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관종은 오늘도 죽습니다 (182)화 (182/185)

#8

폭풍처럼 몰아친 선율이 휩쓸고 간 자리. 여운을 남기는 고동만이 고즈넉하게 울려 퍼졌다.

갈이안의 목울대가 일렁였다. 무대가 끝나고, 막이 내리자 퍼뜩 현실이 체감되었다. 부질없는 꿈에서 깬 기분이었다.

고개를 들어야 하는데, 관객들에게 인사해야 하는데. 아버지의 얼굴을 볼 용기가 도저히 나질 않았다.

‘역시 막무가내로 굴어선 안 되었던 걸까.’

한껏 부린 치기 뒤에 남은 것은 후회뿐이었다. 그렇게 자책하던 찰나.

짝, 짝, 짝, 짝.

한 사람의 박수소리가 적막을 갈랐다. 고작 한 사람의 손뼉임에도 공간을 가득 채울 정도로 컸다.

곧 그 투박한 소리를 시작으로 한 사람 두 사람 일어나기 시작하더니, 이내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와아아! 호우! 최고다!”

“역시 갈이안 선배!”

“완전히 뒤집어 놓으셨다!”

“쟤가 한메이지? 갈이안이 왜 파트너로 정했는지 알 거 같네.”

전신은 뒤덮는 환호성 속에서, 갈이안은 회장을 나서는 검은 인영을 묵묵히 응시했다.

고집스러울 만큼 꼬장꼬장해 보이는 뒷모습.

가장 먼저 일어나 박수소리를 제게 선물한 사람.

‘아버지…….’

평생을 제게 잘했다, 수고했다 한 마디 해준 적 없는 아비였다. 그랬던 그가 가장 먼저 일어나, 누구보다도 크게 박수를 쳐줬다.

갈이안은 한참이나 그 뒷모습을 좇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씩 웃는 싱그러운 낯과 바로 눈이 마주쳤다.

“것 봐요, 제가 뭐랬어요. 틀려도 괜찮다니까요.”

저 웃음 하나에 주변이 환하게 빛난다면, 그건 제 착각일까.

갈이안의 입가에도 잔잔한 미소가 덧그려졌다.

“그래… 정말 그렇군.”

갈이안은 괜찮았다. 그 스스로도 뭐가 괜찮은지 정확히 정의할 순 없었지만, 그조차도 괜찮았다.

그저 전부 괜찮았다. 그게 갈이안이 내린 오늘의 결론이었다.

축제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메인 퀘스트- 갈이안과의 합동공연]

[해당 퀘스트를 달성하였습니다!]

[갈이안 루트가 개방됩니다!]

새로운 루트 개방을 알리는 시스템 메시지와 함께.

그리고 여담이지만, 공연에서 1등 상금을 차지한 팀은 잭과 잭히였다. 종목은 댄스스포츠.

매일같이 서로를 못 잡아먹어 안달인 둘이 딱히 팀워크가 좋은 건 아니었다.

다만, 서로 발을 밟으려고 혈안이 되어 춘 게 제법 열정적인 탱고로 보인 모양이었다.

* * *

오늘도 죽여주는 오죽고는 평화로웠지만, 여기 한사람은 그렇지 못했다.

“하아… 수남주 그 자식이 이렇게 끈질길 줄이야.”

메이는 한숨을 푹푹 내쉬며 바닥에 붙은 껌을 떼어냈다.

쨍한 태양 아래 쭈그리고 앉아 이 짓을 하기도 벌써 사흘째.

찜통보다 더한 열기 속에서 교내봉사 20시간이라니, 고역도 이런 고역일 수가 없었다.

제 처지가 이리 나락으로 떨어진 건 온전히 수남주 때문이었다.

“그 밴댕이 소갈딱지가 그걸 못 참고 발광을 떨어서… 에잇!”

그 맨들맨들한 얼굴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열이 확 뻗쳤다. 메이는 청소도구를 내팽겨치곤 자리에 주저앉았다.

루시와 남주가 옥상에서 싸우고 난 후. 메이와 루시는 다행히 별다른 징계없이 학교생활을 이어나갈 수 있었다.

사건의 목격자인 모루수 교감이 웬일인지 넘어가줬을 뿐더러, 사건의 당사자인 남주가 한 달 넘게 근신을 자처한 탓이었다.

한데 그새 머리카락 좀 자랐다고 남주가 일주일 전 복귀한 것이다. 그는 멀쩡히 지내다 못해 학생회에까지 들어간 메이를 보곤 길길이 날뛰었다.

