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시녀장의 지시 아래, 선임 시녀 몇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트리샤는 벗은 몸에 한기가 들었지만, 매서운 눈초리에 팔을 끌어안을 수도 없었다. 필요한 신체검사는 다 끝난 줄 알았는데 영문을 모를 상황이었다.
“어디…… 트리샤 블랑.”
어느새 트리샤의 차례가 됐다. 서로 간격을 두고 멀찍이 선 탓에 나머지 신입 시녀들에게 정확히 뭘 하는지 보지 못했는데, 곧 그 호기심이 해결됐다. 시녀장은 손에 든 기다란 막대기로 푹, 트리샤의 젖가슴을 찔렀다.
“앗!”
깜짝 놀란 트리샤가 외마디 소리를 냈지만, 시녀장은 아랑곳 않고 뭔가를 기록했다.
“손 치워.”
부끄러워 음부를 가린 손을 막대기가 걷어 냈다.
“왜, 이런 걸…….”
“다 이유가 있으니까 하는 거다.”
시녀장이 트리샤의 의문을 묵살했다. 재차 막대기가 트리샤의 손을 쳤다. 하는 수 없이 손을 치우자 붉은 음모가 드러났다. 이내 시녀장은 트리샤의 뒤로 돌아서 엉덩이를 한 번 더 찌르더니 또 뭔가를 기록했다.
“하, 특이점은 붉은 머리카락 정돈가.”
“만일 ……가 안 되면 다시 뽑아야 할 수도 있겠어요.”
저들끼리 소곤거리며 이야기하는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이제 하나만 더 확인하고 끝내겠다.”
시녀장이 모두의 앞에 섰다. 다른 시녀가 의자 하나를 가져와 책상과 간격을 둔 채로 뒀다. 미묘한 위치였다.
“하나씩 여기 와서 앉아. 거기, 빨간 머리부터.”
트리샤가 머뭇거리며 의자에 앉았다. 엉덩이의 맨살에 딱딱한 의자의 느낌이 닿는 것이 기묘했다.
“책상에 표시대로 한 발씩 올려라.”
“……네?”
확실히 책상엔 두 개의 표시가 있었다. 하지만 그대로 발을 올렸다간 벌어질 광경이 선했다.
“어서. 아니면 체벌을 받고 출궁하겠느냐?”
“아, 아뇨…….”
트리샤가 수치심에 눈을 감은 채 한 발씩 더듬거리며 책상 위에 올렸다. 그러자 다리가 벌어지며 음부가 훤히 드러났다.
장갑을 낀 선임 시녀가 망설이지도 않고 트리샤의 음부를 벌렸다. 배려라고는 한 톨도 없는 기계적인 움직임이었다. 앗, 소리를 지를 틈도 없이 도톰한 음부의 살을 벌려서 질구 안쪽을 확인한 시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통과. 다음, 오도록.”
그때 트리샤는 무엇을 통과한 것인지 알지 못했다. 새로운 시녀를 뽑은 이유도, 그중에서 일부러 몇 명을 골라내서 이곳으로 배치한 이유도 몰랐다. 이 방에 모인 신입 시녀들은 하나같이 출신이 한미하다는 공통점이 있다는 것도 모르는 채였다.
이 방의 새로운 시녀들을 선발한 덴 특별한 목적이 있었다. 아까 스스럼없이 옷을 벗은 소녀들은 그것을 잘 알고 있었다. 어차피 트리샤를 포함한 나머지도 곧 알게 될 것이었다.
***
루카스는 시큰둥한 표정으로 차를 한 모금 마셨다.
“에드윈.”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맞은편의 에드윈을 응시했다. 창문으로 햇빛이 쏟아지고 있었지만, 에드윈의 건장한 체격이 드리우는 그늘이 루카스를 가리고 있었다.
“예, 전하.”
스물의 젊은 대공은 사적으로 루카스의 이종사촌이기도 했다. 어릴 때부터 루카스가 접할 수 있는 유일한 또래기도 했다.
