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
“마, 마왕님……”
나는 도망갈 생각도 못하고 제자리에 못 박힌 듯 섰다.
발이 딱 붙어 떨어지질 않았다. 평소처럼 능청스레 굴지도 못했다.
그의 귀에 딱지를 앉힐 정도로 부르던 딸내미 호칭 역시 감히 꺼내볼 엄두도 못 냈다.
아가레스는 천족을 극도로 원증하는 이였다. 뼛속까지 경멸한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물론 그 사실이 그동안 아가레스와 친분을 쌓는 데 있어서 문제가 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지금은.
‘하필이면 내 정체가 그토록 역겨워하는 신이란 게 문제지.’
그런 존재가 그간 자신을 속이고 가증스레 달라붙었는데.
그것도 모르고 자신은 이것저것 퍼준 게 한둘이 아닌데.
‘노하지 않을 수가 있나.’
그러니까, 천계 침공을 감행해서라도 날 찾아낼 정도로 말이다.
나는 광포한 짐승 앞에 선 초식동물 마냥 식은땀만 주륵주륵 흘렸다.
불과 몇 분 새에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
“마왕님… 제가 정말 마왕님을 속이려고 속인 게 아니라요…….”
얼마나 배신감이 클까. 나는 말을 끝맺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았다.
차마 그의 얼굴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대신 조그맣게 웅얼거렸다.
“……마음껏 때리셔도 돼요.”
신이어서 죽어주진 못해도 분이 풀릴 때까지 맞아줄 순 있었다.
그렇게라도 해서 응어리가 풀린다면 더할 나위 없었다.
나는 단두대에 목이 깔려 사형명령만을 기다리는 죄수의 심정으로 처벌을 기다렸다.
그러나 머리 위로 떨어진 것은 칼날도, 분이 잔뜩 실린 주먹도, 서린 눈빛도 아닌.
“기다려봤자 이번엔 해가 바뀌어서야 모습을 보일 것 같아, 내 직접 찾아왔다.”
내가 기억하는 그대로의 담백한 음성이었다.
‘음? 내가 잘못 들었나?’
환청을 의심하는 날 일깨워주려는 듯, 아가레스가 여느 때와 다름없는 얼굴로 혀를 쯧 찼다.
“꼴을 보아하니, 이리하길 잘했지.”
어안이 벙벙해진 나는 붕어처럼 입만 뻐끔거렸다.
감히 마왕을 속인 발칙한 사기꾼은 뼛조각 하나 안 남기고 고이 발라드실 줄 알았는데.
그는 날 ‘증오스런 천계 놈’으로 취급하는 대신 여전히 메이블린 슈트레커로서 바라보고 있었다.
어떻게 확신하냐면…….
“메이블린 슈트레커.”
그가 대놓고 날 불렀으니까.
“네, 네?”
“곧장 대답하는 걸 보니 내가 아는 사기꾼이 맞군.”
화들짝 놀라 고개를 쳐들자 픽 웃는 아가레스의 모습이 보였다.
노했던 기색은 온데간데없었다. 내가 질리도록 봐왔던 얼굴만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다시 하나뿐인 딸내미로서 들이대도 머리가 날아가지 않을 유순한 분위기.
그에 힘입어 나는 슬그머니 말문을 텄다.
“저기요, 마왕님…….”
“사기죄에 또 무슨 죄목을 추가하려고 그러느냐.”
“그… 음, 그런 게 아니라요… 제가 신인데… 별로… 안 놀라시네요?”
“전투에서 네가 신력을 사용했을 때, 대략 짐작은 하고 있었다. 이렇게 빼도 박도 못하게 직접 확인하게 될 줄은 몰랐다만.”
일말의 주저도 없이 시원스레 돌아온 답.
그는 도리어 그게 뭐라고 그리 뜸을 들였냐는 기색이었다.
나는 아가레스의 태도가 도통 이해되질 않아 조심스레 물었다.
“그런데… 아셨는데도 왜 안 때리세요?”
“누가 말이냐?”
“마왕님이요.”
“내가? 널?”
“예. 아니면 하다못해 역정이라도 내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내가… 왜 그래야 하지?”
아가레스가 눈살을 찌푸렸다. 대체 그 무슨 황당무계한 소리냔 얼굴이었다.
오히려 잔뜩 당황해서 되묻는 이는 나였다.
“아니 그게… 저 신이라니까요?”
“그게 무어 어쨌다고 그러느냐.”
“마왕님은 천족을 경멸하시잖아요. 저는 그 천족이고요.”
“……하.”