그로도 만족할 수 없었던 그는 남다른 집안 파워를 이용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남주는 반성하는 성의라도 보여야 할 것 아니냐며, 끝내 교내봉사 20시간 이라는 선물을 메이에게 하사하고 말았다.

덕분에 메이는 하루하루가 죽을 맛이었다. 이제 막 반의 반 정도나 시간을 채웠을까.

“후우… 왜 이렇게 어지럽지…?”

메이는 소매로 이마를 슥 문질렀다. 바람 한 점 불지 않는 하늘은 오늘따라 유독 덥기만 했다.

장시간 고온에 노출된 탓인지 순간 현기증이 핑 돌았다. 안 그러고 싶어도 자꾸만 시야가 흔들렸다.

입 안이 바싹바싹 타고, 차츰 몸이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정신이 혼미했다.

메이는 저도 모르게 풀썩 쓰러졌다.

“한메이! 야! 정신차려!”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두 눈이 완전히 감기기 전 본 것은, 멀리서 안달이 난 얼굴로 뛰어오는 누군가였다.

* * *

그렇게 까무룩 정신을 잃고 얼마나 지났을까.

‘뭐야… 왜 이렇게 조용하지…?’

분명 조금 전까지 매미소리 때문에 귀가 먹먹할 지경이었는데. 사위는 천이 사각거리는 소리가 들릴 만큼 고요했다.

…잠깐만, 사각?

메이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목 끝까지 덮여있던 이불이 흘러내렸다. 한쪽 귀퉁이에 보건실 마크가 찍힌, 새하얀 이불.

고개를 두리번거리자 보건교사 안슬온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컴퓨터 책상 앞에 앉아 업무를 보다 덜컹거리는 소리에 막 눈을 돌린 참이었다.

“일어났군요.”

“저… 선생님. 설마 저 쓰러진 거예요?”

“교내봉사를 빨리 끝내고 싶은 마음은 이해합니다만, 너무 무리하진 마십시오. 메이학생을 데려온 학생도 어찌나 놀랐는지, 옆을 계속 지키고 있겠다는 걸 겨우 말려서 돌려보냈습니다.”

“네? 저를 데려온 사람이 있어요?”

그러고 보니 정신을 잃기 전 낯익은 목소리를 들은 것도 같았다. 그리고 그 목소리가 꽤나 절박했었다는 것도.

‘혼자 날 발견해서 데려왔다면 고생 좀 했을 텐데, 누구지?’

메이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안슬온 역시 그럴 만 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3학년의 천루시 학생과 꽤 친한가보군요. 저번 일도 그렇고, 오늘도 루시 학생이 사색이 돼서 메이 학생을 업고 뛰어온 걸 보면.”

“루시선배가… 그랬다고요?”

“사실 저도 상당히 의외라고 생각했습니다. 천루시가 겉으로는 모두와 원만히 지내는 듯 보여도, 정작 진심으로 곁을 내주는 사람은 지금까지 없었으니까요.”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 남주 놈 일도 그렇고, 오늘도… 나한테 정말 관심이 있다는 건가? 그렇고 그런 쪽으로 해석해도 된다는 거야?’

안슬온의 부연설명까지 덧붙여지자 메이는 새삼 깊게 생각해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첫 만남부터 마치 오래 알고 지낸 사이인 듯 느껴지던 친밀감.

루트가 개방되었다느니 뭐니 하는 요상한 시스템 메시지.

그리고 가슴 한 켠을 짓누르던… 헉, 맞다!

이래저래 정신없는 와중에도 지금 제 가슴을 가장 묵직하게 짓누르는 것은 따로 있었다. 바로 봉사시간을 채워야 한다는 압박감이었다.

메이는 금방이라도 침대를 박차고 나설 기세로 이불을 홱 걷어냈다.

“선생님, 지금 몇 시예요? 청소시간 다 끝났어요?”

메이의 다급한 물음에 안슬온은 말없이 창밖을 가리켰다. 저무는 태양이 붉은 꼬리를 남기며 넘어가는 중이었다.

메이가 머리를 부여잡고 절규했다.

“으악 안 돼! 내 봉사시간! 오늘 안에 3시간 채우기로 했는데!”

그녀가 이토록 시간 채우기에 혈안이 된 덴 이유가 있었다. 적어도 다음주 수요일 전까진 봉사를 마쳐야 했다.

그래야 빠른 하교가 가능했고, 오매불망 기다리던 매직타워머슬의 콘서트에 갈 수 있었다.

하루라도 정해진 시간을 채우지 못하면 일정이 밀렸다.

허둥지둥 일어서려는 메이를 안슬온이 제지했다.