그러나 둘의 혈연이 무색하게 생김새는 크게 달랐다. 루카스가 밝은 금발에 에메랄드빛 눈동자의 전형적인 황실의 특징을 갖고 있다면, 에드윈은 새카만 머리카락에 바닥을 가늠할 수 없는 깊은 흑안을 갖고 있었다.
“뭔가 즐거운 건 없나?”
“전하의 국혼…… 같은 거 말입니까.”
“끔찍한 소리.”
루카스가 눈썹을 찡그렸다. 황실은 따분하고 지겨운 것투성이였다. 국혼 준비가 시작되자 더 그랬다. 답답한 마음에 에드윈을 불렀지만, 이미 어엿하게 성장한 대공인 에드윈에게서 흥밋거리를 찾을 수는 없었다.
“가끔은 그대가 부럽군.”
에드윈은 올해로 스물이 됐다. 고작 세 살 차이였지만, 어릴 때부터 루카스보다 훨씬 훤칠했던 에드윈이다. 그것은 성인이 되어서도 바뀌지 않았다. 에드윈은 날이 갈수록 훤칠한 키와 무예를 닦으며 건장한 체격을 과시했다. 그에 비해 루카스는 선이 가는 미소년에 가까웠다.
“그럴 리가요.”
목소리조차 에드윈 쪽이 듣기 좋은 저음이었다. 그의 낮은 목소리에선 남자의 냄새라는 것이 물씬 풍겼다.
“어땠습니까, 전하의 비가 될 영애는.”
“그저 그랬다. 아, 무척 불손하고 오만하더군.”
그렇게 말하면서도 루카스의 표정에 노기는 없었다. 그제야 에드윈은 황태자비가 될 영애에 대해 호기심이 들었다. 저런 평가를 내리면서도 살짝 입꼬리를 올린 루카스를 보니 카를가의 영애가 절세미인이라는 소문이 사실인 것 같았다.
“하지만 아름다웠군요?”
“……내 비가 되려면 당연한 소양이다.”
루카스는 부정하지 않았다. 그의 오만한 성정과 까다로운 취향을 생각하면 굉장히 후한 평가였다. 실제로 루카스에게 디아나는 무척 강한 인상을 남겼다.
정말 이상한 영애였다. 햇살 아래에서 빛으로 일렁거리는 머리카락이 무척 예뻤고, 얼굴도 장인이 빚은 인형처럼 도도했다.
루카스는 디아나를 보자마자 어릴 적 동화책에서 본 공주님을 떠올렸다. 감히 제게 대들던 디아나의 푸른 눈동자가 아직 선명했다. 루카스는 그 순간만큼은 자신이 황태자가 아닌 평범한 열일곱의 청년이 된 기분이 들었다. 지루했던 일상의 짜릿한 자극이었다.
“따분하진 않았다.”
발칙한 디아나의 태도를 떠올리는 루카스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새로운 장난감을 고대하는 소년의 표정이었다.
“오만했다면서요?”
“그런 건 입궁하면 고쳐진다.”
황족 특유의 권위적인 말이었다. 에드윈은 살짝 미소를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 일찍 작고한 부친의 자리를 대신해 대공이 된 에드윈에겐 미성숙한 루카스의 마음을 공감하기 어려웠다.
황후는 어려서부터 병치레가 잦았던 루카스를 황실에 가둬 과보호했고, 에드윈은 어릴 때부터 기사들과 침식을 같이하며 산과 들을 헤집고 다녔다.
“그보다, 그대는 나날이 체격이 커지는 것 같군.”
“더 자랄 나이는 아닙니다만.”
그 탓인지 둘은 우선 체격부터가 달랐다. 에드윈은 군중 속에 섞여도 눈에 띌 정도로 큰 키와 너른 어깨, 어지간한 기사도 제압할 정도로 탄탄한 근육을 자랑했다.
