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남자친구는 사대천왕!
#1
*if클라인 외전입니다.
감상에 참고해주세요.
정오까지 몇 분 남지 않은, 봄볕이 따사로운 4교시.
교실 한가운데, 긴 머리칼을 늘어뜨린 한 여학생이 연신 고개를 자울거렸다. 구불거리는 머리칼은 이따금 햇살줄기 안으로 떨어질 때면 언뜻 푸른빛을 띠었다.
와중에도 선생의 말소리를 배경음악 삼은 고갯짓은 그칠 줄을 몰랐다.
리드미컬하게 흔들어 재끼던 헤드뱅잉이 최고조에 달했을 무렵, 꾹 감겨있던 두 눈이 마침내 떠졌다.
‘아으, 머리야…….’
메이는 미간을 와락 구기며 급작스레 들이닥친 빛에 적응하기 위해 눈을 꿈벅거렸다.
분명 수업 중에 잠깐 졸았을 뿐일 텐데. 이상하게도 몸이 천근만근이었다. 머릿속을 가득 채운 긴긴 꿈은 덤이었다.
‘꿈에서 내가… 귀족아가씨였지.’
소설에서나 볼 법한 귀족 영애. 하지만 평범한 레이디가 아닌, 웃기지도 않는 관종영애.
무도회는커녕 광장에서 비트박스나 해대고, 추태란 추태는 다 부리며 사는. 그런 주제에 끝내는 세계를 구하고 마는.
‘초킬이나 안 당하면 다행인 관종이 세계구원이라고?’
그야말로 해괴한 꿈이었다.
‘요즘 웹소설을 너무 많이 봤나.’
곧 시험기간이니 차츰 줄여야겠단 생각을 하며 메이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런데, 눈앞에 요상한 창이 하나 떠있었다.
[현재 당신의 관심 수치는 1%입니다.]
[남은 시간 내 100%를 달성하지 못할 시, 당신은 ‘고삼의 굴레’에 갇힙니다.]
[남은 시간: 8개월 10일 7분 7초]
‘자, 잠깐만 타임. 이게 뭐야?’
마치 자신을 비웃듯 깜빡이는, 게임 속에서나 나올 법한 시스템 창. 아무리 현실을 부정하려 애써도 메시지는 빌어먹게 선명했다.
애석하게도 상황을 이해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방금 꾼 꿈 때문인지 메이는 자신의 처지를 제법 빠르게 납득할 수 있었다.
그녀는 반사적으로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ㅅ1발! 제정신이야? 아무리 픽션이라도 할 짓이 있고 못할 짓이 있지 이게 말이야 똥이야! 고삼루프에 갇힌다고? 미쳤냐?”
“미친 건 너다. 한메이, 나가.”
조용히 판서를 쓰고 있던 선생이 때 아닌 난동에 눈살을 찌푸리며 일갈했다.
메이는 그제야 수업 중이었음을 자각하고 싹싹 빌었지만, 선생은 모델 뺨치는 그 비주얼만큼이나 단호했다.
원어민 영어교사인 실버가 교실 뒤쪽을 향해 고개를 까딱였다. 결국 메이는 대꾸 한번 못하고 울상을 지은 채 돌아서야만 했다.
딩 딩 딩- 빠빠빠빱빱 빠빠빠빱~ 점심빱~
마침 기적처럼 친 점심시간 종소리가 아니었더라면, 정말 그랬을 것이다. 메이는 실버에게 감사를 표하며 그대로 문밖으로 나갔다.
“쌤, 저는 쌤 말대로 나간 거예요-! 앗싸, 오늘 쌈무에 오리불고기!”
관심수치니 뭐니, 밥시간의 여고생에겐 뵈는 게 없었다. 오로지 목적지를 향해 질주할 두 다리만 예열되어 있을 뿐.
원래 여고생이란 무장한 병사 두 명만큼의 전투력을 자랑하는 병기로서, 충분히 연료를 넣어주지 않으면 움직이기 힘들다.
자리를 박차고 나선 것은 비단 메이뿐만이 아니었다. 각 반마다 문이 벌컥벌컥 열리고 학생들이 물소떼처럼 쏟아져 나왔다.
“야야야 뛰지 마! 이따 체육 수행평가 있는 거 몰라? 다쳐서 찔찔짜야 정신 차릴래?”
