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외전) 그 여주의 속사정
#169
누구나 한번쯤은 그런 상상을 한다. 어쩌면 내가 세상의 주인공이 아닐까 하는.
물론 대부분의 사람이라면, 으레 겪는 질풍노도의 시기쯤으로 지나가곤 한다.
하지만 이디스는 달랐다.
그저 막연히 어릴 적의 철없는 치기로 남기기엔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이 명백하게 알려주고 있었다.
이 세계의 주인공은 너야, 라고.
그렇게 어느 순간부터, 이디스는 막연히 깨달았다. 어쩌면, 정말로,
‘나는 이 세계의 주인공이 아닐까.’
누군가 비웃을까 입밖으로 꺼낸 적은 없었으나 확실히 느꼈다.
마냥 헛소리만은 아닌 게, 객관적으로 봐도 자신은 퍽 괜찮은 주인공 감이었다.
명문가의 귀한 아가씨는 아니더라도 제법 부유한 상단의 하나밖에 없는 외동딸이었고, 내로라하는 절색들과 견주어도 뒤지지 않을 만한 미색을 갖추고 있었으며, 모두가 경외하는 마탑에 폭발적인 마력량 하나로 너무도 손쉽게 들어왔다.
인생에 딱히 굴곡이랄 것도 없었다. 마치 주인공의 시련과 같은 고난이 닥치면 매번 짜기라도 한 것처럼 술술 풀리기 일쑤였다.
더불어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좋아했다. 말 그대로 이유모를 당연한 애정들이 쏟아졌다.
별다른 행동을 취하지 않아도, 초면이어도, 처음엔 악감정을 가졌던 사람이어도. 종국엔 다들 생글생글 웃으며 제 곁을 맴돌았다.
심지어 그 까탈스럽다는 마탑주조차 제겐 친절했다.
‘뭐… 통상적인 수준의 친절함은 아니었지만.’
다른 이들로선 씨알 하나 먹히지 않는 부탁이라도 자신이 나서면 종종 들어주곤 했으니까.
이디스는 자신이 충분한 혜택을 누리고 있음을 자각하고 있었다.
한데, 어느 순간부터 그 당연한 명제가 깨지기 시작했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모두가 이디스를 좋아해’ 라는 상냥한 환상은 없었다.
더 이상 자신은 언제나 해피엔딩만이 존재하는 소설 속 주인공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디스는 그것이 단 한 사람으로부터 비롯되고 있음을 어렴풋이 알아챘다.
“다들 인사해. 오늘부터 자주 보게 될 거야.”
메이블린 슈트레커. 사제관계로 시작한 첫 만남.
망할 탑주가 무턱대고 선생님이라며 그녀를 데려왔을 때에는, 정말이지 기절할 뻔했다.
겨우 제 또래나 되는 귀족영애가 선생이라니?
그것도 모자라 자신과 맞먹는 폭발적인 마력량을 가지고 있다니?
무엇보다,
‘그 마탑주가 저렇게 신난 얼굴을 한다고?’
누군가 보면 저게 뭐가 신난 얼굴이냐고 불평할 수도 있겠다만, 늘상 잔잔하던 호수에 이는 파문은 더욱 두드러져 보이는 법이다.
언제나 세상 모든 일에 달관한 듯 초연히 굴던 사람이었다. 그랬던 그가 누군가를 직접 마탑에 불러들였다는 것 자체가 그야말로 천지가 개벽할 일이었다.
그리고 실제로도 그랬다.
‘말도 안 돼…! 상급마물이 지금 내 앞에 나타난 거야?’
‘켄 아저씨가 내 부탁을 거절했어?’
‘엄마아빠가 나한테 처음으로 화를 내다니!’
눈에 띌 만큼 급격히는 아니었지만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자신을 감싼 기류가 변하고 있었다.
더 이상 사람들은 제게 이유없이 친절하지 않았다. 위험이 닥칠 때마다 으레 자신을 지켜주던 요상한 행운도 없었다.
메이블린과의 만남이 거듭될수록 비슷한 상황은 계속해서 발생했다. 제 뜻대로만 굴러가지 않는 사건사고들.
