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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을 끝까지 읽었어야 했다-6화 (6/184)

6화

가벼운 감기는 금세 나았다. 의원은 디아나가 더 요양할 필요가 없다고 진단했고, 그 핑계로 트리샤를 돌려보냈다.

끝까지 아쉬운 눈치에 미련까지 보였지만, 샬롯이 중간에서 선을 그어 준 덕분에 디아나는 간신히 혼자의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당연히 처벌을 내릴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디아나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아무리 후회해도 그 책을 읽다가 덮은 것은 돌이킬 수 없었다.

루카스의 성정으로 미루어서 이 정도 무례를 보내면 불호령과 함께 어디 수녀원으로 유배라도 보낼 줄 알았다. 극단적으로 더한 형벌을 내리더라도 루카스와 사는 것보단 나았기에 이미 각오도 한 채였다.

“생각을 정리해야 해.”

침착하게 현실을 직시해야 했다. 우선, 확실한 것부터 정하기로 했다.

“그 책은 고수위 로맨스 판타지였어.”

실제 전개는 막장 드라마에 가까웠지만, 어쨌거나 소개 글은 그랬다. 그 소개에 낚여서 그 책을 택한 것은 아직도 후회가 되는 일이다.

하지만 소개 글이 전부 틀린 건 아니었다. 확실히 수위는 높았고 판타지적인 배경이었다. 아마 책의 다음 부분엔 로맨스 파트도 있을 거다. 그 상대가 루카스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에 가차 없이 책을 덮었지만.

“그리고 회귀물이야.”

가장 중요한 키워드였다. 그것은 자신이 몸소 체험하고 있었다. 그 책에선 디아나가 온갖 더러운 꼴을 더 본 후에 트리샤의 음모에 휘말려 자결하게 되지만, 자신은 그 죽음을 조금 앞당겼다. 처음으로 그 책의 내용에서 벗어난 것이다.

그대로 그 책에서 벗어날 거라는 기대도 조금 있었다. 그러나 예정보다 앞당겨진 디아나의 죽음에도 원작의 강한 흐름은 바뀌지 않았다. 그 증거로 디아나는 그 책처럼 열일곱으로 회귀했다.

“회귀물…….”

디아나가 생각의 가닥을 잡으려 중얼거렸다. 회귀물이라는 것에 질려서 책을 덮었다는 것은 반대로 말하면 그만큼 자신이 회귀물을 많이 봤다는 뜻이다. 그 책의 결말은 모르지만, 대체로 회귀물은 몇 가지 특징적인 전개가 있었다.

“회귀하는 건, 과거의 후회를 바로잡기 위해서지.”

그 부분이 애매했다. 애초에 주인공인 디아나는 딱히 잘못된 선택을 내린 적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에겐 아예 선택지가 없었다. 타인의 이해관계에 몰려 황태자비가 됐고, 나머지는 트리샤가 차지했다.

그러면 도대체 무엇을 위해 회귀를 했단 말인가.

“뭔가 있을 거야. 뭔가…… 미래를 바꿀 만한.”

회귀엔 반드시 이유가 있다. 무언가는 변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으로선 디아나가 바꿀 수 있는 것이 뭔지 알 수 없었다. 황태자비가 되는 것은 디아나가 바꿀 수 없는 큰 사안이었다.

“그 불행을 반복하기 위해 회귀한 건 아닐 테니.”

황후였던 디아나의 삶을 떠올렸다. 장밋빛 혈기를 머금어 생기 있던 두 뺨이 석고상처럼 창백해지고, 아무런 감정이 드러나지 않는 인형처럼 굳어 버린 아름다운 여자의 삶엔 허무와 회한이 가득했다.

“그렇게 사느니 죽겠어.”

결심은 변하지 않았다. 원작의 디아나는 살아도 사는 게 아니었다. 그저 머리 위에 황후의 관을 쓰고 황실의 부품처럼 존재했다. 오직 그것만을 위한 목숨이었다. 그 얼마나 부질없는 일인가.

“끔찍한 인생이었어.”

그것은 겪어 보지 않으면 모르는 내적인 고통이었다. 사막처럼 버석거리는 마음은 온 세상을 피폐하게 바라봤다. 자신은 그것을 견디지 못하고 디아나의 죽음을 앞당겼다. 디아나 본인이 아닌데도, 도저히 버틸 수가 없었다.

“불쌍한 여자.”

원작 디아나의 고통은 그에 비교할 수 없었을 것이다. 자신의 친구였던 여자가 자신의 남편과 둘만의 세계를 가꾸고 평생 어린아이들인 양 즐거워하던 모습을 똑똑히 지켜보면서도 내색 한 번 제대로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되지 않을 거야.”

