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
잭의 목소리엔 짙은 음울이 서려있었다.
아무리 서로 잡아먹지 못해 안달인 사이라곤 하지만, 끝도 없이 땅굴만 파는 꼴은 보기 싫었다.
재키는 일말의 희망이라도 줄 수 있길 빌며 꺼림칙함을 참고 다시 칼리안에게 다가가 물었다.
“저기… 전하. 뭐 하나만 여쭤 봐도 되나요?”
“얼마든지.”
“그… 주군에 대한 소식은 아직 인가요? 아무것도 나온 게 없어요?”
“안타깝게도, 그에 관해선 나도 해줄 수 있는 말이 별로 없네. 오늘 아침엔 슈트레커 일가와 러셀바드 공까지 가세해 수색했으나, 여전히 흔적조차 없다더군. 마탑과는 아직 연락해보지 않았지만 아마….”
“거기도 마찬가지입니다.”
돌연 슈타커가 칼리안의 말허리를 자르고 나섰다.
칼리안의 한 쪽 눈썹이 슬며시 치켜 올라갔다.
“그대가 그걸 어찌 아나?”
“이디스가 말해줬습니다. 망할 탑주놈이 일만 산더미처럼 떠맡겨두고 코빼기도 안 보인다며, 날마다 하소연을 합니다.”
“이디스라면…… 마탑의 붉은 머리 마법사 말인가?”
“그렇습니다만.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문제가 있을 리가. 다만… 둘이 언제 그리 친해진 건가? 요즘 통 얼굴 보기가 힘들더니, 그 자와 복구 작업을 핑계… 아니 구실로 마을 정찰이라도 나간 겐가?”
묘하게 날선 어투였다. 마찬가지로 그에게 응수하는 슈타커의 태도 또한 비슷했다.
“그리하면 안 됩니까? 전하께서도 러셀바드 공과 꽤나 두터운 친분을 자랑하시지 않습니까. 시도 때도 없이 연락하시는 통에 오늘 사용한 마석만 해도 몇 갭니까?”
“그건 좀 더 빨리 정세를 회복하기 위한 상호간의 원조 차원에서-.”
“저도 그런 차원에서 마탑의 힘을 빌리고자 그녀와 친분을 쌓은 것입니다.”
“그 친분의 정도가 날이 갈수록 깊어지는 것 같아 내 말을 꺼낸 것 아닌가.”
도화선에 불이 붙은 것 마냥 공기가 더욱 달아올랐다.
둘은 이제 서로를 향해 대놓고 쏘아붙이기 시작했다.
“그게 전하와 대체 무슨 상관입니까?”
“그러는 그대는 내가 러셀바드 공과 친밀히 지내는 걸 왜 이리 못마땅하게 여기지?”
“그런 적 없습니다만.”
“지금도 그러고 있지 않은가.”
“그러는 전하께서도 마찬가지 아니십니까.”
“나는…….”
칼리안은 대꾸하려다 딱히 할 말을 찾지 못해 입술만 달싹였다.
때 아닌 언쟁은 그가 침묵하면서 막을 내렸다.
그러나 그도 잠시.
“그대는 전적이 있어서 불안해…….”
들릴락말락한 탄식이 칼리안의 잇새로 흘러나왔다.
여기서 그 ‘전적’에 메이블린이 관련되어 있음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재키는 그와 더불어, 남의 치정싸움에 끼어드는 것만큼 어리석은 짓도 없다는 것 역시 모르지 않았다.
그녀는 축 늘어진 잭을 질질 끌고 한창 썸 타는 두 남녀에게서 최대한 멀어졌다.
실버는 아까부터 일찌감치 하일의 머리맡으로 대피한 상태였다.
재키가 나지막하게 탄식했다.
“……하, 주군 보고 싶다.”
메이블린 슈트레커가 행방불명 된지도 벌써 몇 주.
분명 그녀가 쓰러진 걸 마탑주가 받은 것까진 똑똑히 봤는데, 둘이 한순간에 쑥 사라져버렸다.
땅으로 꺼진 것도, 하늘로 솟은 것도, 마법을 쓴 것도 아니면서. 흔적 하나 안 남기고 사라졌다.
같은 장면을 목격했던 잭이 희미한 물음을 허공으로 흘려보냈다.
“주군은 신이었던 걸까?”
재키는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며 그를 타박하지 않았다.
그야 전투에서 그녀가 보여준 힘은 도무지 인간의 것이 아니었던지라, 다소 합리적인 의심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맞다 아니다 답할 수 있는 처지 또한 아니라서, 재키는 어깨만 으쓱였다.
“나야 모르지. 우린 신이 아니니까.”
“하긴… 우리가 뭐라고….”
“그래도 이건 알아.”
“…뭘 아는데?”
