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시간은 빠르게 흘렀고, 어느덧 붉게 물든 단풍잎이 발치에 채일 무렵.
오죽고에는 작은 실종 사건이 일어났다.
“내가 못 살아, 그러게 콜린을 학교에 데려오면 어떡해!”
“누군들 그러고 싶어서 데려온 줄 아나. 학교에 도착했을 땐 이미 콜린이 뒷좌석에서 튀어나온 후였다.”
“아무튼 빨리 찾기나 해. 날 저물면 더 답 없어. 난 애들 대충 피구 시키고 계속 둘러볼게.”
“알았다. 이따 6교시 때 교대하도록 하지.”
여기서 콜린은, 사람이 아닌 강아지다.
오죽고의 신용용 선생이 키우는 강아지.
그런데 왜 원어민 영어교사인 실버와 실랑이를 하냐고 묻는다면 딱히 답해줄 말이 없다. 그저 같이 사니까 그런가보다, 알아서 납득하는 수밖에.
둘의 연애사실은 이미 전교생이 알아 숨길 것도 없었다. 그러나 두 선생은 뭐가 그리도 부끄러운지 매번 아니라고 부정하곤 했다.
때문에 메이는 오늘 아침부터 웃음을 참느라 곤욕을 치렀다. 콜린이 용용선생의 품에서 뛰어내리자마자 실버한테 쪼르르 달려가 안긴 것이다.
‘저래놓고 안 사귀긴 무슨. 이미 결혼했다 해도 믿겠구만.’
그런데 그 강아지가 사라졌다고?
그간 귀여운 강아지를 빌미로 얼마나 깨를 볶았던가. 둘의 애정행각을 자주 목격한 메이로서는 그들이 콜린을 자식처럼 끔찍이도 아낀다는 걸 알고 있었다.
“콜린! 콜린! 어딨어!”
지금도 그 칼바람 쌩쌩 불기로 유명한 체육쌤이 목이 터져라 부르며 찾는 중이었다.
피구에 딱히 흥미가 가는 것도 아니어서 메이는 슬쩍 강당을 빠져나왔다. 콜린을 같이 찾아볼 요량이었다.
수풀이란 수풀은 닥치는 대로 헤집고 다니길 이십 여분. 어디선가 낑낑대는 소리가 들렸다.
메이는 귀를 쫑긋 세우고 소리를 따라 걸었다. 이윽고 발걸음이 멈춘 곳은 학교 밖 으슥한 골목이었다.
골목 안쪽엔 ‘출장 뷔페’라 적힌 트럭 하나가 정차해있었는데, 그 안에서 소리가 계속 흘러나왔다. 짐칸 문이 열려있기에 힐끔거렸더니 조그마한 솜뭉치 같은 것이 보였다.
실버와 용용쌤이 그토록 찾아다니던 강아지였다.
‘…콜린이 왜 여기에?’
메이는 주변을 둘러보다 잽싸게 트럭에 올라탔다. 용용쌤에게 알리러 가는 사이 트럭이 사라질 우려가 있어 콜린만 얼른 챙겨 나올 심산이었다.
물론, 생각만큼 상황이 잘 굴러가진 않았다.
‘뭐야, 목줄이 묶여 있잖아?’
짐칸 안쪽 고리에 어찌나 단단히 묶었는지 좀처럼 풀리지 않는 매듭이었다.
메이가 낑낑대며 고전하는 사이, 이쪽으로 다가오는 발소리가 점점 커졌다.
메이는 일단 손에 잡히는 대로 마포자루를 뒤집어쓰고 숨을 죽였다.
얼기설기 짜인 자루 너머 흐릿하게 보이는 인영은 총 둘. 짐칸에 올라타 강아지를 확인한 두 남자가 짧은 대화를 나누었다.
“뭐야, 이거 완전 희귀한 품종인데. 어디서 이런 걸 구했어?”
“몰라, 어떤 여학생이 버려진 떠돌이 개라고 주던데.”
“학생이?”
“응. 오죽고 교복을 입고 있었어.”
“뭐, 아무튼 좋은 게 좋은 거지. 교황님 몰래 용돈벌이 좀 되겠네. 얼른 출발하자.”
교황님? 두목을 지칭하는 은어 같은 건가? 고민은 오래가지 못했다.
철컥, 문을 닫는 소리가 들리고 사위가 깜깜해졌다. 곧이어 시동을 거는 소리도 들렸다. 메이와 콜린을 태운 채 트럭이 출발했다.
메이는 자루를 던지고 엉금엉금 기어 나와 머리를 팽팽 돌렸다.
