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루치펠에게 프로포즈를 한 다음날 아침.
눈을 뜨기가 무섭게 에드먼드의 새된 외침이 귓가로 꽂혔다.
“폐하! 폐하!”
“네, 네. 듣고 있어요. 무슨 일이길래 아침 댓바람부터 그렇게 호들갑이에요?”
나는 문밖을 향해 소리치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평소 점잖던 그가 이리 체통을 버리면서까지 달려올 일은 별로 없을 텐데.
퍽 급한 용무인 듯 보여 대충 산책용으로도 손색없는 가운을 걸친 뒤 시녀들을 물리고 그를 안으로 들여보냈다.
왜인지 발목을 붙잡는 불안을 애써 떨치기가 무섭게 에드먼드가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지금 이러실 때가 아닙니다. 밖을 좀 보십시오!”
다짜고짜 커튼을 확 걷은 그는 이어 창문까지 활짝 열어 재꼈다.
산란하는 햇빛에 눈살을 찌푸리기도 잠시,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미친… 저게 왜 여기 있어?”
이곳에서 절대 보일 리 없고, 보여서도 안 되는 것이 눈앞에 떡하니 자리잡고 있는 탓이었다.
‘이 미친놈이 기어이 마탑을 또 옮겨왔구나!’
멀지 않은 숲 한가운데 우뚝 솟은 탑 하나.
게다가 저 휘황찬란하게 빛나는 길은 또 뭐란 말인지.
최고급 스크롤과 마석, 갖가지 보석들이 황궁 정문까지 하나의 길을 만들며 빼곡히 깔려있었다. 너무 눈이 부셔서 제대로 쳐다보지도 못할 정도였다.
차라리 돈다발을 까는 게 나을 만큼 어마어마한 양. 몇 년 치 국고를 다 턴다 해도 비등할까 말까한 액수였다.
나는 에드먼드가 그랬던 것처럼 체통도 잊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보석길 끝에서 수십 명의 마법사들을 거느린 루치펠이 말을 몰며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 뒤론 온통 금으로 뒤덮인 마차가 줄줄이 이어졌다.
마치 구혼을 하러 온 여느 왕국의 사절단처럼 늘어진 행렬. 이윽고 내 앞까지 다다른 그가 말에서 훌쩍 뛰어내렸다.
평소의 편한 차림이 아닌, 고위 귀족처럼 흰 제복을 차려입은 루치펠. 그 모습이 지독히도 아름다워서 나는 정신을 바짝 차리기 위해 애써야만 했다.
“루시… 이게 다 뭐야?”
“다 아시면서 폐하께서도 참 짓궂으십니다. 그야 혼수 아니겠습니까.”
내 뒤를 따라 달려 나온 시종들과 기사들, 대신들을 의식해서인지 그가 말투를 바꿨다.
정말이지 빼도 박도 못하게 정식으로 선포할 셈인 듯했다.
오늘 제대로 도장 찍을 테니, 알아서들 들으라는 듯이.
“우리 폐하께서 갖은 정무로 다망하시니, 장차 폐하를 보필할 부군이 되려면 기꺼이 폐하 곁을 지켜야 하는 법이지요.”
그래, 나도 이왕이면 루치펠이 가까이 있는 게 좋다. 그건 말리지 않는다. 하지만 고작 그런 이유로 저 거대한 마탑을 뿌리 채 뽑아 가지고 왔다는 건가? 응?
헛웃음도 나오지 않아 돌처럼 굳어있는 날 보며 루치펠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말했잖습니까. 프로포즈, 하실 거면 먼저 각오하고 저지르시라고. 이 정도는 예상하고 있을 줄 알았습니다만.”
아니, 예상에도 범위가 있지 어떤 멍청이가 시험범위 밖을 공부 하냐고.
‘흑흑, 상대가 너인 순간부터 범위 따윈 애초에 없다 생각했어야 했는데… 내 불찰이다 아이고…….’
정신이 아득했지만 구혼 행각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내 앞에 천천히 무릎을 꿇은 루치펠이 기어코 내 손을 끌어다 반지를 끼워주었다.
익숙한 기운이 손가락을 타고 흘렀다. 그의 본명을 알기도 전인 옛날. 그가 내게 줬던 목걸이에 박힌 마석을 세공해 만든 반지였다.
시선을 올려 나와 눈을 마주한 루치펠은 짐짓 엄숙한 투로 입을 열었다.
“마탑의 주인, 루치펠 럭스. 이노아드의 황제폐하께 결혼을 승인해주실 것을 간청합니다. 부디 당신의 곁을 제게 내어주시겠습니까?”
단정하고도 성스러운 입맞춤이 손등에 닿았다 떨어졌다. 머지않아 쏟아지게 될 그 어떤 승낙의 표시보다 깊은 확신을 주는 숨결.
이런 너를, 거절할 수 있을 리가.
나는 오롯이 나만을 담고 있는 그 눈을 직시한 채 유쾌한 음성으로 답했다.
“평생 도망칠 생각은 안 하는 게 좋을 겁니다. 내가 욕심이 좀 많아서, 한 번 손에 쥔 건 안 놓치는 지라.”
