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
눈이 부셨다.
분명 눈을 꾹 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눈앞이 새하얬다. 꼭 고도가 높은 곳에 올라 태양과 가까워진 기분이 들었다.
‘꿈은 끝났나.’
주마등처럼 이어졌던 꿈이 막을 내리고, 이제 깰 시간인 모양이었다.
메이블린은 으레 영화나 소설에서 봐왔던 것들을 떠올리며 슬며시 눈을 떴다.
빛나는 오후의 햇살과 포근하고 새하얀 침대, 자신이 일어났음에 감격하며 몰려드는 사람들….
그러나 그녀를 가장 먼저 맞이한 건, 똑같이 하얗고 폭신폭신한 건 맞으나 침대가 아닌 구름이었다.
솜사탕 마냥 몽글몽글하게 피어오른 구름덩어리.
자신 역시 그 중 하나에 폭 에워싸여 누워있었다. 눈을 꿈벅거려도 구름동산은 사라지지 않았다.
진동하던 혈향도 나지 않았고, 그토록 치열하게 움직였음에도 몸이 개운했다.
옷마저도 때가 줄줄 흐르는 갑옷이 아니라 흰 천을 둘둘 만 것에 가까운 긴 드레스를 입고 있었다.
‘혹시… 아직도 꿈속인 건가?’
메이블린은 볼이라도 꼬집어 볼 요량으로 팔을 들었다. 그러나 채 움직이기도 전에 어정쩡하게 굳어버리고 말았다.
그녀의 손가락을 파고든 또 다른 손이 있었다.
“일어나서 다행이야, 메이블린.”
한없이 다정하고 막연히 그리운 목소리.
단박에 안도감이 밀려왔다.
메이블린은 깍지 끼워진 제 손을 물끄러미 보다가, 시선을 위로 올렸다.
눈부신 은발이 얼굴 위로 드리워졌다.
“머리 예쁘다. 보름달처럼 물들었네.”
그녀가 정신을 차리고 내뱉은 첫 문장이었다.
깨자마자 한다는 소리가 이거라니. 얘를 어쩌면 좋아, 진짜.
루치펠은 못 말린다는 듯이 웃어버렸다.
“나도 나지만, 시도 때도 없이 반하게 하는 졸부님에게도 어느 정도 책임이 있다고 생각해.”
“그래서 뭐, 평생 책임지라고?”
“이미 네 울타리 안에 들어와 있는 줄 알았는데. 아니야?”
“들어오긴 무슨.”
메이블린이 바람 빠진 실소를 터뜨렸다. 동시에 루치펠의 입매가 미세하게 굳었다.
“…그 정도까지 바라는 건 내 욕심인가?”
그러자 메이블린은 금전보다 더 허무맹랑한 소릴 들었다는 표정으로 팔을 뻗었다.
졸지에 멱살이 잡힌 루치펠의 눈이 동그래졌다. 그 반동으로 벌떡 일어난 그녀는 다시는 헛소리 말라는 듯 멱살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웃기지 마. 들어온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콱 박혔지.”
“…….”
루치펠이 얼떨떨하게 눈을 꿈벅였다.
그제야 메이블린은 멱살을 탁 놓으며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였다.
“안간힘을 써도 안 뽑힐 것 같아서, 그냥 냅두기로 했어. 평생 끌어안고 살까 봐.”
“하.”
그걸 말이라고. 한숨 비슷한 웃음이 루치펠의 잇새로 새나왔다.
그녀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조여들었다 뛰는 제 심장이 우스웠고, 동시에 안도했다.
물론 그런다고 어찌할 수 있는 건 없었다. 얄밉게 저를 놀리는 모습마저 퍽 사랑스러워 보일 지경이었으니, 이제 와 뭘 망설일 수 있겠는가.
이번엔 루치펠이 팔을 뻗었다. 그는 메이블린의 뒷머리를 부드럽게 감싸 쥐며 제게로 끌어당겼다.
내뱉는 숨결이 그녀의 이마를 간지럽힐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그가 나직하게 말했다.
“잘했어. 앞으로도 그냥 둬. 나는 절대 나갈 생각도, 놔줄 생각도 없거든.”
루치펠이 메이블린의 콧등에 짧게 입을 맞추었다.
메이블린은 루치펠을 마주한 채 숨을 천천히 들이켰다 내쉬었다.
어색했던 공기가 차츰 부드럽게 녹아내렸다. 금전까지 잔존했던 일말의 불안감마저 벗겨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이윽고 눈을 꾹 감았다 뜬 그녀는 루치펠을 와락 껴안았다.
“메이…?”
“조금만 이러고 있어주라, 조금만.”
평소와 달리 먼저 매달려오는 그녀의 모습에 루치펠은 잠시 당황했으나, 어깨를 적시는 목소리가 한없이 애달파 두말 않고 그녀를 꼭 안아주었다.
쿵, 쿵. 박동하는 심장소리가 서로에게 고스란히 전해졌다.
