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이야기의 마지막 장이 덮여도
#168
나는 쭈뼛거리며 모로스와 짧은 포옹을 나누었다.
내가 에리스의 형벌을 준비하고 그간 밀린 일들을 처리하는 동안, 모로스는 모로스 나름대로 굉장히 분주했다.
나는 그녀의 두 손을 꼭 잡고 물었다.
“이제 시나리오는 전부 사라진 건가요?”
“아직 서대륙 쪽이 몇 개 남아있긴 하지만, 곧 전부 제거될 거다.”
그녀는 내 부탁으로 세계에 뿌리내린 시나리오들을 모조리 거두어들였다.
후에 천계와 인간계 사이의 결속이 다시 이어질 때를 대비한 것이었다.
더 이상 신의 뜻대로 인간들을 좌지우지할 수 없도록.
그 어느 것도 우리의 삶을 휘두를 수 없도록.
창세의 권한을 물려받은 모로스에겐 이제 가능한 일이었다.
더불어 최근엔 천계가 빼앗은 마계 영토를 돌려주겠다는 협정까지 발표한 터라 더 정신없이 바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로스는 날 배웅하러 와주었다. 나는 다시금 그녀를 꼭 껴안았다.
“……감사해요.”
진심을 담은 내 인사에, 모로스는 여상스레 답했다.
“너한테 받았던 도움도 있고. 그 정도는 해줄 수 있다.”
“네? 무슨… 도움요? 제가 당신을 도운 적이 있어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눈만 꿈벅이고 있으려니, 모로스가 돌연 옛날 얘기를 꺼냈다.
그녀가 이야기를 마쳤을 즈음엔, 과거의 기억들이 전부 되살아난 후였다.
‘아, 맞다. 그런 일이 있었지.’
내가 모로스의 시나리오, 그러니까 ‘헤이즐에서 아침을’을 읽지 않았음에도 그 내용을 알고 있었던 이유.
시나리오에서 남주는 여주를 살리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대가로 시간을 되돌린다.
그 시간을 돌려준 이가, 바로 나였다.
그래서 한해원이었을 적 소설이라는 형태로 그들의 이야기를 인지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아무튼, 잘 살다 오거라. 나중에 다시 보자꾸나.”
덤덤한 모로스의 목소리가 날 회상에서 끄집어냈다.
해질녘의 노을처럼 무지근한 시선과 함께 그녀는 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나는 반드시 행복해질 너를, 이곳에서 지켜보고 있겠다.”
그리곤 올 때와 마찬가지로 담백하게 작별을 고했다.
점점 멀어지는 곧은 등. 눈가가 괜스레 홧홧해졌다.
그 뒷모습을 눈으로나마 좇으려던 찰나, 방정맞은 목소리가 불쑥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드디어 오늘 내려가시네요, 티케님!”
야, 내 감성촉촉모드 돌려네.
굳이 얼굴을 확인하지 않아도 누군지는 뻔했다.
나는 심드렁하게 답하며 신전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 마라탕. 왔어? 왜 왔을까?”
“아휴, 또 그러신다. 마라탕이 아니라 라파엘이라니까요.”
“아, 맞다. 미안, 깜박했어. 알잖아, 내 나이가 좀 그럴 때라는 거.”
“…그러신 거라면 뭐…….”
“그래서, 여긴 왜 왔어 병나발?”
“아! 됐어요! 차라리 그냥 마라탕이라 부르세요!”
라파엘이 잔뜩 토라진 표정으로 홱 등을 돌렸다.
나는 무시하고 계속해서 걸었다. 그러자 라파엘이 묵언시위를 선언한 지 3초도 채 안 되어 내 옆에 쪼르르 따라붙었다.
“아이 차암, 그렇다고 먼저 가시면 어떡해요!”
“나 바빠. 포털 닫히기 전에 가야돼.”
내가 서둘러 가는 목적지가 어딘지 라파엘은 모르지 않았다.
그는 잠시 입을 다물고 묵묵히 날 뒤따르다가, 앞으로 쑥 미끄러지듯 날아왔다. 거꾸로 걷는 모양새로 나와 마주한 채 남은 길을 동행했다.
“근데 티케님. 저야 더 계셨으면 하지만, 이렇게 오래 있다가 내려가셔도 돼요? 벌써 몇 달이 지났잖아요.”
