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관종은 오늘도 죽습니다 (167)화 (167/185)

#167

루치펠이 아무리 날 사랑한다 속삭여도, 보이고 싶지 않은 면이 없기란 불가능했다.

오히려 사랑하기 때문에 굳이 보지 않았으면 했다.

그런 내 속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루치펠은 날 다독였다.

“알아. 그냥 이 말만 해주고 싶어서 온 거야.”

“무슨… 말?”

“네가 저 곳에 서는 것에 죄책감 가질 필요는 없다고.”

정말이지 정확하게 허를 찌르는 말이었다.

”너는 300년 동안 죗값을 모두 치렀고, 더 이상의 단죄는 없어. 그러니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네 판단대로 해.”

그는 기어이 내 짐을 나눠 들고서, 막힘없이 다음 걸음을 내딛게 했다.

“마지막으로 네가 무슨 짓을 하든, 내가 영원한 네 편이라는 건 변함이 없을 테니까.”

발목을 붙잡는 미련 따위 버리고 내가 진정 원하는 것을 직시하게 만들었다.

나는 참고 참다가, 결국 실없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진짜 무슨 재주가 이렇게 많아?”

“너 웃게 해주려고 이것저것 많이 연마해봤어.”

“재수 없고 뻔뻔한데 멋있어. 얄미운데 네가 너무 예뻐. 이 재주 보여주려고 나 기다렸던 거야?”

“또 마음 약해져서 봐줄 게 빤히 보여 왔지.”

내 말마따나, 루치펠은 자신의 미모를 십분 활용할 줄 알았다.

“지금 네 표정을 보니, 잘한 짓인 거 같네.”

광휘의 천사라는 이명에 걸맞게 루치펠이 환히 웃었다.

그 호선을 그리는 입술이 너무 예뻐서, 그래서. 나는 충동적으로 입술을 포개고 말았다.

그는 당황하는 대신 너무도 자연스레 내 숨을 받았다. 도리어 점차 몸이 뒤로 밀리는 사람은 나였다.

잠깐 한눈 판 새 허리를 감아오는 팔이 단단했다.

“나 지금 들어가 봐야 하는… 읍.”

“먼저 시작한 게 누군데. 조금 늦어도 괜찮잖아.”

발갛게 익은 숨이 뺨을 간지럽혔다. 허리가 더 꺾이고 집어삼켜질 듯 몸이 밀착됐다.

몇 분 뒤, 결국 나는 붉게 상기된 얼굴로 거칠어진 호흡을 다스려야만 했다.

쌕쌕대는 내 앞에 빌어먹게도 완벽한 면상이 반짝거렸다.

“이것도 재주로 쳐주나?”

중요한 일을 앞두고 하마터면 입술이 부르틀 뻔했다. 나는 입가를 문지르며 툴툴거렸다.

“아니. 이건 재주가 아니라 능력이다, 능력. 네 이명은 수식언으로 광휘 같은 게 아니라 아양이 붙었어야 했어.”

“과분한 칭찬, 감사합니다.”

그걸 또 냉큼 받아 먹냐. 어우, 아주 여우가 따로 없어.

이대로 당하기만은 영 꺼림칙해서 나는 그의 가슴팍을 뭉근한 손길로 쓸기 시작했다.

“그래서 말인데, 내 능력도 알고 싶지 않아?”

루치펠의 몸이 점차 굳어가는 게 느껴졌다.

손가락은 점점 더 아래로 내려갔고, 그의 목울대가 느릿하게 울렁였다.

나는 고개를 들고 그의 귓가에 지나가는 한 줄기 바람처럼 속삭였다.

“마침 오늘 환영회를 해서 신전이 한가하더라고……”

루치펠이 찰나 움찔거렸다. 금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기류.

나는 붉게 물든 귓불을 톡 건드리곤 손을 뗐다.

“기다리고 있어. 금방 끝내고 올게.”

루치펠이 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내게 한 수 접어주곤 있으나, 눈을 들어 박아오는 시선만큼은 선연히 타올랐다.

“너무 늦진 마. 보다시피, 인내심이 많이 바닥났거든.”

말마따나 그는 금방이라도 날 잡아먹을 짐승처럼 굴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짓궂게 입꼬리를 늘였다.

“뭐, 어떻게 잘 참아봐. 온순히 굴면 밤엔 이기게 해줄게.”

“…!”

작열하게 쏘아지던 눈빛에 일순 제동이 걸렸다.

루치펠은 언제 그랬냐는 듯 온순한 양의 탈을 쓰고서 고개를 꾸벅 숙였다.

“……천천히, 여유롭게. 볼일 다 마치고 오세요, 부인. 착한 남편은 얌전히 기다리겠습니다.”

