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
나는 기가 차서 입술만 벙긋거렸다.
군단을 이끌게 해준다는 건… 정말 계약에 응하겠다는 건가? 휘하의 31개 군단을 전부 지원해 주겠다고?
하긴, 그 역시 천계와 다시 맞붙을 수 있기만을 오매불망 바랐을 것이다.
와중에 휴전 조약까지 어기지 않을 수 있다니 금상첨화, 결코 뿌리칠 수 없는 제안일 터.
‘어떻게 알고 이미 무장까지 마치고 왔잖아. 이런 날이 오기만을 호시탐탐 기다렸겠지.’
나는 신나서 후다닥 뇌까렸다.
“그럼 어서 계약해요. 마왕과의 계약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거죠? 저번처럼 계약서를 쓰나요?”
“…….”
너무 부담스럽게 들이댔던 걸까.
적요한 눈동자로 나를 힐끗 내려다본 아가레스는 딱 잘라 거절했다.
“계약서는 필요 없다.”
“계약을 안 하시겠다는 건가요?”
“그래.”
아니, 이랬다저랬다 하는 게 어딨어! 지가 우디르야 탈룰라야 뭐야! 왜 갑자기 계약을 안 하겠다는 건데!
속이 몹시도 들끓었으나 나는 겉으론 최대한 평정을 가장하며 말꼬리를 흐렸다.
“마왕님. 정에 호소하고 싶진 않지만, 그간 같이 보내온 시간들이 있는데. 우리 이제 친애하는 옆집이웃 정도의 관계는 되는 것 아니었나요? 정말 계약 안 해주실 거예요?”
“그래.”
와, 단호박. 단호박도 알아서 쭈그러들 저 파렴치함!
과연 악의 끝판왕, 마왕이라 이건가!
처음부터 안 주는 건 괜찮다. 줬다 뺏는 게 더 치사한 법이다.
아가레스는 희망을 줬다가 절망으로 빠뜨리는 게 제일 잔인하단 걸 끝내주게 잘 알았고, 착실히도 실천하고 있었다.
나는 이유나 들어보잔 심정으로 되물었다.
“대체 왜요?”
“이건 거래가 아니니까.”
“……예?”
“내가 그저 널 아끼기 때문에 돕는 거다. 이 시간부로 마계동부의 모든 마족은, 나 포함 전군 계약 없이 출전한다. 영토 회복도 필요 없어.”
더 이상 놀랄 일은 없을 줄 알았는데. 나는 바보같이 또 한 번 턱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네에? 뭐요? 누굴 아껴?’
아무래도 잘못들은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 철혈의 마왕님 입에서 아낀다는 소리가 나올 리가 없다.
커다랗게 벌린 눈을 쏟아낼 것처럼 뜨고 있으려니, 아가레스가 뚱하게 대꾸했다.
“뭘 그리 보느냐.”
“아뇨, 그게… 너무 쉽게 수락하시는 거 아녜요? 잘 생각하신 거 맞으세요? 31군단뿐만 아니라, 마왕님도 전투에 끼시겠다고요?”
아무리 마왕과 계약을 하겠다고 밀어붙이긴 했지만, 그가 직접 나서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산하의 군대를 빌려주는 것만으로도 감지덕지였다.
솔직히 31개 군단을 딜로 걸긴 했으나 실제로 떨어지는 건 그 반의 반 정도나 될 것이라 예상하고 있었다.
계약 없이 인간계에서 힘을 쓰겠다는 건 마신의 권한까지 빌리겠다는 것.
기어이 금계를 어기고 인간계에 개입하겠다는 의미.
이는 정면으로 성마대전을 선포하는 것이나 다름없었고, 그 끝이 승리든 패배든 무수한 사상자가 나올 건 자명했다.
그래서 기대하지 않고 있었는데.
‘전군을 지원해주는 걸로도 모자라 마왕 본인이 직접 등판하겠다고? 그것도 이렇게 흔쾌히?’
몹시도 혼란스러웠으나 아가레스는 뭘 당연할 걸 묻냐는 기색이었다.
“그럼, 내 자식이 당하는 걸 보고만 있으라는 말이냐?”
“물론 걱정되실 순 있으시겠지만… 카임 왕자님이 쉽게 당하시진 않을-.”
“아니, 그 놈 말고.”
“마왕님께 자식이 또 있으셨어요?”
“…….”
에잉, 왜 답이 없어.
묵비권을 행사하는 와중에도 아가레스의 짙은 시선은 내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뭐야, 불안하게 왜 날 봐.’
1초, 5초, 10초…. 검붉은 눈은 끈덕지게도 붙었다.
이거 설마….
“저요?!”
“네가 매일같이 말하지 않았더냐. 홀애비 냄새 풍기는 내게, 너 같은 딸내미 하나 있어야 적적하지 않을 거라고.”
아니 그건 그냥…!
“혹 그저 지껄여본 농이었으냐? 허, 그 가벼운 입을 어찌하면 좋을까…. 화염지옥에 담갔다 올리면 고쳐지려나.”
“아이, 우리 마왕님두 차암. 노, 농이라니요. 당치도 않는 말씀! 저는 매사에 진심입니다. 세기의 진지벌레가 접니다.”
“진지… 무어?”
“제 궁에선 시녀들이 저한테 식사하라고도 안 해요. 진지 드시라고 하지. 와하핫, 이보다 더 진지할 수 없다. 와. 완전히 진지의 기준을 뒤집어 놓으셨다, 호우. 제 말투도 지금 궁서체인 거 아실까 몰라.”
