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외전) 그 관종의 속사정
#157
주변이 빛무리처럼 번지며 빠르게 지나가고, 두 번째로 들어간 몸은 18살의 한해원이었다.
“시발, 왜 나만 갖고 지랄이야.”
…아마 요맘때 즈음부터 입이 꽤 험해졌던 걸로 기억한다.
지금의 내 소울을 있게 해준 오 할이 이 시기였을 것이다. 나머지 반절은 대학원 시절이고.
…음, 거기까지 가면 너무 불쌍하니까 그만 생각하자.
나는 찢어진 교복셔츠를 애써 수습해보려다 마음대로 되질 않자, 욕지거릴 연달아 내뱉었다.
“돈도 없는데, X같네.”
머리에선 걸레 빤 물인지 뭔지 고약한 냄새가 나는 액체가 뚝뚝 떨어졌다.
우중충한 담벼락에 기대고 앉아, 나는 먹먹한 숨만 내뱉었다.
“아… 알바 가야 하는데.”
걷어차인 아랫배가 욱신거려서 일어날 힘조차 없었다. 나는 얼굴을 찌푸리며 흠뻑 젖은 머리를 쭉 짜냈다.
그 악독했던 원장이 의문의 사고로 죽은 뒤, 맞을 일은 더 이상 없을 줄 알았건만.
보육원 밖 세상은 더 혹독했다. 고아인 날 달갑게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학년이 올라갈수록 괴롭히는 강도는 더욱 거세졌다. 멍이고 상처고 마를 날이 없었다.
‘참 거지같은 날들이었지.’
나는 돌이 잔뜩 들어간 신발을 탈탈 털다가, 고개를 들었다. 별안간 눈앞으로 그림자가 진 탓이었다.
“한해원.”
체육복 상의가 툭 떨어졌다.
보란 듯이 새겨져 있는 이름 석 자는, 신제우.
짜식, 이런 센스도 있었던가?
“오, 땡큐.”
나는 제우가 뒤를 돈 사이 더러워진 셔츠를 벗어던지고 체육복에 머리를 밀어 넣었다.
곳곳에서 통증을 호소해대는 통에 어렵사리 환복을 마치자, 제우가 자전거를 끌고 왔다.
“너 알바 가야 되지? 데려다줄게.”
“데려다주는 김에 알바도 대신 해주면 안 되냐.”
“나 그냥 갈까?”
“아뇨, 아닙니다. 잘못했어요.”
“잔말 말고 얼른 타기나 해.”
“쳇, 뭐하느라 저녁만 되면 맨날 바쁘대.”
나는 툴툴거리면서도 뒷자리에 냉큼 엉덩이를 붙였다.
차르륵, 체인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고. 곧 초저녁의 여름 바람이 뺨을 스쳤다.
나는 붉게 물든 노을하늘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다가, 넌지시 물었다.
“신제우. 너는 윤회, 전생, 뭐 그런 거 믿어?”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아니, 정말로. 이게 벌이라면… 만약에 이런 삶이 신이 내게 준 벌이라면… 언제 끝날까?”
…내가 이런 말도 했었나.
“다들 시간이 화살처럼 빠르다던데, 나는 모르겠어. 밤이고 낮이고 뜨거운 태양만 냅다 내리쬐는 사막에 갇힌 기분이야.”
“그래서, 이 삶이 얼른 끝났으면 좋겠어?”
제우가 답지 않게 퍽 과격한 질문을 던졌다. 그러나 난 달리 뜸 들이는 기색도 없이 답했다.
“더 나은 다음 삶을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죽을 수 있을 것 같긴 해.”
“…진심이야?”
“그냥… 흠… 모르겠어. 지금의 난 꼭 시작부터 잘못 꼬여버린 타래 같거든. 세상 모든 게 날 가로막기 위해 존재하는 것 같아. 사람도 모자라 세상한테마저 버림받은 느낌이라고.”
“…….”
제우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이따금 돌부리에 걸린 자전거만 덜컹거렸다.
마치 물속에 잠겨버린 양 이어지던 침묵은, 빨간불인 신호등 앞에 다다라서야 끝났다.
퇴근길 북적이는 소음 사이로 제우가 나직하게 말했다.
“한해원. 나중에 말야… 내가 널 어디 멀리 여행 보내도 화내면 안 돼, 응?”
“뭐야, 뜬금없이. 당장 이 학교만 떠도 난 좋다.”
내 처지에 여행이 가당키나 하나.
열여덟의 나는 일어날 리 없는 일이란 걸 알면서도, 속으로 담아두기만 했던 단꿈을 잠시나마 펼쳤다.
“근데 어디 보내주게? 동남아? 하와이? 난 개인적으로 그 뭐냐, 유럽엔 엄청 예쁜 건물들이 많잖아. 그 중에서도 시계탑 한 번 꼭 올라가보고 싶더라.”
