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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종은 오늘도 죽습니다 (152)화 (152/185)

35. 세계의 주인공은

#152

나는 울부짖으면서 사정없이 주먹질을 했다.

“이거 놔, 제발! 놓으라고! 루치펠!”

닥치는 대로 발길질을 하고 버둥거렸지만 그럴수록 날 안은 팔은 더욱 꽉 죄여왔다.

선로가 끊어진 열차에 갇힌 채 절벽 아래로 추락하는 기분이었다.

쐐애액- 콰악! 콱!

광포한 일격이 쉬지 않고 날아왔다. 천지를 뒤흔드는 포격음이 날카롭게 고막을 후벼 팠다.

나는 엉엉 울면서 루치펠의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그에게 직격하는 매몰찬 신격이 뼛속까지 시리게 느껴졌다.

차마 헤아릴 수 없을 만큼 잔악한 힘이었다. 루치펠이 날 품안에 단단히 가두었음에도 몸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몸은 더 이상 떨리지 않았고, 사위가 잠잠했다.

바닥에 처박히기라도 한 걸까. 눈물인지 피인지 모를 액체로 얼굴이 축축했다.

눈을 뜨면 확인할 수 있겠지만, 무서웠다.

눈꺼풀을 올리자마자 마주한 광경이 싸늘하게 식은 루치펠의 주검일까 봐.

다시는 마주하지 못할, 꾹 감긴 두 눈일까 봐.

너무 무서워서 미칠 것만 같았다.

그런데, 머리 위로 돌연 뜨거운 숨이 쏟아졌다.

“난 괜찮아, 메이블린. 괜찮아.”

다소 호흡이 거칠지만, 분명한 루치펠의 목소리.

“정말 괜찮으니까 나 좀 봐봐.”

날 안심시키기 위해 애써 쥐어짜내는 소리 따위가 아니었다.

나는 눈물이 덕지덕지 매달린 눈가를 한 번 슥 닦고, 천천히 눈을 떴다.

놀랍게도, 그는 완벽하게 무사했다.

“대체 이게…….”

루치펠과 나는 사방이 새하얀 방에 있었다.

그 방의 벽은, 다름 아닌 루치펠의 날개였다.

방어막처럼 우리 둘을 꼭 감싸고 있던 날개가 껍질이 벗겨지듯 서서히 양쪽으로 벌어졌다.

이제껏 봐온, 볼품없이 찢겨진 거무튀튀한 날개가 아니었다.

커다랗고, 신격을 버텨낼 수 있을 만큼 튼튼하고, 눈부시게 빛나는 새하얀 날개.

루치펠의 검은 머리칼도 반짝거리는 은발로 물들어 있었다.

눈앞에서 시스템창이 연달아 떠올랐다.

[‘■■과 ■■의 신 ■■’의 신력으로 블로킹이 소멸됩니다!]

[‘세계의 마지막 잠금장치’를 해금하였습니다!]

[‘타락천사 루시퍼’의 봉인이 풀립니다.]

루시퍼. 루치펠.

여러 작품들에 의해서 사탄이나 악마, 타락천사의 이미지로 고착된 것이지, 기실 원의와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이름이었다.

루치펠은 빛을 가져온 자. 빛나는 별을 의미한다.

아침을 가져오는, 새벽별.

“메이블린한테서 전부 떨어져, 빌어먹을 새끼들아.”

내가 그의 약점임을 안 신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었으나 모두 거대한 격에 가로막혔다.

화악-!

커다란 날개 여섯 장이 루치펠의 등 뒤로 펼쳐졌다.

찬란한 빛이 심판의 칼날처럼 쏟아졌다.

까만 밤하늘 한가운데, 그 홀로 아침 한 조각을 잘라내어 품고 있는 듯했다.

“크으윽…!”

“기어이 스스로 봉인을 풀었단 말이냐!”

작열하는 빛을 막는 신들의 눈이 죄다 붉었다.

그들은 핏줄이 터져 흉흉하게 달아오른 눈을 하고서, 악다구니를 내질렀다.

“형벌의 무게가 같잖은가, 루시퍼! 교화를 위해 추락시켰더니 그새 마왕과 손잡은 인간에게 홀린 게냐!”

“어리석게 굴지 마라! 고작 그 인간 하나 구하겠답시고 우리 모두와 대적할 셈이야!”

바락바락 악을 써대는 것이 몹시도 거슬렸는지, 루치펠의 이마가 단박에 찌푸려졌다.

“여기서 ‘고작 하나’라고 하면 섭하지. 다들 그 인간 하나 구하겠다고 아득바득 달려드는 거 안 보여?”

루치펠이 발산하던 섬광을 거두었다.

밤하늘을 가득 채우던 빛이 가라앉자, 발아래 펼쳐진 정경이 뚜렷하게 보였다.

살아남은 사람들이 무기를 들고 꾸역꾸역 일어나고 있었다.

입에 넥타르를 털어 넣고서 신수화하는 실버와 하일,

온 힘을 다해 부상자들을 치유하는 신관과 사제들,

그들의 도움을 받고 회복하자마자 재정비하는 기사단과 암살자들,

나와 루치펠을 중심으로 횡렬하는 마법사들과 악마군단.