온전히 살아있다는, 뚜렷하고도 선명한 감각.
메이블린은 그를 더 깊숙이 느끼기 위해 그의 품으로 더욱 파고들었다.
세찬 비에 누운 풀잎 같은 물음이 희미하게 새나왔다.
“우리… 무사한 거 맞지? 정말 다 끝난 거지? 더 이상은 없는 거 맞지?”
“응. 다 끝났어. 전부 끝났어. 이제 쉬어도 돼, 메이블린.”
루치펠의 커다란 손이 메이블린의 등을 쓸었다.
그 손길이 너무도 상냥하고 다정해서, 따스하고 든든해서. 메이블린은 별안간 속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극도로 긴장했던 상황에서 벗어나니 맥이 탁 풀린 모양이었다.
‘…왜 이러지? 눈물이 날 것만 같아.’
애써 참아봤지만 일렁이는 파도는 점점 더 부풀어 올라 속을 가득 채웠다. 메스꺼운 것 같기도 하고, 머리가 핑핑 도는 것 같기도 했다.
작지만 강한 새싹이 단단한 벽을 뚫고 기어이 움트는 듯했다.
갑작스럽다는 것도 아는데, 애같이 매달리면 안 된다는 것도 아는데.
잠깐만, 아주 잠깐만 솔직하게 굴면 안 되나.
내 밑바닥 좀 보이면 안 되나.
‘네 앞에서만큼은 그래도 되는 거잖아.’
결국 그녀는,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흐아앙-! 나 진짜 울긴 싫었는데, 안 울려고 했는데…! 너무, 너무 힘들었어. 너마저 잃게 될까 봐, 흐윽! 다 나만 두고 떠나갈까 봐, 너무 무서웠어.”
여전히 꿈에서 깨어나지 못한 아이처럼, 그녀는 엉엉 울어버렸다.
어떤 순간에도 당차고 자신만만하던 메이블린은 없었다.
버티고 또 버티다 못해 무너진 껍데기만 남았을 뿐.
루치펠은 덜덜 떨리는 그 작은 몸을, 제 품에 단단히 가두듯 끌어안았다.
그녀가 우는 모습을 보는 건 생각했던 것보다 더 아픈 일이었다. 가슴을 생째로 도려내도 이보다 아리진 않을 것이었다.
“아무도 너 안 떠나. 못 떠나. 누가 감히, 어떻게 널 떠나.”
“하지만 사람들이, 흐윽! 사람들이 너무 많이 죽었어. 다 지키지 못했어. 근데 나, 나… 회귀하고 싶지 않아. 이기적인 거 아는데… 흑, 이번만큼은 하고 싶지 않아. 못하겠어, 안 할래.”
서럽게도 토해내는 흐느낌이 끊임없이 터져 나왔다. 메이블린은 고개를 저으며 뜨거운 눈물만 펑펑 떨궜다.
그녀는 처절한 절규와 피비린내가 낭자한 그 생지옥으로 다시 뛰어들 자신이 없었다.
몇 번이고 회귀하겠다는 전쟁 전의 다짐은 가벼운 바람에도 찢어질 종잇장처럼 얄팍해졌다.
사정없이 구겨지고 찢겨서, 아무리 펴보려 애써도 그 흔적은 사라지지 않았다. 가시처럼 남아 그녀를 찔렀다.
‘이번엔 모두를 구할 때까지 몇 번의 회귀가 필요할까. 오십 번? 백 번?’
어쩌면 천 번을 반복해도 모두가 사는 길은 찾지 못할 지도 모른다.
처음부터 불가능한 도전에 자신을 꾸역꾸역 밀어 넣었던 건지도 모른다.
으레 그래왔던 것처럼, 모두를 구할 수 있을 거라는 거만하고도 오만한 아집에 빠져서.
‘수천 번을 회귀한다 한들, 과연 그 무자비한 도박에서 완벽한 승리를 거둘 수 있을까? 그게 옳은 선택인가? 그렇다면 그 옳은 선택을 거부하는 나는, 그릇된 길인 줄 알면서도 가는 나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떠오른 의문들의 종착지는 언제나 자신이었다.
‘악인인가?’
답은 알 수 없었고, 어느 누구도 답해주지 못할 물음이었다.
메이블린은 꼭 자책감과 절망감이 양쪽에서 잡아당기는 다리 한가운데 선 기분이었다.
어느 쪽으로도 발을 내딛지 못하고 서서, 그저 괴로워했다. 이다지도 고통스러워했다.
그런 그녀를 끌어올려준 건, 다름 아닌 말 한 마디였다.
“괜찮아, 메이블린. 괜찮아.”
수없는 물음들의 정답이 아닌.
그저 그래도 괜찮다는, 한 마디.
“네 탓이 아니야. 너는 절대 나쁘지 않아.”
결코 그녀의 잘못이 아니라는, 확신.
