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좀처럼 곁을 내주지 않는 디아나는 오늘도 트리샤에게 돌아가라고 했다. 트리샤에게 공작저를 나서는 순간은 꿈에서 깨어나는 것과 같았다. 그다음엔 한 걸음, 한 걸음 시궁창 같은 현실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디아나는 좋겠다…….”
카를가는 허울뿐인 귀족인 블랑 남작가와는 차원이 다른 유구한 가문이었다. 대대로 공작령을 소유했고, 황실을 제외하고 그보다 더 고귀한 신분은 달리 찾기 어려웠다.
그뿐이 아니었다. 디아나는 한번 바라보면 시선을 뗄 수 없는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트리샤는 아직도 일곱 살 때 디아나를 처음 봤던 때를 잊지 못했다.
그때 트리샤는 저도 모르게 디아나의 등에 날개가 없는지 확인했다. 일곱 살 때도 그랬으니, 열일곱이 된 지금은 그 미모가 꽃처럼 피어나 말로는 표현하기도 어려웠다.
“우린 친구인데, 왜 이리 다른지.”
디아나는 트리샤가 꿈꾸는 모든 것을 갖고 있었다. 어릴 땐 그것이 화려한 저택과 시녀, 장인이 세공한 인형과 드레스였다면 지금은 문자 그대로 모든 것이었다.
더 고귀해질 수 없다고 생각했던 디아나의 신분은 이제 황태자비가 되어 정점을 찍을 것이다. 그 후엔 만민의 어머니인 황후가 되겠지. 그쯤 되면, 트리샤에겐 아예 다른 차원의 세상이었다.
“어? 황실에서 사람을 모집……?”
멍하니 걷던 트리샤에게 길에 붙은 종이가 보였다.
“18세 이하의 여인……이라면, 나도 가능하잖아.”
붉은 눈동자가 동그랗게 커졌다. 그러나 이내 다음 줄이 트리샤의 주눅을 들게 했다.
“귀족 부인의 추천장 필수.”
그러면 그렇지. 트리샤는 어깨를 늘어트리고 다시 가던 길을 걸었다. 당장 아버지인 블랑 남작도 귀족이었지만, 어머니는 평민 출신으로 본래는 성도 없었다. 게다가 블랑 남작가는 허울만 귀족이니 아무도 그 이름을 모를 거다.
“……아니, 있어.”
문득 트리샤의 걸음이 멈췄다. 지금 자신에게 보수를 지불하는 사람이 떠오른 것이다. 바로 디아나의 숙모인 카를 공작부인이었다. 그 추천장만 있다면 밀리지 않을 조건이었다.
“하지만 공작부인은 너무 무서운데.”
실비아는 디아나가 있을 때와 없을 때의 온도 차가 컸다. 따로 트리샤를 불러 지시를 내릴 때면 마치 하녀를 대하듯 노골적으로 차가웠다.
“추천장을 이유 없이 써 줄 분도 아니고…….”
디아나가 아니면 트리샤는 감히 실비아와 말을 섞을 신분도 아니었다.
“아.”
그래, 디아나가 아니라면. 바로 그 대목에서 트리샤의 영민한 재기가 반짝였다.
“이유가…… 있었잖아?”
트리샤가 성큼성큼 종이가 붙은 벽으로 돌아갔다. 그러고는 자신만만하게 그 종이를 떼어 내 품에 넣었다. 아직 방법은 있었다. 이 시궁창 같은 현실에서 벗어날 방법이.
***
다음 날, 트리샤는 새벽부터 일어나 찬 물에 몸을 씻고 머리카락에 싸구려 기름을 발랐다. 그나마 하나뿐인 깨끗한 옷도 밤새 손으로 빨아 널어 둔 채였다.
“누나, 오늘 어디 가?”
일곱 살짜리 니콜라는 무슨 호기심이 그리 많은지 성가시게도 얼쩡거렸다.
“니콜라, 중요한 일이니까 저리 가서 혼자 놀아.”
“왜에, 좋은 데 가는 거면 나도 데려가. 응?”
트리샤가 홱, 고개를 돌려 니콜라를 노려봤다. 성가신 늦둥이 남동생은 태어날 때부터 트리샤의 골치였다. 니콜라를 낳고 더 건강이 악화된 어머니는 자리를 보전하고 누웠고 육아는 죄 트리샤의 몫이 됐다.
“니콜라, 말 안 들으면 누나 화낸다?”
“치, 누나 못됐어.”
어머니의 붉은 머리카락을 닮은 트리샤와 달리 니콜라의 머리카락은 노란색과 갈색 사이의 어디쯤이었다. 블랑 남작과 비슷하면서도 조금 다른 색이었다.
“후…… 이제 됐어.”
트리샤가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묶은 후에 마지막으로 제 모습을 점검했다. 어제 새벽까지 애를 쓴 덕인지 평소보다 말끔한 제 모습이 꽤 괜찮아 보였다.
