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관종은 오늘도 죽습니다 (154)화 (154/185)

#154

쇄도하는 창을 쳐내며 노신이 열띤 호성을 터뜨렸다.

“지금 이게 무슨 짓… 큿!”

그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광포한 신격이 그의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달아오른 얼굴 위로 선혈 한 줄기가 주륵 흘러내렸다.

이내 얼음장 같은 음성이 사이를 파고들었다.

“주신이라고 봐드리지 않을 겁니다. 애초에 막다른 길까지 몰아세운 건 당신들이니, 이리할 수밖에 없는 저를 탓하지도 마십시오.”

“모로스! 300년 전 일 때문에 아직도 나를 원망하는 것이냐!”

“당시 판결권을 가진 대표 주신은 당신이셨습니다.”

격노하는 노신과 달리 모로스라 불린 신은 냉담했다.

그녀는 한없이 시린 눈으로, 단호히 일갈했다.

“당신께서 일말의 자비라도 보였다면, ■■가 시궁창 같은 삶을 몇 번이고 반복하지 않아도 됐을 겁니다.”

■■가 누군지 잘 들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녀가 퍽 아꼈던 존재인 듯했다.

노신에겐 한낱 골칫덩어리에 불과한 것처럼 보였지만.

“그 덜떨어진 아이가 너까지 망친게로구나.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야.”

“함부로 재단하지 마십시오. 저는 이 길이 그릇되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해할 수 없구나, 모로스.”

“이해하려고도 마십시오. 당신의 이해는 같잖은 위선에 불과합니다.”

불끈 올라온 핏줄과 함께 노신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대체 이렇게까지 해서 네가 얻는 것은 무엇이지? 얄팍한 신념? 인간들이 보내는 어쭙잖은 감사? 일그러진 길의 끝에서 마주할 허황된 안락?”

마치 파멸뿐인 미래가 보이는 양 한껏 비꼬는 어투.

그럼에도, 모로스는 주저 없이 답했다.

“없습니다.”

“……뭐?”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어조로, 거듭 단언했다.

“무얼 얻고자 이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저 제가 원하기에 하는 것입니다.”

그러자 노신이 탄식하며 마른세수를 했다.

“정말이지… 너는, 이러는 너를… 나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구나.”

“말했잖습니까. 할 수 없으면 하지 마시라고.”

“네 힘이라면 주신이 될 자격도 충분해. 그런데도 기어이 인간들 편에 서겠다는 것이냐? 네가 가질 수 있는 모든 권세와 영광을 버리고?”

“당신께나 권세고 영광이지, 제겐 추잡한 모략질과 하등 다를 바가 없습니다.”

모르스의 손에서 푸른 겁화가 타올랐다.

“젠장… 모로스!”

예고 없이 불어 닥친 겁화 속에서 노신이 허우적댔다.

그는 간신히 들러붙는 불길을 떼어내고서 바락 대검을 쳐올렸다.

그리고 다음순간, 믿을 수 없는 광경이 일어났다.

같은 신끼리, 천사끼리 싸우기 시작했다.

나는 상황이 이해되질 않아 눈을 끔벅거리고만 있었다.

몽땅 뽑은 화살은 시위에 걸리지도 못하고 멈췄다.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 입을 벌린 채 굳었다.

그러고 있으려니, 부대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천사가 앞으로 나섰다.

“안녕하세요 인간계 분들! 반가워요~!”

피비린내 나는 전장과 어울리지 않는 어린 목소리.

“많이 지치셨죠? 그래도 우리 조금만 더 힘내 봐요. 지원군이 왔으니까요! 바로 이노아드의 수호신 모로스와 대천사 라파엘이랍니다~!”

해맑게 웃는 천사는, 꼭 엄마의 손을 놓쳐 엄한 곳에 떨어진 아이 같았다.

“미친… 뭐야?”

나는 눈을 쏟아낼 듯 크게 홉떴다. 더 놀랄 게 없음에도 머리가 멍했다.

꼭 4년 전에 던진 부메랑이 이제야 돌아와 머리를 후려치는 기분이었다.

내가 이리도 심히 놀라는 것은, 갑작스레 나타난 천사부대가 우리 편이어서도, 모로스신이 직접 등판해서도 아니었다.

‘대체 왜 저렇게 생긴 건데?!’

조잘조잘 말을 쏟아내는 천사가 누군가의 어린 시절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만큼 똑닮았기 때문이었다.

이디스에게 목이 따여 죽은, 원작의 남주.

경악하는 내 앞으로 아이천사가 다가왔다.

“■■님, 보고 싶었어요!”

“아이가 된… 베인 에스카로트?”

