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결혼식은 가능한 최소한의 하객만을 초대한 채 진행되었다.
루치펠의 무지막지한 혼수로 국고는 넘쳐났지만 굳이 결혼식을 성대하게 열어 낭비할 필요는 없었다. 그 돈이면 국민들을 위한 연회를 더 풍성하게 열 수 있었고.
무엇보다 나는 이 사람들로 충분했다.
“노아, 안쪽부터 들어가 앉아라.”
“그럼 형이 안쪽에 앉아. 난 여기 앉을 거야.”
“형들, 그냥 빨리 아무데나 앉아요. 그리고 아버지, 아직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부터 우시면 어떡해요.”
“하지만 메이가…!”
손수건으로 연신 눈물을 훔치는 아빠를 달래며 슈트레커 삼형제가 가장 앞 열에 자리를 잡았다.
그 뒤로도 하객들이 줄줄이 들어와 앉았다.
“오랜만입니다, 켈른. 전하께선… 이미 착석해계시는군요. ……늘 고생이 많습니다.”
“공작님께서라도 알아주시니 감사합니다….”
“내 흉을 보고 싶은 거라면, 적어도 당사자 뒤에서 하는 건 어떠나.”
“전하께서 더는 강박적으로 완벽에 집착하지 않으시는 건 기뻐할 일이지만… 가끔은 옛날의 전하가 그리워지기도 하는군요.”
“그 마음, 이해합니다.”
“둘 다 내 목소리만 들리지 않는 마법에 걸린 모양이야.”
“그런 마법에라도 정말 걸렸으면 좋으련만…….”
“공작께선 이제 내가 보이지도 않나보군.”
왜인지 다크서클이 나날이 깊어지는 것 같은 켈른과 오늘도 투닥거리는 칼리안과 슈타커,
“콜린, 혼잡하니 내 손을 놓지 말거라.”
“아빠, 제가 몇 살인진 알고 하시는 소리죠?”
“얘 등치를 좀 봐, 실버. 일이년 후면 당신을 잡아먹을지도 모르겠어.”
“난 근육이 많아서 퍽퍽할 거다, 콜린.”
“징그럽게 두 분 다 무슨 소릴 하시는 거예요, 정말… 아, 메이누나!”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콜린을 은근슬쩍 가운데로 밀어 넣으며 오는 신수가족,
“이제 그만 질질 짤 때도 되지 않았냐, 울보야.”
“씨이, 나만 우는 거 아니거든. 셀턴님도… 흡.”
“둘 다 입 다물고 자리에 앉아.”
“셀턴, 마침 제게 손수건이 있습니다. 필요하다면….”
“됐으니까 보스도 얼른 앉기나 하세요. 곧 식 시작하겠어요.”
어김없이 서로 못 잡아먹어 안달인 쌍둥이와 그 둘의 목덜미를 하나씩 잡고 질질 끄는 셀턴, 거절당한 손수건을 머쓱하게 집어넣는 클라인과 그를 뒤따르는 던켈하이트의 일원들.
“제국과 마탑 간의 국혼이라… 아마 옛날의 저에게 지금 순간을 보여줬다면 목에 칼이 들어와도 믿지 않았을 겁니다. 생전 처음 보는 여인에게 모든 치부를 내보이는 것도 모자라 전부를 맡기게 되다니.”
“저 또한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게 현실이군요.”
“…혹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기분이 어떤지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이런 현실을 마주한 성하의 감상이 궁금합니다. 성하께선 저와 비슷한 궤적을 걸어오신 듯하여.”
“대단치 않습니다만… 그저 살아있길 잘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 숱한 멸시와 조롱을 견뎌내고서도 살아있을 만한 가치가 있었습니다, 제 삶은. ……공께선 어떻습니까?”
“글쎄요… 굳이 답을 골라내자면 성하와 같을 수밖에 없겠군요. 그러니 만약 과거의 저를 만난다면 말해주고 싶습니다. 미래에 딛고 서게 될 현실은, 당장 어쩌지 못하는 모든 모욕과 분노를 감내하며 아득바득 살아낼 만큼 눈이 부시다고.”
내 잦은 부재로 인한 뒤처리를 맡다보니 부쩍 가까워진 에드먼드와 란슬롯도 한 곳에 자리를 잡았고,
“하, 우리 선생님 아까워서 어째.”
“메이, 탑주님이 속 썩이면 말해요! 당장 이혼전문변호사 손잡고 달려갈 테니까! 그리고 저와의 혼인신고서에 새로 도장을…!”
“한번은 봐줄 테니 거기까지만, 이디스.”
“넵. 농담이었어요.”
……누구의 하객인지 모를 마탑의 마법사들까지 전부 빈자리를 메웠다.
금세 사람들로 꽉 찬 교황청의 신전은 저마다의 대화로 북적였다. 이윽고 모든 사람들이 모이자 루치펠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이제 갈까, 메이블린?”
나는 하얀 장갑을 낀 손 위에 내 손을 얹었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그러쥐는 손길은 부드러웠다.