“주군은 반드시 돌아오실 거야.”
메이블린의 정체가 무엇인지, 어디로 갔는지는 모르지만.
재키는 이것 하나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몇 년이 걸리든, 반드시 그러실 거야.”
몇 백 년을 살아온 나무처럼 뿌리 깊고 단단한 어조.
재키가 갑자기 어른스러워 보이는 건 기분 탓일까. 잭은 답지 않게 우울감에 젖어있었던 자신이 갑자기 바보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괜스레 입술을 비죽였다.
“쳇. 그건 나도 알거든. 뭐 당연한 걸 똥폼 잡으며 말하고 있어. 누나 행세하지 마.”
잭은 완전히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그를 보며 재키는 그제야 편히 웃었다.
덕분에 풀어진 손목 스냅을 알차게 이용할 수 있게 되자,
“뭐? 똥폼? 누나 행세? 말 다했냐?”
그녀는 잭의 등짝을 냅다 후려쳤다.
“아야! 무슨 여자 손이 이렇게 매워?”
“알면 알아서 기었어야지. 빨리 따라 복창해! 누나, 잘못했습니다! 앞으로 다신 안 그러겠습니다!”
“싫어!”
“그럼 더 맞던가.”
“어옥! 아!”
연달은 철썩 소리가 잭의 비명과 함께 터져 나왔다.
남매는 육탄전을 벌이고, 연애 같지 않은 연애에 한창인 두 남녀는 설전을 벌이고.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한데 이 모든 소란에도 흔들림 하나 없이 홀로 꼿꼿한 이가 있었으니,
[어우, 귀 따가워. 실버, 넌 괜찮아?]
“…….”
바로 실버였다.
그는 우렁우렁하게 울려 퍼지는 하일의 진언에도 묵묵부답이었다.
이를 의아하게 여긴 하일은 눈동자를 위로 굴려 그를 확인했다.
그리고 그의 귀 양쪽에 툭 튀어나와있는 것을 발견하자마자, 속으로 경탄하고 말았다.
‘정상인 놈이 어째 하나도 없어. 메이블린, 제발 빨리 좀 와라. 다들 미쳐간다.’
실버의 귓구멍엔 텔레포트 할 때 썼던 스크롤조각이 구겨진 채 꽂혀있었다.
* * *
클라인과 재회하고 그에게 천계 구경을 시켜주며 지낸 지도 벌써 열흘이 흘렀다.
그도 이제 천계의 한 일원이 된 지라 새로 익혀야 할 것들이 많았다.
‘당분간은 여기서 살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나는 내 신전 뒤편에 잘 가꿔진 정원을 거닐며 따사로운 햇살을 만끽하는 중이었다.
모처럼 휴식을 취하고 있는데, 멀찍이서 내 근처를 배회하던 클라인이 조금 주저하다 다가왔다.
“……주군. 저…….”
나는 방긋 웃으며 그를 맞이했다.
“이제야 오네요, 클라인. 아까부터 기다리고 있었어요.”
“……죄송합니다.”
“아뇨, 아뇨. 죄송할 것까진 없고요. 그래서, 뭐 궁금한 거 있어요? 다 괜찮으니까 물어봐요.”
“그것이…. 인간계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희미하게 떨리는 낮은 목소리. 애써 평정을 가장하지만 미처 감추지 못한 불안한 기색이 엿보였다.
나는 그저 넝쿨진 푸른 장미의 꽃잎을 문지르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조금… 아니 다소 엉망진창이긴 한데, 따로 생각해둔 복구 방법이 있어요. 걱정하지 않아도 돼요.”
클라인의 얼굴에 잠시 난처해하는 빛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내 말을 의심해서 따위의 이유는 아니었다.
그는 내가 무정란에서 병아리가 태어났대도 믿을 사람이었으니까.
그보다는 훨씬 단순한 문제 때문이었다.
‘신인 내가 천사인 자신에게 말을 높이는 걸 못 견디는 것뿐이지.’
그는 날 만난 직후부터 부디 말을 낮춰달라며 끊임없이 애원했었다. 하지만 나는 꿋꿋이 예전처럼 그를 대했다.
그러니까, 메이블린 슈트레커였을 때처럼.
내가 티케임을 부정하는 건 아니었다.
다만 나는 ‘메이블린으로서의 나’ 또한 잃고 싶지 않았다.
‘언젠가 메이블린의 시간이 다하면, 그 때 티케로 돌아와도 늦지 않아.’
결국 내 고집을 꺾지 못한 클라인은 순순히 이 관계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를 제치고서라도, 그는 여전히 묘하게 안달 난 눈으로 날 응시했다.
“그럼 주군께선… 계속 이곳에 머무르시는 겁니까?”
떼잉. 이게 무슨 소리야. 누가 어디에 머물러?