“이잉, 그 이름은 싫어요. 라파엘이라고 불러주세요.”

요상하게 소름끼치는 애교였다.

겉은 분명 일곱 살이나 겨우 돼 보이는 아이인데, 속은 능구렁이 할아버지가 앉아있는 느낌.

“저 아세요? 대체 왜 이러시는 거예요?”

그런 인위적인 귀여움엔 면역이 없었다. 나는 힉 소리까지 내며 질겁했다.

그러자 아이의 눈꼬리가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궈낼 것처럼 축 쳐졌다.

께름칙하면서도 이걸 달래줘야 하나 고민하던 때. 별안간 아이의 몸이 허공으로 불쑥 들렸다.

조막만한 뒷덜미를 잡아 올린 커다란 여자.

금전까지 애교3종 세트를 날리던 아이가 싹싹 빌기 시작했다.

“모로스님, 잠시만요, 잠, 잠시마아아아아악!”

아이의 애교는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짤막한 몸체가 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갔다.

아이가 적군 한가운데로 처박히고, 그쪽은 일별하지도 않은 채 모로스가 내게 시선을 박았다.

꿀꺽. 나도 모르게 마른침이 넘어갔다.

그녀는 말없이 손을 확 쳐들었다. 머리 위로 검은 그림자가 졌다.

나는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

지금 이게 뭐하는…?

그러나 예상과는 다르게, 모로스의 너른 손은 어설프게 내 머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기분이 묘했다.

내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그녀를 올려다보자 곧바로 눈이 마주쳤다.

금전에 라파엘인지 팡파레인지를 날렸던 거친 기세와는 달리 퍽 다정한 눈빛이었다.

“나중에 다 알게 될 테니, 일단 전투에 집중해라.”

눈빛만큼이나 부드러운 음성.

노신을 겁화로 옥죄던 이와 동일인물이라는 게 믿기지 않았다.

“네, 넵.”

일단 나는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따라 모로스의 입술이 희미하게 호선을 그렸다.

푸근한 미소를 남기고 내게서 돌아선 그녀는, 다시 노신에게 날아갔다.

그리곤 꼬장꼬장한 그 면상을 마주하자마자 그의 멱살을 틀어쥐고 냅다 내리꽂았다.

유감이 상당해 보이는 일격.

먼지구름이 거대한 송이버섯모양으로 피어올랐다.

근처에 있는 것도 아닌데 몸이 움찔 떨렸다.

결코 입 밖으로 꺼낼 순 없는 물음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신도 이중인격일 수가 있나…?’

* * *

예기치 못한 지원군의 등장으로 상황은 빠르게 일단락되었다.

모로스에게 막타를 맞은 노신이 피를 토하며 지상으로 추락했다.

쿠웅.

그 주변의 땅이 구덩이처럼 깊게 파였다. 매캐한 흙먼지가 시야를 장악하다 흩어졌다.

“…….”

파공음이 가라앉은 일대는 지나치게 적막했다. 천군도, 인간군도 숨을 죽였다.

극한으로 조여든 대기 속에서 가느다란 중얼거림이 새나왔다.

“…해치웠나?”

그 고전적인 대사를 듣는 순간, 메이블린의 목에 핏대가 섰다.

‘미친. 누가 부활주문 외웠어.’

데드 플래그를 꽂으려면 지 머리에나 꽂을 것이지, 감히 다 된 밥에 재를 뿌리다니.

그녀는 참지 못하고 소리를 빽 질렀다.

“방금 어떤 새끼야!”

라파엘이 찔끔 몸을 떨었다. 그는 앙증맞은 날개를 푸드덕거리며 모로스 뒤로 냉큼 숨었다.

“아, 저는 아버지보다 티케님이 화날 때가 더 무섭더라고요.”

모로스가 개구리마냥 찰싹 붙은 그를 떼어내려 했지만, 라파엘은 그럴수록 옷자락을 쥔 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이 광경을 보는 천족은 속이 타들어갔다.

농지거리까지 내뱉으며 여유를 부리는 인간계 군과는 달리, 그들은 궁지에 몰려 있었다.

“말도 안 돼…….”

“우리가 패하다니!”

믿을 수 없는 일이 기어이 일어났다.

세계를 멸망시키긴 고사하고 도리어 당했다.

그것도 멸시하던 인간들에게, 아주 처참하게.

‘정말 이대로 퇴각하는 것 외엔 방법이 없는 것인가…?’

다섯 신이 한동안 강림할 수 없을 만큼 심각한 타격을 입은 걸로도 모자라 주신마저 고꾸라졌다.

이도저도 못하고 고심하던 때.

한 천사가 해결책을 냈다.