지나가던 신용용 선생이 부러진 배드민턴 채에 청테이프를 감아 만든 회초리를 휘두르며 한소리 던졌지만, 귀담아 듣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북새통이 따로 없는 복도 위론 여느 때처럼 방송부원의 낭랑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안녕하세요 여러분~ 학우분들의 나른한 오후를 책임질 깜찍이 잭히입니다. 드디어 하루 중 가장 고대하던 점심시간이네요~ 다들 세렝게티의 얼룩말처럼 달리느라 정신들 없겠지만, 추천곡을 빼놓을 순 없겠죠. 그럼 모두들 행복한 맛점하시고, 선곡을 남기며 저는 빠르게 물러가겠습니다. 매직타워머슬이 부릅니다, 죽어도 못 죽어.]
마침 자신이 신청했던 유명아이돌 그룹의 노래를 들으며 메이는 신나게 계단을 뛰어내렸다.
* * *
이름 한메이, 낭랑 18세.
비자발적 관종이 된 지 일주일 째. 그녀는 평소와 별다를 바 없는 해피스쿨라이프를 영위하는 중이었다.
여기서 잠깐 그녀의 가족구성원을 설명하자면, 위로 성인인 오빠가 둘, 아직 중학생인 남동생이 하나, 이 넷을 키우는 아버지 하나다.
첫째와 둘째는 한다넬, 한노아. 동생은 한미원. 그리고 아버지는… 한윗니.
지금까지 개명을 하지 않고 살아온 인생에 기꺼이 박수를 쳐주고픈 조합들이었다.
그러나 이름들이 다 왜 이러냐 물어도 메이는 딱히 해줄 말이 없었다.
아빠한테 따져봤자 그저 이제는 볼 수 없는 어머니께서 소중한 자식들을 위해 일부러 21세기 맞춤형으로 지어주고 가셨다는 말씀만 반복하실 뿐.
물론 어머니의 사려 깊은 안배를 모욕하고픈 마음은 없지만, 이름들이 영 석연치 않은 건 사실이었다.
메이는 가끔 아빠 혼자만 요상한 이름이기 싫어서 엄마를 말리지 않았던 건 아닐까, 하는 의심도 했다. 솔직히 나름 합리적인 의심 아닌가?
하지만 요즈음엔 굳이 불평하진 않는다.
그야,
“사, 사대천왕이다!”
“꺄악! 갈이안 선배!”
“미친… 굴라인 팔근육 좀 봐. 진짜 미쳤어, 미쳤어!”
“천루시 저 퇴폐미는 어쩔! 눈 멀기 전에 빨리 선글라스 챙겨!”
“여기 좀 봐주세요! 한겨울의 피톤치드 카리스마 수탁허 부회장 선배!”
“저기 뒤에는 누구지? 아, 회장선배의 발닦개… 아니 경제학술동아리장인 박갤훈 선배도 있어!”
여기엔 더 이상한 이름들이 넘쳐나니까.
정말 제대로 들은 게 맞나 귀를 한번쯤 후비게끔 만드는 이곳은 다름 아닌 학교다.
그것도 메이가 다닌 지 열흘 정도 되어가는, 새로 전학 온 학교.
누군가 전학 간 학교 이름이 뭐니? 묻는다면 왠지 모르게 오늘도 죽을 것 같은 얼굴로 답하게 되는, 그 이름하야 오죽고등학교.
학교명부터 이 모양인데 교내사정은 더했다. 분명 앞에서 21세기 어쩌구 하지 않았나? 근데 사대천왕이라니? 보이지도 않는 후광에 꺾인 갈대 마냥 우수수 스러지는 팬클럽이라니?
하지만 사대천왕이니 뭐니 고데기 필참 수준의 대사여도 어쩔 수가 없다. 안타깝게도 이 세계의 창조주가 그런 세대다.
창조주는 청춘물이 보고 싶었고, 청춘하면 학교였고, 학교하면 감성 중에서도 가장 큰 항마력을 필요로 한다는 <인소감성>을 빠뜨릴 수 없는 법. 그리고 역하렘은 원래 이런 맛이 있는 거다.
그럼 지금부터 그 맛 중의 맛, 진미들을 소개하겠다.