탄탄대로로 쭉 펼쳐진 제 앞길에 불쑥 내려앉은 커다란 바위. 메이블린 슈트레커.
이성적으로 생각한다면 퍽 짜증이 날 법도 했다. 하지만.
‘왜… 왜 난 기쁜거지?’
도리어 묘한 반발심과 뒤섞인 기대감이 가슴 한켠에서 피어올랐다.
그렇게 여전히 상황은 나아지지 않은 채 조금 더 시간이 흐르고, 이디스는 그제야 문득 깨달았다.
처음으로 빤히 보이던 목적지가 아닌 곳을 향해 갈수도 있음을.
저절로 달리기만 하던 말의 고삐를 자신이 직접 쥐고 이끌 수 있음을.
‘메이블린이 아니었으면 평생 알지 못했겠지.’
처음으로 예측하지 못하는 길로 이탈했으니, 이 얼마나 가슴이 벅찬 일인지.
자신은 모든 이가 친절히 대해야 할 만큼, 얼토당토않은 행운이 지켜줘야 할 만큼 무른 사람이 아니었다.
악당의 목 서넛쯤은 가볍게 딸 수 있는 힘이 있었다. 그간 딱히 쓸 일이 없었을 뿐, 그녀는 강한 마법사였다.
이디스는 처음으로 제 인생에 나타난 훼방꾼을 기쁘게 맞이했다.
“메이. 저는 메이블린이랑 평생 같이 살고 싶어요.”
그간 오래토록 자신을 감싸던 껍질이 벗겨지는 느낌이었다. 그때마다 요동치는 불가사의한 굴곡과 불안정성이 너무나 좋았다. 신이 났다.
꼭 여느 소설 속 등장인물처럼만 느껴졌던 주변 사람들도 비로소 생생하게 움직이는 듯했다.
그래서 그녀는, 다소 충동적일지라도 자신의 의지에 따라보기로 했다.
이번엔 시답잖은 운 따위 말고 순전히 자신의 실력에 기대고서.
“그럼 탑주님. 역시 그놈, 죽이실 거죠?”
“그래. 지금 갔다 올 테니까-”
“제가 갈게요.”
“뭐?”
“어차피 위장 임무에는 절 따라올 사람이 없잖아요. 게다가 메이한테 빚진 것도 있고요.”
“너….”
“목걸이까지 줬는데 탑주님이 가로채는 바람에 못 갚았으니, 이번엔 제 차례에요.”
이디스는 루치펠이 붙잡을세라 황급히 자리를 떴다. 단단히 단도를 그러쥔 손등 위로 옅게 힘줄이 돋았다.
‘감히 우리 선생님을 건드리다니. 누군진 몰라도 곱게는 안 보낼 거다.’
그간 녀석의 동선을 철저히 주시해온 덕분에 이디스는 곧장 베인 앞에 당도할 수 있었다.
수도 외곽의 마기로 가득 찬 숲 속, 드문드문 세워진 간이천막.
마물 토벌에 한창인 탓인지 그녀를 제지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바로 뒤에서 기척이 느껴진다면 동요할 법도 한데. 베인은 놀라우리만큼 미동조차 없었다.
암살자를 목전에 두고도 뒤를 보이는 작태라니. 쉬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이디스는 경계를 풀지 않으며 한걸음씩 다가갔다.
그리고 그때, 베인이 드디어 뒤를 돌았다.
“뭐야, 너였어?”
금전까지 태평하던 기색은 어디가고, 그는 조금 놀란 눈치였다.
“이거 의외네. 당연히 그 놈이 올 줄 알았는데.”
“그 놈? 탑주님을 말하는 거야?”
“아, 너는 걜 그렇게 부르겠구나.”
“……날 알아?”
“글쎄, 뭐라 해야 하지… 알긴 아는데 모르는 사람?”
저의를 파악할 수 없는 알쏭달쏭한 대답과 그보다 더 의문인 사내.
이디스는 자신이 상상했던 귀족나리와는 영 딴판인 베인의 모습에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했다.
