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네가 새로 왔다는 유도부 매니저야?”
메이의 머리 위로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안 그래도 부원들 일정 정리하느라 빠듯한데, 대체 누구야? 메이는 애써 표정관리를 하며 서류에 푹 파묻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사람 좋게 생긋 웃는 낯이 곧장 가까이 다가왔다.
“안녕. 나는 육상부 매니전데, 일이 많으면 내가 좀 도와줄까?”
아무리 일이 많아도 그렇지 어떻게 타 부의 사람에게 유도부 일을 맡긴단 말인지.
거기다 저 은근한 눈빛에서 느껴지는 저의는 단순한 호의뿐만이 아니었다.
메이가 체육관 한쪽에 기다랗게 놓인 계단참에 앉아 서류와 씨름하기를 한 시간.
그녀 스스로는 인지하지 못했지만, 전학 오자마자 수탁허의 파격적인 지지로 학생회에 입성했다는 소문의 주인공을 주시하는 눈길은 상당했다.
개중에선 상투적인 호기심을 넘어 은근한 애정을 표하는 이들도 다수 존재했다.
바로 지금처럼.
“네 이름은 한메이 맞지? 줘 봐, 뭐부터 도와주면 돼?”
남학생이 메이의 서류를 가져가려 손을 뻗었다. 메이는 반사적으로 몸을 물렸다.
‘뭐야, 지금 나한테 관심 있다는 거야? 어휴, 같은 학년이었으면 딱 잘라 거절했을 텐데. 하필이면 선배라 함부로 하기도 애매하네.’
그래도 아닌 건 아닌 거다.
메이는 딸각거리는 볼펜 끝이 어느 쪽 콧구멍에 쑤셔지면 더 잘 어울릴까 상상하다,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뇨, 말씀은 고맙지만 괜찮아요. 혼자서도 충분해요.”
“에이, 그러지 말고…….”
퍽 알아듣게 설명했건만. 남학생은 되레 능글맞게 웃으며 가까이 몸을 붙여왔다.
메이는 눈살을 찌푸리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
빠악-!
“윽, 뭐야!”
쾌속으로 날아온 농구공 하나가 정확히 남학생을 치고 튕겨져 나갔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드니 품에 농구공 서너 개를 든 채 걸어오는 굴라인이 보였다.
이윽고 두 사람 앞까지 다다른 그는 덤덤하게 읊조렸다.
“미안합니다. 체육관을 정리한다는 게 그만 손을 삐끗했군요.”
정중하기 짝이 없는 말과는 달리, 표정에선 미안함이라곤 한 톨만큼도 느껴지지 않았다.
도리어 남학생에게 박혀드는 시선은 매섭기만 했다.
그래도 일단 사과는 사과. 대체 손을 어떻게 삐끗하면 농구공이 야구공마냥 날아올 수 있는진 모르겠다만, 저리 깍듯이 구는데 할 말이 더 있을 리가.
“아, 아냐. 괜찮아, 그럴수도 있지.”
남학생은 괜스레 헛기침을 하며 슬금슬금 멀어졌다. 기실 사과하지 않았더라도 저 학생답지 않게 떡 벌어진 몸을 보면 절로 어깨가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메이 역시 벌어진 유도복 깃 사이로 이따금 드러나는 굴곡에 어느새 시선이 가고 말았다.
‘어우… 와… 진짜… 대박이다….’
남학생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도 메이의 시선은 좀처럼 떠날 줄을 몰랐다.
결국 굴라인이 먼저 그녀를 상념에서 끌어올렸다.
“메이. 괜찮습니까?”
“예, 예? 그야 물론… 아, 정리하는 거 도와드릴게요!”
퍼뜩 정신을 차린 메이는 허둥지둥 일어났다. 무례하게 뚫어져라 쳐다보는 실수를 다 하다니.
하지만 본능적으로 시선이 가게 만드는 완벽한 조형체였음을 부인할 순 없었다.
메이는 자신이 이렇게 짐승 같은 놈이었나, 한탄하며 일부러 바삐 발을 놀렸다.
홧홧하게 달아올랐을 얼굴을 감추기 위함이었다. 곳곳에 널브러진 기구들을 주워 담는 동안에도 통 식을 줄을 몰라 난감하기만 했다.
“메이, 그렇게 서두르지 않아도…….”
“아, 아뇨! 제가 원래 빠릿빠릿한 걸 좋아해서요!”
“……그렇습니까.”
메이를 빤히 응시하는 굴라인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풀어졌다. 금전까지 남학생을 죽일 듯 노려보던 시퍼런 낯빛은 온데간데없었다.
곧 메이의 곁에 커다란 그림자가 같이 움직였다.
* * *
어느덧 붉은 석양빛이 창가로 희부옇게 비쳐들었다. 메이는 기록일지에 쌓인 먼지를 털어내며 창고 문을 잠글 열쇠를 찾았다.
드디어 체육관 정리를 마치고 막 나서기 전, 묵직한 음성이 떨어졌다.
