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관종은 오늘도 죽습니다 (170)화 (170/185)

외전. 해피엔딩의 해피웨딩

#1

이상한 아침이었다. 메이블린은 온몸을 짓누르는 무게감에 고개를 갸웃거렸다.

“희한하다, 분명 개를 안 키우는데 왜 개소리가 날까.”

그것도 이렇게 덩치 큰 개가.

메이블린은 자꾸만 들러붙는 루치펠을 꾸역꾸역 떼어낸 뒤 옷가지를 챙겨 일어났다.

“아, 좀 떨어져봐.”

그러나 호락호락하게 물러날 루치펠이 아니었다. 그는 도리어 그녀의 허리께를 감은 팔에 더 힘을 주어 끌어당겼다.

“옆에만 있게 해준다고 했잖아. 근데 왜 또 날 밀어내는 거야? 내가 싫어졌어?”

아주 요사스럽기 그지없는 눈꼬리를 처량하게 늘어뜨리고선, 비 맞은 강아지마냥 낑낑대며 매달렸다.

메이블린은 한숨을 푹 내쉬며 어깨에 얹힌 그의 뺨을 꾹꾹 밀었다.

“아니, 저기… 옷 갈아입는 데까지 따라오는 건 좀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새삼스럽게 뭘. 어차피 이미 다 아는….”

“나가!”

퍼억.

결국 베개를 정통으로 얼굴에 얻어맞고서야 루치펠은 물러났다.

어제 그렇게 밤을 새우고서도 아침부터 장난을 치다니, 참 체력도 좋았다.

메이블린은 부스스한 머리를 질끈 올려묶으며 문밖을 향해 소리쳤다.

“루시, 너도 얼른 준비해! 내가 중계 봐주기로 해서 늦으면 안 된단 말이야!”

오늘은 잭과 실버의 요리대결이 있는 날이었다. 심사위원은 대회장에 모일 모든 사람들.

물론 편파판정을 방지하기 위해 암흑가 일원과 신수가족은 심사위원에서 제외됐다.

장소는 한창 축제 중인 에임 수도의 외곽마을로 정해졌다. 너무 붐비는 곳은 피차 다 난처한 인물들만 모이는 터라, 별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루시, 다 됐으면 이제 출발하자.”

준비된 해설위원답게 메이블린은 각 잡힌 검은 정장 차림이었다. 그녀는 거기에 중절모자를 쓰고 우스꽝스러운 콧수염까지 붙이고서야 드레스룸을 나섰다.

황실 업무는 에드먼드가 대신 맡아주기로 해서 문제없었다. 어제 일정을 다 마친 후, 그에게 반강제적으로 받아낸 승낙 덕에 메이블린은 지금까지 쭉 마탑에서 뒹군 참이었다.

집무실에서 외투를 걸치며 나오던 루치펠이 그녀를 보더니 흠칫 몸을 떨었다.

“……있잖아, 귀엽긴 한데 대체 그런 수염은 어디서 구하는 거야?”

“왜, 너도 하나 붙여줄까? 위장용으로 아주 탁월해.”

“고맙지만 사양할게.”

“달라하기 미안해서 괜히 거절하는 거면-”

“아니. 정말 괜찮아. 너 두 개 붙여.”

메이블린이 더 권할세라 루치펠은 빠르게 텔레포트 마법진을 펼쳤다.

흐흥, 잘 빠져나가네. 메이블린은 비죽 웃으며 콧수염을 한 개 더 올렸다. 부숭부숭해진 수염을 문지르는 사이, 사람들로 가득 찬 장내가 눈앞에 펼쳐졌다.

제법 뜨거운 열기를 띠는 대회장 한쪽엔 실버와 잭이 대기 중이었다.

갑작스레 나타난 메이블린과 루치펠을 콜린이 태연하게 맞이했다.

“안 늦었네요, 누나!”

“다행히도. 다른 사람들은?”

“저쪽에 모여 있어요.”

콜린이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던지니, 시끌벅적하게 무리지어 있는 낯익은 얼굴들이 보였다.

암흑가 일원과 하일을 선두로 한 신수가족 팬클럽. 그들은 저마다 목이 터져라 출전자들을 응원하는 중이었다.

“던켈하이트의 맛을 보여줘, 잭!”

“지면 신령 딱지 떼라 실버! 집에 들어올 생각 하지 마!”

“엄마, 저 사람들 무서워.”

“가까이 가지 마, 에비.”

……과연, 일반인들은 섣불리 다가가기 어려울 만큼 쟁쟁한 응원이었다.

메이블린이 루치펠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루시, 가서 좀 말려줘.”

루치펠의 얼굴에 퍽 석연찮다는 표정이 떠올랐다. 그러나 콧수염 붙이기 따위가 아닌 이상 그가 메이블린의 청을 거절하는 법은 없었다. 사실 그것도 메이블린이 정말로 원했다면 두말없이 털보아저씨로 변신했을 것이었다.

