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
그 단단한 목소리를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게 다소 축축한 투정이 툭 튀어나왔다.
“그게 뭐야.”
내가 뭐라고 그렇게까지 해.
가슴 한 켠이 욱신거렸다. 그럼에도 날 위해 존재의 상실도 감수하겠다는 그 말이, 그가 내게 주는 확신이.
무모한 만큼 꿈처럼 달콤해서, 나는 못내 웃어보였다.
그러나 감상에 젖어드는 시간은 오래가지 못했다. 북적이는 소란이 상념을 깨웠다.
숲의 너른 공터는 어느덧 수많은 사람들로 가득 찼다.
별이 무수하게 수놓아진 밤하늘을 한 조각 잘라내어 펼친다면 이리 될까 싶었다.
‘……결국 이 지경까지 왔구나.’
청승맞게도 지난날들이 오래된 영화의 필름처럼 스쳐지나갔다.
소설 속 세계에 떨어져서, 얼토당토않은 시스템을 떠안은 채, 생과 사를 수없이 오가고, 이젠 더 말도 안 되는 일을 코앞에 두고 있다.
자그마치 세 종족의 격돌.
천족과 마족, 인간이 뛰어든….
‘전례 없는 거대한 전쟁이지.’
이 대전의 불씨가 바로 나고.
터무니없이 웃긴 소리였다.
살려고 발버둥친 물장구가 해일이 되어 세계를 덮쳤단다.
기껏해야 인간 하나가, 시나리오를 전부 엉망으로 만들었단다.
고작 나 하나에 어그러질 시나리오였으면, 애초에 정상적이지도 않았을 거다.
‘이디스한테 베인 같은 놈을 남주로 붙여준 것만 봐도 뻔해.’
그러니 그들이 아무리 비열한 방식으로 나온다 한들, 나는 물보라를 잠재울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보란 듯이 그 파도를 타고 뒤엎어버리지.
‘누구 좋으라고 줄거리대로 따라가 줘?’
나는 차오른 숨을 터뜨리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침부터 차례차례 만났던 사람들이 각기 저마다의 부대를 이끄느라 분주했다.
마탑의 마법사들, 에드먼드의 황실 기사단과 란슬롯의 성기사단, 던켈하이트의 암살자들까지.
전부 내가 지나온 길에서 만난 사람들이었다.
처음엔 뿌리치는 내 손을 억지로 잡게 했지만, 지금은 먼저 나서서 내 손아귀를 기어이 파고드는,
‘내 사람들.’
나는 그 손을 절대 놓을 생각이 없었다.
어떻게든 악착같이 잡아서, 보여줄 거다.
고고하신 당신네 신들이 깔보는 인간 나부랭이가, 이리도 끈질기다고.
수백, 수천 번이고 죽어도 좋으니 그 잘나신 콧대들을 눌러줄 거라고.
시스템 기간도 아니라면서, 어떻게 그럴 수 있냐고?
그래, 물론 지금은 아니다. 하나 그렇다고 앞으로도 여전하리란 법은 없으니까.
나는 눈앞에 뜬 창을 멀거니 응시했다.
[시스템 비활성화 기간이 곧 종료될 예정입니다!]
[시스템 재가동을 위한 정비에 들어갑니다….]
[관종력: ★★★★
칭호: 위대한 관종
스킬: 재능의 축복(Lv.4), 관심법(Lv.5), 시선의 이정표(Lv.5), 박수갈채(Lv.4), 무관심(Lv.3), 이목의 속임수(Lv.5)]
[확인되었습니다!]
[시스템 활성화까지 카운트다운을 시작합니다.]
루치펠에겐 비밀로 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내가 홀로 끝없는 회귀를 반복하는 걸 지독히도 못 견뎌했다.
지난번 정복전쟁 땐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가 극대노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오십 몇 번의 회귀 끝에 이긴 것 같다고 털어놓자마자 남친이고 뭐고 눈물 쏙 빠지게 혼났었다.
그조차도 이미 지난 일이라 그 정도에 그친 것이었다.
만일 오늘 역시 그리할 거라고 실토한다면, 어찌 나올지는 뻔했다.
‘아마 같이 죽었으면 죽었지, 그 진창 같은 시간 속에 나 혼자 빠뜨릴 순 없다고 하겠지.’
하지만 미안하게도, 나는 이미 마음의 준비를 마쳤다.
[시스템 활성화까지 남은 시간: 1시간 33분 30초]
될 때까지 회귀할 준비를.
내게 회귀는 고통이 아니었다. 대학에 가기 위해 입시공부를 하고, 취직하기 위해 취업준비를 하는 것처럼 내겐 원하는 미래를 위해 밟아야 할 일종의 절차나 마찬가지였다.
기다림과 반복되는 인내 끝에 보상이 주어지는 과정.