“저…… 메이.”
한참을 주저하다 겨우 꺼낸 목소리. 항상 무뚝뚝하기만 하던 양반이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메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를 바라봤다.
그러고도 몇 번이나 말을 골라내고 골라낸 굴라인은 멋쩍은 듯 물었다.
“혹시 오늘 시간 있습니까.”
“시간… 이요?”
“괜찮다면, 호신술을 알려주고 싶습니다. 혹시 모르니 자신의 몸을 지킬 정도는 익혀두었으면 해서.”
어째 갈수록 더 의외인 상황의 연속이었다. 메이는 오늘따라 답지 않게 구는 그를 찬찬히 살폈다.
석양 탓인지 조금 붉어 보이는 얼굴. 그러나 아까의 남학생처럼 불순한 의도는 포착되지 않았다.
말 그대로 순전한 호의인 듯한데….
‘그러니까 나한테 갑자기 왜?’
지난 18년간 마땅한 체술 없이도 잘 살아왔는데, 급히 호신술을 배워야 할 정도로 위험한 일이 생긴다는 건가?
역시 이 오죽고, 오늘도 죽는 고등학교란 건가? 그런 거야?
무수한 의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올랐으나, 기실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그, 말씀은 감사하지만 어쩌죠. 오늘은 선약이 있어서….”
때마침 열린 창고 문으로 기다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누군가가 문가에 기댄 채 서 있었다. 선약의 주인공이었다.
“안타깝게도 내 파트너라네.”
반짝이는 머리칼만큼이나 부드러운 목소리는 단번에 시선을 집중시켰다.
“오늘은 아쉽지만 먼저 가는 게 좋겠어, 굴라인. 메이는 나와 함께 여름축제에서 선보일 합동 공연을 연습해야 하거든.”
갈이안이 예의 웃는 상을 유지한 채 굴라인 앞으로 다가왔다.
마치 메이와 그 사이를 갈라놓듯 미묘하게 선 자리.
굴라인의 입매가 딱딱하게 굳는 것을 보며 갈이안은 여유롭게 메이를 끌었다.
“어서 가자, 메이. 시간이 꽤 촉박해.”
“앗, 네. 그럼 굴라인 선배, 내일 봬요!”
유장하게 걸음을 옮기는 갈이안을 뒤따라나가며 메이가 손을 흔들었다.
굴라인은 이번에도 가만히 서있기만 했다. 그 둘의 신형이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우두커니 한 자리에서.
* * *
“으, 벌써 어두워졌네. 어디보자, 내 귀염둥이를 저기에 뒀던가…….”
합동연습을 마치고서 하교하는 길. 빠듯하게 하루 일정을 마친 메이는 걸음을 서두르며 구석진 골목가로 향했다.
막 꺾어진 코너를 돌려던 차에, 익숙한 목소리가 귓전을 때렸다.
“하- 진짜 성가셔서 원.”
불평불만이 잔뜩 낀 목소리의 주인은 다름 아닌 수남주였다.
메이는 헛숨을 삼키며 빈 상가 안으로 후다닥 몸을 숨겼다. 다행히 들킨 것 같지는 않았다.
“같잖은 여자애 하나 손봐주는 게 그렇게 어려워? 뭐 별거라고 시킨 일 하나 제대로 못하고 말이야, 쯧.”
모자를 푹 눌러쓴 그는 시종일관 투덜거리며 골목을 벗어났다.
메이는 혹시 몰라 가방으로 얼굴을 가린 채 슬금슬금 상가에서 나왔다.
‘뭐야, 대머리 돼서 학교 한 달간 안 나온다고 하지 않았나? 웬일이지?’
악독한 그 성격 상 그냥 오진 않았을 텐데.
그 속이 퍽 의뭉스러운 게 아니었으나 메이는 곧 이유를 알게 되었다.
“세상에… 굴라인 선배!”
오후에 봤던 멀끔한 모습은 어디가고, 엉망진창이 된 몸이 골목 구석에 널브러져 있었다.
메이는 황급히 그 곁으로 다가가 굴라인을 일으켰다. 비릿한 혈향과 함께 거친 숨이 귓가를 맴돌았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에요, 선배. 누가 이런 끔찍한 짓을…!”
“…….”
“어떻게 된 거예요. 뭐라 말 좀 해주세요, 네?”
“…….”
메이가 집요하게 캐물었지만 그만큼 굴라인도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었다.
터진 입술로 밭은 숨만 내쉬면서, 부르튼 살갗에 묻은 흙을 아무렇지도 않게 털어내면서. 마치 별 일도 아니라는 듯이 무상히 굴기만 했다.
그 무던한 모습에 더 속이 탄 메이는 이를 악물고 굴라인의 팔을 제 어깨에 둘러 걸쳤다.
“가요, 선배.”
메이가 끙, 소릴 내며 일어서려하자 굴라인은 그제야 당황한 기색을 표했다.
“어딜… 말입니까?”
