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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종은 오늘도 죽습니다 (159)화 (159/185)

37. 유일한 시간의 이름

#159

훌쩍이는 소리는 한참이나 이어졌다.

볼썽사납게도 한바탕 눈물을 쏟아낸 나는 조금씩 속을 가라앉혔다.

그러자 주변 정경이 차츰 다시 눈에 들어왔다.

목화솜처럼 피어오른 구름, 유달리 눈부시게 타오르는 태양, 빛줄기 사이로 드문드문 보이는 고풍스런 분위기의 신전 같은 건물들.

나는 딸꾹질을 그치려 애쓰며 물었다.

“근데 루시…… 여기가 어디야?”

“천계의 신전.”

“뭐?”

이런 누추한 곳에 나같이 귀한 사람이 왜 있어?

나는 금전까지 펑펑 울던 것도 잊고 벌떡 일어났다. 그 탓에 앞길을 막은 구름 몇 조각이 흔들렸다.

그 너머로 웅성이는 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렸다.

‘누가 있나?’

나는 구름을 헤치며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아직 눈물이 완전히 마르지 않아 시야가 흐릿했지만, 검은 인영들이 어른거리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이윽고 피사체를 식별할 수 있을 만큼 눈이 뜨이자,

‘뭐지, 이보다 더 주옥같을 수 없는 풍경은? 저 거지같은 낯짝들은 뭐냐고.’

나는 속으로 욕부터 지껄였다. 눈물도 어느새 쏙 들어갔다.

그도 그럴게, 스무 걸음 가량 떨어진 신전에 신들이 한 뭉텅이로 모여 있었다.

둥근 원탁에 빙 둘러앉은 그들은 저마다 심각한 표정을 짓고서 무언가에 대해 논의 중이었다.

전부 금전의 전투에서 한 번씩은 봤던 얼굴들이었다.

꼬장꼬장하기가 꽈리꼬추보다 더했던 놈, 비열하기로 조커 밥그릇 두 공기는 족히 뺏어갔을 노신, 반대로 인간의 편에 서주었던 모로스까지.

라파엘인지 나팔인지 하는 녀석도 그 주변을 알짱대고 있는 게 보였다. 갈색머리 여신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유난히 큰 구름 뭉치 뒤에 숨어 동태를 살폈다. 대화가 들리긴 할까 싶었는데, 다행히 신들 무리에서 큰 소리가 날아왔다.

“한낱 인간들이 어찌 우리의 지배를 거부한단 말이오!”

“하지만 세계의 결속이 끊겼잖습니까! 더 힘쓰기엔 그 의지가 너무 막강합니다!”

“이리되면, 아버지께서 나서시는 수밖엔 없습니다.”

“이번에야말로 한꺼번에 인간들을 밟아야….”

맞다, 세계! 인간계는 어떻게 됐지?

나는 고개를 홱 돌렸다.

“루시. 사람들은 어때? 무사해?”

대전이 어찌저찌 승리로 끝났다는 건 기억나는데… 그 다음부턴 필름이 끊긴 것 마냥 머릿속이 완전히 백지였다.

‘그래도 세계는 지켜서 한시름 놨네. 이디스의 거대한 자아가 발현된 게 그야말로 신의 한수였… 잠깐. 내가 이걸 어떻게 알고 있지?’

문득 당연한 궁금증이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전투 내내 루치펠이 말해주지 않은 사실도 자연스럽게 알고 있었다.

마치 내가 천계의 구성원이라도 되었던 것처럼.

덜컥 브레이크가 걸린 날 다시 움직여준 건 루치펠이었다.

그는 내 기억의 공백을 차근차근 채워주었다.

“네가 정신을 잃은 후에도 세계는 한동안 불안정했어. 이디스를 비롯해서 많은 사람들이 천계의 지배에 거부의지를 표했거든.”

“거부의지?”

“응. 노랭이 두 마리랑 충견, 교황과 신수들, 에스카로트 공작과 네 가족들, 암살자들, 그리고 진실을 알게 된 다른 시나리오의 주인공들까지 전부. 그 전무후무하고도 엽기적인 행각에 동참했어.”

“그럼 정말로…….”

“그들의 의지가 천계와 인간계의 결속을 끊어버린 거야. 천계는 더 이상 인간계에 간섭할 수가 없게 됐지.”

그러니까, 등장인물들이 자신이 주인공이 아닌 무대를 떠나는 대신 그 각본을 짠 감독과 제작자를 한 마음 한 뜻으로 버렸단 거다.

줄거리는 우리들끼리 알아서 잘, 만들어나가겠다고.