그러자 루치펠이 기다렸다는 듯 눈을 반달로 접으며 해사하게 웃었다.
“언제든 손만 뻗으세요. 기꺼이, 몇 번이고 잡혀드릴 테니.”
* * *
오랜만에 맡는 마왕성 공기에 발걸음이 더욱 빨라졌다. 나는 란슬롯이 이끄는 성기사단과 신관들의 선두에 서서 대전으로 향했다.
악마 대신의 안내를 받아 널따란 홀로 향하니 아가레스가 무료하게 늘어져있던 몸을 일으켰다.
“참 빨리빨리도 오는구나, 굼벵이 녀석.”
“한 나라의 황제를 그렇게 부르는 사람은 마왕님밖에 없을 거예요.”
“마계의 왕을 이리 박대하는 이도 너뿐일 게다.”
나는 아가레스와 시시껄렁한 농을 주고받으며 홀 한가운데 놓인 긴 탁자에 앉았다. 오늘 마왕성에 온 것은 단순히 수다나 떨기 위함이 아니었다.
지난 번 성마대전 이후. 천계와 마계 사이의 영토쟁탈 문제는 모로스가 실권을 잡으면서 원만하게 해결되었다.
덕분에 더 이상 인간계에 마물을 풀어놓지 않아도 되자, 아가레스가 모든 공허를 닫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신권을 대표하는 란슬롯과 동행한 건 이 때문이었다. 인간계와 마계의 배타적인 상호협정.
그 최종 결재 서류에 서명을 휘갈기며 나는 참, 하고 운을 뗐다.
“그러고 보니 한 가지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별로 궁금하지 않으실 수도 있겠지만… 저 결혼해요, 마왕님.”
“……뭐?”
“식은 다음 달에 올리기로 했어요. 아무래도 더 더워지기 전에 치르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마왕님도 그렇게 생각하시죠?”
“방금… 무어라 했느냐?”
“네? 마왕님도 그렇게 생각하시냐고…….”
“아니. 더 전에.”
“어… 다음 달에 결혼한다고요?”
쾅!
갑자기 터진 굉음에 홀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움찔 몸을 떨었다. 나조차도 깜짝 놀라서 하마터면 펄쩍 뛸 뻔했다.
한차례 눈을 꿈벅이니 믿지 못할 상황이 펼쳐져 있었다. 금전까지 멀쩡하던 탁자가 모세의 기적처럼 반으로 쩍 갈라진 것이다. 웬만한 악력으론 금조차도 가기 힘든 돌탁자가.
그 진원 한가운데 박혀있는 것은, 다름 아닌 아가레스의 주먹이었다.
가히 흉기라 불러도 부족할 주먹을 거둔 아가레스가 격분해 호통쳤다.
“뭐? 결혼? 내 눈에 흙이 아니라 설령 넥타르가 들어가기 전까진 절대 그럴 순 없다! 어딜 그런 능구렁이 같은 자식에게…!”
그때였다.
촤악!
난데없이 아가레스의 코앞으로 푸른 액체가 튀었다. 다행히 면전에 끼얹어지거나 옷을 적시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몇 방울은 형형하게 부릅뜬 그의 눈에 들어갔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악마들이 턱을 뚝 떨어뜨리고, 신관들은 거의 울기 직전인 표정으로 양손을 꼭 붙잡았다.
모두가 시한폭탄을 끌어안은 듯 잔뜩 숨죽인 공간.
그 사이를 가르고 어울리지 않게 경건한 음성이 떨어졌다.
“이런, 죄송합니다. 갑자기 손이 미끄러지는 바람에.”
란슬롯은 내용물이 확연히 줄어든 병을 추스르며 태연스레 고개를 숙이고 물러섰다.
한 신관이 덜덜 떨리는 손가락으로 병을 가리키며 울먹였다.
“바, 방금 서, 성하께서… 성하께서…!”
그러자 그의 동료로 보이는 한 성기사가 딱 잘라 일갈했다.
“아냐, 잘못 본 거야.”
“서, 성유물을…….”
“잘못 본 거래도.”
“마왕께 넥타르를 뿌리신…….”
“어허, 잘못 봤다고 했지.”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구는 신관의 대화를 들으며, 나는 아가레스 옆에 붙어 조곤거렸다.
“이런, 어쩌면 좋아요 마왕님. 넥타르가 눈에 들어가셨으니 이제 못마땅해도 허락하실 수밖에 없겠네요. 그래 주시는 거죠? 한번 뱉은 말은 기필코 지키신다는 마왕님이 저는 너무너무 멋져요.”
내가 눈꼬리를 접어 살살 구슬리자, 그는 턱에 꾹 힘을 주고 날 야멸차게 노려보았다.
“널 따르는 것들은 어찌 다 널 닮아 이 모양이냐. 역시 넌 내가 아는 인간 중에 가장 간사하다.”
“그런 절 좋아하시면서, 뭘.”
“가장 방자하기도 하지.”
“그래서 제가 싫어지셨나요?”
“……나 원, 참.”
