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9
나는 다리를 부들부들 떨면서도 기어이 일어났다.
고개를 쳐들고 서서, 똑바로 눈을 마주했다.
“절대적이고 나발이고, 그러니까 대드는 거잖아. 보고도 모르겠어?
“이런 건방진…!”
노인 모습의 신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곁을 지키던 갈색머리 여자가 그를 붙잡았다.
“벌레만도 못한 미물의 작요에 노하실 것 없습니다. 주신께서 허락하신다면, 제가 잠시 나서도 되겠습니까?”
노신이 고개를 끄덕이자, 여자가 앞으로 나왔다. 묘하게 익숙한 느낌이 드는 여자였다.
냉철함을 가장하나, 그 속에서 애끓는 분노를 감추지 못하는 목소리조차도.
“메이블린 슈트레커. 시나리오를 비틀어 일을 이 지경으로 몰아넣은 장본인인 주제에, 퍽 뻔뻔도 하지.”
아무래도 천계에서 내가 꽤 유명인사인 모양이었다. 이름까지 다 불러주시고 말이야.
물론 그 정성에 감읍해 설설 길 생각 따윈 없었다.
나는 귀를 후비적거리던 손가락을 후 불었다.
“아, 미안. 내가 원래 진짜 경청하는 스타일인데, 헛소리를 들으면 귀가 막히는 알레르기가 있거든. 진짜 미안.”
“도무지 신에게 순종할 줄 모르는 머저리가 따로 없구나. 그간 대가없는 자비를 얼마나 베풀어 주었거늘…!”
“잠깐, 뭐? 자비? 지금 자비라고 했어? 대체 신이란 작자들은 양심 팔고 뭘 사먹는 거야? 좀 알려줘 봐. 뭐가 그렇게 맛있어서 중요한 양심을 한 톨도 안 남기도 다 판 거야, 어?”
차분한 기류는 예상보다 빠르게 깨졌다.
여자의 하얀 목 위로 푸른 핏줄이 발칵 돋았다.
“아둔하기 짝이 없는 것! 감사할 줄 모르는 너는, 오늘 끝없는 고통 속에서 울부짖게 될 것이다.”
“으, 감사라니. 너무 가증스러워서 치가 다 떨린다, 야. 여름도 겨울로 만드는 재주가 있네. 그게 당신 능력이야? 뭐 헛소리로 계절을 바꾸는 신, 그런 건가?”
“천박한 것이 입 하나는 끊임없이 놀리는구나. 계속 지껄여 보아라. 그리 할수록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은 너다.”
“그래? 고마워, 칭찬해준 김에 더 놀려볼게.”
“하찮은 인간이 분수도 모르고 감히…!”
굴종하긴커녕 능청스럽기 그지없는 응수에, 매끈한 낯짝은 더욱 구겨져만 갔다.
나는 아랑곳 않고 뚜둑거리는 고개를 몇 번 돌렸다.
루치펠이 신력을 어느 정도 쳐내주고 있어서 움직이기가 한결 편해졌다. 고른 숨이 내딛는 발에 힘을 실어주었다.
나는 마치 걸음마를 떼는 아이처럼, 그의 품에서 한 발짝씩 걸어 나왔다.
“네놈들에게 이 세계는 체스 판에 불과하겠지. 우린 그 위에서 놀아나는 말들에 불과하고. 너희처럼 맘에 안 들면 언제든 엎어버리는 게임을 뭐라고 하는 줄 알아?”
나는 화살을 하나 뽑고, 루치펠과 나의 마력을 함께 실었다.
“더티플레이라고 해. 말 그대로 더러운 게임.”
이내 검푸른 빛을 두른 살이 활에 메겨졌다.
나는 꼿꼿하게 허리를 펴고 팔을 구부렸다.
“그리고 당하는 입장으로선 그게 말이야….”
시위가 팽팽하게 당겨지고,
“기분이 아주 엿 같다고, 새끼들아.”
쐐액-!
내 손을 떠난 발칙한 도발은 날카로운 마찰음을 내며 허공을 갈랐다.
거침없이 뻗어나간 화살은 신력에 막혀서야 턱 멈췄다.
여자의 안면과 불과 한 뼘도 남겨놓지 않은 거리였다.
“이런 조악한…….”
모멸감이 가득 차오른 얼굴이 파르르 떨렸다.
여자는 거칠게 화살을 잡아챘다.