먼저 오죽고의 사대천왕 넘버원 갈이안.
“조심하게, 부딪혀서 넘어지기라도 하면 큰일이잖나.”
“아아아! 쏘 스윗한 저 목소리! 귀가 녹아내린다!”
“한겨울의 호빵도 저보다 뜨끈하진 못할거야! 과연 왕세자님!”
말투가 왜 그러냐고는 묻지 마라. 원래 컨셉 한번 씨게 잡는 애들이 무슨무슨 천왕 칭호를 획득할 수 있는 거다. 그럴 배짱도 없는 나약한 녀석들은 감히 그 축에 끼지도 못하는 게 험난한 인소의 법칙이다.
오죽고의 학생들은 이미 완벽하게 적응을 마쳐 그에게 왕세자라는 이명까지 지어주었다.
모 소설의 백금발 왕세자와 분위기가 굉장히 비슷하다나 뭐라나. 색소가 옅은 탓인지 갈이안의 머리 역시 언뜻 보면 백금발로 보이기도 했다.
아무튼, 왕세자 갈이안은 그 단정한 품행만큼이나 성품도 우수했다. 자애롭고 인자한 왕자님.
오죽하면 오죽고에서 전교회장은 3년 내내 갈이안뿐이었다.
품행단정 성품우수 전교회장. …이라면 당연히 전교1등도 기본옵션으로 따라와야 하는 게 정석.
하지만 오죽고의 전교1등 자리를 갈이안 대신 점거한 사람은 따로 있었다.
“너부터 비키지 그래? 내 발이 네 뒤꿈치를 내려찍기 전에.”
“미친… 단어 사이사이 느껴지는 저 퇴폐나른섹시!”
“지금이 낮 12시인지 밤 12시인지 헷갈려! 찌푸린 저 미간에 끼고 싶다!”
바로 사대천왕 넘버 투 천루시.
양아치와 우등생, 그 사이 어딘가에 위치한 그는 일반적인 상식으론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사내였다.
분명 하루가 멀다 하고 결석에, 학교를 숙박시설 쯤으로 아는 나태함에, 입학 때부터 선후배 가릴 것 없이 나가는 일관적인 반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단 한 번도 전교 1등을 놓친 적이 없었다. 무료할 때마다 한번씩 교외 대회에 나가 상을 쓸어오는 일도 허다했다.
워낙 자기 내킬 때만 나서서 그렇지, 종목을 불문하고 그는 가히 천재라 불릴만했다.
행실 역시 조금 거칠 뿐이지 정당한 이유 없이 누군가에게 해를 준 적도 없었다. 오히려 삥이나 뜯고 다니는 진짜 양아치들을 살짝 교육해 준 거라면 몰라도.
천루시의 걸걸한 방식에 길들여진 추종자들은 되레 그를 정의의 사도쯤으로 모시고 다녔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교사들도 그의 행적에 대해 별다른 제재를 가하지 않았다. 조금 못마땅하긴 해도 학교에 이득이 되는 경우가 더 허다했으므로.
그렇다면 이쯤에서 사대천왕 넘버쓰리를 소개하지 않을 수가 없는데, 그는 앞선 둘과는 활약하는 무대가 달랐다.
“죄송하지만 잠시만 비켜주십시오, 통행에 방해가 됩니다.”
“내가 잘못 본 건가? 방금 등근육이 말하지 않았어?”
“나는 가슴근육인줄 알았는데.”
“팔뚝 아니었음?”
교장마저 눈여겨보고 있는 유도부 유망주, 굴라인.
그는 늘상 과묵하게 입을 닫고 있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그러나 그것이 꼭 불친절함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갈이안만큼 눈에 띄게 상냥하지 않아서 그렇지, 그는 그 나름대로 다정했다. 마치 비오는 길가의 고양이를 집안으로 들이지는 못하더라도, 그 곁에 우산을 들고 하루 종일 서있는 종류의 다정함이랄까.
잔정이 많지만 타인의 집에 얹혀사는 열악한 환경 탓에 일부러 스스로를 억누르곤 했다.
굴라인의 추종자들은 그가 항상 좁은 상자에 몸을 욱여넣은 채 살고 있어서 그렇지, 진정 상자를 찢고 나온다면 그의 (집)주인조차 막을 수 없을거라 입에 침이 마르도록 설파하고 다녔다.