너무도 듣고 싶었던, 누군가 해주었으면 간절히 바랐던 말.
그 말들이 메이블린의 눈물을 그치게 했다. 주체하지 못하고 토해내던 오열을 삼키게 했다.
차차 가라앉는 울음소리를 들으며 루치펠은 잔잔한 음성으로 그녀를 다독였다.
“완벽할 수 있는 존재는 없어. 너도 알잖아, 메이.”
“하지만 내가 회귀한다면,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을 살릴 수 있는 거라면… 그 기회를 버린 나는 살인자나 마찬가지잖아.”
“아니.”
루치펠이 처음으로 그녀의 말을 단호하게 부정했다.
그는 눈물과 함께 엉망으로 들러붙은 머리칼을 조심스레 쓸어넘겨 준 뒤, 메이블린의 양 어깨를 잡고서 눈을 마주했다.
“완벽한 상황도 존재할 수 없어. 누군가를 살리면, 다른 누군가가 죽게 되는 상황은 계속해서 발생할거야. 그 순간이 후회되지 않을 만큼 최선을 다한 상황과 그렇지 못한 상황만 있을 뿐이지.”
“그래도 루시, 만약 내 이런 선택이 잘못된 거면 어떡해? 회귀를 수천 번 반복해서라도 사람들을 조금이나마 살리는 게 맞는 거면 어떡해?”
“그건…….”
루치펠의 말끝이 늘어졌다. 쉬이 답할 수 없는 질문이니 당연했다.
그럴수록 메이블린은 더 초조해져만 갔다. 지금이라도 회귀하고픈 마음이 불쑥 치솟았다.
‘72시간이 지났으면 어떡하지? 그럼 정말 끝인데…!’
스킬 ‘이목의 속임수’가 풀리면 관심수치가 다시 올라가게 된다. 수치가 다 차면, 시스템이 사라지기 때문에 회귀를 할 수 없었다.
그녀는 부디 시스템이 남아있길 빌며 서둘러 창을 띄우려 했다. 그러나 루치펠이 그녀를 붙잡는 게 더 빨랐다.
그는 양손에 메이블린의 두 뺨을 담고서 담백하게 운을 뗐다.
“아무도 모르지.”
“……뭐?”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는 몰라. 절대적인 지표가 답이 되어줄 수도 없고. 완벽한 상황이 없는데, 선택에 맞고 틀린 게 어떻게 있겠어. 그러니까 그냥… 메이블린.”
루치펠이 발갛게 물든 메이블린의 눈가를 조심스레 쓸었다.
“넌 언제나 최선을 다했어. 그거면 된 거야. 그 누구도 네게 희생을 강요할 순 없어.”
뜨거운 눈물이 뼈마디가 불거진 긴 손가락 아래 번져나갔다.
“너 말고는.”
메이블린의 가슴에 파문을 일으킨 이 말 한마디처럼.
그녀는 고장 난 시계마냥 덜컥 굳어버렸다.
‘내가… 스스로에게 희생을 강요한다고?’
무수한 회귀를 반복하면서,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물음이었다.
자신 한 사람만 아프면 수많은 사람들이 행복할 수 있는데. 당연한 것 아닌가?
그러나 루치펠은 더 생각할 틈을 주지 않고 다감한 목소리로 그녀를 감쌌다.
“그러니 네 존재를 포기하면서까지 희생하지 마. 널 행복하게 해줘.”
쿵, 쿵. 그가 내뱉는 문장 하나하나가 화살이라도 되는 양 메이블린의 가슴 속에 박혀들었다.
심장이 콱 옥죄이고, 물기를 머금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그 아래 자리 잡은 호박색 눈동자도 덩달아 요동쳤다.
속이 비칠 듯 투명한 눈동자에 다시금 눈물이 가득 차올랐다.
그녀는 별수 없이 끅끅대며 두 손으로 눈가를 문질러 닦았다.
“자꾸… 자꾸 그렇게 말해주지 마. 나한테 괜찮다고 말하지 마…! 나는 이제 정말 어쩌면 좋을지 모르겠어서…!”
그녀의 만류에도, 루치펠은 마지막 한 발을 기어이 내딛었다.
“그럼 그저 행복해지면 돼, 메이.”
메이블린의 본심을 가차 없이 파고들었다.
“그거면 돼. 넌 그럴 자격 충분한 사람이야. 너 아니면 대체 누가 행복해져야 해?”
그는 그녀의 두 손을 잡아 내리고 엉망으로 짓무른 눈가에 입술을 눌렀다. 그녀가 토해낸 슬픔을 삼키듯이, 몇 번이고 입을 맞추었다.
그러자 축축한 뺨에 왈칵 물길이 터졌다. 하느작거리는 손이 루치펠의 옷깃을 그러쥐었다.
메이블린은 변함없는 그 품에 기대어 울었다. 금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목 놓아 울었다.
처음으로 마음껏 터뜨려보는 울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