그녀의 손아귀에서 두 동강난 살대가 떨어지고, 음산한 목소리가 으득으득 갈려나왔다.
“어리석은 것들. 기어이 스스로 불구덩이에 뛰어드는구나. 장난은 끝이다.”
으, 좀 더 장난에 어울려줬으면 했는데. 안타깝게도 그녀는 진심이었다.
“전부 죽여라.”
급류처럼 불어난 천사들이 열을 맞춰 지상으로 돌격하기 시작했다.
우리 군 역시 지지 않고 맞섰지만, 전과 같지 못했다. 수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차이 났다.
심지어 그들은 우리만을 공격하지 않았다. 발아래 깔린 것은 보이는 족족 파괴했다.
사람들이 대피해있는 곳까지 기어이 찾아내, 마구잡이로 헤집었다.
“꺄아아아악!”
“사, 살려주세… 끄아악!”
천사부대가 우릴 상대하는 동안 신들은 세상을 깨뜨리고 헐었다.
손가락으로 개미굴을 헤집어 망가뜨리는 것처럼 무심하고도 별 볼일 없는 행위였다.
인간은 그 가벼운 손짓 한 번에 쓸려나가는, 한없이 작은 존재에 불과했다.
무자비하고 가차 없는, 일방적인 폭력.
깊은 심해 속으로 속절없이 끌려들어가는 기분.
거대한 재앙 앞에서 우리는 이다지도 무력했다.
‘제발, 제발!’
나는 거의 발악하다시피 마법을 날리고, 활을 쏘고, 아득바득 대항했다.
그럼에도 역부족이었다. 어찌 해볼 만한 전력이 아니었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망망대해를 작은 통통배 하나로 건너겠다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뒤에서 막 날아온 일격을 가까스로 쳐내며 나는 시스템 창을 확인했다.
[시스템 활성화까지 남은 시간: 46분 56초]
회귀 포인트를 만들려면 여기서 꺾일 순 없었다. 조금만 더 버텨야 했다.
‘하지만 이렇게 가다간 전멸인데…!’
그 때에 가서 회귀해봤자 살아있는 사람이 없으면 무슨 소용일까.
나는 이를 악물고 남은 전력을 확인했다.
처음보다 확연히 줄어든 수의 기사와 암살자들이 어지러이 흩어져 죽어나가고 있었다.
매캐하게 피어오른 흙먼지 사이로, 미친 듯이 대검을 휘두르는 노아도 보였다.
그는 앞에서 몰아쳐오는 공격을 막는데 급급했다. 그래서 빈틈을 뚫고 들어오는 적을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
당장 달려가서 막기엔 너무 늦었다.
텔레포트를 하든 공격 마법을 날리든 노아의 옆구리가 뚫리는 게 더 빠를 것 같았다.
그의 이름을 목청이 터져라 부르는 것 말곤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오빠, 안 돼!”
검이 노아의 옆구리를 스치고, 노아가 고꾸라졌다.
넘어진 노아를 향해 사방에서 몰려온 천사들이 검을 치켜들었다. 벌레를 박멸하기 위해 혈안이 된 학살자들 같았다.
그 모습을 구경밖에 못하는 나 자신에 절망하던 때.
투쾅!
검은 구멍에서 느닷없이 튀어나온 누군가가 노아 앞을 막아섰다.
키 백구십이 넘는 노아가 왜소해 보일 정도의, 거구의 사내.
가로로 눕혀 들은 두꺼운 창대가 덤벼들던 모든 공격을 무마시켰다. 도리어 창대에 직격한 칼날이 두 동강났다.
경악 섞인 술렁임이 거센 물결처럼 번져나갔다.
“말, 도 안 돼…….”
“어찌, 어찌하여 네놈이…!”
급작스레 나타난 사내는 천사들의 개탄에도 유유자적했다.
그 여유로움에서 나오는 기태가 그들을 더욱 질겁하게 만들었다.
“극적인 순간에 도착하려던 건 아니었지만…….”
사내가 커다란 악어에서 뛰어내리자 일대의 땅이 쿵, 하고 흔들렸다.
그는 그보다 더 큰 삼지창으로 주변에 달려드는 모든 천사들을 모조리 찍어 눌렀다.
동시에 짙은 마기로 점철된 두꺼운 가시들이 불쑥 땅에서 치솟았다.
“끄아아아악!”
