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
300년 전, 천계.
콰앙!
한 수호신이 다짜고짜 문을 박차며 티케의 신전으로 들어섰다.
티케를 발견하자마자 그녀는 거세게 항의하기 시작했다.
“티케! 이번 분기에 전쟁은 넣지 않기로 했잖아! 근데 어젯밤 에임이 라호든을 침공했다고!”
새된 소리를 연달아 터뜨리는 여자는 에임의 이웃나라, 라호든의 수호신이었다.
갑작스런 방문에 티케가 놀라 되물었다.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전쟁이라니?”
“그럼 내가 지금 없는 말을 지어냈다는 거야?”
“그게 아니라… 살론은 지혜로운 사람이야. 그럴 리가 없어.”
그녀가 알기로, 에임의 왕 살론은 결코 전쟁을 일으킬만한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자애롭고 어질었으며, 왕국민들의 평안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이십 년을 넘게 그리 지내온 사람이 하루아침에 돌변해 전쟁을 감행했다니?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얼떨떨하게 고개를 젓는 티케 앞으로 라호든의 수호신은 스크린을 띄웠다.
“봐, 이건 뭔데? 네가 인간들을 제지하지 않고 멋대로 행동하게 두니까 이런 일이 발생한 것 아냐!”
믿을 수 없게도, 스크린 속에선 전쟁이 한창이었다.
검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쉴 새 없이 울리고, 끔찍한 절규와 비명이 낭자했다. 그야말로 눈 뜨고 제대로 보기 힘든 참상이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두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던 건, 가장 무도하게 학살을 일삼고 있는 자가 다름 아닌 살론이라는 사실이었다.
“너 때문에 내 시나리오는 망했다고! 어쩔거야, 티케!”
“마, 말도 안 돼…….”
티케는 반박할 일말의 의지도 잃고 주륵 미끄러져 내렸다.
어째서, 어째서. 그 인자하고 현명한 왕이 저렇게나 잔악하게 변한 것이지? 그것도 이리 한순간에?
실상은 에리스가 살론에게 정복욕을 속살거려 전쟁을 일으키도록 유도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는 티케로서는, 급변한 에임의 모습이 당황스럽기만 했다.
사건을 수습할 새도 없이 상황은 더욱 극한으로 치달았다.
나비의 날갯짓 하나가 일으킨 바람이 그 끝엔 태풍으로 변모하듯, 한번 틀어진 시나리오는 걷잡을 수 없을 만큼 무너졌다.
이윽고 에임과 라호든의 시나리오뿐만 아니라 주변국들의 시나리오마저 폐기 직전 수준까지 다다르자, 신들은 티케를 심판장에 세울 수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에리스는 다시 한 번 선동에 나섰다.
수호신들 사이에 분쟁을 조장해, 본래보다 더 큰 형벌이 내려지도록 몰아갔다.
“에임의 시나리오 7012호는 지금 시간부로 폐기된다. 더불어 새로운 시나리오의 용이한 정착을 위해, 에임의 인구 절반을 20년의 휴지기간 동안 교체할 것을 명한다.”
인구교체. 기존의 인물들을 죽이고 새로운 시나리오를 위한 인물들을 탄생시키는 것.
“교체 방식은 전염병의 대유행 정도가 적당할 듯싶군. 곧바로 시행하도록.”
자신이 그토록 아끼던 인간들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게 생겼는데, 얼마나 고통스러워할까.
에리스는 자꾸만 비죽비죽 올라가는 입꼬리를 감추기 위해 입가를 소매로 가렸다. 이만하면 충분히 통쾌했다.
한데 이 바보 같을 정도로 미련한 수호신은, 알아서 더 나락으로 떨어졌다.
“판결을… 다시 고려해주실 것을 요청합니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
“제가, 제가 잘못한 겁니다. 사람들은 죄가 없습니다. 살상명령만은 거둬주십시오.”