루치펠은 그럼 조금 뒤에 보자는 말과 함께 왁자지껄한 무리 속으로 뛰어들었다.

곧 그의 제지 아래 두 팀의 흥분이 조금 가라앉자, 메이블린은 단상 위로 올라갔다.

요리재료가 쌓인 긴 테이블이 단상 가운데 난 계단을 중심선 삼아 양쪽으로 준비되어 있었다.

메이블린은 그 사이에 자리를 잡고 목소리를 증폭시켜주는 마도구를 들었다.

드디어 대회의 주인공들을 소개할 시간이었다. 분위기를 달구는 유쾌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의 음식을 아예 맛보지 않은 사람은 있어도 한번만 맛본 사람은 없다! 오늘은 내가 제일 가는 요리사, 요식업계의 신흥강자 잭!”

짤막한 소개가 끝나자 잭이 손바닥 키스를 날리며 유유히 단상위로 올라왔다.

그 아래서 재키가 재수 없다며 엄지를 뒤집어 야유하고, 메이블린은 다음 타자를 소개했다.

“300년 동안 이 날만을 위해 칼을 갈았다! 제국의 교황도 인정한 300년 전통 맛집, 이것이 근본 있는 요리다 실버!”

실버는 소개가 창피했는지 애써 그녀를 외면하며 긴 다리로 휘적휘적 올라갔다.

마침내 두 사람이 단상에 서자 모두의 시선이 그리로 집중되었다.

메이블린은 한껏 치켜든 팔을 내리며 소리쳤다.

“그럼 지금부터, 실버 대 잭의 요리경연을 시작합니다!”

우렁찬 메아리가 채 사그라들기도 전에 둘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순식간에 잘게 토막 난 채소들이 하늘을 날아다니고 허기진 배를 더 움켜쥐게 하는 맛있는 냄새가 경연장을 가득 채웠다.

그러고도 시간이 남아도는지, 실버와 잭은 아닌 척 서로 곁눈질하며 견제하기에 바빴다.

잭이 무심한 듯 툭 던진 칼을 손가락 사이로 휘리릭 돌려 잡으면, 실버는 커다란 웍을 흔들어 재료를 높이 띄웠다. 그리곤 폭포수마냥 떨어지는 음식을 접시에 채가듯 담아 보란 듯이 탁 내려놓았다.

여느 서커스 못지않은 묘기에 관중들의 함성은 더욱 거세졌다.

“우와아아! 이런 요리 구경은 난생 처음이야!”

“그것도 저렇게 많은 양을 빠른 시간 안에 만들다니! 둘 다 어지간한 솜씨가 아니군!”

“오늘 하루는 오랜만에 축제다운 축제를 벌이겠어!”

매년 성대하게 축제를 열지도 못하는 변변찮은 마을이었다. 이런 작은 마을에 거물들이 온 것만으로도 얼떨떨한데, 주민들을 배불리 먹일 연회까지 손수 열어주니 황송할 따름이었다.

저마다 흥분과 설렘이 뒤섞인 얼굴로 차곡차곡 쌓이기 시작하는 음식을 기다렸다.

메이도 숟가락을 들고 두 사람 사이를 왔다 갔다 하며 중계인의 특권을 누렸다.

그렇게 경연이 어느덧 막바지에 치달았을 무렵. 메이블린은 이 북새통에도 한구석에서 여유롭게 차를 홀짝이는 두 인영을 발견했다.

단색의 평범한 드레스에 챙이 넓은 모자를 푹 눌러쓴 여자. 이젠 길드장이 된 셀턴이 호위를 서고 있는 걸로 보아 여자는 슈타커였다.

‘그러면 반대편에 앉은 남자는…… 누구지?’

낡은 로브로 전신을 꽁꽁 싸맨 초라한 행색이었지만 찻잔을 들었다 놓는 동작이 군더더기 하나 없이 깔끔했다.

게다가 로브모자 밖으로 비죽 튀어나온 저 금발. 순간 불길함이 엄습한 메이블린은 슈타커 옆으로 슬쩍 다가가 속삭였다.

“저 슈타커… 설마 제가 생각하는 그 사람은 아니겠죠?”

슈타커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그렇게 말렸는데도…….”

그러자 대화의 주인공이 기다렸다는 듯 모자를 걷었다. 곧 찬란한 백금발이 흘러내리고, 정말이지 이런 곳에선 보고 싶지 않았던 눈부신 미소가 쏟아졌다.

“신수와 암흑가 요리사가 대결하는 거로도 모자라 그 황제폐하께서 중계를 보신다는데. 이런 재밌는 구경을 놓칠 수야 있나.”

으. 메이블린은 반사적으로 지끈거리는 이마를 짚었다. 지금쯤 머나먼 저 왕궁에서 서류더미에 파묻혀 있을 켈른의 절규가 들리는 듯했다.

* * *

그 어느 때보다도 치열하게 부딪쳤던 대결은 실버가 승기를 거머쥐며 끝이 났다.