“오죽고의 보건교사로서, 아직 충분히 회복하지 못한 학생을 보낼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저 무진장 급하단 말이에요, 선생님!”“봉사 시간을 채워야 하는 게 문제라면, 제가 해결해 줄 수 있습니다.”“…네? 선생님이요?”

안슬온은 메이 옆에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본격적으로 무언가를 제안할 심산인 듯 보였다.

“제가 주말마다 방문하는 곳이 있는데, 메이 학생이 같이 가준다면 봉사시간을 주겠습니다.”

“저 죄송하지만… 쌤이 주말마다 가는 데면… 성당 아니에요?”

안슬온은 교내에서 아주 신실한 신자로 소문나 있는 사내였다.

그가 굳이 장소를 밝히지 않아도 매주 가는 곳이라면 성당밖에 없었다.

안슬온도 딱히 부정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맞습니다. 하지만 미사를 드리러 가는 것만은 아닙니다. 성당에서 운영하는 보육원이 하나 있는데, 그곳에서 아이들을 가르칩니다.”

“누가요? 선생님이요?”

“예. 그리고 이제 메이학생도요.”

“아뇨, 전 아직 대답 안 했는데요. 제가 그런 걸 어떻게….”

“별 거 아닙니다. 메이 학생의 실력이면 충분합니다.”

안슬온의 시선이 보건실 벽면으로 옮겨갔다. 크게 프린트 되어있는 수학 경시대회 수상자 명단이 눈에 띄었다. 최상단에 위치한 이름은 한메이.

안슬온은 나긋한 어조로 메이를 설득했다.

“어차피 몸도 좋지 않으니, 당분간은 태양 아래 오래 있는 것도 금물입니다. 더 의미 있는 곳에 쓰일 수 있는 메이 학생의 능력을 고작 껌이나 떼게 두기엔 아깝기도 하고요. 모루수 교감껜 제가 잘 얘기해 두도록 하죠. 어떤가요?”

“음… 선생님께서 그렇게까지 해주신다면야… 좋아요. 할래요.”

“잘 생각했습니다. 그럼 자세한 설명은 나중에 하는 걸로 하고,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저녁시간 전에 교무회의가 있어서.”

“감사해요, 선생님.”

작게 고개를 끄덕인 안슬온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메이가 편히 쉴 수 있도록 커튼을 둘러주고는 서류파일 몇 개를 챙겨 보건실을 나섰다.

막 문을 닫고 돌아서자마자 검은 인영과 맞닥뜨렸다.

“……굴라인 학생?”

벽에 등을 기대고 서있던 굴라인이 꾸벅 고개 숙여 인사했다. 그는 내내 문밖을 지키고 선 모양이었다.

안슬온은 다소 의아한 기색을 표했다. 그도 그럴게 굴라인이 먼저 보건실을 찾은 적이 전무후무했기 때문이었다.

유도부 유망주답게 갖가지 잔상처들과 부상을 항상 달고 다님에도 불구하고.

“학생이 여긴 웬일입니까? 어디가 크게 다친 건-”

“아뇨. 전해줄 게 있어서 왔습니다.”

퍽 단호하게 용건을 뱉은 굴라인이 손에 든 것을 내밀었다.

반듯하게 갠 체육복 상의였다. 색깔로 보아 2학년 것 같은데, 이걸 굴라인이 왜?

여전히 궁금증이 해소되지 않은 얼굴로 있는 안슬온에게 굴라인이 잠시 주저하다 입을 뗐다.

“메이가 정신을 잃던 차에 떨어뜨리고 간 것을 발견했습니다. 선생님께서 메이에게 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왜 학생이 직접 전해주지 않습니까?”

“…….”

말문이 막힌 건지, 아니면 적당한 답을 골라내는 건지. 굴라인은 입을 꾹 다물고 가라앉은 눈으로 문을 잠시 응시했다.

체육복을 쥔 투박한 손이 잘게 떨렸다. 침묵은 한참동안이나 계속되었다.

이윽고 안슬온이 먼저 적막을 깨려던 찰나.

“별로 그럴만한 사이는 아닌지라.”

굴라인은 짤막하게 답한 뒤 올 때처럼 깍듯이 인사하고서 등을 돌렸다.

안슬온은 건네받은 체육복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퍽 쌉쌀한 맛이 감도는 문장이 귓가에 맴돌았다.

듣는 사람도 이런데, 당사자는 오죽할까.

고개를 돌리니 불투명한 작은 창 너머 메이의 실루엣이 어렴풋이 어른거렸다.

안슬온은 건조한 숨을 내쉬었다.

“메이 학생이… 꽤 인기가 많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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