깊은 한숨이 진득하게 떨어졌다. 답지 않게 어딘가 억눌린 듯 내뱉는 숨이었다.
그는 한차례 마른세수를 하고서, 이유모를 서글픔이 실린 눈으로 날 마주했다.
“얼마나 더 말해주면 믿겠느냐.”
“뭐, 뭘요?”
“늘 일러오지 않았더냐. 너는 내 딸이라고.”
“……예?”
“혹 너와 내가 지금껏 쌓아온 시간들이, 너의 정체 한 번에 뒤집어질 만큼 얄팍하다 생각한 것이냐?”
날 타박하기보다는 어이없어하는 투가 더 강하게 느껴졌다.
지금 넋이 나간 사람은 나임에도 불구하고.
‘이게 다 무슨 소리야. 내가 신인 걸 알아버렸는데도 여전히 나와 함께하고 싶다는 건가? 염치없다는 거 아는데… 정말 그런 의미로 받아들여도 되는 거야?
머리가 띵하니 저려왔다. 아까부터 줄곧 무슨 상황인지 당최 납득이 가질 않았다.
그러니 더 확실하게 확인받을 필요가 있었다.
나는 용기를 내서 꾹 짓씹었던 입술을 뗐다.
“그럼… 마계 공주님 자리가 아직 유효하단 뜻인가요?”
샐샐거리며 살갑게도 굴었건만.
“글쎄… 그건 잘 모르겠다. 누구 때문인진 몰라도 요즘 뒷골이 상당히 땅겨서 말이다.”
아가레스는 매정하게 날 거절했다. 요 며칠간 자신을 고생시킨 벌인 듯했다.
그렇다고 지레 겁먹을 필욘 없었다.
‘저 발연기가 말해주는 입꼬리를 보아하니, 이미 게임은 끝난 것 같네.’
나는 그가 원하는 반응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었고, 고작 이것으로 선처해 준다면야 내게는 더할 나위 없이 감사한 일이었다.
그의 애완악어의 등가죽에 기꺼이 뽀뽀를 퍼부어줄 수도 있었다. 물론 에르제베트 2세가 먼저 거절하겠지만.
나는 부러 과장스레 탄식하며 아가레스에게 매달렸다.
“세상에나, 대체 어떤 파렴치한 자가 우리 마왕님 뒷골을 빼먹는담!”
“있다, 비실비실거리게 생겨가지곤 시도 때도 없이 사기를 치는 녀석이.”
“아, 저 알 거 같아요. 소문으론 사기꾼이지만 엄청 멋지고, 매력적이고, 성격도 그렇게 좋다던데.”
“하지만 그 습성 어디 못 간다고, 지금도 사기를 치고 있을게다. 역시, 함부로 정을 주는 게 아니었지.”
“그럼 딸내미 자리는…….”
“다른 놈도 아니고 자식 놈에게 뒤통수 맞을 걱정은 더 이상 하기 싫구나.”
고집스레 단단히도 다물린 입.
우리 마왕님, 토라져도 잔뜩 토라진 모양이었다. 한 두세 번만 더 두드리면 오픈 마인드로 돌아올 것 같은데.
나는 더욱 애절한 낯을 하고서 손사래를 쳤다.
“어휴, 무슨 그런 섭한 소릴 하세요. 저 이제 진짜 숨기는 거 없어요. 솔직히 말해서, 저도 피해자예요. 제가 신인 줄은 겨우 조금 전에야 알았다구요.”
“사기꾼 말은 영 믿을 게 못 돼.”
“아이, 차암. 듣는 딸내미 속상하게 자꾸 왜 그러실까.”
“방금 따…… 크흠, 흠.”
아가레스가 흠칫 반사적으로 반문하려다 말고 헛기침을 했다. 드디어 틈이 조금 보이는 듯했다.
좋아, 그럼 막판 쐐기를 박아볼까.
“마왕님.”
나는 내가 지을 수 있는 가장 최대한의 믿음직한 미소를 걸쳤다.
“제가 자식 농사 하나는 끝내주게 잘 지었다는 소리 듣게 해드릴게요.”
* * *
강하게 내리쬐던 태양빛이 조금 느슨해졌다.
텅 빈 신전 내에는 아가레스와 나뿐이었다.
제우가 배려해준 덕분에, 나는 다른 천족들의 방해 없이 아가레스와 좀 더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애초에 제우에게 승인받아 가려던 곳도 마계여서 오히려 내가 찾아갈 수고를 덜었다.
거기서 데려오려 한 증인은…….
“근데 마왕님, 왕자님은 안 보이네요?”
악마 왕자 카임이었다.
