠는가. 실비아의 욕망은 허무하게 무너질 거다. 디아나를 이용했지만, 그 덕은 볼 수 없는 것이다.

“과연 황태자비가 되는 게 그 영애에게도 행복일까.”

선대공비는 권력의 중심에서 다투는 여인의 삶이 얼마나 척박한지 잘 알고 있었다. 자신이 자랐던 반 테스 가문도 권력에 혈안이 되어 두 딸을 모두 정략적으로 혼인시켰다.

본래 명문가의 여식이란 그런 용도였다. 그레이스는 제게 딸이 없다는 사실이 어쩌면 다행이라고도 여길 정도였다.

“그것도 하필, 상대가 루카스 전하라니.”

그레이스의 말에 가시가 있었다. 어떤 결혼은 시작하지 않아도 그 불행을 짐작할 수 있었다. 지금 디아나의 처지가 그랬다.

“가엾은 일이야.”

여느 때보다 조금 더 쓸쓸한 석양이 대공저에 드리웠다. 하루가 저물고 있었다.

***

디아나는 에드윈에게 무슨 말을 먼저 해야 좋을지 가늠하기 어려웠다. 주어진 시간은 한정적이었고, 조금 있으면 예배당을 떠나야 했다. 겨우 몇 마디로 제 의지를 전할 수는 없었다.

“전하, 그 이야기는 이곳에서 다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그도…… 그렇군.”

에드윈도 고개를 끄덕였다. 쉬이 나눌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대로 자리에서 일어서려니 무척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이제 막 만난 인연이었다. 지금 에드윈의 눈에는 디아나의 모든 숨결과 몸짓이 새로웠다. 그것을 눈에 담기에도 부족한 시간이었다.

“영애의 침실은 몇 층이지?”

“예?”

디아나의 눈동자에 의아함이 서렸다.

“2층입니다만.”

“그 정도는 가뿐하지.”

에드윈이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그러고는 불쑥 디아나에게 다가왔다. 순간적으로 그의 체취가 훅 짙어졌다. 에드윈의 입술이 거의 디아나의 귓가에 닿을 것처럼 느껴졌다.

“창문을 열어 두고, 촛불을 켜 놓도록.”

나직한 목소리가 디아나에게 속삭였다.

“오늘 밤, 찾아가겠다.”

다시 에드윈이 멀어졌다. 디아나의 눈을 보는 그의 흑안은 진심이었다. 그는 눈을 동그랗게 뜬 디아나를 보며 안심을 시키려는 듯 씩, 미소를 머금었다.

오늘 밤, 밀회가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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