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관종은 오늘도 죽습니다 (185)화 (185/185)

#11

쇠파이프에 묻은 피를 털어내며 가이주가 히죽 웃었다.

“이런, 대단한 기사도구만. 그걸 또 대신 맞… 어흑!”

메이는 순간 참지 못하고 손에 걸리는 것을 들어 냅다 휘둘렀다.

단단한 각목이 가이주의 중심을 내려치고 반으로 쪼개졌다. 더불어 그 중심도 쪼개졌는지 가이주가 퍼렇게 질린 얼굴로 풀썩 엎어졌다.

그가 정신을 잃자마자 메이는 굴라인을 확인했다. 굴라인 역시 거의 정신을 잃기 직전이었다. 머리에서 흐른 붉은 피가 메이의 손을 적셨다.

덜컥 겁이 난 메이는 자신도 모르게 굵은 눈물방울을 뚝뚝 떨구었다.

“흐엉, 죽지 말아요, 선배! 흐어엉, 흐엉-! 죽으면 안 돼요!”

흉터투성이 몸과 힘겹게 숨을 내쉬는 입술. 다신 뜨이지 않을 것처럼 꾹 닫힌 눈꺼풀.

지금 이 순간, 메이는 왜인지 그 꿈이 생각났다.

피가 낭자한 전쟁터 한가운데서 끝내 눈을 감은 한 사내.

클라인이라 불린 그 사내처럼 선배 역시 그리 될까봐 미치도록 무서웠다.

메이는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애써 다리에 힘을 주었다. 막 일어서려던 찰나, 고통을 참느라 힘줄이 불거진 손이 메이를 턱 붙들었다.

“죽긴 누가 죽는다고 그럽니까.”

“어…?”

꽉 잠긴 목소리였으나 이지를 잃은 음성은 아니었다. 굴라인이 머리를 부여잡고 옅은 신음성을 흘리며 상체를 일으켰다.

메이는 물기를 한가득 머금고서 커다래진 눈망울을 꿈벅였다. 또다시 눈물이 후두둑 떨어졌다.

굴라인은 그를 빤히 바라보다, 천천히 손을 뻗었다. 어설픈 손길이 발개진 눈가를 다정히도 쓸었다.

“울지 마십시오. 이 정도론 안 죽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너무 무서웠단 말이에요…!”

“당신이 무서운 것도 있었습니까?”

“지금 농담이 나와요? 피나는 것 좀 봐, 어떡해, 일단 구급차부터 부를게요. 혹시 핸드폰 있어요? 없으면 제가 얼른 나가서-”

“좋아합니다.”

“……네?”

잘못 들은 건가 싶어 메이가 토끼눈을 홉떴다. 방금 내가 무슨 말을 들은거지?

다시금 대답해주길 바라는 듯한 눈빛이 굴라인에게 닿았다. 그러나 그는 시선을 회피하며 이를 악물었다.

저도 모르게 툭 튀어나와버린 속마음이었다. 그간 안간힘을 다해 참고 참았는데, 결국 주체 못하고 이리 터져 나올 줄이야.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지만 대충 덮고 넘어갈 수만 있다면 그리하고 싶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방금 건 못 들은 걸로… 하.”

어떻게든 없던 일로 만들고 싶었는데. 굴라인은 차마 말을 끝맺을 수 없었다.

저 투명한 눈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는 순간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메이 앞에서 더 이상 본심을 숨기고 달아날 순 없다고. 더는 그녀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는 마른세수를 하며 목구멍에서 맴도는 퍼석한 단어들을 겨우 건져 올렸다.

“이리 말을 꺼내는 게 염치없지만… 사실 알고 있었습니다. 당신이 요즈음 절 피한다는 것을.”

“느, 네? 따, 딱히 그런 적은 없는데요…….”

“갈이안이나 천루시하고는 스스럼없이 지내면서 저와는 말도 잘 섞으려 하지 않잖습니까. 혹 제가 뭔가 잘못한 거라도 있는 겁니까? 말하면 바로 시정하겠습니다. 부디 알려주십시오.”

“아, 아뇨, 선배. 그런 게 아니라… 그러니까 선배를 피한 건 맞는데 그게 선배가 싫어서가 아니고…….”

메이는 더 말을 잇지 못했다. 그저 양 볼만 가을단풍처럼 붉게 물들었다.

그간 학교에서 굴라인의 그림자만 보여도 냅다 숨긴 했다. 그러나 결코 그를 꺼려서 따위의 이유는 아니었다.

그저 혼란스러운 마음을 정리할 시간 조금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지난 번 보육원을 다녀온 이후부터, 그를 볼 때마다 요상한 기분에 휩싸이곤 했으니까.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긴장이 풀리자 메이는 좀처럼 굴라인과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애꿎은 입술만 잘근거렸다.

