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관종은 오늘도 죽습니다 (151)화 (151/185)

#151

그러나 현실은 꿈이 될 수 없었다.

눈 감았다 뜨면 사라질 허상도, 해피엔딩으로 끝났습니다, 하고 덮을 수 있는 동화도 아니었다.

나는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경각이 무한의 시간처럼 늘어지고, 나를 스쳐가는 것들이 슬로우모션처럼 느리게만 흘러갔다.

강철보다 단단하던 날개가 망신창이로 꺾인 채 발악하는 하일,

축 늘어진 쌍둥이를 물고 다급하게 몸을 피하는 실버,

얼마 남지 않은 신성력을 쥐어 짜내며 몇 번이고 몇 번이고 결계를 세우는 란슬롯,

부러진 검을 지지대 삼아 일어나는 에드먼드,

피가 흐르는 머리를 부여잡고 비틀거리는 아빠와 그를 부축하는 노아까지.

절규하는 사람들 위로 두 무리의 거대한 새 떼가 마구 뒤섞여 엉망진창이었다.

그야말로 아비규환이 따로 없는 풍경이었다.

까만 건 악마, 하얀 건 천사.

‘누가 악이고 누가 선이지?’

우리의 피를 더러운 오물취급하며 고고하게 허공에 뜬 천사들.

손가락을 까딱하는 것만으로 운석을 지상에 내리꽂는 수호신들.

대체 저들이 뭐기에, 무슨 자격으로 우릴 내려다보는 거지?

‘수호신이라면서, 인간을 수호하는 신이라면서. 시나리오가 엉켰으면 엉킨 대로 흘러가게 두면 안 돼? 이럴 거면 애초에 우릴 왜 이 세계에 밀어 넣은…….’

아. 나는 문득 깨달았다.

그들이 수호하는 것은, 인간이 아니었다.

자의를 따라 움직이고 생각하는 인간 따위가 아니었다.

그런 인간이 사는 세계도 아니었다.

저들 뜻대로, 원하는 시나리오에 맞춰 움직여줄 인형이었다. 그 외의 생명체는 고려할 바가 아니었다.

간혹 지금처럼 주제도 모르고 대드는 인형이 있으면, 짓밟고 뭉개서 터뜨리면 그만이었다.

더 이상 움직이지 못하도록. 반항하지 못하도록.

그 시린 벽에 부닥친 나는, 넋이 나간 얼굴로 하늘을 멍하니 올려다보기만 했다.

* * *

망연자실한 메이블린의 얼굴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스크린에서 고개를 돌린 라파엘은 안절부절 못하고 날개를 푸닥거렸다. 같은 궤도만 벌써 일흔 두 바퀴 째 돌고 있는 중이었다.

그는 대전에 입는 둥 마는 둥 옷가지를 걸친 남자가 들어서자마자 그 옆에 매달려 만류했다.

“어떻게 좀 해보세요, 아버지! 저러다 다 죽겠어요!”

다급한 외침에도 남자는 태연했다. 여느 때처럼 의자에 드러눕듯 몸을 뉘이고선, 고개를 저었다.

“나는 중심을 지켜야지. 어느 쪽으로도 기울어선 안 돼. 전투 후라면 몰라도, 지금은 간섭할 수 없다는 거 알잖아.”

“하지만 그땐 이미 세계가 멸망한 후일 거 아녜요! 아버지는 정말 걱정도 안 되세요? 전부 끝장나는 꼴이 보고 싶으신 거예요? 아무리 티케님은 다른 세계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다지만 저들은…!”

“시끄러워. 누군들 가만히 있고 싶어서 있는 줄 알아? 그렇게 걱정되면 네가 가던가.”

“저는 허가 받아줄 신이 없잖아요. 아시면서…….”

펄펄 열을 내던 라파엘의 고개가 푹 떨궈졌다.

신급이라면 몰라도, 일반 천사들은 인간계에 가고 싶다고 마음대로 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수호신 산하의 천사들이 강림하려면, 주신의 허가 판결을 받아야 했다.

그 판결을 내려주길 요청하는 이가 주인으로 모시고 있는 수호신이었고.

그러나 현재 라파엘은 둘 다 불가능했다. 인간의 편에 설 제게 주신들이 순순히 허가 판결을 내려줄지는 고사하고, 판결을 받아줄 신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그의 수호신은 300년 전 추방당해 지금까지 부재중이었다.

현실을 자각한 라파엘이 무기력하게 축 늘어졌다.

한순간에 가라앉은 분위기 속에서, 남자가 능청스럽게 눈썹을 치켜 올렸다.

“없긴 왜 없어.”

“……예?”

