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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책을 끝까지 읽었어야 했다-5화 (5/184)

5화

조금 후, 샬롯이 디아나에게 다가왔다.

“아가씨, 공작부인이 오셨나 봐요.”

디아나는 무심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나 다를까 문이 열리고 화려한 치장을 한 공작부인 실비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디아나는 그 모습을 보고도 침대에 앉은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디아나, 감기에 걸렸다더니 이런 가엾은…….”

실비아가 호들갑을 떨며 디아나의 곁에 앉았다. 디아나는 떨떠름한 눈길로 그런 실비아를 봤다. 속내를 이미 알고서 보는 실비아의 인상은 새삼 달랐다.

“이번에 황태자 전하를 알현하느라 많이 긴장한 모양이구나.”

루카스가 뭐라고, 다들 멋대로 생각한다. 그렇게 내버려 두는 게 디아나에겐 편했다.

“실은, 황태자 전하도 지금 열 감기로 누워 계신단다.”

별로 알고 싶지 않았다. 디아나는 일부러 콜록, 기침 소리를 냈다. 실비아가 어서 제 할 말을 쏟아 내고 가 버렸으면 해서 눈치를 준 것이다. 그러나 실비아는 슬쩍 디아나와 거리를 둘 뿐, 떠날 생각은 없는 것 같았다.

“그리고…… 후후, 이건 아직 공표되지 않은 내용이다만.”

실비아의 만면에 만족감 어린 미소가 가득했다. 디아나는 그 점에 살짝 불길함을 느꼈다.

“드디어, 황후 폐하께서 확답을 주셨단다!”

덥석, 실비아가 디아나의 손을 잡았다. 디아나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실비아를 봤다.

“그래! 디아나 네가 바로 황태자비가 되는 거야!”

“……네?”

황당한 디아나의 반문은 흥분할 대로 흥분한 실비아의 귀에 닿지 않았다.

“하긴, 너만 한 후보도 없었어. 하지만 황태자 전하까지 널 택하셨단다. 그러니 더 지체할 이유가 없어진 거지!”

“세상에…….”

디아나의 입에서 망연한 소리가 흘러 나왔다.

“저런, 많이 놀랐니? 이제 귀한 몸이니 마음을 굳게 먹어야지. 응?”

무엇이 잘못된 걸까. 디아나는 루카스와의 짧은 만남을 떠올렸다. 황족에 대한 기본적인 경의조차 표하지 않은 디아나를 루카스가 직접 택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디아나, 네 숙부도 나도…… 정말 네가 자랑스럽단다.”

이미 실비아의 목소리가 멀게만 들렸다. 뭔가 잘못됐다. 잘못됐어. 디아나를 먼 곳으로 유배 보내거나, 수녀원에 강제로 집어넣으라는 명령이 왔어야 했다.

그러나 루카스는 디아나를 선택했다. 디아나의 생각보다 훨씬 미친놈이었다. 아니, 아예 황실에서만 자라서 일반적인 인간관계가 어떤 건지 모르는 것 같았다.

“이젠 국혼을 준비해야겠구나. 어쩜…… 이런 경사가.”

혹시 루카스는 자신을 모욕하는 것을 즐기는 변태였을까. 그런 정보는 그 책에 없었다. 하긴, 그 누구도 감히 루카스의 권위에 대든 적이 없으니 선례가 없었다. 어쩌면 루카스에게 디아나의 태도 따위는 중요치 않았을 지도 모른다. 그로선 지금 디아나의 태도가 어떻든, 복종시키면 그만이라고 생각했을지도.

“그러니까, 디아나.”

“콜록!”

일단 실비아를 여기서 치워야겠다. 디아나는 노골적으로 아픈 티를 냈다. 실비아는 호들갑을 떨며 그런 디아나를 걱정스레 봤다.

“어머, 내가 아픈 널 너무 놀라게 했구나. 그래, 어서 쾌차해야지.”

그제야 실비아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실비아가 하고 싶은 것은 국혼을 위한 사치스러운 준비였지, 아픈 디아나의 병수발 따위가 아니었다.

“푹 쉬고, 어서 나으렴. 참, 그 아이도 들어오라고 해.”

실비아가 시녀에게 지시를 내렸다. 디아나가 의아함에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며칠이나 병석에 있으려니 무료했지? 내가 선물로 네 친구를 데려왔단다.”

설마. 아닐 거야. 그러나 이런 종류의 나쁜 예감은 늘 적중한다. 곧 열린 문으로 소박한 차림의 소녀가 등장했다. 일부러 시선을 주지는 않았지만, 이미 그 아이의 머리카락이 붉다는 것을 보고 말았다.