칼리안과 슈타커가 고심한 끝에 골랐을 카펫을 따라 걷자 예복을 갖춰 입은 주례자가 우리를 맞이했다.
나름 주례 경력 20년 차 베테랑이라는 신관은 안색이 매우 새파랬는데, 마지막으로 들어선 한 하객 때문인 것 같았다.
내 청으로 주례사는 퍽 짧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좀처럼 진정하질 못했다.
“에, 그, 그, 그러, 니까아… 아, 앞으로, 두, 두두, 두 사람은…….”
어떤 투명인간이 남몰래 그를 흔들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될 만큼 내뱉는 말도 몸도 형편없이 떨렸다.
결국 그를 이토록 떨게 만든 장본인이 직접 나서고야 말았다.
“도저히 못 봐주겠군. 날이라도 샐 셈인가?”
평소 아무렇게나 풀어헤치고 다니던 장발을 단정히 묶은 아가레스가 자리에서 일어나 주례단상 앞에 섰다. 그 뒤로 아뿔싸, 이마를 짚는 카임이 보였다.
신관의 낯빛은 이제 파랗다 못해 새하얗게 질려버렸다.
“흐, 흐아아악…!”
끝내 그는 헛숨을 들이 삼키며 그대로 졸도하고 말았다. 아가레스가 한 것이라곤 손을 댄 것뿐이었는데.
다행히 란슬롯이 눈치 빠르게 대처해준 덕분에 뒤탈은 없었다. 나는 왜인지 익숙한 데자뷰를 느끼며 신관이 들것에 실려 나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 사이에도 아가레스는 태연스레 품을 뒤적거리더니, 꼬깃꼬깃한 종이를 꺼내 펼쳤다.
‘저게 카임이 말한 편지라는 건가.’
그 지엄하신 마계의 군주께서 이리 귀여운 짓을 준비하셨을 줄이야.
나는 벌써부터 두근거리는 가슴을 다스리며 그가 입을 떼길 기다렸다.
귀여운 편지의 서두는 이렇게 열렸다.
“세상에서 가장 간사하고 방자한 딸아.”
음… 시작이 어째 좀 불안하지만 감동적인 낭독이 될 거라 믿어요, 마왕님.
“너를 처음 봤을 땐 무어 이리도 맹랑한데다 어리석을 만큼 무모하기까지 한 인간이 다 있나 싶었다. 제 목숨을 담보로 내게 맞서는 모습이 참 기가 찼지.”
……여전히 믿고 있어요, 마왕님.
그러나 애써 믿으려 해도 초장부터 튀어나온 요상한 수식어에 내 기대는 점차 무너지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나와 눈이 마주친 아가레스가 한차례 헛기침을 하며 목을 풀었다.
저건 뭔가 멋쩍을 때마다 나오는 습관인데, 따위의 생각을 하는 사이 다시 낭독이 이어졌다.
“그 생각은 지금도 유효하나, 어느 순간부터 난 그런 널 기다리고 있더구나. 그제서야 알았다. 마냥 흘려보낼 줄만 알던 시간이, 이리 즐겁게 다가올 수도 있는 것이었음을. 무료한 하루도 널 기다리는 날들 중 하나 뿐이라 생각하면 나쁜 것만은 아니었지. 마왕이 한낱 인간을 기다리다니, 참으로 우스운 일이지 않느냐. 하나 이제 와서 후회해봤자 전부 부질없는 일이구나. 나는 이미 그 건방진 인간을 퍽 아끼게 되었으니 말이다. 스스로도 그를 어찌나 잘 알고 날 이용해먹는지, 가끔은 내가 요물에게 홀린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물론 얼마든지 홀려줄 테니, 성에 자주 들르기나 하거라. 요새 들어 통…….”
아가레스가 한참 편지에 집중할 때였다. 느닷없이 그의 말을 자르고 끼어든 간 큰 인간이 있었다.
“절제의 미학을 아는 것도 군주의 덕목이라 사료됩니다만.”
그 인간, 아니 아버지는 아가레스가 그랬던 것처럼 품에서 곱게 접은 종이뭉치를 꺼냈다.
마왕 너 말 많이 했으니 이제 내 차례라는 듯 그를 슬쩍 밀어내고 단상을 차지하기까지 했다.
정신을 차리고 부랴부랴 다시 주례를 보러 온 신관은 그 모습을 보고 또 까무룩 쓰러졌다.
물론 마왕만큼이나 범상치 않은 심성의 소유자인 우리 아버지께선 아랑곳 않고 편지를 읽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사랑하는 딸아. 이 한 마디를 하기까지…….”
“-그러니 난 이제부터라도…….”
대부님께서도 지지 않고 끼어든 탓에 두 목소리가 겹치고 말았지만.
아가레스와 아빠는 땅따먹기라도 하는지 엎치락뒤치락 서로 단상을 차지하기 위해 열을 냈다. 두 개의 편지가 번갈아가며 떠듬떠듬 읽혔다.
아가레스의 목소리가 좀 더 큰가 싶으면 바로 아빠의 목청이 커졌고, 그러면 얼마 가지 않아 아가레스의 음성이 다시 그를 덮었다.