그 사납던 천사들이 소시지마냥 줄줄이 꿰여 떨어져 나갔다. 날개가 꺾인 채 사내의 발밑에 널브러져 끅끅댔다.
그 사이 란슬롯이 노아를 부축해 옆구리에 남은 자상을 치료해 주었다.
다행히 노아는 무사했다.
일련의 정리 끝에 내 앞에 당도한 사내는 든든한 미소를 내비쳤다.
“부디 늦은 게 아니었으면 좋겠구나, 딸아.”
쿠웅-
아가레스가 삼지창으로 땅을 내려쳤다.
꽂힌 창을 중심으로 충격파가 나무의 잔가지처럼 퍼져나갔다.
거센 파동은 지진을 일으키더니,
꽈득, 꽈드드득.
땅이 기이하게 모양을 틀기 시작했다.
같이 비틀린 나무가 하나 둘 우지끈 쓰러졌다. 뿌리째로 뽑힌 나무들은 그 아래 생긴 블랙홀로 속절없이 빨려 들어갔다.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 동시다발적으로 생긴 공허.
그 안에서, 아가레스의 31개 군단이 폭포처럼 쏟아져 나왔다.
“빌어먹을 천계 놈들! 오늘이야말로 끝장을 보자!”
“그 오만한 머리를 진흙탕에 처박아주마!”
“전군 돌격-!”
뼈대가 도드라진, 검은 가죽 같은 날개가 펄럭였다.
카임을 선두로 악마군이 사나운 기합을 내지르며 비산했다.
끝을 모르고 불어나던 천사무리와 비길 수 있을 만큼 많은 수였다.
까마귀 떼처럼 덤벼드는 악마를 닥치는 대로 쳐내며, 갈색머리 여신이 악을 썼다.
“아가레스! 감히 네놈이 금계를 어긴 것이냐!”
“하, 적반하장이로군. 과연 파렴치한 천족다워.”
공간을 찢는 매서운 진언에도 아가레스는 느긋함을 잃지 않았다.
되레 두꺼운 눈썹 사이를 좁히며, 태연스레 한탄했다.
“내 이래서 천계 놈들을 좋아할 수가 없어. 염치도 모르고 불나방처럼 달려들지.”
“그 입 닥쳐라, 아가레스. 마계는 인간사에 간섭하지 않기로 했지 않나!”
“인간사라… 글쎄. 너무 거창하군. 나는 그저 내 딸을 지키기 위해 온 것뿐인데 말이야.”
‘딸… 이라고…?’
다시금 귓바퀴를 파고드는 단어에, 나는 멍한 시선을 올렸다.
그러자 투박한 손이 흙먼지와 피로 엉겨 붙은 내 머리를 쓸었다.
서툴기 그지없는 손길이었으나, 마주한 시선은 따스하기만 했다.
“소중한 걸 지키고 싶은 건, 당연한 것 아닌가.”
그 말을 끝으로 아가레스가 움직였다.
방금까진 깔짝대본 것에 불과했다는 듯, 아주 본격적으로.
내 옆에 있었던 그는 눈 깜짝할 새 천공으로 튀어 올라 갈색머리 여신의 목을 틀어쥐었다.
“크읏…! 이 더러운 손 치워라!”
“잘도 명령질을 하는구나. 나는 네 수하도, 그렇다 하여 호락호락한 상대도 아닌데. 상황파악이 안 되나?”
“상황파악을 못하는 건 너다, 아가레스. 네놈이 이런다고 멸망을 막을 수 있을 것 같으냐? 구원은 고사하고 저 계집의 목숨 하나 지키지 못할 것이다.”
“입을 잘도 나불대는 걸 보니, 아직 견딜 만한가 보군. 그럼 지금은 어떨까.”
여신의 목덜미를 쥔 손에 힘줄이 불퉁 돋았다.
그와 대비되는 하얀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발을 버둥거리며 아가레스의 손을 박박 긁었다.
“컥, 크흡…!”
“살고자 한다면 기를 쓰는 성의정돈 보여야 하지 않겠나. 그것이 싫으면 알량한 자존심 따위 버리고 빌어도 좋고.”
“내가 추잡한 마족 새끼에게 그리할 것 같으…!”
콰앙!
여신은 말을 끝맺지 못하고 땅에 처박혔다.
그 위로 피어오르는 먼지구름을 보며, 아가레스가 불결한 것을 만졌다는 듯 손을 털었다.
“물론 그리한다 해도 봐줄 생각은 없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