그를 어찌 해석한 것인지 굴라인은 고개를 푹 떨구었다. 곧 축축한 음성이 입술 새를 비집고 흘러나왔다.

“당신 주변엔… 당신을 아끼는 사람들이 많단 걸 압니다. 저도 그렇고요. 당신은 그럴 수밖에 없는 사람이니까.”

“…선배? 갑자기 그게 무슨… 무슨 말이에요?”

“나는 당신이 계속 그렇게 사랑받길 원합니다. 당신의 시간이 온전히 내 차지였으면 좋겠지만, 나만을 봐달라는 이기적인 짓은 못합니다.”

굴라인은 평소의 담담한 태를 유지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메이를 붙잡으려 간신히 뻗은 손은 형편없이 떨리기만 했다.

더는 숨길 수 없는 마음을 쥐어짜내 내뱉는 목소리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가끔은 참을 수 없이, 어쩔 수 없이. 못된 생각이 듭니다.”

굴라인은 메이의 손을 끌어다 손목 안쪽 박동하는 곳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곤 짙은 담갈색 눈을 들어 메이를 담았다.

그 어느 때보다도 솔직하고, 그만큼 절박한 고백도 함께.

“그 애정, 조금만이라도 좋으니 내게도 주면 안 될까. 나도 좋아해주면 안 될까. 그저 곁에 있을 수 있게만 해줘. 날 피하지 마. 그거면 되니까, 제발…….”

그 눈을 마주하는 순간 메이의 심장이 쿵, 떨어졌다.

그 태산 같던 남자가 이토록 나약해진 모습은 처음이었다. 늘 단단한 벽처럼 버텨 설 줄만 알던 사람이, 제 앞에서 글썽이고 있었다.

손목에 느껴지는 날숨이 데일 듯이 뜨거웠다. 메이의 몸이 움찔 떨렸다.

‘내가 뭐라고, 나 따위가 뭐라고.’

이 가여운 사람을 이리도 절절히 매달리게 만들까. 메이는 시리게 저미는 가슴을 누르며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아뇨, 선배.”

“……미안. 역시 방금 얘긴 잊는 게….”

단호한 거절에 굴라인이 입가를 쓰게 일그러뜨렸다. 그가 자책할세라 메이는 서둘러 손을 내저었다.

“아뇨, 아뇨. 그런 게 아니라요. 제 말은, 그러니까… 저도 선배가 사랑받았으면 좋겠어요.”

“……뭐?”

“그리고 그 사랑을 가장 기쁜 마음으로 받고 싶은 상대가 저였으면 좋겠어요.”

굴라인이 말뜻을 이해하지 못해 멍하니 굳어있자, 메이는 쐐기를 박듯 다시 입을 열었다.

“저도 좋아해요, 선배.”

그 어느 때보다도 확고한 고백임을 선언했다. 선배가 자신을 좋아하는 것처럼 자신도 선배를 좋아한다고.

굴라인은 자꾸만 흐릿해지는 시야를 다잡으려 노력했지만 쉽지 않았다. 메이의 모습이 파문이 인 호수처럼 일렁였다.

툭, 투둑. 연달아 떨어지는 눈물방울이 바닥에 동그란 자욱을 만들어냈다.

‘지금 선배… 우는 거야? 정말?’

죽굴사-죽어도 굴라인 사랑해-들이 본다면 땅을 치고 통곡할 장면이었다.

그들은 굴라인이 베인의 그늘에서 벗어나는 날, 비로소 터지게 될 야성미를 기대했을 것이다. 오랜 시간 우리에 갇혀 살던 짐승이 날뛰듯이.

그러나 굴라인은 그런 짐승이 되기엔 너무도 다정한 사람이었다. 적을 물어뜯고 덤벼들기 보다는 제 울타리 안을 지키는 사람.

그리고 메이는, 그런 사람이 좋았다. 그런 굴라인이 좋았다.

굴라인을 꽉 끌어안는 메이의 귓가에 마지막 알림음이 울렸다.

[메인퀘스트(FIN)- 관오죽 IF 세계의 결말 충족]

[해당 퀘스트를 달성하였습니다!]

[시스템이 영구해제 됩니다!]

허공에 뜬 창이 사라짐과 동시에 멀리서 강아지가 짖는 소리가 들렸다.

왕왕!

조금 전 뛰쳐나갔던 콜린이 사람들을 이끌며 달려오고 있었다.

실버와 용용쌤, 신제우 교장과 대마왕 이사장까지. 그 뒤론 각각 경찰차와 구급차에서 내리는 천루시와 갈이안도 보였다.