“가끔 네가 잊는 거 같은데, 티케랑 주신들 위에 내가 있거든.”

“그럼…….”

동그랗게 뜨인 눈동자가 곧장 남자에게 박혀 들었다.

희망으로 들어찬 그 시선에 부응하듯, 남자가 턱을 까딱였다.

“그 정도는 관여할 수 있다고. 내가 허가할 테니, 가고 싶으면 가 봐.”

“진심이세요?”

“안 그래도 인간계에서 가져올 게 좀 있어서 포털을 준비해둔 상태야. 림피에이온 신전에 열어놨으니까, 네 애들 데리고 가던지. 닫히기 전에 서두르는 게 좋을 거다.”

남자를 보는 라파엘의 눈이 일순 가늘어졌다.

라파엘은 자신이 이끄는 천사부대를 동원할 작정이었고, 남자 역시 그를 모르지 않았다.

그 모든 인원이 이동할 대형포털은 곧바로 열 수 있는 게 아니었고.

‘그런데 닫히기 전에 서두르라는 건, 이미 열어두었단 소리지.’

거기다 림피에이온 신전이라면 창세신만이 이용하는 신전이었다. 다른 천족들의 눈을 피해 강림하기에 그보다 좋은 공간은 없었다.

마치 이럴 줄 예상했다는 듯, 딱 맞아 떨어지는 상황.

라파엘은 히죽 입꼬리를 올렸다.

“뭐예요, 이러실 거면서 괜히 뻗대시기는.”

“널 보니 지금이라도 닫고 싶어진다.”

“아잉, 제가 많이 사랑하는 거 아시죠 아버지?”

“그 사랑 지금은 거절하니까 얼른 내 눈앞에서 썩 사라져.”

파리 쫓듯 휘휘 내젓는 남자의 손길에도 라파엘은 신나서 날개를 펼쳤다.

“감사해요, 아버지!”

남자의 신형이 점점 멀어졌다.

부랴부랴 신전에 도착한 그는 수하의 천사부대를 먼저 보내고, 마지막으로 포털 앞에 섰다.

자신도 서둘러 막 몸을 던지려는데, 뭔가가 그의 시선을 붙잡았다.

‘저건…….’

희끄무레하게 빛나며 몽글거리는 덩어리.

아직 형체는 불분명하지만 그것을 준비하는 게 분명했다.

‘인간계에서 뭐 좀 가져오신다더니… 이거였나. 아버지께서 간만에 힘 좀 쓰셨네.’

하여간 깍쟁이라며 툴툴거리곤 포털로 상체를 기울였다.

그러나 발 하나를 미처 집어넣기도 전에, 라파엘은 또다시 멈출 수밖에 없었다.

바로 뒤에서 느껴져선 안 되는 인기척이 전신을 강타했다. 상당한 세기의 신력이었다.

‘젠장, 들켰나.’

그는 급습이라도 가할 요량으로 창을 더욱 틀어쥐고 몸을 돌렸다.

주신이면 자신이 죽을지도 모르겠지만, 어떻게든 불청객을 물리고 인간계로 달아날 작정이었다.

하나 인기척의 주인을 맞닥뜨린 순간. 그대로 굳어버렸다.

라파엘은 내지르던 창을 후다닥 등 뒤로 숨겼다.

“엥, 모로스님께서 여긴 웬일이세요?”

인기척의 주인은 다름 아닌 모로스였다.

제 수호신과 돈독했던 유일한 신.

수호신 티케가 지나갔던 길을 그대로 밟아, 마찬가지로 형벌을 받게 된 신.

그런 그녀가 무슨 일로, 어떻게 여길 찾아온 거지?

라파엘은 동그란 눈을 꿈벅이며 물었다.

“이렇게 돌아다니실 수 있으신 거예요? 이미 판결 떨어지지 않으셨어요? 곧 동면에 들어가실 거라고 들었는데…….”

“…….”

모로스는 말이 없었다. 시선은 아까부터 줄곧 포털에만 고정한 채였다.

‘설마…….’

불현듯 말도 안 되는 가정이 라파엘의 뇌리 한구석에서 피어올랐다.

정말 말도 안 된다는 걸 알지만, 마냥 무시하고 넘어갈 순 없었다.

모로스는 가끔 그런 일에 막무가내로 뛰어들곤 했으니까.

‘그러니 티케님과 친하셨겠지… 그래도 지금은 완전히 범법행위나 마찬가지 아닌가?’

형벌 대기 기간에 독단적으로 이리 일을 벌인다면 가중처벌 또한 피할 수 없었다.

본인 스스로가 그를 가장 잘 알고 있을 터인데.