힘들기야 하겠지만 죽음엔 웬만큼 단련되었다. 두렵지 않았다.
두려운 건 내가 알던 모든 것이 한 줌 재로 돌아가는 것뿐.
이 세계가, 영영 사라지는 것뿐.
나는 절로 힘이 들어간 두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까마득하게 멀지 않아. 고작 한 시간 반이야.’
딱 90분만 지나면, 회귀 포인트를 만들 수 있다.
그러니 그때까지 만이라도 어떻게든 버텨야 했다.
나는 어느덧 주홍빛으로 물든 나뭇잎을 눈에 담았다. 그림자가 길게 늘어지고, 노을이 깔리기 시작했다.
오늘따라 하늘은 유독 발광하는 핏빛이었다.
곧 이 땅 위에 펼쳐질 파멸을 예고하기라도 하듯이.
‘한 십 분이나 남았나.’
이곳에 모인 자들은 전부 각 분야에서 최정예로 추려진 자들이었다.
본능적으로 곧 끼쳐올 위기를 감지하고 최후의 준비에 들어갔다.
기도를 올리는 자, 평소같이 친우와 담소를 나누는 자, 무기가 멀쩡한지 살펴보는 자….
황실 기사단 근처를 배회하던 아빠는 노아를 발견하고 짤막한 포옹을 나누었다.
하일과 실버도 한쪽에서 몸을 풀고 있었다.
콜린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칼리안과 슈타커와 함께 에임을 지키기로 했다.
‘지금쯤 켈른이 오매불망 제 자식처럼 알아서 싸고돌고 있을 테니까, 걱정할 건 없겠지.’
볼에 뽀뽀는 이제 안 하려나. 켈른이 입술만 내밀어도 콜린이 질색팔색하곤 했는데.
작은 실소가 푸슬 새나왔다. 소소하게 떠올리는 평온한 일상은 바짝 선 불안함을 조금은 눕혀주었다.
“오셨습니까, 주군.”
마침 멀리서 길드원들을 다독이던 클라인이 다가왔다.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는 듯 보였다.
루치펠과 클라인. 내겐 산처럼 커다란 두 사내가 나를 사이에 두고 섰다.
나는 속으로 간절히 빌었다.
‘둘이 친구까진 바라지도 않는다. 원수지간만이라도 벗어나 보자, 좀.’
내 간절한 바람이 들린 것일까. 우려와는 달리, 둘은 웬일로 기 싸움 없이 얌전히 있었다.
루치펠만 보면 말티즈에서 시베리안 허스키로 진화하던 클라인. 그는 지금 리트리버 정도에 그친 것 같았다.
‘음, 좋아. 시도 때도 없이 깔리던 살기도 없군.’
큰 전쟁을 목전에 둔 만큼 괜한 힘 빼지 않기로 둘이 합의라도 본 모양이었다.
근데 클라인. 그 뺀 힘을….
“주군. 이 전쟁이 끝나면 저는…….”
사망 플래그 꼽는 데 쓰면 어떡해! 이 양반아, 그거 플래그 중에서도 1순위 대사라고!
지금은 집에 아무리 토깽이 같은 자식새끼와 고운 마누라가 있다한들! 사진 같은 거 꺼내보면서 ‘집에 돌아가면….’ 따위의 말은 콧구멍으로든 똥구멍으로든 절대적으로 삼켜야 하는 상황이라고!
나는 그가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을 세라 황급히 요망한 그 입을 틀어막았다.
“씁, 잠깐만요. 안 돼요. 그 이상은 절대 허락하지 않겠어요.”
감히 내가 두 눈을 부릅뜨고 있는데 사망 플래그를 세우려 하다니!
“클라인이 세울 건 사망 플래그 말고 해피엔딩을 위한 지름길뿐이에요! 하고 싶은 말은 그 때가서 해도 늦지 않아요. 삼일 밤낮을 얘기해도 들을 테니까, 그 때 꼭 얘기해줘요. 알았죠?”
“……알겠습니다.”
내 신신당부에 클라인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여줬다.
어휴, 십년감수했네. 안 그래도 위험군인 인물, 사망 플래그까지 달고 전투에 뛰어들게 할 뻔했다.
나는 철렁한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러자 루치펠이 세모꼴로 눈을 치뜬 채 클라인을 향해 턱을 까딱였다.
“아니꼽긴 한데, 메이가 슬퍼하는 꼴은 보기 싫으니까. 안 죽으려고 애써 봐, 충견. 길운까진 무리여도 무운정돈 빌어줄게.”
불운이 아닌 거에 감사하라 이거냐.
나 같으면 그 무슨 망발이냐고 화르륵 따져 물을 텐데, 클라인은 그걸 또 태연스럽게 받아쳤다.