‘우리 오라버니께선 어디 계시지? 아가레스를 말리려 따라붙었을 법도 한데.’
내가 아가레스 주변을 기웃거리자, 그의 이맛살에 주름이 파였다.
“그 놈은 왜 찾는 것이냐?”
“그게…….”
쿠웅!
느닷없는 소음이 내 말을 끊었다. 또다시 한차례 파동이 일었다.
피는 못 속인다고, 허공에 불쑥 생겨난 공허에서 익숙한 인영이 튀어나왔다.
“아버지! 이런다고 그 녀석을 찾을 수 있을 리는…!”
오, 마침 오셨네.
“반가워요, 왕자님.”
나는 살랑살랑 손을 흔들었다.
공허에서 나오자마자 날 만날 줄은 몰랐겠지.
카임의 잇새로 얼빠진 중얼거림이 새나왔다.
“……찾았네.”
평소 그의 이미지를 생각하면 굉장히 보기 드문 얼굴이었다. 영상구로 찍어 놓으면 두고두고 놀려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나는야 착한 공주님. 그런 못된 짓은 잠시 삼가도록 할게요.
나는 마구 치밀어 오르는 충동을 애써 잠재우며, 그 앞으로 다가갔다.
지척에서 내가 팔을 쭉 뻗자 카임이 엉거주춤했다.
“뭐, 뭐야. 나 이런 거 딱 질색인 거 몰라?”
내가 포옹이라도 해줄 거라 예상한 걸까.
안타깝지만 눈물겨운 재회장면을 연출하려던 건 아니었다.
나 역시 웬만해서 그 정도는 해주고 싶어도 시간이 촉박했다.
나는 그를 안아주는 대신 뿔을 잡고 아래로 당겼다. 거침없는 내 손길에 카임의 고개가 푹 수그러들었다.
“…지금 뭘 하는 거지?”
“잠깐만 좀 볼게요.”
“다짜고짜 내 머리는 왜…….”
“진짜 잠깐이면 돼요. 확인 좀 할 게 있어서요.”
나는 이를 잡듯 그의 머리를 헤집었다. 꼼꼼히도 살피는 내게 카임이 금전보다 더 얼탄 얼굴로 뭐라뭐라 꿍얼거렸다.
나는 그 미미한 반항을 가뿐히 묵살하고서, 특히 뿔을 집중적으로 공략했다.
그러자 곁에 우직하니 서있던 아가레스마저도 내게서 슬그머니 떨어졌다.
허허, 부자가 쌍으로 귀한 딸내미를 밀어낼 줄이야.
하지만 내 이름은 메이블린 슈트레커. 외로워도 슬퍼도 울지 않지.
증거 확인을 마친 나는 말끔한 낯으로 고개를 들었다.
“이 정도면 됐네요. 어서 갑시다.”
“……어딜?”
카임이 영 께름칙하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며 몸을 물렸다. 물론 의미 없는 불응이었다.
나는 다른 신전으로 통하는 포털을 열고 그 안으로 카임을 꾹꾹 밀어 넣었다.
“심판장이요.”
“그러니까 내가 거길 왜.”
카임이 발뒤꿈치를 땅에 박아 브레이크를 걸었다.
나는 개의치 않고 등판을 미는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하나뿐인 동생의 한을 풀어주고 싶지 않으세요?”
“내가 무슨 수로 네 한을 풀어줄 수 있다는 거야.”
“가보면 알아요.”
끙차.
막판에 안간힘을 다해 밀치니 카임의 신형이 포털 속으로 훅 사라졌다. 나도 곧바로 그를 따라 몸을 던졌다.
환한 빛무리가 몸을 훑고 지나가며 저 멀리 보이는 심판장의 정경이 점차 가까워졌다. 웅성이는 소리도 점점 커졌다.
가장 먼저 귓가를 선명히 파고드는 건, 에리스의 카랑카랑한 목소리였다.
“저는 무고합니다, 주신! 다들 큰 실수하시는 겁니다!”
그녀는 놀라우리만큼 당당했다.
자신을 벌할 마땅한 증거가 없다는 걸 스스로도 잘 알고 있는 작태였다.
창세신인 제우조차 주신들 뒤편에 앉아 돌아가는 상황을 관망하기만 했다.
그러나 어찌할 도리가 없어 손 놓고 있는 것이라기보다는, 꼭 때를 기다리는 맹수처럼 잠자코 지켜보는 모습이었다.
이윽고 에리스가 다시 한 번 더 억울함을 토로할 때에,
“여기 왔습니다, 증거!”
나와 카임이 포털에서 튀어나왔다.
우리의 보호자를 자처한 아가레스도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