“인간들을 그리 방임했으면, 이런 결과정돈 예상했어야지.”
“그러니 제가 형벌을 받겠습니다. 판결을 다시 내려주십시오.”
간절히도 매달리는 어투에 주신들의 이맛살이 찌푸려졌다.
어찌하여 신이란 존재가 인간들을 감싸지 못해 안달인 것인지. 수호신들 중에서 티케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종자였다.
심판석에 앉은 주신들 중 판결을 내린 노신이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지금 그대가 하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아나?”
“……알고 있습니다.”
“정녕 추방당해도 괜찮다는 것인가?”
“예. 형량이 얼마든 상관없습니다. 부디 제가 책임을 물 수 있게 해주십시오.”
“기어코 신으로서의 긍지를 저버리는구나, 티케.”
노신은 못마땅하다는 얼굴로 혀를 쯧쯧 찼다.
저리도 고집스레 나온다면야 이참에 버릇을 완전히 길들여 놓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진창에서 한번 구르고 나면, 인간이란 얼마나 비루한 존재인가 깨닫게 될 터다.
그는 수호신에게 구형할 수 있는 최대의 악벌을 내렸다.
“시간과 운명의 신, 티케를 관할 구역 외 세계로 추방한다. 이 시간부로 그대가 신으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권능과 힘은 소멸당하며, 인간의 모습으로 기약 없는 비천한 생을 보내게 될 것이다. 그대는 형벌이 끝나 봉인이 풀릴 때까지 스스로의 존재조차 자각하지 못하리라.”
둥, 둥, 둥. 더 이상의 번복은 불가한 최종판결을 알리는 북소리가 떨어졌다.
그렇게 에임 사건은 일단락되는 듯 보였다.
그러나 바로 그 직후, 심판장엔 또 다른 죄인이 서게 된다.
“더러운 배신자!”
“감히 아버지의 권능에 대항해?”
“지옥에나 떨어져라!”
죄인으로 낙인찍힌 신을 옹호하다 못해 감히 창세신에게 달려든, 대천사 루시퍼를 심판하기 위해서.
그는 이미 죄인의 편을 든 것만으로도 처벌을 피할 수 없었다.
한데 자중하고 있어도 모자랄 판에, 되레 티케의 형벌을 거두어 달라 창세신께 난동까지 부렸다.
결국 가중처벌이 내려져 루시퍼 또한 형 집행 날만을 앞둔 죄인이 되었다.
“타락천사 루시퍼를, 인간계로 추방한다. 이 시간부로 그대의 직위를 박탈할 것이며, 모든 기억을 지우고 인간의 몸에 가둠으로써 힘을 봉인한다. 그대는 스스로 그 죄를 자각하고 뉘우칠 때까지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둥, 둥, 둥.
두터운 북소리가 또 한 번 울렸다.
* * *
에리스는 티케가 싫었다. 죽도록 싫었다.
벌레만도 못한 인간들이 뭐가 좋다고 그토록 아끼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끽하면 죽어나갈 미천한 존재들에게 어째서 삶을 주는 거지? 원하는 시나리오대로 끌고 가는 게 보기에도 좋고 그들도 편할 텐데.
하지만 아버지께선 그 모자란 신을 내치긴커녕 어여삐 여겼다. 이 또한 티케를 향해 더욱 깊은 증오심을 태우게 만들었다.
수호신으로서의 본분도 다하지 않는 녀석인데, 매번 인간들을 방임하다 간단한 시나리오조차 겨우겨우 마치는 녀석인데. 대체 어디가 그리도 맘에 드시는 건지.
형 집행까지 불과 삼십 분도 채 남지 않은 시점에서, 에리스는 티케를 찾아갔다.
앞으로 보고자 해도 보지 못할 그 얼굴을, 절망으로 뒤덮인 그 표정을. 가능한 많이 눈에 담고 싶었다.