짤막하게 한숨을 터뜨린 아가레스가 의자에 등을 기대며 고개를 까딱였다.
“그 요사스런 놈한테 가서 전해라. 방자한 인간 얼굴에 조금이라도 그늘이 비치는 날엔, 네놈부터 그늘 아래 묻히게 될 것이라고.”
마뜩잖아 하는 티가 팍팍 느껴지는 어조였다. 그러나 그 안에 담긴 애정마저 불퉁거리진 않았다.
나는 그 퉁명스런 애정이 못내 좋아 실없이 푸슬 웃고 말았다.
“꼭 전할게요. 우리 아버님, 정말 무서운 분이니 조심하라고.”
“방금 아버… 크흠, 흠. 알아들었으면 얼른 가기나 하거라.”
“네, 네. 다음에 봬요, 아버님.”
나는 돌아가기 전 마지막으로 그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일자로 다물린 아가레스의 입꼬리가 주체 못하고 씰룩이고 있었다.
* * *
그로부터 며칠 후.
나는 드레스 자락을 움켜쥔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쩔쩔맸다.
“저… 아빠… 그만 우세요.”
“그래요, 아버지. 오늘은 그냥 드레스 디자인만 정하는 날인걸요.”
“그렇다기엔 노아오빠도 눈가가 붉은 것 같은데.”
“시끄러워. 여기 먼지가 많아서 그래.”
나는 아무리 문질러도 때 하나 묻지 않을 황궁의 의상실을 둘러보다 아빠 옆에 조심스레 앉았다. 하얀 웨딩드레스가 내 움직임을 따라 발치로 사르륵 떨어졌다.
곧 아빠의 물기를 머금은 시선이 내게 닿았다.
“옹알이하며 아장아장 걷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이렇게 다 커서는…!”
“엊그제라기엔 너무 많이 가신 것 같은데요, 아빠. 제국의 황제가 이리 아이 취급받는단 게 알려지면 놀림감이 될 걸요.”
“허나 내 눈엔 아직도 어리기만 한 사랑스런 딸이야. 그건 설령 십 년이 더 지난대도 마찬가지일거다.”
“우와, 우리 아버지 진짜 진심이신가보다. 말수도 이렇게 느시고.”
내가 짐짓 놀라는 척 능청스레 굴자 한쪽에 팔짱을 끼고 서있던 다니엘이 다가왔다.
“네겐 언제나 진심이었다, 메이블린. 노아라면 몰라도, 적어도 우린 늘 그랬어.”
“뭐야, 형. 갑자기 나는 왜 물고 늘어져?”
혼자 진심을 의심당한 노아가 볼멘소리를 냈다. 그는 이제라도 진심을 보여줄 모양인지, 뒷머리를 신경질적으로 벅벅 긁다가 대꾸했다.
“아무튼, 메이블린. 그놈이 단 하루라도 네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지게 만드는 날엔 내가 가만 안 둘 거니까 그렇게 알라고. 뭐, 물론 나보다 아버지께서 먼저 나서시겠지만. 우리 아버지, 평소엔 곰 같아도 화나면 되게 무서운 거 너도 알지?”
“당연히 알지, 아주 잘 알지. 그걸 어떻게 모르겠어.”
다니엘 오라버니 유전자가 누구랑 아주 붕어빵인데.
나는 노아의 말에 웬일로 지극히 공감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리고 여전히 훌쩍이는 아빠와, 다른 드레스를 뒤적여보는 다니엘과, 낯간지러운 대사를 날려서인지 애꿎은 검집으로 바닥을 툭툭 치는 노아와, 아까부터 연신 ‘아름답습니다 누님….’ 이라는 감탄사만 반복하는 미하일을 한데로 끌어당겨 두 팔 가득 안았다.
난데없는 감상인지, 뜬금없는 다짐인지 모를 말들이 속에서 흘러나왔다.
“있잖아요, 저 지금 너무 행복한 거 있죠.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정말 현실인가 싶을 만큼. 그래도 한 가진 확실히 알아요. 앞으로도 전 이렇게, 계속 행복할 거란 걸.”
나는 한데 모인 슈트레커 가족들의 얼굴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
“그러니까 다들 나랑 같이 쭉 행복해줘요, 그럴 수 있죠?”
그러자 삼형제가 저마다의 방식으로 답하며 날 마주 끌어안았다.
“얼마든지, 메이.”
“저는 누님과 함께 있는 모든 시간이 행복합니다.”
“너야말로 무슨 일 있으면 재깍재깍 말해. 혼자 해결하려고 좀 하지 말고. 또 그러면 가만 안 둬.”
“헤헤. 오빠들이랑 미하일이 내 가족이어서 너무 행복해. 아빠도 빨리 안아줘요, 네?”
바삐 눈물을 훔치는 와중에도 내 부탁은 착실히 입력됐는지 아빠가 비실비실 팔을 뻗었다.
나는 그 품에 와락 뛰어들었다. 한결같이 안온한 품이 기분 좋았다.
그리고 정말이지 안타깝게도, 아빠의 눈물방울은 더욱 굵어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