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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종은 오늘도 죽습니다 (160)화 (160/185)

#160

수호신들이 하나같이 입을 떡 벌렸다. 창세신과 루치펠을 제외한 모든 이들이 경악을 금치 못했다.

여기저기서 정신없이 아우성이 쏟아졌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아버지!”

“한낱 인간에게 치국의 권한을 물려주신다니요!”

“그것도 전 세계를 맡기시다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오로지 수호신들의 영역이었다.

모든 시나리오를 통제하고, 인간들을 그 안에 맞춰 조종할 수 있는 권한은 신만의 전유물이었다.

한데 창세신은 감히 인간에게 그 권한을 쥐여 주겠노라 선언했다.

그것도 한 나라 수준이 아니라, 세계 전체를 지배할 수 있는 권한을.

이는 즉 창세신의 자리를 물려준다는 의미나 다름없었다.

갑작스레 후계자가 된 메이블린은 눈을 한껏 부릅뜬 채 석상처럼 굳어있었다.

창세신은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두며 일어났다. 그가 뒤를 돌자 열띤 쟁란을 펼치던 신들이 잠시 입을 다물었다.

“지금 내 뜻에 반대하는 이들은, 감히 내게 대항하는 것이라 봐도 되나?”

날카롭게 벼려진 칼날 같은 음성이 떨어졌다. 달아올랐던 공기가 삽시간에 서늘해졌다.

경직된 분위기 속에서, 수호신들은 더욱 핏발을 세웠다.

평소 같았다면 으레 고개를 조아리며 뜻대로 따랐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 상황은 창세신의 권위 앞에 마냥 수그릴만한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 아무리 그러셔도 이건 지나쳤습니다!”

“수명도 유한한 존재에게 창세의 권한을 내리신다니요!”

“게다가 우릴 농락한 계집 아닙니까! 최고형을 내려도 모자랄 판에 어찌하여 이토록 괴이쩍은 행태를 보이시는 겁니까!”

신들은 쉽사리 물러나지 않았다. 아버지께서 왜 인간의 편을 드는지는 몰라도, 이번만큼은 결단코 용납할 수 없었다.

그렇게 악에 받친 고성이 오가는 가운데, 창세신이 별안간 풀썩 드러누웠다.

최고신으로서의 위신 따윈 버린 채, 의자처럼 솟아있는 구름덩이 위로 널브러졌다.

“아버지! 지금 무슨…!”

수호신들이 놀라서 황급히 몸을 낮추었으나 그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몰라, 나 피곤해. 나도 좀 쉬자.”

다만 손을 내저으며 잔뜩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저번에 했던 말 기억 안 나? 딱 10세기만 더 일하겠다고 했잖아. 근데 지금 벌써 10세기 하고도 23년 8개월이나 지났다고. 내가 십 세기 채울 날만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알아? 응? 씹쎄기.”

유난히 쎈 시옷발음이었다. 믿기지 않는 광경을 보며, 메이블린은 속으로 생각했다.

‘…욕하는 것처럼 들리는 건 내 착각이겠지?’

천계의 모든 것을 다스린다는 최고신은 아이마냥 땡깡을 부렸고, 그 사이에도 팽팽한 논쟁은 끊임없이 오갔다.

창세신 앞에 수많은 신들이 몰려가 금전의 결정을 번복해주길 거듭 간청했다.

“아버지, 얼토당토않다는 걸 아버지께서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메이블린 슈트레커는 인간입니다. 신들과 같은 자리에 있어서도, 나라를 지배해서도 안 되는 존재란 말입니다!”

“세계를 감당하기에 저 여인의 존재는 너무나 한미합니다!”

수호신 무리에서 메이블린을 두둔하는 이는 모로스와 라파엘뿐이었다.

그러나 둘은 이번 전투에서 인간의 편을 서 이미 죄인으로 낙인찍힌 터였다. 그들의 발언은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이 요란한 북새통 속에서, 루치펠은 줄곧 주저앉아있던 메이블린을 조심스레 일으켜주었다.

정신이 돌아왔는지 그녀는 하도 부릅떠서 뻑뻑한 눈을 두어 번 꿈벅였다.

“와, 뭐가 뭔지 하나도 모르겠다, 진짜.”

막막한 한숨을 내쉬는 그녀를 보며 루치펠은 빙긋 웃었다.

“그래도 할 말은 있어 보이는 얼굴인데.”

그러자 메이블린이 픽 실소를 터뜨렸다.

그건 또 어찌 귀신같이 알아선, 제 표정을 읽는 데 도가 튼 모양이지.