마치 돌림노래처럼 들리는 희한한 낭독. 카임은 아가레스를 모르는 사람마냥 외면하며 단상 쪽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건 슈트레커 삼형제도 마찬가지였다. 다니엘은 묘하게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돌렸고, 노아는 그 큰 덩치를 어떻게든 줄여보려고 팔짱을 낀 채 몸을 말았다. 그나마 의리 있는 미하일은 두 손을 모으고 기도에 들어갔다.
차마 웃지 못 할 이 상황을 즐기는 건 나뿐인 듯 했다. 내가 참지 못하고 폭소를 터뜨리자 루치펠은 그런 날 보며 떨떠름하게 입꼬릴 끌어올렸다.
“그래, 뭐… 네가 좋다니 됐어.”
“루시는 안 웃겨? 정말 이런 결혼식은 처음이야! 아마 죽을 때까지 못 잊을 거 같아.”
“나는 지금 네가 이렇게 웃는 모습을 못 잊을 거 같은데.”
“……있잖아, 절대 싫다는 건 아닌데 가끔은 예고 좀 하고 들어와 줄래. 내 심장이 종종 하소연을 해서 말이야.”
“나도 딱히 의도하고 하는 건 아니라서. 하지만 노력은 해볼게.”
루치펠이 금전부터 조금씩 지분거리던 손가락 사이를 얽어오며 답했다. 평소에 다르게 깔끔히 올린 머리 탓에 반듯한 이마가 시선을 사로잡았다.
얽힌 손을 당기자 그의 상체가 살짝 기울어지며 얼굴 사이 간격이 좁혀졌다.
나는 반듯한 이마 아래 부드럽게 휘어지는 눈을 마주하며 능청스레 물었다.
“그래서, 웃는 모습조차 죽을 때까지 못 잊을 만큼 예쁜 신부를 얻게 된 지금 심정은?”
“답하면 심장이 하소연을 할 만큼 멋진 남편을 얻은 감상도 들려줄 거야?”
“얼마든지.”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루치펠의 매끄러운 입술이 냉큼 열렸다.
“더할 나위 없이 완벽한 해피엔딩. 옛날엔 고리타분하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겪어보니까 꿈같네. 이젠 이런 꽉 막힌 엔딩이 좋더라.”
“글쎄, 이게 엔딩이라고 누가 그래?”
“아직 남은 이야기가 있어? 여기서 더 행복하면 정말 꿈이라 착각할지도 모르겠는데.”
내가 루치펠과 꿀 떨어지는 눈빛을 주고받는 사이, 돌림노래 편지낭독 쟁탈전은 어느덧 막바지에 다다르고 있었다.
나는 자꾸만 새나오는 웃음을 추스르며 신전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유리조각으로 장식된 긴 창을 통과한 햇살이 하객들의 얼굴 위로 포근하게 쏟아졌다.
처음엔 적대적이었을지라도 종래엔 이토록 사랑하게 된 사람들.
내가 뻗어 내린 뿌리에 기꺼이 얽혀준 사람들.
그들과 같이 걸어온 시간들을 넘어, 비로소 이 자리에 섰다.
시선을 마주한 모든 이들이 사붓한 미소로 내게 화답했다.
그를 마주하자 나는 새삼 깨달았다. 회귀에 회귀를 반복했던 모진 시간들이 마냥 아픈 것만은 아니었음을.
그들이 나로 인해 새 삶을 얻었다 말하는 것처럼, 나도 그랬다. 나 역시 그들로 구원받았다.
‘이들이 아니었다면 난 세계를 지킬 엄두조차 못 냈을 테지.’
지킬 대상이 있다는 건, 무엇보다 소중한 대상이 있다는 건. 결코 사람을 나약하게 만들지 않는다.
삶에서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해지는 순간이 도리어 그럴 때다. 반드시 지켜내고 싶은 것이 있을 때.
모두가 어리석다 매도했던 내 사랑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다. 막강한 무력 앞에 부러질 만큼 유약하지도 않았다.
끝내 신들을 꺾고 우리의 의지를 관철시킬 만큼 굳건해서, 이다지도 아름다운 현재를 피워냈다.
그렇기에 이 반짝이는 순간들로, 나는 계속 사랑할 수 있었다.
이 세상을, 당신을, 그리고 나를.
누군가를 사랑함에 더 이상의 망설임은 없었다. 나는 그런 나를 지독히도 사랑하는 한 남자의 목덜미를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다.
불어온 바람에 면사포가 흘러내려 오로지 둘만의 공간을 만들고, 흐르는 숨결 새로 루치펠이 나직하게 속삭였다.
“그래도 일단 오늘은 해피엔딩인 것 같네. 그렇지?”
등을 받치는 단단한 손길을 느끼며 나는 말간 미소를 한가득 피워냈다.
“앞으로도 그럴 거야. 기대해도 좋아.”
또다시 새로운 시작이었다.
눈이 부시도록 찬란한.
<관종은 오늘도 죽습니다> 외전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