그러나 막상 마주한 얼굴은 너무도 평온해서, 일순 속이 뒤집힐 만큼 잔잔해서. 에리스는 악독하게 저주를 퍼부을 수밖에 없었다.
“죽어. 그냥 죽어. 나는 네가 죽어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으면 좋겠어. 내 눈앞에 영영 나타나지 않았으면 좋겠어.”
신의 위엄이고 뭐고 없었다. 한껏 체면 차리던 말투는 어디가고, 에리스는 가장 원색적인 욕망을 표출하는 아이처럼 굴었다. 그녀는 티케 앞에만 서면 늘 그리 행동했었다.
티케는 익숙한지 덤덤한 태를 유지하며 팔짱을 꼈다.
“너 아니랄까봐 욕심이 많네. 미안한데, 둘 다는 못 들어주고 하나만 들어줄게. 죽는 거. 어때?”
“생각 없이 멍청한 줄로만 알았더니, 너도 네가 여기에 필요 없다는 자각은 있구나. 아버지께선 왜 너 같은 걸 내버려 두시는지 몰라.”
“아버지께서 정말 모르실 거라고 생각해?”
“상관없어. 너만 없으면 그 옆자리는 내 차지야. 이제 얼마 안 남았지? 잘 가.”
에리스의 시선이 잠시 티케의 손목에 닿았다.
[00:23:51]
선명하게 새겨진 숫자가 시시각각 변했다. 이 순간에도 추방되기까지 남은 시간은 빠르게 줄어드는 중이었다.
그러나 티케는 볼썽사납게 떠는 대신, 빳빳하게 고개를 들고 에리스를 직시했다.
“모두의 소원대로 죽어는 줄 텐데, 다시 돌아올 거야. 잊지 마.”
상대를 집어삼키는 푸른 인광이 두 눈동자에서 일렁였다.
“그리고 각오해. 내가 받은 상처만큼, 아니 그 곱절보다 더 처절하게 갚아줄 테니까.”
그녀의 말이 끝난 순간, 한차례 거센 바람이 일었다. 티케와 에리스가 동시에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눈부신 날개가 두 여신 사이를 가로막듯 펼쳐져 있었다.
“나오지 마십시오. 상대하실 필요 없습니다.”
루시퍼가 티케를 보호하듯 그 앞을 단단히 점거했다.
그는 감히 제 주인님을 모욕한 적에게 지대한 살기를 내뿜었다.
이어 한 치의 빈틈도 없는 설전이 오갔다. 에리스는 열이 바짝 올랐다.
자신은 무기력하게 늘어져 있는 작태나 감상하며 비웃어주려 왔건만. 오히려 제가 말리는 듯한 꼴은 뭐란 말인지.
그녀는 참지 못하고 악에 받쳐 소리를 내질렀다.
“어리석은 것! 네가 돌아올 때쯤엔 네 자리는 없을 거다! 내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네 나라만큼은 멸망시킬 테니까!”
‘저게 보자보자 하니까 진짜.’
티케는 루시퍼가 사이를 가로막고 섰음에도 에리스의 손가락질이 보이는 듯했다.
그녀는 갈 땐 가더라도 할 말은 하고 가야지 싶어 루시퍼를 슬 밀었다.
그러나 루시퍼는 그 자리에 박혀버린 바위처럼 꼼짝도 하지 않았다.
“괜찮습니다. 제가 알아서 할 터이니 티케님께선 잠시 물러나 계십시오.”
다만, 음습하고도 질척이는 기운이 그의 전신에서 피어올랐다.
“네깟 게 뭘 할 수 있…!”
일순 당황한 에리스가 말을 잇지 못했다.
검은 연기가 너울거리는 검이 정확히 그녀를 겨누었다.
빛을 이끄는 대천사란 위명이 무색하게도, 까만 독을 품은 날이 진동했다.
타락천사의 낙인을 얻고서 변질되어버린 힘이었다.
에리스가 격노해 호통을 쳤다.