“걱정 마, 라파엘. 내가 누구야. 시간의 신이잖아. 시간선만 잘 맞춰서 내려가면 돼.”
나는 생긋 웃으며 팔을 쭉 뻗었다. 라파엘이 옆으로 슥 밀려났다.
내가 처음으로 그의 이름을 제대로 불러준 덕분인지, 그는 치워진 것에 대해 귀찮게 굴거나 더 항의하지 않았다.
다만 입가를 손으로 가리고 물기어린 눈을 연신 깜박였다. 나는 그를 가볍게 타박했다.
“야, 내 눈물은 쏙 들어가게 해놓고 네가 울면 어떡해.”
“하지만 너무 감격스러운 걸요. 흐윽, 흑! 드디어 티케님의 입에서 라파엘이란 단어를 듣게 되다니…!”
아니, 이게 그렇게까지 눈물을 쏟아낼 일이야?
너무 좋아하니 조금 미안한 마음마저 들었다.
‘진즉에 제대로 불러줄 걸 그랬나. 하지만 놀리는 재미가 꽤 쏠쏠했는걸.’
미안해서 한 번 더 이름을 불러주려던 때.
라파엘이 느닷없이 탄성을 내질렀다.
“하, 살다보니 이런 날도 오네요! 제가 이겼어요, 이겼다고요! 와하하! 종버는 승리한다! 종말까지 버티기 얏호! 저도 이제 아버지 뺨 때릴 수 있어요! 아니다, 전 딱밤 때릴래요!”
……이 새끼가?
아무래도 제우 녀석이 자신의 헤픈 뺨을 걸고 모종의 내기라도 건 모양이었다.
내가 라파엘을 라파엘이라 부르면 맞아주기라도 했다든지.
‘걔는 대체 왜 내기만 걸었다 하면 벌칙이 죄다 맞는거야? 혹시 성향이 그쪽인건가?’
창세신이 마조히스트든 라파엘에게 곧 딱밤을 맞을 예정이든, 내겐 하등 도움 될 것 없는 정보라는 점에서 매한가지였다.
내가 TMI로 고통 받는 사이에도 라파엘은 약 잘못 먹은 풍뎅이처럼 날아다니는 중이었다.
그는 당장 아버지께 가봐야겠다며, 반세기 후에 보자는 작별인사를 남기곤 쏜살같이 사라졌다.
‘어우, 정신없어.’
나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아직도 잔상처럼 남은 그의 신형을 털어냈다.
라파엘이 가렸던 시야가 드러나자, 열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 활성화된 포털이 보였다.
묵묵히 포털을 지키고 서있는 또 다른 천사도.
그를 보니 금전의 소란으로 수선했던 머리가 한결 가라앉는 듯했다.
“클라인. 준비 됐어요?”
“예, 주군.”
반듯하게 고개를 숙이는 변함없는 남자.
그 지척으로 가까이 간 나는 그의 턱을 잡고 들어 올려 시선을 마주했다.
“클라인은 죽고 다시 태어난 거나 마찬가지라서, 정체를 숨기고 살아야 해요. 천족으로서의 힘은 가능한 죽을 때까지 드러내선 안 돼요. 그래도 정말 갈 거예요?”
“원래부터 없는 힘이었습니다. 제 일은 주군을 섬기는 것이고, 충실히 이행할 것입니다. 제가 원하는 것은 그뿐입니다.”
뭐, 이럴 거라 예상하긴 했는데.
막상 직접 들으니 든든한 기분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이 좋았다.
그런데 좋은 티를 너무 적나라하게 냈나보다.
루치펠이 어찌 알고 눈 깜짝할 새 바람처럼 나타났다.
그는 라파엘 저리가라 잽싼 몸놀림으로 클라인과 나 사이에 끼어들었다.
“충견을 자처하는 건 봐주겠는데, 안전거리 좀 유지하자.”
아니, 날 너무너무 사랑해서 아끼고 싶은 마음이야 이해는 한다지만. 과보호가 너무 심한 거 아냐?
나는 그를 밀어내려 낑낑대며 투덜거렸다.
“루시, 무슨 안전거리 타령이야. 내가 위험할 게 뭐 있다고.”
“내가 말하는 안전은 저 충견을 위한 거야.”
“…뭐?”
누가 누굴 위해?