그녀는 구겨진 옷자락을 탈탈 털고서 허리를 폈다.

“당연하지, 그럼. 내가 이 소동의 주인공인데. 당사자가 할 말이 없어서야 되겠어?”

메이블린은 한 차례 깊은 숨을 내쉬더니, 자신의 두 뺨이 얼얼하도록 찰싹 때렸다.

“음, 됐어. 정신줄 다시 잡았어.”

그것으로 완벽하게 현 상황을 자각한 그녀는 번쩍 손을 들었다.

“저기 잠깐만요, 잠깐만 스탑. 다들 이렇게 싸우실 필요 없어요.”

“어딜 인간이 끼어들….”

“저는 별로 하고 싶지 않거든요.”

“……뭐?”

“그 뭐냐… 창세의 권한이니 뭐니, 아무튼 그런 거 말이에요. 차라리 모로스 신께 주면 안 되나요?”

난데없는 폭탄선언에 신들의 턱이 빠질 듯 내려앉았다. 그 능청맞던 창세신조차 뉘였던 몸을 벌떡 일으켰다.

한 노신이 메이블린을 향해 손가락질하며 외쳤다.

“보십시오! 은혜도 모르고 건방지기가 짝이 없습니다! 즉시 형벌을 내려야 합니다!”

“아니, 애초에 달라한 적도 없거든요?”

“저, 저 본인이 어느 위치인지도 모르고 대드는…!”

“조용.”

창세신이 침묵의 의미로 손을 들었다.

얼굴 가득 핏발을 세우던 노신은 확 돌변한 기류에 찔끔 입을 다물었다.

사위가 고요해지자 창세신은 손깍지를 낀 채 메이블린에게 지그시 시선을 박았다.

“왜 거절하는지 이유를 듣고 싶은데.”

그녀는 여전히 후광 때문에 좀처럼 보이지 않는 얼굴을 마주하며 당당하게 되물었다.

“그 전에 제 질문에 먼저 답해주세요. 왜 하필 저예요?”

“너는 세계의 지배자가 아니라 조력자가 되어줄 수 있을 것 같거든.”

“제가요? 대체 뭘 보고요?”

“아주 옛날부터 많은 걸 보고. 수십 세기동안 이어져온 지배관계를 깨뜨리고 새로운 세계를 열 수 있는 사람이지.”

메이블린은 깊은 상념에 잠겼다. 그의 마지막 말이 뭔가를 건드린 모양이었다.

그러나 몇 초되지 않아, 역시 안 되겠는지 고개를 저었다.

“저치들 말에 동의하긴 싫지만, 저는 어쩔 수 없는 인간이 맞아요. 제가 앞으로 백 살까지 산다고 쳐도 당신들에겐 찰나의 시간일 걸요. 저는 유한한 그 시간을, 제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보내고 싶어요. 세계를 위해서 제 행복을 포기하고 싶진 않아요.”

“그럼 신이면 되는 거야?”

“예? 누가요?”

“누구긴 누구겠어.”

창세신의 시선은 메이블린에게 끈덕지게 붙어 떨어질 줄을 몰랐다.

메이블린은 검지로 자신을 가리키며 헛헛한 숨을 내뱉었다.

“저를 뭐… 신으로 만들겠단 말씀이세요? 진심?”

“네가 인간계에서 살다 죽을 때까지도 휴가로 처리해줄게.”

“와, 실례가 안 된다면 혹시 천계에도 마약이 있는지 물어도 될까요?”

“여기엔 없는데, 옛날에 지구에서 누구 좀 찾다가 라스베가스에서 몇 번 한 적은 있지.”

“신이 아니라 완전 양아치였네요.”

“뭐, 완전히 부정할 수 없는 말이긴 해.”

불현듯 익숙한 감각이 메이블린을 강타했다.

‘어째서… 창세신이란 작자에게서 신제우의 향이 느껴지는 거지?’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줄곧 흐리던 얼굴도 점차 또렷해져 갔다.

어째 생긴 것 마저 제우와 비슷한 것 같다 생각하던 순간, 그는 수호신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너희들도 그러면 해결되는 거지? 메이블린이 신이 되면, 아무 문제없는 거지?”

“아버지, 그건…!”

“어차피 후계 지목은 온전히 내 권리니 더 얹을 말도 없을 테고. 무엇보다, 너희들이 진정으로 날 따른다면 원래 입도 벙긋 해선 안 돼. 나는 그녀가 잃은 것을 돌려주는 것뿐이니까.”