디아나는 계략에 휘말려서 낭떠러지에 선 후에야 자결한다. 자신은 그걸 이미 알고 있었다. 즉,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기에 다른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사람은…… 초목으로 살 수 없어.”

모두 디아나를 초목 같은 사람으로 여겼다. 공기와 햇빛만 있으면 살아갈 수 있는 정적인 존재라고. 그러나 디아나의 마음은 늘 황폐했다. 사람은 그렇게 살 수 없는 법이다. 그건 죽음과 그리 다르지 않은 생이었다.

***

실비아가 유난을 떨며 국혼 준비를 시작한 탓에 차기 황태자비가 디아나라는 것은 공공연한 일이 됐다. 황실의 전통에 따르면 신부가 지참금을 준비할 필요도 예복을 준비할 필요도 없는데, 우스운 일이었다.

곧 황실에선 그 말을 증명하듯 황태자비에 대해 공표했다. 반전은 없었다. 황태자비로 간택된 것은 디아나 카를이었다.

똑똑.

노크 소리가 디아나의 상념을 끊었다. 잠시 후, 트리샤가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들어왔다. 공작가의 문양이 새겨진 은쟁반을 든 트리샤는 퍽 어색한 모습이었다. 입궁하기 전에 친구와 시간을 보내라는 실비아의 배려가 디아나를 더 괴롭혔다.

“디아나, 차를 가져왔어.”

트리샤는 최근 디아나와의 사이가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한층 조심스러워졌다. 예전엔 나란히 고개를 맞대고 종일 즐거운 이야기를 조잘거렸는데, 이제 디아나는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둘의 관계에 선을 그었다.

“오늘 드디어 황실에서 공표를 했다던데…… 기분이 어때?”

“실감이 안나.”

디아나가 무성의한 대답을 뱉었지만, 트리샤는 애써 미소를 잃지 않았다.

“아직은 그렇겠지. 당연히 그럴 수 있어! 황태자비라니, 정말 대단한 일이니까.”

트리샤의 들뜬 목소리에도 무심한 표정은 그대로였다.

“아, 물론…… 디아나 너는 본래부터 고귀한 태생이니까, 자격이 있지!”

일부러 과장스레 떠들던 트리샤가 찻주전자를 실수로 쳤다. 그 바람에 뜨거운 찻물이 흘러나와 쟁반을 적셨다.

“어머! 미안, 내가 너무 들떴나 봐.”

보통은 하녀를 부르기 마련인데, 트리샤는 손수 흐른 찻물을 닦아 냈다. 귀족 영애가 직접 하기엔 자질구레한 일을 하면서도 트리샤는 싫은 내색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이런 일에 익숙해 보였다. 아무리 초라한 남작가라도 귀족인데, 가난을 이길 수는 없는 것 같았다.

“자, 디아나.”

트리샤가 찻잔에 차를 따랐다. 향긋한 냄새에도 기분은 나아지지 않는다.

“딱히 할 일도 없는데 뭐하러 왔어.”

별 감정이 없는 건조한 말투였다. 트리샤는 애써 미소를 지었다. 이것 또한 익숙한 일이다.

“그래도…… 입궁하면 만나기 힘들잖아.”

“그럴까?”

디아나가 차갑게 실소했다. 트리샤는 언제나 디아나의 곁에 있었다. 무슨 수를 써서 용케 따라붙은 건지는 몰라도 황후가 됐을 때 이미 황실에서 머무르던 그녀다.

“아, 물론…… 네가 초대해 준다면 나도 입궁할 수 있겠지만.”

트리샤의 말끝에 기대감이 묻어났다. 원작의 디아나는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들은 모양이다.

“사실, 지나가다 들었는데. 황족을 모시는 시녀는 귀족 출신이어야 한대. 나도…… 남작가의 영애니까, 자격은 되지 않으려나?”

국혼을 알게 된 후로 트리샤는 밤새 잠을 뒤척였다. 디아나가 입궁하면 공작저에 걸음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더 큰 기회였다. 여태까지처럼 디아나를 만날 수도 있었다. 그것도 제국의 황실에서 말이다.

“우린 친구잖아. 난, 디아나 너라면 평생 시녀로 살아도 좋을 것 같아.”

디아나는 꿈에 부푼 트리샤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래?”

“응, 당연하지. 널 돌보는 건, 내게 너무 행복한 일이야. 우린 어릴 때부터 친구였고…… 또 너도 입궁하면 낯선 사람들보단 내가 있는 게 더 낫지 않을까?”