얼빠진 표정을 짓는 내게 루치펠이 상체를 숙여왔다. 그는 내 머리칼을 한 줌 그러쥐더니, 그 위에 입술을 포개며 눈을 마주쳤다.
요요한 붉은 기가 그 안에서 찰나 일렁였다.
“정확히 말하면, 자꾸 우리 부인께 들러붙는 모든 상대지. 알다시피 보고만 있기엔 내 성미가 워낙 더러워서, 가끔은 내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르겠거든. 물론 충견정도는 우리 부인을 봐서라도 참겠지만. 다른 놈들은 어디 파묻어버려도 모를 일이잖아? 안 그래, 부인?”
어휴, 저놈의 부인 소리. 이젠 졸부님에서 부인으로 호칭이 바뀌었냐.
‘가자마자 결혼식부터 올려야지, 원.’
나는 일단 ‘그래그래, 네 말이 다 맞다’ 식으로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이끌고 포털 앞으로 다가갔다.
클라인도 마지못해 ‘안전거리’를 지키며 내 곁에 섰다.
인간계로 통하는 포털이 눈앞에서 웅웅 울렸다. 새삼 가슴이 벅차올랐다.
‘정말로, 돌아간다.’
시나리오는 사라졌고, 신들은 인간사에 간섭할 수 없었다.
세계를 뒤집으면서까지 이뤄낸 쾌거였다.
‘그러니 최대한 유용하게 써줘야 하는 거 아니겠어.’
현재 인간계는 이례 없는 대전쟁으로 인해 대부분 폐허가 된 상태였다.
온전한 옛 모습으로 돌아가려면 수십, 수백 년이 걸릴지도 몰랐다. 그 정도로 피해 규모가 상당했다. 그러나 심각해질 필요는 없었다.
여기서 나는 가장 빠르고 간편한 회복 방법을 알고 있었다.
어차피 신들의 개입이 불가하다면, 그렇다면.
애초에 전쟁이 존재하지 않았던 상태로 되돌리는 것은 어떨까.
아니, 그 시점으로 돌아가서 미래를 바꾼다면 어떨까.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은, 그리고 일어나지 않을.
‘성마대전이 일어나기 전의 시점으로.’
나는 포털을 향해 가볍게 손짓했다.
내 손짓을 따라 포털 주변을 에워싼 톱니바퀴들이 맞물리며 차르륵 돌아가기 시작했다.
일련의 과정 끝에 톱니들이 움직임을 멈추고. 포털 안의 빛무리가 더욱 거세게 요동쳤다.
나는 양옆에 선 루치펠과 클라인의 손을 각각 잡은 뒤,
“그럼 갑시다.”
주저 없이 포털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곧바로 세찬 바람이 뺨을 때렸다. 유화물감을 흩뿌린 듯한 풍경이 주변을 빠르게 지나갔다. 거꾸로 뒤집혀 탈탈 털리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길고도 짧은 회귀가 끝났을 땐, 거의 울기 직전인 표정의 다니엘이 지척에서 달려들고 있었다.
“메이블린! 어딜 갔다 이제야…!”
어이쿠. 좀만 더 뒤로 가자.
나는 백스텝을 밟아 다시 포털로 들어갔다.
몇 초 후 눈을 깜박이자, 이번엔 눈시울을 붉힌 채 코를 훌쩍이는 아빠가 보였다.
“메이블린! 우리가 얼마나 너를…!”
음, 조금만 더 뒤로.
나는 루치펠과 클라인이 포털에서 채 나오기도 전에 둘을 꾹 밀어 넣으며 다시 몸을 던졌다.
그렇게 마지막으로 시간을 되돌리고 난 다음.
“메이블린, 뭐해. 어서 촛불 안 불고.”
노아가 커다란 3층짜리 케이크를 들이밀며 코앞에 서있었다. 그를 중심으로 한가득 몰려있는 사람들은 덤이었다.
슈트레커 일가와 신수가족, 칼리안과 슈타커, 켈른과 던켈하이트 일원들, 란슬롯과 에드먼드, 그리고 이디스까지.
성마대전이 발발하기 한 달 전, 내 생일날이었다.
요란스러운 게 싫어 소중한 사람들끼리만 모여 열었던 파티.
‘음, 뭐. 이 정도면 적당하네.’
나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흥겹게 무르익은 분위기 속에서 모두가 케이크의 촛불이 꺼지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루치펠과 클라인도 어느새 자연스레 그 틈에 끼어들어 날 바라보았다.