“당연히 병원이죠! 아니, 그럼 이 몸으로 그냥 돌아가려고 했어요?”
“괜찮습니다. 그냥 가십시오.”
“보는 사람이 안 괜찮아요.
“도와 달라 한 적 없습니다. 어쭙잖은 호의는 사양하겠습니다.”
허어, 이것 봐라.
메이는 한쪽 눈썹을 치켜 올리며 그를 타박했다.
“저기요, 선배. 지금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거 같은데, 저 길에 퍼질러 있는 아무나 도와줄 만큼 그렇게 착한 사람 아니에요.”
“그럼 왜…!”
“전 매니저잖아요. 선배의 컨디션과 몸 상태를 관리할 책임이 있는 사람이라구요. 그러니까 군소리 말고 제 말 들어요.”
“여긴 학교 밖입니다. 이렇게까지 신경 쓸 필요는 없습니다.”
“아이, 참. 학교 안이든 밖이든, 제가 매니저란 사실엔 변함이 없다구요. 어휴, 안 그래도 몸이 재산인 사람이 신세 망칠 일 있나요. 자꾸 이렇게 나오면 내일 학생회에 소문 쫙 낼 테니 각오하세요.”
빈말로라도 전혀 괜찮다고 할 수 없는 몰골인 주제에 계속 고집을 피우는 것이 이상했다.
메이는 제게 기대 조금씩 일어서는 굴라인을 힐끔거렸다. 동요하지 않으려 애쓰는 얼굴에서 보다 복잡한 사정이 읽혔다.
‘그러고 보니 선배는 수남주와 산다고 들었던 거 같은데. 아까 호신술이니 뭐니 한 것도 그렇고, 방금 지나간 남주놈이 했던 말도 그렇고…….’
아니라고 믿고 싶었지만 혹시나는 역시나인 경우가 다반사였으므로, 메이는 아예 초장부터 쐐기를 박았다.
“이거, 남주 그 새끼 짓이죠.”
아니나 다를까. 굴라인의 몸이 눈에 띄게 움찔했다.
메이는 한숨을 내쉬며 그를 골목 안쪽으로 이끌었다.
“그 자식이 선배한테 저 손봐주라고 시켰는데 거절해서 이렇게 만든 거예요?”
“…….”
굴라인이 시선을 피하며 입술을 짓씹었다. 원체 거짓말에 서투른 그는 찔리는 일이 있을 때마다 눈을 마주치지 못하곤 했다.
으이구 맞구만, 맞아. 묵언에서 답을 얻은 메이는 더 다그치는 대신 걸음을 멈췄다.
희미한 가로등 불빛아래 커다란 쇳덩이 하나가 반짝였다.
“응급상황이니까 선배한테만 보여주는 거예요. 짜잔, 제 애완자전거 에르제베트 2세를 소개합니다.”
“에르… 예? 그보다 이게 어딜 봐서 자전…!”
“자, 타요. 제 허리에 단단히 팔 두르고요.”
굴라인이 뭐라 항의하기도 전에 헬멧이 쑥 씌워졌다.
메이가 야심차게 소개한 에르 어쩌구는 스쿠터였다.
굴라인이 어안이 벙벙해서 정신 못 차리는 사이 메이는 그를 뒤에 태운 뒤 핸들에 손을 올렸다.
짤막한 다짐 같은 한 마디와 함께.
“나는 선배가 마음에 들어요.”
쿵, 뭔가가 크게 흔들리는 소리가 났다.
굴라인의 목울대가 울렁이며 마른 침이 넘어갔다. 머리가 일순 핑 도는 듯했다.
지금 자신을 온통 휘젓는 이 진동이 제 심장박동일 리가 없다. 그리 스스로를 거듭 세뇌시키며 굴라인은 힘겹게 입술을 뗐다.
“남주에게… 그리 휘둘리는데도 말입니까. 저는 사람을 부드럽게 대할 줄도 모릅니다. 지금만 봐도 당신을….”
“네. 그런데도 끝까지 소신을 지키는 그런 목석같은 점이 좋아요. 결국 남주 말 안 들었잖아요, 선배.”
찰칵, 시동키를 돌리는 마찰음이 대화를 잠시 끊었다.
메이는 선선한 숨을 들이키며 되물었다.
“선배는요? 선배는 내가 마음에 들어요?
“…….”
이 사람과의 대화엔 언제나 적막이 흐른다. 늘 신중하게 고민하고 고심한 끝에 최대한 말을 골라내어 답하기 때문이겠지.
무뚝뚝함 저편에 느껴지는 다정함이 메이는 싫지 않았다.
그녀는 느긋하게 기다렸고, 한참을 침묵으로 응수하던 굴라인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잔잔하지만 확고한 목소리가 메이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단단한 어조만큼이나 울림을 주는 답이었다.
메이는 망설임 없이 시동을 걸었다.
부르릉-
도로를 가로지르는 배기음소리가 덩달아 시원하게 울렸다.
메이의 입가에도 시원스레 미소가 걸렸다.
“그거면 됐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