‘어떡하지? 핸드폰은 아침조회 때 걷어가서 없는데…. 아무리 봐도 개장수한테 잡힌 것 같고…….’
그 불법포획 대상에 자신도 포함되어 있을 린 만무했다. 기회가 생기는 즉시 도망치는 게 상책이었다.
메이는 타결책을 고심하며 목줄의 매듭을 풀었다. 그 사이 트럭은 목적지에 도착했는지 덜컹거림이 멈췄다.
서서히 열리는 문틈으로 빛이 새들자마자 메이는 콜린을 안고 냅다 튀어나갔다.
눈이 마주친 남자가 화들짝 놀라 빽 소리쳤다.
“뭣…! 가이주! 저 여자애 당장 잡아!”
메이는 정신없이 달렸고, 운전석에서 내린 또 다른 남자가 달려들었다.
목덜미가 턱 잡혔지만 잽싸게 몸을 틀어 팔꿈치로 턱을 가격해 빠져나왔다. 굴라인에게 그간 배운 호신술이 한몫했다.
그렇게 무사히 도망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이 씨… 완전히 갇혔잖아.’
문득 주위를 돌아보았을 땐 막다른 길이었다.
너무 거대한데나 정신이 없어서 인지하지 못했을 뿐, 메이가 들어와 있는 곳은 창고였다.
불법으로 탈취한 갖가지 물품들이 가득한 창고.
사방에서 남자들이 올가미를 조이듯 메이를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교황님 오시기 전에 우리 선에서 빨리 해치우자고.”
“가이주, 네가 맡아.”
“간만에 꽁돈 좀 챙기나 싶었는데, 이거 원 골치 아프게 됐네. 그래이, 창고 문 닫아.”
금전에 메이에게 맞아 벌겋게 부어오른 턱을 문지르며 가이주가 입매를 늘였다.
텡구르르르…. 그의 발길에 차인 부탄가스통이 메이의 앞으로 하나 굴러왔다. 바닥에 질질 끌리는 각목 소리가 소름끼치게 귓바퀴를 긁었다.
온몸에 소름이 돋았지만 메이는 애써 침착하게 주변을 살폈다.
‘뭐라도 해야 해, 어떻게든, 뭐든…!’
그 순간, 메이의 눈에 뭔가가 들어왔다.
일렬로 늘어진 회색통과 빨간 글씨. 취급주의, 가스.
마땅히 숨을 만한 곳 탐색까지 마치고서 메이는 바닥에 굴러다니는 부탄가스통을 집어 들었다.
반대쪽 손아귀에선 아까 트럭에서 주운 라이터가 틱틱거리며 점화했다.
좋아, 이제 깽판 좀 벌여볼까.
“아저씨들, 내가 지금부터 난리 좀 피울 건데 위험하니까 절대 따라 하지 마.”
메이는 컨테이너 상자 모서리에 냅다 부탄가스를 박았다.
푸곽! 찢어진 표면 사이로 가스가 새나오기 시작했다. 메이는 있는 힘껏 팔을 휘둘렀다. 점화된 라이터도 함께.
“저 미친… 다들 피해!”
가이주가 다급히 외치며 몸을 날렸다. 다른 남자들도 혼비백산이 되어 미친 듯이 달렸다.
메이 혼자 호탕하게 깔깔댔다.
“와하하하! 다 날라가라! 무너져! 다 터져버려!”
“젠장…! 어디서 저런 미친년이 굴러 들어와선…!”
가이주는 이를 아득바득 갈며 욕지거릴 내뱉었다. 그러다 문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야 멀쩡히 말하고 있었으니까. 그것도 어디 다친 곳 하나 없이 멀쩡하게.
그렇다. 메이의 바람과 달리, 급제조한 폭탄은 터지지 않은 것이다. 짜부라진 부탄가스통만 요란하게 깡깡거리며 굴렀다.
그 처량한 소리를 들으며 메이는 직감했다.
‘아, X됐다.’
상황을 파악한 남자들이 하나둘 일어나기 시작했다. 저마다 화난 기색들이 역력했다.
무릎이 닳도록 싹싹 빌어도 곱게 살아 돌아가긴 힘들 듯했다.
“이 년이… 감히 우릴 가지고 놀아?”
“음, 저기요, 우리 이성을 가진 인간으로서 조금 차분해져 봐요. 정말 죄송해요, 다신 안 그럴게요. 제가 정녕 물 위를 걸어야 제 말을 믿어주실 건가요?”
“잡아.”
“이런 씨앙.”
당연했지만 눈물겨운 호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메이는 콜린을 안은 손에 더욱 힘을 주며 뒷걸음질 쳤다.