“그래서 지금은 다 멀쩡해? 세계가 불안정했다며. 그건 괜찮은 거야?”

“음…….”

거침없이 얘기를 이어가던 루치펠이 답지 않게 말꼬리를 늘였다.

그는 최대한 좋게 포장할 말을 골라내려는 듯하다가, 내가 눈을 흘기자 순순히 실토했다.

“세계가 한 번 뒤집히기도 했고, 천계에서 워낙 무도하게 공격을 퍼부은 탓에 좀 엉망이긴 해. 이노아드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더라고.”

“그럼 에임도? 에임도 난장판이야?”

루치펠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대체 얼마나 난장판인 거야? 얘가 인정할 정도면 어지간한 난리가 아니란 소린데.

심각해진 내 표정을 본 루치펠은 떨떠름해 하면서도 착실하게 답은 해줬다.

“내가 아까 노랭이랑 공작도 거부의지를 표했다고 했잖아. 다 무사해. 건물 몇 개만 좀 사라졌을 뿐이야.”

“건물 몇 개? 그래서 피해가 자세하게 어느 정도인 건데.”

“…….”

왜 대답을 못 하는 거야, 이 양반아.

나는 팔짱을 끼고 이맛살을 찌푸렸다.

“네 기준 말고 통상적인 기준으로 어서 말해.”

루치펠은 잠시 머뭇거리다 마지못해 답했다.

“그냥 웬만한 수도들은 다 반파됐다고 봐야 해. 각 나라 수도 신전마다 방대한 신력이 들어차서 지각이 흔들렸거든.”

“뭐?”

“하지만 그만큼 완전히 자유의 몸이 됐지. 현재는 완벽하게 안정됐어. 조금 너덜너덜한, 전과 다를 바 없는 세계야.”

‘전과 다를 바 없다고…….’

목구멍에 턱 막혔던 안도의 숨이 그제야 새나왔다.

엉망이니, 너덜너덜이니 하는 단어가 좀 걸리긴 했지만 일단 꼭두각시 노릇을 때려 친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그래, 이보다 더 나을 수 없는 상황이긴 해. 그 빌어먹은 결속이 끊겼다니깐. 좋지, 좋아. 그런데…….’

나는 묘하게 찝찝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 이유는 아까부터 줄곧 시야를 차지하는 구름덩이와 여전히 회의 중인 신들을 보자마자 깨달을 수 있었다.

‘간섭할 수 없다더니 인간인 내가 어째서 천계에 있는 거냐고.’

나는 혹 목소리가 새나갈까 루치펠 옆에 붙어 소곤거렸다.

“저기 루시. 근데 나는 왜 여깄어?”

“…….”

이번에도 그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나는 재촉에 아니꼬움을 한 스푼 더한 눈총을 장전한 뒤 쐈다.

총탄을 직격으로 맞은 루치펠의 입이 다시 열렸다.

“그게… 이 모든 일의 시초인 널 심판해야 한다고 아우성을 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었어. 다른 인간들은 몰라도, 이상하게 너만큼은 천계로 데려오는 게 가능했고.”

“심판? 설마… 저 신들이 지금 논의하고 있는 게 내 형량이란 소리야?”

“뭐, 그런 셈이지.”

“말도 안 돼! 그럼 나 벌 받는 거야?”

내가 어떻게든 좀 살아보겠다고 그 고생을 했는데, 벌까지 받는다고? 억울하다, 억울해!

당장 화병 걸려 죽는대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었다. 나는 별 욕이란 욕은 다 쏟아내며 분통을 터뜨렸다.

그런 날 루치펠이 다독였다.

“걱정 마. 창세신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이니까.”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사위가 무섭도록 조용해졌다.

단순한 적막을 넘어서 공기를 짓누르는 무언가의 존재감.

고성이 오가던 회의장에서도 소란이 한순간에 뚝 그쳤다.

‘무슨 일이지?’

나는 다시 구름자락을 움켜쥐며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그 꼬장꼬장한 신들이 죄다 한 남자 앞에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좌중을 압살하는 기운,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나른한 동작.

저 자가 창세신이란 건 단박에 알 수 있었다.

남자의 얼굴은 느닷없이 내리쬔 햇빛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는 고개를 조아린 신들을 둘러보더니, 서서히 몸을 돌렸다. 동작 끝에 걸려 내다보는 시선은 정확히 이쪽을 향하고 있었다.

마치 숨어있는 내가 보이기라도 한다는 듯이.

나는 찔끔 몸을 떨며 곧바로 홱 주저앉았다.

