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관종은 오늘도 죽습니다 (150)화 (150/185)

#150

마왕 아가레스의 등장으로, 전세는 조금씩 역전되기 시작했다.

과연 지옥 동부를 장악한 군주다웠다.

그 찬란하게 빛나던 천계 패거리가 득달같이 달려드는 악마군에게 차츰 먹혀들었다.

“세상에…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가? 마계가 우리 편을 들고 있어!”

“그래, 그리고 천계가 우리의 적이지. 그러니 어서 정신 차리고 공격하세, 이 친구야.”

혜성처럼 나타난 마계의 협력에 우리군은 사기를 얻고 다시 일어났다. 엎치락뒤치락하는 혈투가 새로이 재개되었다.

마계와 인간계 대 천계.

성마대전에 인간이 낀 것은 둘째치고서라도, 마족과 인간이 합심해 천족에게 대항했다. 전에 없이 이례적인 조합의 전쟁이었다.

창칼이 쉴 새 없이 부딪치며 쟁쟁한 파공음을 만들어냈다.

어느 하나 물러서지 못하는 각 세력의 의지가 검 끝에서 장렬하게 타올랐다.

“거기 공주님, 꼴이 말이 아니네. 잠깐 쉬어가지 그래?”

제법 노련한 움직임으로 천사들을 쳐내며 카임이 가까이 다가왔다.

껄렁대는 작태완 달리 실력은 상당해서, 나는 그를 내버려두었다.

마력을 한꺼번에 너무 많이 소진한 터라 조금 휴식이 필요하던 차였다.

그가 만든 안전지대 안에 들어와 숨을 돌리자 악마 왕자님과의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아버지께서 널 대놓고 딸이라 공표한 기분이 어때?”

“글쎄요… 솔직히 실감은 잘 안 나네요. 그렇게 저돌적으로 나오실 줄은 몰라서.”

“그게 끝이야?”

“음… 그냥 다음부터 마계에 갈 땐 공주님 대접 받을 수 있겠구나, 정도?

좀 더 거창하게 감격스러움을 표해줬어야 했나.

카임의 눈썹이 한 쪽만 샐쭉 올라갔다.

“그럼 지금까지 받은 건 아니었어?”

“제가 뭘 받았는데요?”

“……하. 너 말야, 아버지의 개인 정원에서 사과 먹은 적 있지?”

“그거 그렇게 귀한 거 아니라고 마왕님이 그러셨는데…….”

“누굴 위해서 뭘 해준 적이 없으신 양반이야. 그거 하나 생색낼 줄도 몰라서 그리 말씀하신게지. 생각해 봐. 마왕의 개인 정원에서, 그것도 손수 직접 딴 사과를 공주님 아니면 누구한테 줘? 나는 사과는 고사하고 아들이라고 불려본 적도 까마득해.”

이야, 우리 아버님 그렇게 안 봤는데 편애가 심하셨네.

나는 짐짓 속상하다는 듯 불퉁거리는 그의 어깨를 다독거렸다.

다음번엔 내가 서리를 해서라도 그 사과, 꼭 대접하겠노라 답하려던 때.

탁, 발을 내딛는 소리와 함께 훤칠한 인영이 끼어들었다.

“이 시커먼 놈은 뭔데 너한테 투정을 부리는 거야.”

덤덤한 어조임에도 짐승의 하울링처럼 억제한 살기가 느껴지는 목소리.

나와 카임 사이를 가로막고 선 루치펠이 카임을 주욱 밀어냈다.

카임은 개의치 않고 능청스럽게 대꾸했다.

“시커먼 놈이라니. 그런 쪽보단… 큰 오라버니, 정도의 관계로 봐줬으면 좋겠는데. 아버지께서 딸이라 공포하시기도 했고. 내가 보기보다 나이가 좀 있거든.”

갑자기 둘러싼 공기가 뜨거워졌다. 어처구니없게도 팽팽한 신경전이 오갔다.

와중에 두 사람 다 달려드는 적을 찍어 내리는 손길은 멈추지 않았다.

아니, 한 악마와 한 천사라고 해야 하나.

카임의 검붉은 눈이 루치펠의 날개를 훑었다.

“이 나이 먹고서 새파랗게 어린 애를 품진 않아. 그렇게 파렴치하지 않다고, 네놈같이.”

비록 지금은 너덜너덜하긴 하지만, 본디 루치펠의 태생은 천족.

내 나이보다 백 살이 아니라 백배는 더 먹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예상치 못한 한 방에 루치펠의 등이 찰나였지만 잘게 떨렸다. 살벌한 음성을 뱉어내던 입도 꾹 다문 채였다.