동시에 묘한 반발심도 들었다. 무턱대고 그를 향한 이유모를 호감이 차츰 피어오른 탓이었다.
‘뭐야, 뭔데. 대체 뭐냐고. 방금 처음 봤잖아. 적이잖아. 그런데 왜, 왜… 저 남자가 싫지 않지?’
스스로도 이해 못할 감정에 혼란스러워하던 찰나.
우우웅-
느닷없이 사방에서 불투명한 막이 뻗어 올라가기 시작했다.
거침없이 세워진 막은 이윽고 커다란 돔의 형태로 자신과 남자를 에워싸고서야 멈췄다.
이디스가 살짝 놀람과 동시에 의아한 기색을 표하자 베인이 손을 휘휘 내저었다.
“걱정 마, 해될 건 없으니까. 잠깐 스크린으로부터 초상권을 지켜주는 용도랄까? 저게 있는 한은, 이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도 아무도 모르거든.”
‘소드마스터라더니, 오러를 이리도 운용할 수 있는 건가.’
아무래도 자신을 쥐도 새도 모르게 처리할 심산인 모양이었다.
누가 그렇게 둘까보냐. 이디스는 주저않고 검을 뽑아 겨눴다.
“그거 잘됐네. 당신이 비명을 질러도 달려와 줄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
“내 말이 그거야.”
“……?”
대체 아까부터 무슨 소린지. 죽어도 괜찮다는 건가?
이디스는 남자 앞에서 이상하게 자꾸만 약해지려는 마음을 몇 번이고 다잡으며 달려들었다.
그럼에도 그녀는 승부 앞에서 끝까지 냉정하지 못했다. 내리꽂는 검끝이 꼭 결정적인 순간에 무뎌졌다.
이디스가 번번이 결정타를 놓치고 흔들리자, 도리어 베인이 일갈했다.
“정신 차려! 나는 네가 좋아해야할 사람도 아니고, 사랑에 빠질 운명적인 상대도 아니야! 그런 건 네가 알아서 정하라고!
챙!
“아니면 계속 주인공 행세라도 하며 살고 싶은 거야?”
챙강!
“그래? 네 의지 따윈 아무래도 좋을 만큼 주인공을 원하는 거냐?”
마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다는 듯한 어투. 자신을 꿰뚫어보는 눈빛.
이디스는 이를 악물고 사납게 읊조렸다.
“닥쳐.”
“그걸 원한다면, 그리 해주고. 이유없이 널 사랑해줄 존재는 얼마든지 있으니까.”
“닥치라고.”
“요즘 널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가 전과 달라졌지? 말만 해, 네 자리를 위협하는 존재쯤은 얼마든지 죽여줄… 커헉!”
신랄하게 쏘아붙이던 베인이 돌연 앞으로 풀썩 고꾸라졌다.
일격을 가한 이디스의 주먹이 그의 복부에서 떨어졌다. 이디스는 속박 마법으로 그를 옥죄며 음산한 경고를 토해냈다.
“뭘 안다고 함부로 지껄여. 누가 그딴 거 하고싶대? 넌 메이블린 손 끝 하나라도 건드릴 수 없어. 지금, 여기서 죽을 테니까.”
이디스의 손짓에 따라 생겨난 붉은 선이 베인의 목덜미를 가로질렀다. 이어서 숨통이 콱 조여지고, 붉은 선혈이 왈칵 쏟아졌다.
그러나 베인은 켁켁대면서도 기어이 두 다리로 버티고 섰다.
죽음을 목전에 둔 상황이건만 그는 웃었다. 헐떡이는 와중에도 꿋꿋이 지껄였다.
“와, 진짜 골 때리네. ■■님 옆에 있어서 이렇게 안심되는 녀석은 그 놈 말고 네가 처음이다.”
“대체 아까부터 무슨 소릴…!”
“마음은 이해하는데, 성급히 굴지 않아도 돼. 때가 되면 다 알게 될 거야. 그렇지만 지금은….”
말끝을 흐린 베인이 생긋 웃었다. 천사라 해도 믿을 만큼 눈부신 미소였다.