이제 정말 끝장이구나 싶은 순간이었다. 그러나 하늘은 가여운 관종을 버리지 않았다.
콰앙!
“메이!”
별안간 무언갈 내다꽂는 소리와 함께 창고 문이 벌컥 열렸다. 그리고 그 한가운데 후광을 가르며 서있는 한 남자.
“선배가 여길 어떻게…?”
“메이! 괜찮습니까? 다친 곳은 없습니까?”
커다란 창고 안이 쩌렁쩌렁하게 울리도록 굴라인이 메이를 불렀다. 메이는 얼떨떨한 얼굴로 겨우 대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사색이 된 굴라인의 안색이 그제야 한시름 놓은 듯 풀어졌다.
“다행입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굴라인이 거칠어진 호흡을 내쉬며 안도했다.
어찌나 절박한 표정이었는지, 꼭 삶의 마지막을 선고받았다가 극적으로 되살아난 사람처럼 보일 정도였다.
이윽고 숨을 가다듬은 그는 천천히 굽혔던 몸을 일으켰다.
폭주하기 직전의 금수 같은 태세. 어둠의 패거리를 직시하는 두 눈동자에 흉흉한 살기가 일렁였다.
“메이, 이제부턴 조금 물러나 계십시오.”
“이것들이 무슨 배짱으로- 커흑!”
퍼억! 퍽!
굴라인이 발돋움을 함과 동시에 그에게 달려들던 남자들이 날아갔다. 둔탁한 파열음 한 번에 한 사람씩 말 그대로 날아갔다.
메이는 멍하니 서서 믿기지 않는 그 광경을 관망했다.
마치 소설 속 한 장면에 덩그러니 놓인 것처럼 현실과 동떨어진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여느 통속소설들이 그렇듯, 사태는 주인공의 등장으로 빠르게 정리된다. 지금이 꼭 그런 상황 같다고 메이는 생각했다.
“으으…….”
“어흐으…….”
금전까지 괄괄하게 쏘다니던 패거리가 풀죽은 시금치처럼 널브러져있으니까.
바닥을 기는 신음소릴 뒤로하고서 굴라인이 메이에게 다가왔다. 다리가 풀려 주저앉아 있는 그녀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눈을 마주쳤다.
“메이의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너무 무모했습니다. 오는 내내 그대가 잘못되었을까봐 저는…!”
“죄송해요, 처음부터 이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그나저나 제가 여기 있는진 어떻게 알았어요?”
“체육관에서 나오다 메이가 트럭에 타는 걸 봤습니다. 급히 따라갔지만 놓쳐 불가피하게 메이의 스쿠터를 빌렸습니다. 과격하게 주행하느라 조금 부서졌습니다만, 나중에 꼭 변상하도록 하겠습니다. 미안합니다. 견적이 나오는 대로….”
“잠깐, 잠깐만요. 설명은 이만하면 됐어요. 그냥 지금은…….”
만나자마자 쏟아지는 사과세례에 메이가 손을 내저었다. 그녀는 다만 굴라인을 꼭 끌어안은 채 목덜미에 이마를 기댔다.
“와줘서 고마워요, 선배. 정말 고마워요.”
“……!”
굴라인은 차마 메이를 밀어내지도, 마주안지도 못하고 두 손만 허공에서 방황했다.
허둥대는 속처럼 얼굴도 발갛게 물들어갔다. 한 뼘 거리에서 닿는 밭은 숨이 그를 더 달아오르게 했다.
누군가 곁에 있다는 사실 하나 만으로 이리 복잡한 감정에 빠질 수 있을까. 굴라인은 생전 처음 느껴보는 이 감정이 낯설면서도 싫지 않았다.
메이 역시 그와 같은 감정을 공유하고 있었다. 포근하고, 따듯하고, 계속 이대로만 있고 싶었다.
그러나 그도 잠시, 돌연 시야가 홱 돌았다.
메이의 몸에 손끝 하나 못 댈 것 같았던 굴라인이 메이를 제 품에 와락 가두며 몸을 돌린 탓이었다. 동시에 무언가를 거세게 가격하는 소리가 났다.
빠악-!
심상찮은 소리에 메이는 퍼뜩 고개를 들었다. 음산하게 입꼬리를 올린 가이주의 낯짝이 곧장 눈에 들어왔다.
그는 피가 뚝뚝 떨어지는 쇠파이프를 들고 있었다. 그 피가 누구의 것인지 메이는 알고 싶지 않았다.
하나 그렇다면 훅 끼치는 혈향은 대체 어디에서 나는 거란 말인지.
“선배-!”
정신이 순간 아찔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