“판도를 뒤집을 수 있는 방법이 있어. 세계를 원하지 않는 주인공의 거대한 자아를 발현시키면 돼.”

“그럼…….”

“존재할 가치를 잃은 세계는 스스로 자멸하겠지.”

세계는 연극 무대나 마찬가지였다.

등장인물들이 배우가 되어 살아가는 곳.

등장인물들을 품기 위해, 연기를 보여주기 위해 존재하는 배경.

그런데 만약, 대체할 수 없는 인물이 무대에서 내려간다면?

‘주인공’이 무대를 거부한다면?

아무리 엑스트라가 갈망해봤자 주인공이 없으면 무대는 존재 의의를 잃는다.

그리고 가치를 잃은 무대는, 막을 내리기 마련이다.

주인공이 원하는 새 무대를 다시 짓기 위해서.

천계는 무대에 오르고 싶지 않은 ‘주인공의 의지’를 이용할 생각이었다.

세계와 연결되어 있는 ‘거대한 자아’를 발현시켜, 끝내는 세계를 저물게 하도록.

“지금 주인공은 어디 있지?”

수백 개의 동공이 다급하게 허공을 헤집었다.

이윽고 깃발처럼 휘날리는 붉은 머리칼이 시야에 들어왔다.

마지막까지 치열하게 전투에 임하는 여자.

그녀를 발견한 천사 무리가 그곳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여자를 가두듯 둥그렇게 진을 치고서, 큰소리로 일갈했다.

“이디스! 저 여자만 아니었다면 그대가 이 세계의 주인공이 되었을 것이다!”

“메이블린 슈트레커가 망치지만 않았어도, 모든 권력과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었단 말이다!”

성난 고함이 지나간 자리엔, 거대한 스크린이 나타났다.

스크린 속 영상은 원래대로 진행되어야 했을 시나리오를 비추고 있었다.

“보아라. 이것이 그대의 운명이었다. 주인공에서 엑스트라로 밀려났는데, 억울하지도 않은가?”

영상에선 두 남녀가 등장했다.

베인 에스카로트와 이디스.

“그대가 원하기만 한다면, 그대가 가졌어야 할 삶을 돌려주겠다.”

“그대는 완벽한 주인공으로서, 다시 서게 될 것이다.”

영상을 보는 이디스의 눈이 커다랗게 부풀었다.

그녀는 홀린 듯이 스크린 앞으로 다가갔다. 저 스크린 속 여자는 자신이되 자신이 아니었다.

폭군이라고 밖엔 칭할 수 없는 남자를 만나 그를 길들이고, 종래엔 그와 사랑에 빠진 여자.

남자의 성에서, 그가 선물한 반지를 끼고, 그 품에 안겨 행복하게 웃고 있는 여자.

지금처럼 꾀죄죄하고 흙먼지 속을 구르는 마탑의 일개 마법사가 아니라,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은 귀족 아가씨가 되어 빛나는 무도회장에서 춤을 추는 여자.

‘저게… 나라고? 원래 내가 가졌어야 할 삶이었다고?’

이디스는 문득 현재의 제 모습을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흙탕물에 몇 번이고 담갔다 건져 올리길 반복한 듯 지저분한 옷차림, 잔흉터로 덮인 팔다리와 수없는 전투로 형편없이 부러지고 때가 낀 손톱.

꼬질꼬질하기 그지없는 지금 처지에 비하면 ‘또 다른 자신’은 확실히 나무랄 데 없이 완벽한 인생을 영위 중이었다.

“이디스…!”

멀리서 메이블린이 허겁지겁 달려왔다.

이디스는 손을 들어 멈춰달란 제스처를 취했다.

“잠깐만요. 잠깐만요, 메이. 생각할 시간이 좀 필요해요.”

메이블린이 망연한 얼굴로 그 자리에 굳었다.

영상은 여전히 흘러갔고, 이디스는 그를 뚫어지게 응시했다.

모두가 전투를 멈추고 그녀의 결정만을 기다렸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천사들의 입가에 걸린 회심의 미소도 짙어졌다.

‘됐다.’

그 이디스가 메이블린을 다 막을 줄이야.

그녀는 이미 흔들리고 있는 게 분명했다.

‘하긴, 저 안락하고 화려한 삶을 버리고 비루한 인생을 택할 리가 없지.’

거의 다 왔다. 여기서 조금 더 부추겨주기만 하면…….

“설마 마지막 비장의 무기가 이건 아니죠?”

한참이나 스크린에 머물던 붉은 시선이 드디어 움직였다.

정적만이 감도는 공간.

그 사이를 가르고 바람 빠진 웃음소리가 떨어졌다.

“아, 진짜 꼴사나워서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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