믿는 구석이라도 있는 건가? 왜 저렇게 여유로운 거지? 갑자기 불안해진 이디스는 버럭 소리쳤다.
“헛수작 부리지 마!”
“이런, 들켰네.”
올라간 베인의 입꼬리가 더욱 짙게 패였다. 동시에 손가락을 가볍게 튕기는 소리가 났다.
누군가 제 머리를 쥐어짜기라도 하는 듯 핑 돌았다.
“혹시 모르니 기억 좀 지울게. 참, 이건 내 선물이야. 네 답이 꽤 마음에 들어서.”
유쾌한 음성이 떨어진 다음 순간.
마치 축제날 저잣거리의 절단 마술쇼처럼, 베인이 얼굴과 몸으로 똑 분리되었다.
그리곤 공처럼 날아온 머리통 하나.
“그럼 이만. 즐거웠어.”
아니, 말하는 머리통 하나.
그것이 이디스가 기억하는 베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다시 눈을 깜박였을 땐, 오직 그와의 결투에서 승리했다는 사실만이 뇌리를 맴돌 뿐이었다.
묘하게 거슬리는 기분과 함께.
* * *
이디스가 일전의 그 묘한 이질감을 다시 느낀 것은, 성마대전이 한창 이어질 무렵이었다.
거대한 악과 선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디스는 전에 없이 후련한 얼굴로 날뛰었다.
마치 작은 어항 속을 뛰쳐나온 물고기처럼, 비로소 숨통이 트이는 기분.
“나는 주인공 같은 거, 바란 적 없어요.”
자신은 관상용으로 예쁘게 꼬리나 살랑이는 금붕어 따위가 아니었다. 언제든 바다를 헤엄칠 수 있고, 드넓은 대지를 거닐 수 있는 사람이었다.
“줏대 없이 끌려 다니며 절로 얻어지는 부귀에 웃어야만 하는 게 주인공이라면, 차라리 엑스트라가 될래요.”
제 시간마다 떨어지는 먹이에 배불러하며 살기엔, 자신은 충분히 자유로운 사람이었다.
“소설에 단 한 줄밖에 나오지 않는대도 훨씬 행복할 테니까.”
뒤틀린 퍼즐조각이 제자리를 찾았을 때.
이디스는 비로소 진짜 ‘이디스’로서 존재함을 느꼈다.
소설 속 특별한 등장인물도, 사랑받아야만 하는 주인공도 아닌 그저 그런 이디스.
그렇게 재해처럼 찾아온 자각 속에서 무대가 막을 내리고, 모든 것이 끝난 후.
그냥 이디스는 자신이 과연 옳은 선택을 한 것인지 확인받아야만 했다.
“메이. 저는 이게 다 꿈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제가 본 건, 뚜렷한 현실이고 진실이었어요. 제가 맞나요? 그렇다고 확신해줄 사람이 필요해요. 저는 지금 너무 혼란스러워요.”
하나 몰아치는 혼돈 속에서도 그녀가 명확하게 인지한 감정이 있다면, 이디스는 메이블린 슈트레커를 좋아했다. 매우 많이 좋아하고 있었다.
아마 모든 진실을 안 상태에서 과거로 돌아간다 한들, 다시금 같은 선택에 기꺼이 몸을 내던질 수 있을 만큼.
지금 자신을 바라보는, 투명한 금안에 서린 눈부신 여명을 또다시 사랑할 만큼.
“이디스. 이제 와선 다 의미 없어진 말이지만, 언제가 되었든 한번은 꼭 말하고 싶었어. 그게 지금인 것 같네.”
천사든 신이든 하나같이 메이블린을 눈엣가시로 여겨도 상관없었다.
“시나리오의 주인공이 너여서, 날 믿어줘서.”
이미 자신에게 그녀는, 어쩔 도리 없이 특별한 사람이 되어버렸으니까.
“정말 고마워. 고마워, 이디스.”
그러니 그런 사람을 무조건적으로 믿는 것 또한, 애초부터 어쩔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관종은 오늘도 죽습니다>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