“제대로 미쳤구나! 네게 쌓인 죄가 몇인데 감히…!”
“그렇기에 더더욱 당신의 가슴에 칼을 꽂아도 상관없는 겁니다.”
루시퍼는 아랑곳 않고 검을 치켜 올렸다.
“여기서 죄가 더해져봤자, 추락할 바닥 따위 남아있지 않으니.”
푸욱.
독으로 뒤덮인 날이 에리스의 어깻죽지를 관통했다. 검붉은 피가 날을 타고 뚝뚝 떨어졌다.
“더 잃을 것이 없는 놈에게 덤비실 땐, 심장이 꿰뚫리는 각오정돈 하셨어야지요.”
이보다 더 시릴 수 없는 읊조림이 에리스를 다시 한 번 더 꿰뚫었다.
에리스는 날을 두 손으로 꽉 쥔 채 새파랗게 질린 입술을 파들파들 떨었다.
“비열한 놈 같으니….”
“그리 욕지거릴 내뱉을 바에 이만 물러가는 게 좋을 겁니다.”
루시퍼가 관통한 검을 쑥 빼냈다.
“진정 내 발밑에 쓰러져 날 올려다보고 싶은 게 아니라면.”
“크윽, 허억!”
에리스는 억눌린 신음을 터뜨리며 휘청거렸다.
안간힘을 다해 짓누른 어깨 부근이 검게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 치료가 시급했다.
그녀는 별수 없이 제 신전으로 향하는 포털을 다급히 열었다.
그리고 포털에 몸을 던지기 직전, 아득바득 웃어 보였다.
“어디 마지막까지 그리 발악해 보아라. 결국 승자는 내가 될 것이다.”
기이하게 비틀린 조소를 마지막으로 그녀는 떠났다.
이윽고 둘만 남게 되자, 루시퍼는 검도 버리고 곧바로 티케를 살폈다.
주어진 시간이 얼마 없었다. 그녀의 손목에 새겨진 숫자는 무섭도록 빠르게 닳고 있었다.
[00:00:58]
1분 남짓한 시간.
루시퍼는 티케의 얼굴을 감싸고 위태롭게 흔들리는 두 눈을 마주했다.
고스란히 전해오는 떨림.
앞으로 인간의 생을 몇 번이나 겪어야 당신을, 이리 다시 안을 수 있을까.
그는 자신이 줄 수 있는 가장 확고하고도 필연적인 작별인사를 남겼다.
이 순간이 되어서야 겨우 참고 또 참았던 고백을 토해냈다.
“당신이 어디에 있든, 어떤 모습으로 다시 나타나든. 저는 당신의 곁에 있을 겁니다. 당신을 기억하지 못해도, 반드시 그럴 겁니다. 서로를 잊어도 함께할 겁니다. 그러니 울지 마세요.”
그는 먹먹한 숨을 삼키며 눈물줄기가 지나간 뺨을 다정히 쓸었다.
흐르는 눈물에 입을 맞추고, 그녀를 애써 다독였다.
티케는 어깨를 잘게 떨며 루시퍼의 품에 얼굴을 묻었다. 여느 때처럼 시원한 박하향이 났다.
에리스의 악독한 저주에도 멀쩡했던 눈물샘이 그 향 하나에 눈물을 펑펑 터뜨렸다.
“기다릴게, 루시. 약속한 거야. 나도 무슨 일이 있어도 네 곁으로 돌아올게. 그러니까….”
티케가 있는 힘껏 루시퍼를 끌어안았다.
“날 꼭 찾아줘야 해.”
[00:00:00]
다음 순간, 그녀의 신형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흔적 하나 남기지 않고 사라졌다.
갑작스레 사라진 부피감에 루시퍼의 두 팔이 허공을 휘저었다.
“아아, 아…….”
까맣게 물든 탄식이 그 사이로 흘러들었다.
채 가시지 않은 온기만이 남아, 비어버린 품을 허망하게 맴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