“시계탑?”
“응. 엄청 크고 화려한 시계탑. 그 위에서 사랑하는 사람이랑 춤추고 싶은 로망이 있지. 물론 말 그대로 그저 로… 잠깐 스톱, 그 웃음은 뭐지? 나 비웃냐?”
“나 안 웃었는데.”
방금 쪼갰잖아, 새끼야. 다 봤어. 감히 내 소원을 비웃어?
당시 낭랑 십팔세 여고생도 혈압이 상승했는지 마구 껄렁댔다.
“하, 이게 진짜. 야, 내기해, 내기. 내가 비록 이 모양 이 꼴이긴 하지만 언젠가 진짜로 소원 이루면 어쩔래?”
“글쎄… 뺨이라도 맞아줄까.”
“오케이, 콜! 손가락마다 반지 주렁주렁 끼고 갈 테니까 딱 기다려라. 내가 요절하더라도 그건 하고 간다.”
그 순간 초록불이 켜졌다. 제우는 페달에 다시 발을 올리며 푸슬 웃었다.
“그래, 딱 기다릴 테니까 꼭 해.”
자전거가 앞으로 나아갔지만 횡단보도를 건널 순 없었다.
아스팔트에 건반처럼 그려진 흰 선들이 엿가락마냥 늘어지며 일어났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땐 어느새 세 번째 몸, 이십대 중반 한해원이었다.
시간대는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듯 우중충한 어느 가을밤이었다.
이 날은, 제우가 빌어먹을 소설을 보여준 날이기도 했다.
나는 내 자취방의 침대 위로 벌렁 드러누웠다.
“야, 내가 졌다. 그냥 네가 내 뺨 때려라.”
“갑자기 왜 그러는데.”
제우가 시체처럼 늘어진 날 툭툭 건드렸지만 나는 더 말을 얹기도 지친다는 듯 한숨만 푹 내쉬었다.
“에휴, 내 신세에 시계탑이니 춤이니 해외여행은 무슨. 지렁이로 태어나면 땅만 박박 기다 죽는 건데. 어떻게 새가 되겠냐.”
가난과 실패는 톱니바퀴처럼 맞물리는 굴레였고, 그렇기에 안간힘을 써도 빠져나올 수 없는 지옥과도 같았다.
내가 기댈 사람이라곤 부모는커녕 동갑내기 친구 하나뿐.
그런 내게, 세상은 가시밭길 그 자체였다.
날지 않는 이상 매순간 찔릴 수밖에 없는 삶.
아득바득 공부해서 좀 살만하다 싶어지면 기다렸다는 듯 새로운 재앙이 덮쳤다.
악착같이 고비를 넘기면 또 다른 재앙이, 극복하면 그 다음 재앙이. 끊임없이 날 갉아먹었다.
운명은 마치 내가 이 모든 시련을 반드시 감내해야만 하는 사람인 양 밀려왔다.
나는 몸을 뒤집어 베개에 얼굴을 푹 파묻었다. 제우는 말없이 내 머리를 쓸었다.
“……넌 원래 새였어.”
어딘지 모르게 먹먹한 목소리가 축축한 공간에 스며들었다.
짜식이, 왜 자기가 더 울적해하고 난리야.
얼굴을 보고 싶었지만 나는 여전히 고개를 들지 않은 채 웅얼거리기만 했다.
“참 나. 꼴에 친구라고 위로는. 뭐, 말이라도 고맙다.”
“정말인데. 크기는 작아도 가장 높이, 멀리 나는 새가 너였어. 혼자만 너무 앞서가서 다들 끌어내리기 바빴지만.”
“뭐야, 너 언제 동화 작가로 이직했냐. 깜찍한 이야기를 그새 한 편 써내내.”
“……사실 아직 결말은 못 정한 이야기야. 네가 나중에 끝맺어 줄래?”
그제야 몸을 일으킨 나는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뭐. 별거라고.”
그 답을 끝으로 시야가 또다시 휙 돌아갔다.
그 탓에 제우가 무슨 표정을 지었는진 끝까지 볼 수 없었다.
눅눅한 자취방이 녹아내렸다. 20대 한해원도 멀어졌다.
나는, 다시 아이가 되어 고아원 원장실의 커다란 철문 앞에 쪼그리고 앉아있었다.
어디선가 훌쩍훌쩍 우는 소리가 들렸다.
‘되게 꾹꾹 눌러 우네. ……설마 내가 울고 있는 건가?’
눈을 꿈벅이니 굵은 눈물방울이 후두둑 떨어졌다.
기분이 이상했다. 별안간 서러워졌다.