옳지, 착하다.

나는 한결 가뿐해진 걸음으로 돌아서 돌문 앞에 섰다.

차가운 석면에 손바닥을 올리고, 심호흡을 했다.

드디어 심판의 시간이었다.

* * *

메이블린은 높다란 벽을 따라 계속해서 걸었다.

이윽고 한 여인 앞에 다다라서야, 그녀는 걸음을 멈췄다.

사슬로 사지가 결박된 채 무릎 꿇려진 여자.

신력까지 봉인되어 꼼짝도 못 하고 있는 여자는 에리스였다.

제 머리 위로 그림자가 드리워지자 에리스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자신을 찾아온 이를 확인한 그녀는 조소를 터뜨렸다.

“비웃으려고 왔어? 시간 끌지 말고 집행인이나 빨리 불러.”

비록 볼썽사납게 묶여있다 한들 흉악한 기세는 여전했다. 메이블린을 올려다보는 눈에 독기가 넘실거렸다.

그러나 자신을 구렁텅이로 빠뜨린 범인을 코앞에 두고도, 메이블린은 평정을 잃지 않았다.

다만 산책하듯 그 주변을 유장한 걸음으로 선회했다.

나긋한 목소리가 보폭에 맞춰 떨어졌다.

“그간 네가 저지른 짓들을 보고, 많은 생각을 했어. 기존의 형벌론 네 그악한 성질이 좀처럼 고쳐지지 않을 것 같더라고. 그래서… 새로운 형벌을 좀 고안해봤어.”

“다 상관없으니까, 집행인이나 부르라고. 네가 시시덕거리는 꼴 따위 내가 보고 싶어 할 거 같아?”

“보기 싫어도 봐.”

“내게 명령하지 마!”

에리스가 빽 소리를 질렀다.

오로지 분노만 담고 있다기엔 묘하게 상기된 안색이었다.

애써 태연을 가장해보았지만 이유 없이 치솟는 불안감마저 덮을 순 없었다.

에리스는 입술을 콱 짓씹었다. 비릿한 피 맛이 났다.

어째서 자신을 이송한 천사들 모두가 저만 두고 형벌장을 나간 것인지, 심판은 끝났음에도 저 역겨운 얼굴을 왜 이 순간 또다시 마주해야 하는 것인지.

도통 이해되질 않아 혼란스럽기만 했다.

그런 그녀를 보며 메이블린은 여상스럽게 응수했다.

“아, 내가 말을 좀 애매하게 했나? 넌 날 볼 수밖에 없어. 내가 일을 마치고 나가지 않는 이상.”

“헛소리하지 말고 어서…!”

뚝, 선회하던 발걸음이 돌연 멈췄다.

“내가, 형 집행인이야.”

무감각하기 짝이 없는 눈에 비뚜름하게 올라간 입꼬리.

분명 웃고 있는 얼굴이건만, 에리스는 뼛속까지 한기가 스며드는 듯했다.

그녀는 불온한 기운을 떨쳐내고자 부러 코웃음을 쳤다.

“하, 네가 무슨 수로 형벌을 내리게?”

“영원한 시간을 줄 거야.”

“멍청하긴. 그런 무료함은 내게 아무런 고통도 줄 수 없어. 추방시키든 지옥불에 떨어뜨리든 마음대로 해.”

꽉 아문 에리스의 턱에 핏발이 섰다. 저를 내려다보는 저 눈을 할 수만 있다면 당장 파버리고 싶었다.

뒤바뀌어버린 제 처지를 도무지 견딜 수가 없었다.

그녀는 악에 받쳐 소리쳤다.

“이 치욕을 결코 잊지 않을 거다. 너의 뼛조각을 하나하나 부러뜨려 삼키는 날이 올 때까지 오늘을 기억할거라고!”

“너 때문에 죽지 않아도 될 수많은 사람들이 죽었어. 그런데도 여전히 그렇게, 참으로 파렴치하게도 당당하구나.”

“그딴 벌레만도 못한 것들한테 얽매이는 네가 멍청한 거야, 티케. 그런다고 그들이 알아주기나 할 것 같아?”

메이블린은 대답하는 대신 천천히 허리를 숙였다. 바로 정면에서 그녀를 마주하게 된 에리스가 이를 바득바득 갈았다.

메이블린은 그저 측은지심이 가득한 얼굴로, 에리스의 뺨을 감쌌다.

붉게 상기된 뺨과 대비되는 흰 손가락이 맞닿은 볼을 느릿하게 쓸었다.

“에리스, 나는 네가 너무 불쌍해.”

“네까짓 게 뭔데…!”

“그들이 없으면 우리의 존재 이유도 없어. 왜 그 당연한 사실을 모르는 거야?

“손 치워.”