“둘이 친하잖니. 내가 직접 블랑 남작 부인에게 부탁했어. 네가 나을 때까지 말동무도 하고 간호도 해 줄 거야.”

디아나는 눈을 감았다.

“얘, 이리 오렴.”

“네, 공작부인.”

그 목소리는 틀림없는 트리샤다. 그야말로 가장 보고 싶지 않았던 사람을 실비아가 굳이 데려온 것이다.

“디아나를 잘 보살펴 주렴. 디아나는 곧 황태자비가 될 귀한 몸이니까…… 친구로서 잘 살펴 줄 수 있지?”

“네, 공작부인. 아무 염려 마세요.”

트리샤 특유의 활기찬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변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이 디아나를 괴롭게 했다.

“그럼, 디아나. 나는 이만 가 볼 테니 푹 쉬렴. 지금은 무엇보다 네 건강이 우선이야. 넌 이제 혼자만의 몸이 아니란다.”

실비아를 치우려고 했더니 트리샤가 왔다. 믿고 싶지 않은 상황에서 디아나는 눈을 뜰 수가 없었다.

곧 공작부인이 떠나는 소리가 들렸다. 침실엔 다시 적막이 고였다. 그냥 이대로 기절해서 죽어 버렸으면 좋겠다. 왜 자신의 삶은 그때 끝나지 않은 걸까.

“디아나, 많이 아파? 참, 황태자비가 된 거 정말 축하해!”

그러나 디아나는 또렷한 정신으로 트리샤의 목소리를 들어야 했다. 천천히 눈을 뜨자 트리샤의 붉은 눈동자가 걱정스레 디아나를 보고 있었다.

“당연히 제국에 너만 한 영애는 없겠지만, 정말 영광스러운 일이다…….”

트리샤의 천진한 미소는 딱 열일곱의 것이었다. 그 광경을 보는 디아나의 마음이 헤아릴 수 없이 복잡했다.

디아나는 말없이 트리샤를 응시했다. 그리고 처음 보는 열일곱의 트리샤를 천천히 관찰했다.

블랑 남작가는 작위만 있을 뿐, 보잘것없는 가문이었다. 형편은 어지간한 평민만도 못했다. 그 탓인지 몸에 걸친 모든 것이 수수함을 넘어 초라했다. 거친 천으로 만든 조악한 드레스는 한 벌뿐인지 자세히 보면 끝이 닳아 있었다.

“내가 어머니 덕분에 간호는 자신 있어. 니콜라도 내가 손수 키운걸.”

트리샤는 참 씩씩하게도 웃었다. 물수건을 짜는 트리샤의 손은 귀족 영애의 손이라기보다 공작저에서 일하는 하녀 아이들의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디아나가 황후였을 때 트리샤도 부모를 잃은 후였다. 대신 늦둥이 남동생을 귀족 출신 시녀들의 손에 애지중지 키웠다. 황실의 법도를 완전히 무시하는 일이었지만, 루카스는 기꺼이 트리샤의 동생까지 받아들였다.

“디아나는 그냥 푹 쉬어. 나머지는 내가 다 알아서 할게.”

붉은 머리카락과 붉은 눈동자 외에는 그저 평범한 소녀였다. 훗날 황실에서 그런 영예를 가진다는 것을 상상하기 어려운 모습이었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밝고 꿋꿋한 붉은 머리카락의 소녀. 그 소녀가 얼마 후엔 주먹만 한 루비를 목에 건 채로 황후보다 더한 권세를 떨치다니.

“아, 참…… 그리고 고마워.”

활기 넘치는 트리샤가 살짝 시선을 깔며 속삭이듯이 말했다.

“뭐가?”

디아나는 저도 모르게 대답을 하고 말았다. 수줍은 건지 부끄러운 건지, 아무튼 트리샤에겐 어울리지 않는 표정이어서 의아함이 들었던 탓이다.

“모르는 척 안 해 줘도 돼. 공작부인께 날 데려와 달라고 부탁한 거 디아나지?”

아니, 그럴 리가. 상황 파악이 안 되는 디아나가 눈을 깜박였다.

“덕분에 공작부인이 어머니께 사례금을 주셨어. 친구 사이에 당연한 일인데도…… 우리 집 사정을 생각해 줘서 고마워.”

오해가 너무 깊었다. 그보다 놀라운 것은 트리샤의 붉은 눈동자가 진심으로 감사를 담고 있다는 점이다.

“아니, 됐어.”

디아나가 차갑게 잘랐다. 트리샤 따위에게 감사를 받고 싶지 않았다.