“모로스님도… 강림하시려구요?”

슬그머니 새나온 물음에 모로스는 라파엘을 한 번 슥 쳐다봤다. 그러더니 곧 말도 없이 포털 속으로 사라졌다.

졸지에 라파엘은 죄수가 탈옥하는 광경을 바로 눈앞에서 목격하고도 놓아준 공범자가 되어버렸다.

그는 한동안 벙쩌있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와, 진짜 가만 보면 제일 점잖으신 만큼 제일 미치셨다니까.”

감탄하며 혀를 내두르는 그의 신형도 곧 포털 안으로 사라졌다.

* * *

[시스템 활성화까지 남은 시간: 58초]

시스템 기간 중에 죽으면, 시스템이 시작된 때로 회귀한다.

회귀 지점이 전투 도중에 생성되는 건 안타까웠지만, 그래도 더 많은 이가 죽은 후에 보다야 나았다.

피에 절은 비명소리가 연신 귓가를 파고들었다.

“끄아아악-!”

“살려줘!”

스스로를 운명이라 칭하는 학살자들에게 내가 알던 모든 사람들이 부질없이 스러졌다.

죽고, 죽고, 또 죽었다.

너무 많이 죽었다.

“읏…!”

텅 빈 머리를 가누는 것만으로도 버거웠던 나는 일순 몸을 잘게 떨었다.

갑자기 속이 간지러웠다.

아니, 뜨거운 용암이 흘러들어 들끓는 것 같기도 했다.

온몸이 달아올라 정신이 몽롱했다. 주체할 수 없는 어떤 기운이 발끝에서부터 올라와 용솟음치고 있었다.

그러나 전신에 빠듯하게 들어찬 기운은, 몸 안에서만 맴돌 뿐 터져 나오진 못했다.

마치 커다란 댐이 턱 막고 있는 느낌이었다.

나는 멍한 시선을 돌려 허공을 헤집었다.

이제 하늘에 남아있는 인원은 많지 않았다.

하일은 추락한지 오래고, 간신히 버티고는 있지만 아가레스도 머지않아 그럴 테고, 그리고…….

‘루시.’

온전치 못한 날개를 펼친 채 비틀거리며 나는 최후의 천사가 있었다.

우리 편인 천사가.

그는 원래 천계에서 천사들의 왕, 대천사를 이끄는 수장이라고 했다.

그랬던 그가 모종의 이유로 형벌을 받고 인간의 몸에 갇힌 후로는, 예전만큼 힘을 온전히 끌어올리지 못했다.

그동안 신성계나 치유마법을 쓸 수 없었던 것도 본래 힘을 봉인 당했기 때문이었다.

봉인을 풀기 위해선 신력이 필요한데, 그를 위해 기꺼이 힘을 내어줄 신은 없었다.

죽인다면 몰라도.

“미욱한 반푼이 놈. 참으로 끈질기기도 하구나!”

“제대로 가누지도 못하는 그 날개부터 꺾어주마.”

신과 천사들은 더욱 맹렬한 기세로 루치펠을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그들에겐 고지가, 우리에겐 나락이 코앞이었다.

신력이 실린 수백 개의 창은 금방이라도 루치펠을 꿰뚫을 듯 보였다.

[시스템 활성화까지 남은 시간: 5초]

그마저 잃을 순 없었다.

여기서 루치펠이 죽는다면, 아무리 회귀를 반복해도 그가 살아있는 시간은 만들지 못한다.

[시스템 활성화까지 남은 시간: 3초]

쐐애액!

두꺼운 창들이 루치펠을 향해 비처럼 쏟아졌다.

제발, 제발!

나는 정신없이 땅을 박차고 올랐다. 그 앞에 아득바득 버티고 서서, 양 팔을 벌렸다.

닿는 것은 무엇이든 단숨에 잿더미로 만들 빛줄기가 사방에서 쇄도했다.

[시스템 활성화까지 남은 시간: 0초]

눈을 질끈 감기 전 마지막으로 보인 메시지.

‘됐다.’

나는 비로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다행히 루치펠보다 내가 먼저 죽을 것이고, 그러면 회귀 포인트를 지금 박을 수 있게….

‘어?’

뭔가 이상했다.

나는 죽지 않았고, 그렇다고 아픈 곳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목숨이 붙어있다면 적어도 온몸이 산산조각 나는 고통쯤은 느껴야 하는데.

나는 지나치게 멀쩡했다.

짙은 혈향을 뚫고 코끝에 익숙한 향기가 훅 끼쳐들었다.

‘말도 안 돼. 이럴 순 없어.’

“루시, 이거 놔!”

공격을 맞은 건, 내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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