차가운 복도 바닥에서 스며드는 냉기마저 서럽게 느껴졌다.
‘뭐야, 왜 이러지?’
드디어 벗어났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제자리였다.
나는 아직도 맘대로 울지도 못하는 일곱 살 한해원이었다.
‘내가… 나는… 그러니까…….’
머리가 멍했다. 정말 어린아이가 된 듯 아무 생각도 하기 싫었다. 당장의 감정과 욕구에 충실하고만 싶어졌다.
그동안 꾹꾹 눌러 담았던 말들이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나, 나… 그만할래요. 더는 못하겠어요.”
처음으로 포기하고 싶다 토해낸 순간, 나는 더 이상 한해원이 아니었다.
메이블린 슈트레커가 말하고 있었다.
“회귀도 안 할래. 나도 죽고 사람들도 죽고 계속 반복하는 거… 더 이상 못하겠어. 너무 힘들어요. 그만 힘들고 싶어요.”
애써 아무렇지도 않다, 괜찮다, 할 수 있다.
그렇게 온갖 희망과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다시피 한 자기위로로 덧칠된 진심.
“흉 지면 안 아플 줄 알았는데, 아직도 아파요. 너무 아파서 죽고 싶어요. 그냥 죽여주면 안 돼요?”
내 가장 깊은 곳의 소리.
더는 무시할 수 없을 만큼 선명한, 내 진짜 속마음.
나는 자꾸만 훌쩍였고, 그런 날 누군가 안아주었다.
“……상처를 제대로 치료한 적이 없으니까 그렇지.”
익숙하게 귀에 감겨드는 음성과 따스한 손길.
“더럽게 아프면서, 안 아픈 척은 혼자 다 하니까 그렇지.”
고개를 드니 그리스 신화 시대의 신들처럼 옷을 입은 한 남자가 있었다.
그는 내 앞에 무릎을 구부리고 앉아 손을 내밀었다.
“일어나, 이제 그만 가자.”
“……어딜요?”
“상처 치료하러 가야지.”
후광 때문에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는 무척이나 다정했다.
그러나 나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싫어요. 안 갈래요. 어차피 다치면 또 아플 거잖아요.”
“아냐, 안 아파.”
“거짓말쟁이. 저번에도 그럴 거라고 말해놓고 엄청 아팠단 말예요. 내가 원래 참는 거 잘하는데, 참지도 못할 만큼 아팠다고요.”
내가 재차 거절하자 남자의 몸이 일순 굳었다.
그는 텁텁한 숨을 내쉬며 마른세수를 했다. 듣는 이마저 가슴이 에일 만큼 애틋한 숨소리였다.
‘아픈 건 난데, 왜 당신도 아픈 것처럼 구는 거야?’
남자가 입술을 짓씹으며 내 손을 잡았다.
“미안해. 하지만 이번엔 정말이야.”
“그걸 어떻게 믿어요?”
“지금부턴 아예 다치지 않을 거니까. 넘어지기 전에 널 잡아줄 사람들이 많아.”
나는 무릎을 더욱 끌어 모으며 그 사이에 고개를 파묻었다. 열린 창문으로 매서운 겨울바람이 쌩쌩 불어왔다.
“또 거짓말. 나 친구 없는 거 여기서 모르는 사람 없어요. 아무도 날 좋아하지 않아요. 엄마아빠도 날 여기다 버렸는걸요.”
“그렇지 않아, 잘 생각해 봐. 널 사랑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그럴 리가 없어요. 이렇게 꼬질꼬질하고, 울기나 하는 애를 누가 좋아하겠어요?”
울음을 먹은 목소리는 내가 듣기에도 형편없었다.
남자는 다만 커다란 손을 들어, 눈물 자국이 주룩주룩 남았을 내 뺨을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글쎄… 내가 보기엔 널 만난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좋아할 수밖에 없을 것 같은데? 네가 구한 사람들이, 이젠 널 구할 차례야.”
“저는 누굴 구한 적이 없는…….”
그 때, 찬바람을 타고 멀리서 희미한 목소리가 실려 왔다.
[……린! …블린!]
그것은 꼭 누군가를 애타게 찾는 소리 같기도 했다.
남자가 생긋 웃으며 내 눈물을 마저 닦아주었다.
“봐봐, 누가 벌써 데리러 왔다.”
곧 새하얀 빛이 공간을 잠식했다. 시야에 닿는 모든 것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날 위로해주던 남자가 사라지고, 원장실도 사라지고, 딛고 있던 땅마저 빛에 먹혀들었다.
또다시 혼자가 되는 걸까 절망하던 순간.
사정없이 뭉개지는 백광을 뚫고 한 인영이 뛰쳐나왔다.
“메이블린!”
휘날리는 은발이 새하얀 눈을 닮은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