적어도 공작부인을 만나러 저택에 도착했을 때까진 그랬다.
디아나의 숙부 내외는 다른 공작저에 머물고 있었다. 대문부터 웅장했고 디아나의 공작저보다 한층 사치스러운 장식이 트리샤의 기를 죽였다. 오히려 하녀가 입은 옷이 트리샤보다 깨끗해 보일 정도였다.
“뭐야, 넌.”
한참을 기다린 끝에 응접실에 들어서자, 한창 원단을 고르고 있던 실비아가 물었다.
“아, 디아나의…….”
“네, 트리샤 블랑입니다.”
공작부인은 몇 번을 봐도 트리샤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했다.
“보수는 받았잖니.”
“오늘은 다른 일로 왔어요. 저어…….”
“시간 끌지 말고 빨리 말해. 바쁜 거 안 보이니?”
“황실에 추천장을 써 주세요. 시녀로…… 입궁하고 싶어요.”
“뭐?”
그제야 원단 더미에서 시선을 뗀 실비아가 트리샤를 보며 눈썹을 찌푸렸다.
“디아나가 이제 제 보살핌은 필요 없다고 해서요. 하지만 전 디아나에게 받은 은혜를 어떻게든 보답하고 싶어서…… 고민하던 차에 황실에서 시녀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그래서?”
실비아는 많은 시간을 할애해 주지 않을 것이다. 트리샤는 다급하게 주어진 시간을 쓰기 위해 입을 열었다.
“제가 먼저 입궁해서 황실에 적응한다면, 디아나가 국혼을 치른 후에 미미한 도움이라도 되지 않을까 해서요. 디아나는 예민한 아이라서 낯선 사람만 있으면 너무 쓸쓸하지 않을까……. 그렇다고 디아나에게 이런 말을 하면 자신 때문에 고생하지 말라고 할 것 같아서 공작부인께 왔어요.”
긴 말을 마친 트리샤가 가쁜 숨을 쉬었다. 실비아는 그런 트리샤를 잠시 노려봤다. 결혼으로 입궁하게 되면 공작저에서 모시던 시녀가 함께 입궁하는 것이 관례였다. 하지만 샬롯은 선대 공작 내외의 사람이라 좀처럼 실비아의 뜻대로 부리기가 까다로웠다.
우선 트리샤가 시녀가 된다면 디아나의 친구라는 이유를 내세워 황태자비의 측근으로 삼을 수 있었다. 쓸모가 없으면 깔끔하게 제거할 수 있었고, 필요가 생기면 끄나풀로 써먹을 가능성도 있었다.
“흠…… 기특한 생각이구나.”
“네, 항상 디아나에게 받기만 했으니 저도 뭔가 스스로 돕고 싶어서요. 디아나는…….”
“한 가지, 확실히 해 둘 것이 있는데.”
“네, 공작부인.”
실비아가 비스듬한 미소를 지었다.
“넌 디아나의 친구로서 곁에 있어 준 거야. 그런 널 고용해 준 것은 나고. 즉, 네 고용주는 처음부터 나였다는 거지.”
“공작부인의 자비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 마음, 시녀가 되어서도 잊지 않길 바란다. 너에게 직접 돈을 주는 건 나니까.”
“물론입니다.”
꾸벅, 트리샤가 고개를 숙였다.
“추천장은 시녀장에게 일러둘 테니, 받아 가라.”
“네.”
“아마 내 추천장이면 탈락할 리 없을 거다. 시녀가 되면 내게 주기적으로 보고를 하도록. 매사에 관해서……. 곧 알게 될 거다. 그러면 내 시녀 보수만큼의 금액을 따로 지불하지.”
“공작부인의 자비에 감사드립니다!”
“아…… 그 꼴은 곤란하지. 드레스도 한 벌 받아 가도록.”
“네!”
실비아는 제 할 말을 마친 후에 성가신 듯 손짓을 했다. 이만 시야에서 물러가란 뜻이었다. 트리샤는 쿵쿵 뛰는 가슴을 안은 채로 방을 나섰다.
***
시녀 심사는 의외로 간단하게 끝났다. 실비아의 말대로 카를 공작부인의 추천서는 강력했다. 트리샤는 입궁 전에 디아나에게 말하고 싶었지만, 좀처럼 공작저에서 불러 주질 않았다.
“괜찮아. 나중에 깜짝 놀라게 해 주는 것도 좋지.”
모처럼의 기회에 트리샤는 긍정적인 마음을 먹기로 했다. 언제나처럼 술에 절어 있는 아버지는 돈을 벌 수 있다니 흔쾌히 허락했고, 니콜라는 떼를 부렸지만 어머니의 중재로 어느 정도 달래졌다.
“트리샤, 입궁해선 매사에 조심해야 한다.”
“알아요.”