성치 않은 몸으로 흙먼지 속에서도 꿋꿋이 고개를 쳐들었다.

비록 행색들은 남루하지만 적을 직시하는 눈동자만큼은 불꽃이 타올랐다.

아무리 뭉개고, 짓밟고, 쳐부숴도 일어나고, 일어나고, 또 일어나는 사람들.

이 세계를 살아가는, 지키고 싶은 평범한 사람들.

끝까지 굴복하지 않는 우리의 기세에 신들의 얼굴에도 차츰 공포가 스며들었다.

그를 감추려는 듯 그들은 더욱 거들먹거렸다.

“용기는 가상하나, 그래봤자 다 지친데다 한 줌도 안 되는 졸개 집단이다. 부디 다음 생엔 주인공으로 선택받길 빌며 죽음을 받아들여라.”

“개도 아닌 것들이 왜 자꾸 짖는지 모르겠네. 우리가 왜 그래야 하지?”

“닥쳐라, 루시퍼!”

건방진 작태에 한 신이 분개했지만 루치펠은 한결같았다.

변함없이 오만하고 고귀한 눈으로, 그를 내다봤다.

“아니, 정말 궁금해서 묻는 거야. 우리가 왜, 너희 같은 족속들에게 빌어야 해? 마음에 안 차면 이리도 무자비하게 버려지는데.”

“너도 멍청했던 네 수호신을 기어이 닮아 가는구나! 루시퍼, 넌 구원받을 수 없을 정도로 타락했다. 더 이상의 환생도 무의미해. 여기서 저 계집과 함께 끝을 맞이해라!”

꽈르릉!

진언과 함께 터진 번개가 나를 향해 직격했다.

미처 피할 겨를도 없는 광속이었다. 막는 것도 불가한 세기였다.

지금 이 거리에서 맞닥뜨린다면 흔적도 남기지 않고 잿더미가 될 게 분명했다.

그러나 눈을 한 번 감았다 뜨자,

“누구는 선택받고, 누구는 선택받지 못한 삶이란 건 있어선 안 돼.”

번개는 루치펠의 손아귀에 있었다.

“너희들에겐 메이블린이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내게는 한 세계야.”

잡아챈 샛노란 전선(電線)이 스파크를 튀기며 파지직거렸다.

격렬하게 날뛰는 신격에 얼굴을 찡그릴 법도 한데, 루치펠은 흔들림 없이 말을 이었다.

“여기 있는 모든 한 사람 한 사람이 세계이자, 누군가에겐 주인공이라고.”

문장이 마침표를 찍음과 동시에 루치펠이 번개를 던졌다.

천공을 가르고 무섭게 날아간 섬전은, 신의 가슴팍을 정확히 관통했다.

“허억, 큭, 쿨럭!”

팽창한 복부가 마른기침을 터뜨리며 휘청거렸다.

그는 심장께에 박힌 빛줄기를 부여잡고 부들부들 떨다가, 이내 가루가 되어 흩날렸다.

더 이상 인간계에서 육신을 유지하지 못하고 천계로 회부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끝난 줄 알았던 메시지음이 한 번 더 울렸다.

[당신의 마지막 칭호는 ‘다시 사는 주인공’입니다.]

[‘성검의 주인’ 자격을 획득하였습니다!]

[‘운명을 품은 검’이 당신의 의지에 반응합니다!]

창이 사라짐과 동시에 진동하는 허벅지.

레그홀스터에 끼워놓았던 성검이 달각거리고 있었다.

나는 홀린 듯이 검을 빼들어 두 손으로 붙잡았다.

단도와 거의 비슷했던 날은 장검으로 길어지더니, 푸르게 빛났다.

정신없는 시야 사이로 풀숲 위에 누워있는 클라인이 찰나 스쳐지나갔다.

나는 검을 쥐어짜듯 틀어쥐었다.

어차피 시스템도 가동되기 시작했으니까…….

[‘이목의 속임수’를 발동시킬 경우, 이 스킬을 제외한 나머지 스킬은 모두 잠깁니다.]

[스킬 ‘이목의 속임수(Lv.5)’가 발동됩니다!]

[72시간 동안 관심 수치가 현 수치인 88%로 유지됩니다.]

[현 시각부터 ‘이목의 속임수’를 제외한 모든 스킬이 잠깁니다.]

‘언제든 회귀 포인트 박을 준비 됐다고.’

인간이 감히 신에게 도전한다는 것 자체가 얼토당토않은 일이라는 건 알았다.

그들의 무력에 몇 번이고 고꾸라져봐서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알면서도, 나는 그냥 덤볐다.

앞뒤 안 재고 막 내달렸다. 우리의 의지를 보여주고 싶었다.

결코 부러지지도, 굴복하지도 않는다고.

“발악해봤자 소용없는 것을!”

갈색머리 여신이 또다시 팔을 치켜들었다.

쿠구구구-

머리 위로 발간 불꽃이 아른거렸다.

흡사 재앙이라 칭할 만큼 거대한 운석.