나는 눈을 훼둥그렇게 뜨며 답했다.
“아뇨, 아뇨. 당연히 아래에서 살 거 마저 다 살고 올라와야죠. 그러려고 창세신 후계도 마다한 건데.”
“한데 어째서…….”
왜 아직도 천계에 있는 지 궁금한 거겠지.
아무래도 천계에서의 내 체류 기간이 길어지자 불안한 모양이었다.
나는 말없이 그의 손을 잡았다.
이제 상처 하나 없이 깨끗하지만, 지난 아픔마저 차마 지워버리진 못한 그 손을.
그가 얼떨떨한 시선을 제 손아귀로 내렸을 땐 푸른 장미가 쥐여진 채였다.
“아직 할 일이 좀 남아서 그래요. 그것만 마치면 바로 내려갈 거예요.”
내가 환히 웃자, 클라인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슬슬 갈 시간이 됐는데….
때마침 타이밍 좋게 라파엘이 불쑥 나타났다.
“어, 우리 잘생긴 신입! 여기있었구나. 어서 가자!”
정원 끄트머리서부터 광속으로 날아온 그는 클라인을 참 살뜰히도 챙겼다.
“뭡니까?”
클라인은 잔뜩 찌푸린 미간을 펼 생각조차 하지 않는 듯했지만.
물론 라파엘에겐 끄떡도 없었다. 그는 아예 클라인의 팔에 매달려 앙탈을 부렸다.
“에이, 빼지 말고. 지금 신입 환영회한다고 다들 기다리고 있단 말야. 우리가 이날만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아?”
“제가 그걸 알 필요가 있습니까?”
“아이, 우리 라인이 또 까칠하게 군다. 이번엔 내가 특별히 바람 좀 더 넣었으니까, 기대해도 된다고.”
“쓸데없는 짓을 하셨군요.”
“내가 원래 그런 짓을 좀 잘해. 어떻게 알았어? 이야, 우리 라인이 이제 보니 나한테 은근 관심이 많았구나?”
클라인의 턱 흉터가 사라진 자리엔 불뚝 핏발이 올라 있었다.
무던한 클라인을 저토록 열 받게 만들다니. 역시 만만치 않은 녀석이었다.
라파엘은 아랑곳 않고 방긋방긋 웃으며 천진난만하게 물었다.
“근데 티케님, 루시퍼 보셨어요? 모처럼 몇 백 년 만의 환영회라 대장이 없으면 영 그림이 안 살아서요.”
“아니, 못 봤는데. 네가 여기 오는 사이 이미 가 있는 거 아냐?”
“흠, 그럴 녀석은 아닌데…. 아무튼 그럼 먼저 가볼게요.”
“그래, 어서 가. 가서 영영 안 돌아오면 더 좋고.”
“아휴, 제가 옆에 있으면 너무 사랑스러워서 깨물어버리는 참사를 저지를까봐 그러시는 거죠? 저는 다 알아요.”
“혹시 난청이 있니?”
“티케님께서 절 이렇게나 아껴주시다니… 이 파엘이는 너무 기뻐서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아요!”
요즘은 천사들도 난청은 물론이고 부정맥도 있나보다. 아니면 거지같은 3인칭을 써야만 하는 법이라도 있다든지.
나는 오로지 클라인에게만 시선을 고정한 채 손을 흔들었다.
“클라인도 재밌게 즐기다 와요. 파티의 주인공이잖아요.”
“주군께선 안 가십니까?”
“음… 아까 할 일이 좀 남았다고 했었죠? 지금 그 일 마치러 가는 거라서요.”
나는 포털을 열고 그 앞으로 성큼 다가갔다.
“그럼 이따 봐요.”
* * *
멀리서 낯익은 실루엣이 어른거렸다.
굳이 가까이 다가가지 않아도 말쑥한 인영의 정체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도 날 발견했는지 벽에 기대고 있던 등을 뗐다.
커다란 돌문이 세워진 성벽은 눈부시게 빛나는 그와 어울리지 않게 으스스하고, 음침했다.
주변엔 아무도 없어서 나는 눈치 볼 것 없이 말을 걸었다.
“뭐 대단한 거 한다고 여기까지 와.”
“그냥 보고 싶어서 왔어.”
“삼십분을 못 참아?”
“네가 그렇게 만드는 걸 어떡해.”
평소라면 어디서 그런 낯간지러운 말을 또 배워왔냐며 타박이라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꼼짝 않고 동상처럼 서있기만 했다.
발아래부터 올라온 차가운 돌문의 냉기가 머리끝까지 스며드는 듯했다. 높다란 성벽에 압도되는 기분이었다.
나는 몇 초가량 머뭇거리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겨우 중얼거렸다.
“……앞으로 이 안에서 일어날 일은 별로 보여주고 싶지 않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