하나 빌어먹게도, 다가오는 발자국소리는 점점 더 커져만 갔다.

“뭐해, 루치펠! 얼른 이리 와!”

나는 멀뚱히 앞에 서있는 루치펠에게 너도 어서 숨으라고 입모양으로 외치며 다급히 손짓했다.

근데 이 망할 놈이 글쎄,

“드디어 결정났나보네. 이만 나가자, 메이.”

별안간 날개를 펼치더니 참으로 기똥차게도 펄럭였다.

덕분에 날 감싸던 구름조각들은 외딴 섬 마냥 사방으로 떠내려갔다.

‘아, 안 돼!’

등 뒤가 순식간에 썰렁해졌다. 한 트럭으로 쏟아 부어진 찬물세례 속에 나 홀로 떨어진 기분이었다.

새가 찍 싸고 간 새똥처럼 휑뎅그러니 앉아있는 내 앞으로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굳이 돌아보지 않아도 창세신이 서있음은 분명했다.

그의 세계를 망친 내가 여간 탐탁지 않을 것이란 사실 또한, 자명했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불호령이든 형벌이든 떨어지기만을 기다렸다.

그렇게 잔뜩 각오하고 있는데, 돌연 눈앞이 환해졌다.

나는 꾹 닫고 있던 눈꺼풀을 슬그머니 들었다.

‘……뭐지?’

상황이 쉽사리 이해가지 않았다. 은은한 후광을 발산하는 창세신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그러나 거센 노성도, 원통하기 그지없는 형벌도 없었다.

단지 그 빛만큼이나 따스한 음성이 날 감쌌다.

“오랜만이야. 드디어 여기까지 왔네.”

정감이 한가득 깃든 목소리. 꼭 오랜 시간 만나지 못했던 친구를 마주한 기분이었다.

숱한 의문들이 연달아 떠올랐다.

‘어째서 나와 알고 있었던 것처럼 구는 거지? 왜 아무런 처벌도 내리지 않는 거지? 루치펠은… 웬일로 지켜보고만 있지?’

나는 여전히 갈피조차 잡지 못하고 얼떨떨하게 있었다.

날 더 절망하게 만들려는 몰카인건가, 천계에도 몰카가 있나, 까지 생각이 미쳤을 즈음.

“궁금한 게 많지? 뭐부터 말해줄까. 아, 일단 세계의 존속에 관한 거부터?”

창세신이 무릎을 접고 앉아 나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곳곳에서 경악하는 신들이 헛숨을 들이 삼키는 소리가 났다.

그러나 그는 아랑곳 않고 말을 이었다.

“나도 웬만하면 지금 상태를 유지하고 싶지만… 인간의 생명은 유한하고, 거부의지를 표한 이들의 시간이 다하면 결속은 다시 발현될 거야. 언제까지고 천계와 인간계가 분리되어 있을 순 없어. 우린 그들에게 강제성을 부여해야만 하는 존재들이고, 그들은 받아야만 하는 인간들이니까. 그게 이 세계가 굴러가는 법칙이야. 그걸 바꾸는 건 불가능해.”

나는 눈동자를 도르륵 굴렸다.

“저, 음… 무슨 말인진 알겠는데… 제게 왜 이런 걸 설명해주시는 거죠…? 당신은 창세신이 아니던가요?”

그는 긍정의 답으로 흔쾌히 턱을 까딱였다.

“맞아. 그래서 그 방식을 바꾸는 것 정돈 할 수 있거든.”

“네……?”

주변이 또다시 한차례 더 술렁였다. 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건 나뿐만이 아닌 듯했다.

신들 역시 창세신의 저의를 파악하지 못하고 웅성거렸다.

그 소란을 뚫고 낭창한 음성이 떨어졌다.

“그러니 그 때까지는, 그리고 그 후로도. 네게 이 세계를 맡길게.”

“예?”

“뭐, 지금 당장이라도 힘 좀 쓰면 끊어진 결속을 연결하는 것쯤은 할 수 있긴 한데, 당분간은 그럴 생각이 없거든.”

후광 사이로 언뜻 비친 시선이 날 직시했다.

모든 신들이 경배해 마지않는다는 창세신은, 기어이 잔잔한 호수에 물보라를 일으켰다.

“그러니까 어디 한 번 잘 다스려… 아니지. 이젠 이렇게 말해야 하나?”

수천 년 동안 지켜져 온 굳건한 규율을 깨뜨리고, 날벼락을 꽂아 넣었다.

“잘 살아 봐.”

나라는 날벼락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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