대신 루카스는 미려함을 자랑하는 미소년에서 청년으로 성장했다. 한마디로 에드윈과 루카스는 전혀 다른 타입이었다. 그런데도 루카스는 자기가 갖지 못한 에드윈의 면모를 탐내곤 했다.
“내 국혼이 끝나면, 그대 차례인가?”
“글쎄요, 전 아직 결혼에 대해선 그리 생각이 없어서.”
에드윈은 아직도 기사단원들과 어울리며 무예에 시간을 쏟는 걸 즐겼다. 어릴 때부터 연회 같은 건 질색을 하던 그다웠다. 아직 여인의 향기를 느낀 적도 없었다.
스무 살의 에드윈은 더 넓은 세상을 보고 대공으로서 자리를 확고히 하는 데 몰두하고 있었다.
“그래도 재미는 보고 살겠지? 신분을 막론하고 여인들이 그대에게 몸을 던져 댄다던데, 그 이야기를 해 봐라.”
“예?”
“발뺌할 생각 말고, 어서 해 보래도.”
“하고 말 것도 없습니다.”
“흐음, 내 들은 게 적지 않거늘.”
물론 에드윈은 하루가 멀다 하고 유혹에 시달렸다. 개중에는 노골적인 시선으로 서툰 유혹을 보내는 영애도 있었고, 농밀한 여인의 향취를 풍기며 에드윈에게 은근한 추파를 던지는 귀족부인들도 있었다. 시녀나 하녀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들은 틈만 나면 누가 봐도 작위적인 우연을 가장해서 몸부터 들이대고 봤다. 물을 뒤집어쓴 채로, 제 젖가슴을 꾹 누르며 다가올 때의 당혹감이란.
“사교계엔 원래 스캔들이 따라붙기 마련이죠. 전 딱히 여인에게 흥미가 없습니다.”
“그런 사내도 있나? 수도자가 아니고서야.”
픽, 루카스가 실소를 뱉었다. 에드윈은 다소 억울했지만, 피곤하게 반박하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오늘 그대를 입궁하라고 한 것은, 물어볼 것이 있어서다.”
“하문하십시오.”
겨우 곤란한 화제에서 벗어났다고 생각한 순간, 루카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여인을 안을 때 말이다.”
루카스의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호기심으로 빛났다.
“아, 물론 이론적인 것은 나도 다 안다.”
모순적이지만, 귀족가의 영식보다 스캔들의 기회가 적은 것이 황태자였다. 특히 지금의 황후는 무척 서슬이 퍼렇게 황태자궁을 감시했으니 감히 루카스에게 다가올 여인이 없었다. 즉, 실전은 아직이었다.
“어떤가? 실제로는.”
“그러니까 전 모른다고…….”
“집어넣어야 하는 구멍은 예상보다 아래에 있다던데.”
에드윈의 답은 들리지도 않는지 루카스는 제 할 말만 했다. 노골적인 말에 에드윈은 살짝 불편한 기색을 비췄지만, 이 화제를 돌릴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적당히 희롱하면 젖는 모양이지만, 굳이 그럴 필요는 없다고 했다. 일단 넣고 나면 본능적으로 몸이 움직이고, 파정을 하게 될 거라고 말이다.”
“아, 예…… 그럴 겁니다.”
다소 무성의한 대답이었다.
“다른 것과 비교할 수 없는 특유의 쾌감이 있다던데, 사실인가?”
“그것은…… 곧 전하께서 직접 알게 되실 테니.”
“하긴.”
루카스가 멋대로 결론짓고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오늘 밤 알아볼 작정이다.”
“예? ……아아.”
반문하던 에드윈은 금세 이해한 것 같은 소리를 흘렸다. 귀하게 기른 아들의 혼인 전에 먼저 여자의 몸을 알려 주는 것은 비단 황실만이 아니었다. 부유한 귀족가에서도 처녀인 평민 소녀들을 데려다 남녀 간의 정사를 가르쳤다.