기세로는 아가레스에게도 밀리지 않는 녀석이, 고작 나이 태클에 넉다운 된 광경이라니!

그를 등지고 있어서 표정을 볼 수 없다는 게 참으로 애통했다.

루치펠을 정면으로 대하고 있는 카임이 즐거워 죽겠다는 얼굴이어서 더 그랬다.

나는 목석이 따로 없는 아가레스에게서 어찌 저리 유들유들한 양반이 나올 수 있었을까, 따위의 생각을 하며 다시 전투에 임할 준비를 했다.

“이만 가볼 테니까, 둘도 그만 콩 볶고 일들 해요. 난 더 많이 일하는 사람 편 들어줄 거니까.”

때마침 근처에서 저공비행을 하는 하일이 보였다. 나는 그녀가 지나가는 틈에 안장 끄트머리를 잡고 훌쩍 올라탔다.

머릿속으로 불퉁거리는 음성이 들렸다.

[갑자기 뭐야?]

“탈출이 좀 필요해서요.”

3분 남짓이었지만 생과 사를 오가는 현장에서 이만하면 충분히 쉬었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광포한 기세로 천사들을 족치고 있는 두 남자가 보였다.

아주 불이 붙어 아군들조차 그 주변은 피할 정도였다.

‘능률 올리는 덴 경쟁이 최고지.’

나는 하일을 타고 전장을 누비다가, 이젠 밑동만 남은 자이언트 트리 위로 뛰어내렸다.

마침 그곳에 서서 신력을 방출하고 있던 갈색머리 여신이 날 돌아보았다.

그녀는 처음과 달리 상당히 엉망인 꼴이었다.

비단결 같았던 머리는 산발에, 깨끗하고 고아했던 얼굴은 살기가 그득그득 올라 표독스럽기 그지없었다.

나는 거칠어진 숨을 한 번 내쉬며 일갈했다.

“몰살당하기 전에 이만 포기하고 물러가지 그래.”

“……뭐?”

여신의 눈가가 기이하게 뒤틀렸다.

“방금 무어라 했느냐? 물러가? 하하하, 아하하하!”

가소롭기 짝이 없다는 웃음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나무가 그녀의 진언을 이기지 못하고 흔들릴 무렵, 웃음소리는 뚝 멈췄다.

고개까지 젖히고 날 비웃던 그녀는 언제 그랬냐는 듯 음산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우매한 인간아, 헛된 희망에 눈이 멀어 한 치 앞밖에 보질 못하는구나. 그러니 고귀한 신의 지배 아래 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너무 호언하는 거 아니야? 주위를 둘러봐. 너희들이 아무리 짓밟는다고 해서 우리가 순순히 굴복할 사람들인지.”

여신의 시선이 주변을 찬찬히 쓸었다.

곳곳에서 고통에 겨워 내지르는 신음이 낭자하고, 붉게 물든 깃털이 바닥에 즐비하게 깔렸다.

그보다 더 지독한 혈향이 사방에 진동했다.

그러나 끔찍한 참상을 지나 다시금 마주한 여신의 두 눈은, 일말의 동요조차 없었다.

무감각 그 자체였다.

“고작 이 정도 희생에 물러나리라 생각했다면 오산이다. 피는 얼마든지 흘려줄 수 있어.”

“수호신이라는 존재가 그런 말을 잘도…!”

“수호신이니 이리 하는 것이다. 순진하게도, 우리가 전력을 다한 줄 알았느냐? 준비한 것이 이뿐이라 여겼다면, 그 역시 크나큰 오판이다.”

그녀의 입꼬리에 걸린 조소가 더욱 짙어졌다.

문득 불안해진 나는 알림창을 확인했다.

[시스템 활성화까지 남은 시간: 13분 33초]

정말 머지않았다.

조금만, 조금만 더 버티면 된다. 고지가 눈앞이었다.

그런데, 그 한 걸음을 남겨두고 제동이 걸렸다.

“가엾기도 하지. 결국 최악의 수를 자초하고 마는구나.”

여신이 돌연 팔을 번쩍 들었다.

그녀의 말이 끝나자마자 하늘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쿠르릉- 쿠릉-

매일같이 봐오던 평범한 하늘이 아니었다. 마치 자아를 가진 존재 같았다.

끊임없이 울음을 토해내고, 금방이라도 녹아내릴 듯 일렁였다.

역한 음식을 삼킨 장처럼 꿈틀거리던 하늘은 이윽고 참으로 엄한 것도 쏟아냈다.

뭔가가 뒤로 기다란 꼬리를 그리며 청천을 가르고 떨어졌다.

‘저건…!’

해가 떨어진 지 오래였지만 사위가 별안간 대낮처럼 밝아졌다.

“모두 피해!”