마른기침을 하면서도 트리샤의 어머니인 사라 블랑은 당부를 계속했다.
“책은…… 아직도 외우고 있지?”
“그럼요.”
사라는 어린 트리샤에게 글자부터 가르치고선 매일 밤 필사를 시켰다. 낮에는 집안일을 돌보고 늦둥이 동생에게 시달리며 밤에는 공부까지 시키다니, 참 과한 욕심이었다. 블랑 남작이 술을 마시고 행패를 부린다면, 사라는 조금이라도 책을 외우는 부분이 틀리면 회초리를 때렸다.
“확실한 거니? 단 한 글자라도 틀려선 안 돼.”
“……그럼요.”
도박에 빠진 블랑 남작 대신 생계를 책임졌던 것은 사라였다. 그녀는 평민 출신이었지만, 약재를 다룰 줄 알아서 가계에 보탬이 되곤 했다.
트리샤가 베껴 쓰던 것도 주로 약재에 관한 것이었다. 이제 그런 것 따위 필요 없는 인생을 살게 될 텐데, 트리샤는 속으로만 생각했다.
“마지막 책의 구절은 특히 매일같이 되새기렴.”
“네…….”
따분한 설교였다. 사라는 그 마지막 책이라는 것을 외우게 할 때 특히 엄했다. 심지어 기본적인 약초학과는 달리 트리샤가 이해할 수 없는 내용이 가득한 책이었다. 무슨 말인지도 모르는 것을 외우는 것은 어려웠다. 물론, 열 살부터 매를 맞아 가며 외웠으니 잊을 수도 없다.
“다 기억해요. 제가 몇 번이고 그 책을 똑같이 쓰는 걸 확인하셨잖아요.”
“그래, 그게 가장 중요한 거야…….”
지친 사라의 목소리가 건조해지기 시작했다.
“입궁해도 휴일엔 집에 올 수 있어요. 보수도 많이 받을 거고요. 황실 시녀로 일하면 혼처도 더 좋은 곳으로 알아볼 수 있댔어요.”
그제야 사라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트리샤는 자못 서운한 표정을 했지만, 마음은 이미 기분 나쁜 습기로 가득 찬 집을 벗어나 있었다.
이제 곰팡이처럼 자신의 인생을 좀 먹는 이 집과는 안녕이었다. 트리샤는 새로운 삶을 살 거다. 황태자비의 시녀는 그 시작에 불과했다.
트리샤가 입궁한 날은 이미 국혼을 준비하는 움직임이 분주했다. 무척 바쁠 거라는 예상과 달리 트리샤는 일반 시녀들과 다른 곳에 배치됐다.
시녀장이 궁중의 예법과 여러 가지 필요한 것들을 교육한다고 했다. 트리샤는 지엄하고도 어려운 예법을 배우며 처음으로 디아나의 존재를 살짝 잊었다.
“어머, 오늘 대공 전하께서 입궁하셨대!”
“황태자궁으로? 아, 오늘 내가 당번으로 갔어야 하는데…….”
고참 시녀들이 지나가면서 하는 말에 절로 마음이 들떴다. 트리샤도 곧 그들 중 하나가 되어 귀한 신분의 사람들을 보게 될 것이다.
깐깐한 시녀장은 트리샤를 하찮게 대했지만, 비밀을 품고 있는 트리샤로선 지금 상황이 죄 우습게 느껴졌다. 지금은 일개 신입 시녀지만, 디아나가 입궁하면 황태자비 전속 시녀가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시녀장도 감히 자신을 함부로 하지 못할 거다. 단순한 시녀가 아닌, 황태자비의 친구 트리샤니까.
“그럼, 모두 옷을 벗도록.”
시녀장의 한마디에 트리샤의 부푼 상상이 잠깐 멈췄다. 시녀장의 말에 문이 닫히고 커튼이 내려졌다. 신체검사는 입궁할 때 이미 했는데, 영문을 모를 노릇이었다.
“반복하지 않겠다. 어서, 몸에 걸친 건 다 벗어.”
트리샤를 포함해 세 명 정도가 놀란 듯 눈치를 봤다. 하지만 나머지 신입 시녀들은 당연한 일이라는 듯이 옷을 벗었다. 트리샤는 붉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눈치를 봤다.
“속옷까지 전부!”
흘깃, 눈치를 보자 정말 몇 명이 이미 나신이 된 채로 똑바로 서 있었다. 시녀장을 따라온 선임 시녀가 각각의 나신에 다가가 이곳저곳을 함부로 만져 대며 무언가를 기록했다.
“거기, 빨간 머리. 뭐 하고 서 있어?”
“아, 네…….”
분위기에 떠밀린 트리샤가 머뭇대며 옷을 벗었다. 망설이던 나머지 신입 시녀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내, 대여섯 명 정도의 소녀들이 나신이 된 채 일렬로 시녀장 앞에 늘어섰다. 퍽 기이한 광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