“억지 부리지 마. 신이 전지전능한 존재라곤 하지만, 그게 모든 걸 네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당위성은 줄 수 없어. 너는 세계의 조력자는 될 수 있어도, 지배자여서는 안 되었어.”

“손 치우라고!”

타악!

에리스가 세차게 고개를 돌렸다. 메이블린은 더 첨언하길 관두고 다시 허리를 폈다.

금전과는 사뭇 달라진 분위기가 공간을 잠식했다.

“네가 그렇게 외면했던 이들에게 똑같이 외면당해봐.”

얼음장 같은 눈빛이 날카롭게 벼려진 칼날처럼 떨어졌다.

“그들은 더 이상 널 추앙하지도, 따르지도 않을 거야. 기억하지도 못해. 네 존재는 사라지고, 완전히 잊히는 거야.”

따악, 손가락을 맞부딪치는 소리가 공기를 울렸다.

다음 순간, 에리스 뒤 허공에 검은 씨눈 같은 것이 콕 찍혔다.

수박씨만 했던 구멍은 점점 그 크기를 부풀리더니, 이내 성인 남성 한둘이 드나들 정도로 커졌다.

메이블린의 가벼운 손짓에 소용돌이치는 블랙홀이 점차 에리스에게로 이동했다.

동시에 메이블린이 엄숙하게 선포했다.

“‘버림받은 신’ 에리스의 형 집행을 시작한다.”

“아니야… 아니야! 그깟 놈들이 뭐라고 신을 버려! 난 버림받지 않았어! 누가 감히 날 버리냐고!”

에리스가 몸을 사방으로 뒤틀며 고래고래 악을 썼다. 그 통에 사슬끼리 맞부딪히는 절그렁 소리가 끊임없이 신경을 긁어댔다.

하나 메이블린은 일말의 흔들림도 없이 형 집행을 이어나갔다.

“시간과 운명의 신, 티케는 버림받은 신 에리스에게 영원한 시간을 내리겠다.”

마치 세상의 종말을 고하듯 묵직하게 떨어진 문장.

메이블린이 말을 마치자마자 블랙홀은 에리스를 조금씩 먹어치우기 시작했다.

발끝부터 하반신 전체, 한껏 몸부림치는 등과 뒷머리까지. 전부 끝을 알 수 없는 무저갱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윽고 가슴과 얼굴만을 남겨둔 상태에서, 메이블린은 끝까지 표독스러움을 잃지 않는 면상을 마주했다.

그녀는 에리스의 거친 숨소리가 콧등에 닿을 만큼 가까이 얼굴을 붙였다.

희미하게 늘어진 입술 새로 음산한 저주가 흘러나왔다.

“너를 기억하는 이는 아무도 없는 곳에서, 너 혼자만 모든 기억을 간직한 채 살아봐.”

메이블린은 에리스의 가슴팍에 손을 얹고, 그대로 밀었다.

“그게 얼마다 지독스럽고 끔직한 것인지, 똑똑히 느껴.”

에리스는 저를 잡아당기는 어둠에서 벗어나려 미친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나 딱 그뿐. 이미 두 눈을 덮고 목덜미까지 집어삼킨 칠흑은 그녀를 잠식하는 속도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허망하게 부릅뜬 눈이 극한으로 커지고.

“아, 안 돼, 이럴 순 없어! 안…!”

물 밖에 던져진 붕어마냥 뻐끔거리던 입술도 마침내 완전히 먹혀들었다.

훅.

에리스의 신형과 함께 블랙홀이 완전히 사라졌다.

사위가 고요해졌다. 적막은 놀랍도록 빠르게 내려앉았다. 이따금 머리칼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소리만 들렸다.

메이블린은 홀로 남은 공터에 한참이나 멀뚱히 서 있다가, 몸을 돌렸다. 왔던 길을 따라 다시 내딛는 걸음이 퍽 성급했다.

저도 모르게 픽 실소가 터져 나왔다.

‘그러네, 삼십분을 못 참고 보고 싶네.’

드디어 긴 여정의 종점지에 다다랐다.

그 결말 위에 서서, 메이블린은 잠시 생각했다.

만약 자신이 주인공인 소설이 있다면, 아마 지금이 마지막 장이지 않을까.

‘그렇다면 다음은…….’

수많은 얼굴들이 눈앞을 스쳐갔다. 잠시 주춤했던 걸음이 다시 빨라졌다.

이야기는 끝을 맺었고, 책장은 덮였다.

그럼에도 그녀는 계속해서 나아갔다.

300년 전 모두가 기피했던 신은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그녀에겐 돌아갈 곳도, 곁을 함께해줄 이들도 있었다.

메이블린은 당장이라도 그 품에 뛰어들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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