달조차 그에 가려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전에 없이 포악한 불길을 남기며 운석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저 운석이 그대로 지상에 직격한다면, 남아있는 사람들은 전부 죽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그리하도록 놔두지 않았다.

압도적인 재앙을 목전에 두고서, 나는 있는 힘껏 검을 내리그었다.

푸가가각!

운석이 돌진하다 말고 멈췄다.

깔끔하게 잘린 단면만을 남긴 채, 쩍 벌어졌다.

빈틈없이 수놓아진 검의 궤적은 재앙을 돌가루로 파산시켰다.

“이 무슨…….”

빳빳하게 목을 세우던 여신의 매끈한 낯짝에 경악이 스쳤다.

나는 차오른 숨을 한 번 터뜨리며, 운석을 벤 검을 가볍게 털었다.

“이게 다야?”

내 도발에 다섯 명의 신과 천사부대가 일사불란하게 열을 맞춰 섰다.

“각오해라, 건방진 계집.”

더 이상의 만용은 용납할 수 없다는 듯 각 잡힌 움직임이었다. 들끓는 분노가 공기를 덥혔다.

조밀한 그물처럼 도열해 하늘을 가득 채운 천사들.

‘어지간히도 많네.’

꼭 넘을 수 없는 높다란 담처럼 보였다. 인간의 힘으론 어찌할 수 없는 운명 같기도 했다.

본디 운명이란 장엄하고도 견고한 벽이었다.

결코 무너지지 않는 철옹성.

빈틈없이 심장을 꿰뚫는 검.

피할 수도, 숨을 수도 없다면.

그저 힘없이 휩쓸리는 선택지 밖에 없다면.

‘기꺼이 맞서주는 수밖에.’

나는 그 굳건한 벽을 무너뜨리고, 무자비하게 쇄도하는 날을 부러뜨리기로 했다.

나는 운명을 부술 것이다.

그리고 그 위를 걸어갈 것이다. 앞으로 나아갈 것이다.

내가 바라보는 끝은 여기가 아니다.

앞으로 개척할 길이 얼마나 멀었는데. 벽 좀 만났다고 주저앉을 순 없었다.

‘아무리 찍어 눌러 봐라. 몇 번이고 일어나서 그 잘난 턱주가릴 갈겨줄 테니까.’

성검은 금전보다 더욱 짙은 빛을 내뿜었다. 곧 검신에 응집된 기가 온몸을 감쌌다.

마력도, 신성력도 아닌 기운.

그보다 더 촘촘하고 강한, 그래. 내 앞에서 막대한 살기를 끌어올리고 있는 저 신들에게서 느껴지는 기운과 똑같은 힘.

믿기지 않게도, 검에 맺힌 힘은 신력이었다.

“갈까?”

어느새 곁에 선 루치펠이 넌지시 물었다. 고개를 가볍게 끄덕이자 그가 빙긋 웃으며 앞을 내다봤다.

그는 시선을 고정한 채, 툭 짤막한 다짐을 던졌다.

“메이블린, 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최우선으로 너를 지킬 거야.”

“루시, 그건…!”

“그러니까, 너는 오늘을 지켜.”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붉은 눈동자가 다시 날 직시했다.

“죽을 생각 같은 거 하지 말고, 오늘을 지켜. 이 하루를 구해.”

상황과 어울리지 않게 아름다운 은빛 머리칼이 밤바람에 하늘거렸다.

“나는 널 구할 테니까.”

나는 말문이 막힌 채 멍하니 그를 보다가, 그만 픽 웃고 말았다. 그리고 가볍게 눈을 흘기며 답했다.

“제대로 호위해. 빈틈 보이면 바로 아웃이야.”

“명하시는 대로.”

든든한 보디가드도 생겼겠다, 나는 주저 없이 성검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루치펠이 곧바로 엄호하듯 옆에 붙었다.

“말도 안 돼…!”

“어찌 한낱 인간이 신격을 다룬단 말이야!”

신들은 처음으로 속내를 다스리지 못하고 당황한 기색을 내비쳤다.

그들과 나의 거리는 빠르게 좁혀지고 있었다. 격돌하기까진 불과 몇 초 밖에 남지 않았다.

마냥 두고 보고만 있을 신들이 아니었다. 일제히 뻗어진 팔에서 막대한 신격이 방출됐다.

꾸득꾸득 모여든 신격은 어느새 하늘과 땅을 아우르는 웅대한 벽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지상까지 미처 뿌리내리진 못했다.

콰드득!

방벽 한가운데 날카로운 뭔가가 매섭게 박혀들었다.

은은하게 빛나는, 두꺼운 창대.

“제길… 아가레스!”

막강한 충격파가 벽 전체를 집어삼켰다.

파고든 창날을 중심으로 비틀린 금이 나무뿌리처럼 퍼져나갔다.

쩌저적!

무서운 속도로 뻗어나간 줄금은, 이윽고 벽을 무너뜨리고 말았다.

부서진 파편들이 삼지창과 함께 후두둑 떨어졌다.

그 아래에서 창을 턱 받아든 아가레스가 사납게 눈을 치켜떴다.

“내 딸이 공격 좀 하겠다는데, 막으면 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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