정신없이 북적대는 와중, 유일하게 가시방석에 앉은 듯 구는 이는 딱 한사람뿐이었다.
때마침 눈이 마주친 이디스가 움찔 몸을 떨었다. 커다랗게 부푼 동공이 지진을 일으켰다.
자신이 왜 갑자기 여기에 있는 건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빛.
이디스는 천계와 인간계의 결속을 끊은 시발점이자 그에 공헌한 최대 기여자였다. 그러다보니 기억이 그대로 보존된 모양이었다.
‘흠… 일단은 이 순간을 즐기고 싶은데.’
고민은 길지 않았다.
나는 오른발을 뒤로 슬쩍 구부려 구두 앞코로 바닥을 콩콩 찧었다.
구두굽 소리가 멎었을 땐, 시간도 멈췄다.
흔들리던 촛불이 모형처럼 딱딱해지고, 시끌벅적하던 말소리가 한순간에 싹 사라졌다.
때마침 콜린이 놓쳐 날아간 유리잔도 허공에 박혀있었다.
밀랍인형처럼 딱딱하게 굳어버린 사람들.
모든 것이 정지한 장면 속에서 오직 이디스와 나만이 숨을 쉬었다.
나는 잔을 콜린의 손에 쥐여 주곤 그녀를 마주했다.
이디스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메, 메이.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이게 다 뭐, 무슨….”
“나중에 다 설명해줄게.”
“네? 하지만…….”
“약속해. 아무것도 걱정하지 마. 지금은 그냥…….”
나는 입가에 검지를 가져다대고 쉿, 하는 입모양을 보였다.
이디스는 한참이나 얼떨떨한 표정으로 날 응시하다가, 이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빙긋 웃으며 제자리로 돌아갔다.
곧 멈췄던 시곗바늘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타오르는 촛불 아래 촛농이 흘러내리고, 잡다한 소음으로 공간이 가득 찼다.
그 중심에 선 나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케이크 앞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그럼 불게요. 하나, 두울…….”
“잠깐만요! 소원 비셔야죠 누님!”
“아, 맞다.”
하마터면 제일 중요한 걸 빠뜨릴 뻔했네.
미하일의 나이스 알림 덕분에 나는 잠시 눈을 감고 소원을 비는 시간을 가졌다.
소원은 별거 없었다. 생사가 걸린 것 마냥 비장하거나, 가슴이 찢어지게 애절하거나, 운명을 송두리째 뒤집을 듯 거창하지도 않았다.
그저 여느 동화 속 주인공들처럼,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게 해달라고 빌었다.
너무 뻔하고 뻔해서 지루할 만큼 행복하게.
그리고 다시 눈을 뜨자마자,
“셋!”
훅.
일렁이던 촛불이 한꺼번에 날아갔다. 꺼진 초 위로 옅은 연기가 흩날렸다.
앞으로 불게 될, 수많은 촛불들 중 첫 번째 촛불이었다.
그것을 신호탄으로 삼기라도 한 건지 사람들이 너도나도 달려들어 날 껴안았다.
동시에 웃음소리가 와르르 터졌다.
겨우내 웅크렸던 꽃망울이 꽃을 피워내듯, 커다란 웃음소리.
“생일 축하해!”
“생일 축하한다, 메이.”
“올해는 이리 넘어가지만, 부디 내년엔 우리가 준비한 리스트대로 실행하길 허락해주리라 믿네.”
“먼저 비밀리에 모든 준비를 마친 뒤 폭로하는 건 어떻습니까.”
“일단 저는 적극 찬성합니다. 폐하께서도 그리 당하는 심정을 아셔야 합니다.”
“제가 무덤파고 들어갈 때까지 저희와 함께해주세요, 주군!”
“뭐야, 저리 안 비켜? 저 먼저 안아주세요, 주군!”
“누나! 저도요, 저도요!”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사방에서 저마다 한마디씩 던져왔다.
웃음소리가 소낙비처럼 떨어지고, 끊이지 않는 말소리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나는 이 왁자지껄한 소란이 못내 행복해서, 꿈처럼 달콤해서. 그럼에도 분명한 현실이어서.
덩달아 웃어버리고 말았다.
“다 덤벼요. 한꺼번에 안아줄게.”
내가 달려온 모든 시간들을 담아, 있는 힘껏.