사실 그건 핑계고 죽굴사-죽어도 굴라인 사랑해-들은 그 때에 비로소 터질 야성미를 굉장히 고대하는 눈치였다.
말만 들으면 그 (집)주인이 굉장히 악독한 이 같은데, 반은 맞고 반은 틀린 말이었다.
그 주인이란 작자들은 남매였다. 그리고 그 중 동생인 수탁허는 굴라인과 마찬가지로 사대천왕 중 한명이었다.
나름 인성평가도 더해지는 사대천왕은 성깔에 하자가 있으면 발탁될 수 없었다. 그러니 수탁허는 독할지언정 악독하진 않았다. 애초에 굴라인과 사이가 나쁜 것도 아니었다.
“복도에서 이리 소란스러운 건 학업에 방해됩니다. 곧 수업도 시작되니, 모두 자리로 돌아가세요.”
“흐앗…! 싸늘하다. 가슴에 비수가 날아와 꽂힌다.”
“하지만 걱정마라. 그녀를 향한 내 마음은 저 시선보다 깊으니.”
…이쯤 되면 여기가 엘리트주접러양성소 아닌가 싶지만, 오죽고가 맞다.
오죽고의 전교 부회장이자 유도부 매니저인 수탁허. 서늘하고 고고한 겨울호수.
그 외양만큼이나 냉철한 그녀는 특유의 카리스마로 수많은 소녀팬들의 가슴에 번번이 불을 지르기 일쑤였다.
분명 수탁허는 찬바람 쌩쌩 부는 겨울이건만. 죽수사-죽어도 수탁허 사랑뿐-들은 불나방이 따로 없었다.
그녀가 유도부 매니저로 발탁된 날, 입부 신청서가 소나기처럼 쏟아졌으니 말이다. 상상을 초월한 강도 높은 훈련 탓에 지옥 그 자체라 불리는 유도부에!
물론 열에 열은 호되게 당하고 멀리서 지켜보는 것만으로 만족해야함을 깨닫는다.
이렇게 사대천왕은 그 스펙만으로 이미 상당한 유명인사가 될 수밖에 없는 조건이었다.
하지만 이 넷이 유명한 결정적인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것은 뛰어난 두뇌도, 운동신경도, 날카로운 카리스마도 아닌.
‘바로 얼굴!’
얼굴! 얼굴이었다. 중요하니까 두 번 말한다.
사실 천 번을 더 말해도 부족할 만큼 그 넷은 완벽한 미를 갖추고 있었다.
메이 역시 그 사실만큼은 피타고라스 정리 뭐시기 따위보다 더 절대적인 명제라고 생각했다.
어딜 내놔도 꿀리는 법은 절대 없을 거라 여겼던 자기집 남정네들이 잠시 잊힐 만큼.
무엇보다 우리의 주인공 메이는, 당연하게도 이런 상황을 꽤나 즐기고 있었다.
“사탄들의 학교에… 루시퍼의 등장이라. 이거 흥미로운걸? 쿡쿡쿡…….”
메이가 한쪽 입꼬리를 픽 올리며 중얼거렸다. 그러자 옆에서 팔짱을 끼고 있던 이뒤수가 익숙하다는 듯 밍밍한 눈으로 그녀를 내다봤다.
“메이… 그게 또 무슨 소리야.”
“아무것도 아냐. 그냥 갑자기 이런 대사를 쳐보고 싶어졌지 뭐야. 어서 밥이나 먹으러 가자!”
“으, 응…….”
뒤수는 겸연쩍은 기색을 애써 감추며 잠자코 메이를 따랐다.
메이가 전학 와서 새로이 사귀게 된 친구, 이뒤수. 쾌활하고 붙임성도 좋은데다 메이의 난무하는 드립을 받아줄 만큼 착했다.
거기다 결정적으로, 최근 정상가도를 달리고 있는 아이돌그룹 매직타워머슬과 같은 소속사 연습생이었다.
메이의 방 한 면을 빼곡히 덮고 있는 머스클의 포스터와 앨범은 전부 뒤수가 준 것이었다.
그날로 메이는 그녀의 노예… 아니 단짝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