“그쪽이나 몸 사리십시오. 원래 힘 믿고 괜히 나대는 놈이 먼저 가는 법입니다.”
“입 한번 제대로 돌아갔네. 멋모르고 입부터 나불대는 놈이 더 먼저 간다는 거 몰라?”
“그럼 곧 있으면 알게 되겠군요. 누가 먼저 가게 될지.”
내가 못 살아. 친구하랬더니 왜 자꾸 원수에서 철천지원수로 진화하는 건데? 니들이 포X몬이야? 최종진화 날엔 서로 머리채 잡겠다? 어?
나는 유치하기 짝이 없는 두 남자의 팔을 하나씩 잡아끌었다.
“둘 다 살벌한 소린 그만하고 준비나 해요.”
그리고 조금 후회했다.
이 말을 좀 더 빨리할 걸.
쿠쿵-
잠잠하던 땅이 일순 태동했다.
‘드디어 강림하는 건가.’
이어서 약진이 길게 깔리더니, 신전을 덮고 있던 거대한 천장이 부질없이 무너져 내렸다.
파공음이 우레처럼 울리며 일대를 감싼 신력이 더욱 짙어졌다.
모두의 시선이 신전 한복판으로 쏠린 가운데,
푸콰가가각!
광포한 빛기둥이 터질듯 솟아올랐다.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있음에도 손끝이 저릴 만큼 난폭한 기운이었다.
처음엔 손가락만한 굵기로 보이던 기둥은, 점차 몸집을 부풀리더니 이윽고 루치펠의 너른 등짝만큼이나 커졌다.
옆에서 입을 멍하니 벌리고 있는 벤을 이디스가 쿡쿡 찌르는 것이 보였다.
“벤, 기억나요? 옛날에 하늘이 무너져도 탑주님이 누군가를 좋아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했었잖아요.”
그녀의 시선이 꼭 붙어있는 나와 루치펠에게로 잠시 향하다 돌아갔다.
빛기둥은 점차 옅어지고 있었다. 그 끝을 넌지시 응시하며, 이디스가 무심한 어투로 말을 툭 던졌다.
“그래서 하늘이 무너지나 봐요.”
콰르릉!
가열찬 굉음과 함께 하늘이 찢어졌다.
그 사이를 비집고 하얀 새 떼 같은 것들이 무자비하게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벤은 울상을 지으며 이디스의 소매 끝을 잡고 이를 딱딱 맞부딪쳤다.
“이 상황에 농담이 나와?”
“긴장 풀어주려고 한 건데. 별로 도움이 안 됐나 보네요.”
안타깝게도 이디스의 사과는 벤에게 닿지 못했다.
쩌적! 쩌저적!
샛노란 벼락줄기가 비처럼 쏟아졌다.
나는 마법진을 앞으로 퍼뜨리며 소리쳤다.
“모두 제자리 지켜!”
나와 함께 최전선에 도열해있던 신관과 마법사들이 일제히 팔을 뻗었다.
신성력과 마법으로 촘촘하게 짜인 결계가 넝쿨처럼 뻗어나가 숲을 덮었다.
상부는 루치펠이, 측면과 후방은 란슬롯이, 전방은 내가 주축이 되어 대기 중인 군사들을 감쌌다.
“인정머리 없는 것들… 초장부터 필살기를 쓰냐!”
이를 악물고 매달렸으나 발뒤축은 조금씩 밀려만 갔다.
내색은 안 해도 루치펠과 란슬롯 역시 힘이 부치는 듯했다.
그런다고 상대가 봐줄 리도 없었다. 눈부신 휘광을 전신에 감은 채, 하얀 날개를 펄럭이는 작자들은 더 이상 선량한 천사가 아니었다.
세계에 종말을 고하러 온 잔악한 침략자에 불과했다.
콰드드드득-! 콰득!
하나로 응집된 거대한 불기둥이 연달아 결계를 파고들었다.
눈이 멀 듯한 섬광이 시야를 가득 채우다 사그라지길 반복했다.
손이 덜덜 떨렸다. 등골이 삐걱거리고,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결계가 얼마나 버텨줄 지는 미지수였다. 그것이 머지않았다는 것만 확실할 뿐.
그마저도 이쪽이 먼저 깨뜨려야할 판이었다.
우리가 쉽게 밀려나지 않고 버티고 있으니, 관심이 다른 곳으로 쏠리기 시작한 탓이었다.
콰앙! 쾅!
그들이 너무도 가뿐히 휘두르는 일격에 수도는 처참히 무너져갔다.
벌써 수도 정중앙을 지키던 시계탑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사람들이 대피한 황궁까지 피해가 번지면 큰일이었다. 그 전에 결단을 내려야만 했다.
나는 피가 나도록 입술을 짓씹다가, 힘겹게 입을 뗐다.
“전군 결계를 개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