“아니야. 나도 다 알아. 디아나는 지체 높은 공작 영애인데도 다들 무시하는 나 같은 거랑 친구를 해 주고…… 그냥 전부 고마워.”

머리가 아팠다. 트리샤가 자신을 ‘다들 무시하는 나 같은 것’이라고 칭했다. 그건 디아나가 아는 트리샤가 아니었다. 도대체 지금부터 무슨 일이 일어나기에 디아나가 아는 트리샤가 되는 걸까.

“디아나, 괜찮아? 많이 아프면 의원을 불러올까?”

디아나의 뇌리에 그간의 트리샤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항상 높은 소리로 웃음을 터트리고 오만한 붉은 눈동자를 빛내며 황실이 제 것인 것처럼 뛰어놀던 트리샤가 본래는 이런 소녀였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어느 순간이나 트리샤는 루카스와 디아나 사이에 있었다. 심지어 만찬 중에도 테이블보 아래로 음란하고 끈적한 발 장난을 나누곤 했다. 그게 비밀스러운 행위라고 생각했던 건지, 디아나더러 보라고 하는 짓거리였는지는 모르겠다.

무엇보다 루카스의 곁에서 서로 속닥거리는 짓거리를 할 때면 트리샤는 황후보다 더한 권세를 과시하는 것처럼 새초롬한 표정을 지었다. 그 미소엔 디아나를 향한 과시가 꼭 배어 있었다.

“아니.”

혼란 속에서 디아나가 차분히 말했다. 워낙 성정이 차분한 디아나였기에 트리샤는 대수롭지 않게 그 말을 넘기는 것 같았다.

“아, 맞다. 디아나, 혹시 나도 국혼을 보러갈 수 있을까? 네 친구라고 초대장 하나만 내어 준다면…… 평생의 영예가 될 것 같아서 그래.”

친구, 친구, 친구. 트리샤의 톡톡 튀는 목소리는 그 단어를 발음할 때마다 디아나의 신경을 거슬렀다. 그건 마치 마법 주문과 같아서 트리샤가 저지르는 모든 일에 대한 면죄부가 됐다. 친구니까, 디아나의 신혼에 함께했다. 친구라서, 디아나의 남편과도 우정을 나눴다. 그리고 친구여서, 디아나의 남편과 위치를 전부 빼앗고도 떳떳하게 웃었다.

“그냥 멀리서 구경만 할 수 있어도 돼. 네가…… 황태자비가 되는 순간을 지켜보고 싶어서. 그건 정말 꿈같은 일이잖아.”

이제 트리샤에게 나눠 줄 것은 없었다. 디아나는 현실로 돌아와 천천히 입술을 벌렸다.

“트리샤.”

“응? 뭐 필요한 거 있어?”

디아나는 트리샤 대신 허공을 봤다.

“조용히 좀 해 줄래.”

항상 이 말이 하고 싶었다. 깔깔, 높은 소리로 웃으며 루카스의 어깨에 손을 걸치는 그 가증스러운 모습을 보면서 한순간이라도 그 입을 닥칠 수는 없느냐고 말 하고 싶었다.

“앗, 미안. 내가 아픈데 너무 떠들었지…….”

열일곱의 트리샤 블랑은 다소 기가 죽은 채 순순한 대답을 내놨다. 디아나는 그게 신기하기도 우습기도 했다. 디아나가 천천히 베개에 얼굴을 파묻고 누웠다. 트리샤는 그 옆에서 눈치를 보며 쥐 죽은 듯이 물수건을 짜고, 약봉지를 정리했다.

똑같은 것은 붉게 일렁이는 그녀의 머리카락뿐이었다. 강렬한 붉은빛의 눈동자엔 그때의 광채가 없었다. 그러나 저 소녀는 곧 디아나에게 극독처럼 치명적인 존재가 된다. 안타까운 것은 디아나가 그 과정을 모른다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것은 변하지 않았다. 디아나는 다시 황태자비로 선택됐다. 반역죄를 물을 만큼의 불손한 태도를 보였음에도 그대로였다.

나머지도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이대로면 또 인형처럼 루카스의 후계자를 낳기 위해 다리를 벌려야 할 테고, 행복의 전부는 트리샤가 차지할 것이다. 그렇게 죽는 것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상태로 식물처럼 살아가야 했다. 디아나로선 결코 돌이키고 싶은 삶이 아니었다.

한 가지 더, 돌이킬 수 없는 것이 있었다. 디아나만이 이해할 수 있는 후회였다.

디아나는 다시 한 번 돌이킬 수 없는 후회를 되새겼다.

역시, 그 책을 끝까지 읽었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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