후, 디아나가 한숨같이 짧은 웃음을 흘렸다. 트리샤는 그걸 긍정으로 받아들인 것 같았다.

“둘이면 쓸쓸하지 않을 거야. 아, 물론 황태자 전하도 계시니까 그럴 리는 없겠지. ……참, 황태자 전하는 어떤 분이셔? 한 번 알현했잖아.”

열일곱의 트리샤도 욕망이 있었다. 고된 삶을 사는 소녀의 모습에서도 그 빛은 감출 수가 없었다.

“왜, 궁금하니?”

디아나의 물음에 트리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으응? 그야 귀하신 분이니 당연하지. 나 같은 것은 평생 알현하기도 힘든 분이신걸.”

“그럼 궁금할 필요도 없지 않아?”

“……어?”

“어차피 뵐 일도 없다며.”

“아, 그건…… 그렇지.”

민망함에 트리샤의 손가락이 꼬물거렸다.

“그래도, 얼마나 멋진 분일까 해서.”

이 정도는 대개의 영애가 가질 수 있는 호기심이었다. 그 상대가 트리샤라 달리 보이는 것뿐이다. 적어도 지금의 트리샤는 열일곱의 소녀였다. 디아나의 눈엔 그 서툰 동요가 다 읽혔다.

“사람들이 말하기론, 제국에서 가장 멋진 분이 황태자 전하와 대공 전하라고 하더라고.”

루카스는 어떤 의미에선 미남자였다. 특유의 날카롭고 염세적인 분위기에 얼굴도 미형이었다. 고귀한 신분 특유의 오만함도 분위기를 자아내는 데 한몫을 했다.

“대공 전하?”

디아나의 관심은 다른 이에게 쏠렸다. 어디서 많이 들었던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떠오르지 않았다.

“응, 체스터 대공 전하는 황태자 전하와 사촌지간이시니까. 두 분이 닮으신 게 아닐까?”

루카스가 둘이라니 그건 사절이었다. 디아나는 제 머리를 맴돌던 대공이란 단어를 확 지워 버렸다.

“그래도 난 황태자 전하가 더 궁금해.”

“넌 궁금한 게 참 많구나.”

“으응, 난 원래 호기심이 많잖아. 그런 것도 잊은 거야?”

트리샤의 눈에 서운함이 그렁그렁했다. 둘은 일곱 살 때 만난 사이다. 하루아침에 그런 성격까지 잊어버릴 리가 없었다.

“요즘, 디아나 네가 조금 멀어진 것 같아…… 물론 나 같은 게 너와 친하게 지낼 수 있다는 것부터 감사한 일이지만. 우리 예전엔 더 가까웠던 것 같아서.”

잔뜩 주눅이 든 트리샤가 웅얼대듯 말했다. 그곳에 디아나를 깔보며 웃던 트리샤는 없었다. 아직은 열일곱의 소녀가 갑자기 멀어진 제 친구를 보며 서운함을 어렵게 꺼내는 것뿐이다.

“그랬나?”

그러나 이제 디아나는 트리샤같이 제 인생을 좀 먹는 존재와 함께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우리도 내년이면 성년이야. 난 곧 결혼을 할 테고.”

“그건…… 그렇지. 그래도 만일 내가 네 시녀가 된다면 우리 계속…….”

“내가 결정할 일이 아니야.”

디아나가 곧게 선을 그었다.

“우리, 어른이 되어 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해.”

“……네 말이 맞겠지.”

트리샤가 미련을 떨치지 못한 채로 웅얼댔다.

“응.”

디아나가 다시 한 번 마침표를 찍었다.

“우린, 이제 어른이 되는 거야.”

디아나와 트리샤는 출생부터 갈 길까지 모든 것이 달랐다. 황후였던 디아나와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 한, 여기서 둘은 갈림길을 맞이한다.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둘은 각각 어른이 될 것이다. 서로가 서로의 삶에 영향을 주지 않는 아주 먼 관계로 살아가면 된다.

“저어, 디아나.”

트리샤가 용기를 낸 듯 말했다.

“그래도…… 내 마음은 똑같아. 그것만 기억해 줘.”

서로의 첫 친구였다. 신분의 벽을 넘어선 동갑내기 소녀들은 아기자기한 추억을 공유하며 자랐다. 그건 온통 무채색의 풍경에서 살아온 트리샤에겐 눈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풍경이었다.

“네가 찾으면 난 언제든 널 위해 달려갈 거야.”

“그래.”

디아나는 트리샤의 애절한 눈빛에서 시선을 거뒀다. 창밖에 석양이 내리고 있었다. 트리샤를 돌려보내기 좋은 구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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