단상 아래에선 하일이 실버의 목에 팔을 두른 채 잘했다며 마구 머리를 쓰다듬었다. 콜린은 실버가 받은 트로피를 신기한 듯 이리저리 둘러보며 눈을 빛냈다.

저 모자의 삼시세끼를 300년이나 책임진 주부 99단이니, 어찌 보면 승패의 결과는 당연했다.

‘역시 세월의 짬밥에서 오는 노련미와 연륜은 쉽게 무시할 수 없지.’

한편 한쪽에선 셀턴과 클라인이 패배의 고배를 마신 잭을 다독이는 중이었다.

둘이 땀을 흘리며 쩔쩔매는 게, 잭의 기분이 영 나아지는 것처럼 보이진 않았지만.

나는 위로에 서툰 둘 사이에 슬쩍 끼어들어 잭 앞에 엄지를 치켜세웠다.

“그래도 디저트는 네 것이 최고였어, 잭. 알지?”

“저, 정말요…?”

“그럼, 나중에 생각 있으면 이노아드로 와. 마침 내 전속 파티시에 자리가 비어있거든.”

“저, 저 더 열심히 해서 꼭 황궁에 들어갈 거예요! 기다려주세요!”

“기대할게.”

잭은 언제 시무룩했냐는 듯 입꼬리가 귀에 걸려서 재키에게 자랑하러 뛰어갔다. 곧 시끄럽다며 저리 떨어지라는 재키의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경연이 완전히 막을 내리자 슬그머니 수염을 떼고 모자도 벗었다. 더는 위장하고 있을 필요가 없었다.

“그럼 다들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클라인과 셀턴에게 인사하고서 근처 건물의 옥상으로 이동하니 마을의 정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해가 저물고 거리마다 불빛이 반짝이기 시작하는 저녁시간. 축제를 즐기는 행복한 웃음소리가 끊이질 않고 공기 중에 잔잔히 퍼졌다.

마침 바로 발아래를 지나가는 한 모자의 대화가 들렸다.

“엄마, 오늘 무슨 날이에요? 왜 다들 노래 부르고 춤을 춰요? 마을도 밤까지 반짝반짝하구.”

“그건 오늘이 각 나라마다 수호신을 기리는 날이라서 그래. 한 해의 풍년과 무사기원을 비는 거지.”

“훔… 잘은 모르겠지만 엄마. 티케신은 우릴 버렸다구 저번에 푸줏간 아저씨가 그랬는데.”

“글쎄…… 그런가? 엄마는 왠지 버렸다기보단… 자유롭게 살 수 있는 의지를 줬다고 생각해.”

“자유… 의지? 그게 뭐예요? 좋은 거예요?”

“좋은 거라기 보단 당연한 거지. 신탁이든 예언이든 얽매이는 거 없이, 엄마랑 우리 테오가 원하는 대로 사는 거.”

“그럼 좋은 거 아녜요?”

아이의 천진난만 물음에 여자는 결국 부드럽게 웃으며 아이를 안아들었다.

“그러게, 좋은 거네. 그럼 앞으로도 계속 그래달라는 의미에서 우리 저 주스 마시러 갈까? 티케신의 신전에서 난 사과로 만든 거래.”

“좋아요!”

여자와 아이는 까르르 웃음소릴 흘리며 점차 멀어졌다. 나는 턱을 괴고 앉아 그 뒷모습을 한참이나 응시했다.

그 때, 바로 뒤에서 가볍게 착지하는 발소리가 들렸다.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누구인진 훤했다.

루치펠이 옆에 걸터앉으며 넌지시 물었다.

“기분이 어때?”

방금 들은 대화의 감상이 궁금한 모양이었다. 나는 건물 아래로 늘어뜨린 발을 대롱거리며 괜스레 뜸을 들였다.

“음… 잘 모르겠어. 사실 기분이 좋다 나쁘다 보다는 그냥…….”

“그냥?”

“다행이야.”

그리 픽 내뱉곤 무심코 올려다본 하늘. 한가득 차오른 보름달이 손을 뻗으면 닿을 듯 손아귀에 걸렸다.

“저 위에서 아무리 시끄럽게 떠들고 싸우든 말든, 사람들은 자기 인생을 꿋꿋이 살아가고 있어서 참 다행이야.”

다시 아래로 시선을 내리면, 그 사람들이 잔을 부딪치며 한창 흥겨움을 나누고 있었다.

거리를 채운 색색의 불빛과 어우러져 별가루처럼 반짝거리는 풍경.

나는 빠듯하게 부푼 가슴을 끌어안고 한참이나 거리를 구경했다.

그런 날 빤히 보던 루치펠이 나지막이 입을 뗐다.

“참 사랑스럽게도 보네.”

“왜, 질투나?”

“아니.”

바람에 휘날리는 내 머리칼을 귀 뒤로 꽂아주며 그는 다정히 말했다.

“나는 그런 널 사랑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나도 배시시 웃으며 그의 품에 쏙 안겼다.

“나는 이런 날 네가 사랑해서 다행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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