“결계, 결계를 쳐!”

콰앙- 쾅!

귀가 먹먹해질 정도의 소음이 온 신경을 뒤흔들었다. 시야가 끊임없이 뱅글뱅글 돌았다.

어디가 다쳤는지, 아픈지, 팔다리가 제대로 붙어있긴 한 건지조차 알 수 없었다.

무지막지한 운석이 함박눈마냥 떨어졌다. 빈틈없이 하늘을 덮을 정도로 수가 어마어마했다.

그 폭격에 깔린 모든 것들이 무참하게 짓이겨졌다.

다급하게 펼친 결계도 얼마 못 버티고 산산조각 났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지만, 그저 모든 것이 다 부서져 내리고 있단 것만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나는 절대 보고 싶지 않았던 장면을 목도했다.

“클라인!”

클라인이 두꺼운 창에 꿰뚫린 채 바위 위에 쓰러져 있었다.

나는 정신없이 달려가 그를 일으켰다.

그러나 창백하게 질린 뺨은 엷은 숨만 이따금 내쉴 뿐, 눈을 뜨지 못했다.

나는 이를 악물고 창대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끙끙대며 간신히 창을 뽑자 피가 솟구쳤다.

덜덜 떨리는 두 손으로 애써 상처를 막았다. 회복 마법을 닥치는 대로 시전하며 마력을 퍼부었지만 역부족이었다.

신력이 깃든 창으로 낸 상처라 아물지가 않았다.

눈앞이 부옇게 흐려졌다. 나는 자꾸만 흐물거리는 눈가를 문지르며 간절하게 빌었다.

“클라인, 눈 좀 떠봐요, 제발. 제발…!”

하염없이 그의 이름을 부르며 매달렸지만 이조차도 오래가지 못했다.

“정신 차려라, 메이블린!”

윽박지르며 클라인을 들쳐 멘 아가레스가 나를 옆구리에 안은 채 도약했다.

콰앙!

방금 전까지 내가 있었던 자리엔 간발의 차로 날카로운 운석조각이 난폭하게 처박혔다.

일초만 더 지체했더라면 뼛가루도 남기지 못하고 운명을 달리할 뻔했다.

쿵, 쿠웅. 아가레스가 땅을 박찰수록 포격음이 조금씩 멀어졌다.

그가 우릴 데리고 피한 곳은 비교적 폭격이 덜한 곳이었다.

평평한 땅에 클라인을 눕히고서 아가레스는 내 양 어깨를 잡고 흔들었다.

“메이블린. 날 보거라. 여기서 정신을 놓으면 안 돼.”

한 번, 두 번. 나는 눈을 깜빡였다.

이지러졌던 시야가 차츰 원래대로 돌아왔다.

핏기가 싹 가신 입술을 뻐끔거리며 그를 올려다보니, 아가레스가 조급한 얼굴로 당부했다.

“네 곁에 있고 싶지만, 난 오래 못 있는다. 빌어먹을 천계 놈들이 날 집중적으로 노리고 있어. 너까지 위험해질 수도… 제길.”

어깨를 감싸던 온기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자신의 마기로 내 주변을 둘러주고서, 그는 전광석화로 튀어나갔다.

꽈르릉! 꽝!

거대한 두 격이 연달아 맞부딪쳤다. 날카로운 섬광이 하늘을 점멸했다.

까마득한 천공에서 벌어지는 전투임에도 전신이 오싹오싹했다.

“인간의 편에 선 그 어리석음을 후회하게 해주마!”

“죽어라, 더러운 악의 졸개!”

신들은 아가레스만을 끈덕지게 좇으며 공격을 퍼부었다.

마왕은 현재 그들에게 가장 위협이 되는 존재였다.

즉 그만 없으면 이 전쟁을 종결 낼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지금까지 버틸 수 있던 것도 전부 아가레스 덕분이었다.

이곳에서 신격에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

그런 그조차도 군데군데 찢긴 상처들로 엉망이었다.

아무리 아가레스가 신 둘 셋은 감당할 만한 괴력을 가졌다곤 하지만, 저쪽은 신 여섯이었다.

그들이 힘을 합쳐 아가레스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진다면, 그가 고꾸라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그 간악한 덫에서 빠져나올 방도는 없었다.

‘이제… 어쩌면 좋지? 뭘 어떻게 해야…….’

목이 바싹바싹 타들어갔다. 속이 울렁거렸다.

항상 최선의 해결책을 내놓던 머리는 더 이상 굴러가지 않았다.

학살의 현장이 바로 눈앞에서 벌어지는데, 이상하게 현실감이 없었다.

모든 게 꿈만 같았다.

‘제발, 제발 꿈이었으면.’

간절히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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