“그대는 경험이 풍부할 테니, 조언을 듣고 싶군.”
에드윈이 곤란한 웃음을 지었다. 실제로 입에서도 약간 쓴 맛이 났다. 그는 향락과는 멀었다. 언젠가는 여인을 안아 보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있지만, 돈으로 사 온 소녀는 그 대상이 아니었다.
“그저 본능을 따르시면 됩니다.”
“과연. 실전이라는 거군.”
“뭐든 그렇지요.”
적당한 대꾸를 한 에드윈은 어서 이 화제에서 빠져나가고 싶었다. 그에게 이 음습하고 비밀스러운 관례를 바꿀 힘은 없었지만, 생각을 멈추는 것은 할 수 있다.
“여러모로 기대가 되는군.”
루카스가 밤을 기다리며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그는 자신을 기다리는 순결한 신부를 내버려 두고 먼저 남녀 간의 정사를 배우게 될 것이었다.
***
트리샤는 계속 방을 두리번거렸다. 카를 공작저도 화려했지만, 황실에 비교할 수는 없었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아름다운 장식들이 한창 소녀의 마음을 뛰게 했다.
긴장한 탓인지 고급스러운 소파에 앉은 게 영 불편했다. 게다가 지금 트리샤가 입고 있는 옷까지 제 것이 아니라 뭔가 더 어색했다.
“디아나가 봤으면, 예쁘다고 해 줬을까.”
어릴 땐, 종종 디아나와 옷장을 활짝 연 채 그녀의 드레스들을 꺼내 입으며 놀았다. 그러다 운이 좋으면 드레스를 얻는 때도 있었다.
트리샤는 그것도 기뻤지만, 디아나가 자신을 보며 예쁘다고 해 주는 순간이 가장 행복했다. 그 환상 속에서 둘은 자매 같았고, 모든 것이 똑같은 친구가 되는 것 같았다.
‘나보다 너한테 더 잘 어울리는 것 같아.’
트리샤는 디아나의 따스한 말을 떠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과연 카를 공작저의 영애가 입는 드레스는 자신의 초라한 드레스와는 차원이 달랐다. 샬롯이 마뜩잖은 눈치를 주긴 했지만, 주인인 디아나가 한사코 트리샤에게 선물하겠다고 하니 말릴 수는 없었다.
‘정말 예뻐, 트리샤.’
그 말처럼 거울 속의 자신은 빛이 났다. 언제나 해어진 옷자락 끝을 숨기고 다니기 바빴던 것이 거짓말인 듯 드레스는 트리샤에게 잘 어울렸다.
그 후로 모처럼 꾸민 모습을 디아나에게 보여 주지 못하는 것이 조금 아쉬웠다. 이 모습을 보면, 디아나가 예전의 놀이를 떠올리고 다시 트리샤를 봐 줄지도 모르는데.
“그런데, 난 여기서 뭘 하면 되는 걸까.”
시녀장의 지시는 단순하면서도 알 수가 없었다.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면 알아서 잠을 자고, 다음 날 그 방으로 모이라고 했다. 그 외엔 딱히 일이랄 것도 없었다.
“황실 시녀들은 다 이렇게 호강을 누리나…….”
화려한 방 가운데에 앉아 있자니, 자신도 귀한 사람이 된 것 같았다. 트리샤는 이미 마법에 걸린 것처럼 마음이 들떴다. 그러나 오늘은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멀리서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렸다.
“정말, 이게 전부인가?”
트리샤는 잠시 의아함을 품었다가 이내 몰려오는 피로를 느꼈다. 오늘 하루는 평소처럼 허드렛일을 하는 것처럼 육체적인 피로가 아닌 정신적 피로가 심했다. 특히 수치스러웠던 검사를 떠올리면 아직도 얼굴이 달아올랐다. 아무래도 황실에서 일하려면 많은 검증이 필요한 모양이다.
“으음, 오늘은 그냥 자야지…….”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트리샤의 밤이 저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