고개가 천천히 제자리로 돌아오고, 햇빛 아래 다소 갈색을 띠는 검은 머리칼이 들썩였다.

그가 다시 메이블린을 마주했을 땐, 선명한 얼굴이 그대로 드러났다.

후광도, 은근슬쩍 가리는 햇빛도 없는.

장장 이십년을 동고동락했던 친구 놈, 신제우의 얼굴이.

“너, 너… 네가 어떻게…….”

상당한 충격에 메이블린이 연신 말을 더듬었다.

창세신이자, 그녀의 소꿉친구인 제우는 느릿하게 웃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메이블린의 이마를 가볍게 톡 쳤다.

“아직도 기억이 나지 않아?”

그 순간, 시스템 알림음이 연달아 울렸다.

[지극한 관심으로 당신의 존재감이 모두에게 각인됩니다!]

[관종력: ★★★★★]

[축하합니다! 당신의 레벨이 최고치를 달성했습니다!]

[업적 정산을 위한 최종 업데이트에 들어갑니다….]

[봉인 되었던 존재가 풀립니다!]

[당신의 진명은 ‘티케’입니다.]

휘이익-!

시스템 창이 사라지자마자 거센 돌풍이 메이블린을 감쌌다.

그녀의 전신에서 눈부신 빛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신들이 팔로 얼굴을 가리며 몸을 낮추었다. 꾹 딛고 선 발들이 구름에 긴 자국을 남기며 뒤로 밀렸다.

“메이블린!”

루치펠은 창세신도 제치고 달려가 메이블린을 꼭 끌어안았다.

광포한 휘광이 공간을 자를 것처럼 허공에 번져나갔다.

루치펠은 더 안달이 나서 메이블린을 안은 팔을 더욱 가까이 끌어당겼다.

기묘한 힘이 그녀에게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리워하고 또 그리워해도 모자란, 오직 그 분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포근한 결.

‘이건…….’

메이블린을 만난 뒤 한동안 자신을 아프게 하지 못했던 존재가 루치펠을 불쑥 찾아왔다.

아무리 참고 또 참아도 절로 향하는 마음만은 어쩔 수 없어 끝내 가슴에 품었던,

‘나의 여신.’

[티케: 에임의 수호신. 시간과 운명 위를 걷는 자.

300년 전, 한 수호신의 모략으로 시나리오의 균형을 무너뜨려 기억을 잃고 다른 차원으로 추방되었다. 형 집행 중 창세신의 인도로 영혼만 에임으로 빙의된 상태. 현재는 모든 업보를 치르고 본래의 힘을 되찾았다.]

[수호신 티케의 귀환을 축하합니다!]

[시스템이 종료됩니다.]

뚝, 소리와 함께 창이 모습을 감췄다.

메이블린은 휑한 허공을 멍하니 응시했다.

마지막 메시지를 끝으로, 시스템 창은 더 이상 뜨지 않았다.

지난 몇 년간 지긋지긋하리만큼 자신을 얽맸던 시스템이 사라졌다.

완전히, 사라졌다.

다만 결코 잊을 수 없는 과거의 조각들이 거대한 해일처럼 밀려와 전신을 덮쳤다.

바람이 잦아들고 빛이 가라앉았을 땐,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그녀는 더 이상 메이블린이되 메이블린이 아니었다.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얼굴로, 그녀는 팔을 뻗었다.

하느작거리는 손가락이 루치펠의 뺨을 천천히 쓸었다.

“루시… 나, 나 돌아왔어. 다 기억났어. 나는 메이블린이자 티케야. 그리고, 그리고….”

이어지는 말은 새삼스럽게도 루치펠에게서 돌아왔다.

“여전히 날 사랑해. 그렇지?”

다정한 목소리가 메이블린의 귓가에 내려앉았다.

일말의 흔들림도 없는 어조와 곧은 눈빛.

갑작스레 몰아친 기억 탓에 모든 것이 혼란스러운 지금, 메이블린은 그것만큼은 확신할 수 있었다.

“응. 네가 날 사랑하는 것처럼 사랑해.”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을 맞추었다.

달콤하게 오가는 숨결을 느끼며, 루치펠은 문득 메이블린과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이성적인 사고로는 설명할 수 없었던, 본능적인 이끌림.

그는 그녀에게 끌릴 수밖에 없었다.

이제 와 돌이켜보면 이리될 줄, 더없이 사랑하게 될 줄 어렴풋이 알았던 것 같다.

그에게 있어 그녀는, 유일한 신이었으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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