……분명 드라마 촬영과, 강의와, 훈련 중이었을 한씨네 남자들도.

“내 딸! 내 딸은 어딨소!”

“야 너는 무슨 애가 겁도 없이 이런 델 무턱대고 오냐!”

“메이! 무사한가!”

“괜찮은 거야? 어서 병원으로 가자!”

“여기 부상자가 있어! 들것을 가져와!”

폭풍처럼 몰아치는 소란. 그 소란이 주는 자각.

이건 명백한 현실이었다. 결코 꿈 같은 게 아니었다. 꿈처럼 되지 않았다.

사라지지 않는 생생한 현실 속에서, 메이는 그제야 웃었다.

* * *

그로부터 며칠 후.

‘콜린실종사건’에서 ‘콜린납치사건’으로 정정된 소동의 범인은 빠르게 검거되었다.

이사장과 교장의 적극적이다 못해 부담스러울 만큼 과한 개입이 있었을 뿐더러, 결정적인 증거가 나왔기 때문이었다.

바로 콜린의 입속에서.

“그러니까 이 명찰을… 콜린이 뱉었다구요?”

“그래. 콜린은 총명해서 직감 했을 거야. 제게 해를 가하는 사람이 누군지.”

“아무리 그래도 강아지가 그런 걸 어떻게….”

“우리 콜린은 천재견이다. 인간의 말도 알아듣는데 그깟 증거 하나 은폐 못하겠나?”

“그럼, 그럼. 아마 너보다 아이큐가 높을지도 몰라.”

실버와 용용쌤이 주거니 받거니 콜린을 추켜세웠다.

메이는 차라리 콜린 안에 강아지요정이 빙의했다고 하지 그러세요, 덧붙이며 둘의 행각을 지켜보았다.

믿기진 않았지만 그 덕분에 사건 해결이 용이해진 건 사실이었다.

메이는 애리수란 세 글자가 선명하게 반짝이는 명찰을 손가락으로 툭툭 건드려보다 일어났다.

“아무튼, 교장쌤이랑 이사장님이 알아서 잘 처리해주신다고 하니. 소녀는 이만 물러가보겠습니다아-.”

“온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가나. 5분이 그렇게 아깝나.”

“아유, 섭하게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5분이 아니라 5초도 아까운걸요.”

“어련하시겠어, 한창 좋을 때다 그래. 얼른 가버려. 가서 좋아죽는 네 남친이랑 소중한 5분 5초나 써라.”

“역시 용용쌤. 제 맘을 어찌 그리 잘 아실까. 역시, 부부의 연륜이란 건가?”

“무, 뭐? 너…!”

메이는 혀를 쏙 내밀고는 후다닥 문가로 달렸다. 얄밉게 사라지는 메이의 뒤로 두 사람의 외침이 쏘아졌다.

“우리 같이 안 산다니까!”

이렇게 메이의 좌충우돌 오죽고 생존일지는 끝을 맺는다. 뻔 하지만 가장 행복한 결말의 막이 오죽고에도 내렸다.

메이가 내딛는 모든 길을 비추는 눈부신 햇살처럼.

그리고, 덤.

실버와 용용선생이 느긋하게 점심산책을 즐기는 동안, 콜린 역시 나름대로의 휴식을 취하는 중이었다.

익숙하게 학교 뒷문으로 쪼르르 나간 콜린은 길을 따라 짧은 다리를 부지런히 놀렸다.

이윽고 인적이 드문 공터에 다다르자, 한차례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제 보금자리라도 되는 양 풀숲으로 쏙 뛰어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부스럭거리며 떨어지는 나뭇잎 사이로 볼멘소리가 흘러나왔다.

“진짜 러브러브 이벤튼지 뭔지 내가 다시는 하나 봐라.”

퍽 짜증 섞인 음성과 달리, 별안간 풀숲에서 튀어나온 남자의 모습은 꽤 괴리감이 있었다.

미처 숨기지 못한 강아지귀가 쫑긋거리고 꼬리가 살랑였다.

“에휴, 다른 세계선 애는 악당이어도 최소한 사람행세는 했지 나는 뭐냐… 어? 개네, 개야, 푸하핫, 하핫! 아하핫!”

콜린, 아니 콜린이었던 천사는 실성한 사람처럼 고개를 젖히고 웃었다. 당최 웃는 건지 우는 건지 모를 괴상한 웃음이었다.

그러더니 그는 곧 다리 하나를 무릎에 걸치곤 손으로 입가를 가려 담뱃불을 붙였다.

후, 하고 하늘 위로 내뿜는 연기와 함께 짙은 한숨도 흘렀다.

“이런 개 같은 팔자…….”

<관종은 오늘도 죽습니다> if 외전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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