“우리 딸은 참 재주도 가지가지군그래. 요상한 헛소리 하난 이틀 밤이라도 쉬지 않고 내뱉겠어.”
“이렇게 다재다능한 저를 지옥불에 튀기실 건 아니죠, 네?”
나는 끓는 물에 떨어진 생닭처럼 파드득거렸다.
누군 이리도 필사적으로 발악하는데, 곁에선 꾹꾹 눌러 참는 웃음소리가 들렸다.
“크흑… 큽…!”
이 모든 상황을 예상하고 있었는지 카임은 연신 터져 나오는 웃음을 추스르기에 바빠 보였다.
아까 부러 진지한 척 연기한 것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그는 꼭 동생 놀리기에 맛 들린 오빠 같았다.
아가레스가 사납게 쏘아보자 금세 꼿꼿한 태로 돌아오긴 했지만.
눈빛만으로 카임을 찍어 누른 그는 다정한 목소리로 날 얼렀다.
“든든한 대부 하나 생겼다고 생각하거라. 네가 호소하고 싶지 않은 정, 나는 걸고 넘어져서라도 대부 노릇 좀 해봐야겠다.”
커다란 손아래 머리칼이 흐트러졌다. 나는 눈을 꾹 감았다 떴다.
내 머리에서 손을 뗀 아가레스의 입가엔 부드러운 미소가 번져 있었다.
“이제 어서 가거라. 준비를 마치는 대로 나타나마.”
딱, 이마에 손가락을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발아래가 훅 꺼지는 느낌을 받으며, 난 생각했다.
다들 하도 내 이마만 노려서, 조만간 반사판으로 쓸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 * *
황궁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급소만을 가리는 가벼운 갑옷에 몸을 끼워 넣었다. 마법을 주로 쓸 테니 무거운 건 되레 쥐약이었다.
검도 비교적 간소한 체형을 가진 성검으로 챙겼다.
칼리안에게 걸린 블로킹을 깨준 전적이 있는 검이니, 다른 검보다 더 도움이 될 지도 몰랐다.
최소한 ‘천족에게 공격 데미지 5%증가’ 따위의 기능이라도 있길 빌며, 나는 시종장이 내민 활대를 들었다.
‘지독한 회귀 덕분에 활 실력 하나는 저절로 마스터 됐지.’
분야가 무엇이든 극한의 상황에 수십 번이고 던져지면 살기 위해서라도 저절로 터득되기 마련이다.
나는 전장에서 오십 번 넘게 구른 전적이 있었고, 그 덕택에 로빈후드 제자 정도는 된다고 말할 수 있는 실력이었다.
나는 활시위를 퉁, 튕겨보다 이만 활통을 메고 나섰다.
복도로 나오자마자 기다렸던 목소리들이 날아왔다.
“메이블린!”
“메이!”
“누님!”
아빠와 다니엘, 그리고 미하일이 대피하는 사람들의 행렬을 지키다 말고 뛰어왔다.
나는 세 사람이 밀려오는 대로 꼭 안아주다가 고개를 들었다.
“노아 오빠는요?”
“러셀바드 공과 함께 기사단을 이끌고 신전으로 갔다.”
그리 말하는 아빠에게선 평소와 다른 쇠 냄새가 났다. 옆구리에 찬 긴 대검이 갑옷과 부딪혀 절그럭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는 무장한 차림이었다.
“아빠도… 가시게요?”
“그런 표정 지을 것 없다. 노아가 누굴 닮았을 것 같더냐.”
그가 젊었을 적 노아만큼이나, 혹은 그보다 더 이름을 떨치는 대상이었단 건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그 고아한 얼굴과 번듯한 태도가 무릇 여인들의 마음을 뒤흔들었다는 게 크게 한 몫 하긴 했지만.
하나 그 사실을 제하고도, 그는 꽤나 주목받는 사람이었다.
다름 아닌 뛰어난 기사로서.
노아가 무(武)에 대해 조예가 깊은 것은 어쩌면 아빠의 그런 기질을 가장 많이 물려받아서 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예전과는 같지 않으실 텐데…….
“메이블린.”
내 우려를 끊어내듯 아빠가 두 눈을 마주했다.
“일전에 말했었지. 우리는 알아서 뒤따를 터이니, 너는 너의 길을 가라고. 나 또한 내가 원하는 길을 가는 게다. 그게 내 딸의 곁일 뿐이야.”
“…….”
“설마 노아는 되고, 나는 아니 된다 할 건 아니겠지? 차별이라니, 이거 좀 섭하구나, 메이블린.”
“그런 거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라…….”
횡설수설 고개를 젓는 날 아빠가 부드럽게 타일렀다.
그는 한 팔로 내 머리를 감싸고, 다른 팔로 등을 토닥였다.
“다 안다. 그러니 너도 날 이해하리라 믿는다. 감히 소중한 사람을 노리는 적들을 앞에 둔 심정이 어떤지.”
여러 감정이 뒤섞인 그의 심장박동은, 나와 같았다.
같은 끝을 보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차마 그의 손을 뿌리칠 수가 없었다.
다만 더 꼭 붙잡고, 발 아래로 마법진을 퍼뜨렸다.
“다니엘 오빠, 미하일.”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내게 박혔다.
나는 부러 평소보다 더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부탁했다.
“힘이 닿는 한 사람들을 대피시켜 줘요. 피해가 어디까지 미칠지 몰라서.”
“여긴 걱정마라. …부디 조심하고.”
“무사히 돌아오세요, 누님. 아버지도요. 노아형님껜 다리 하나 부러져도 괜찮으니 살아서만 돌아오라고 전해주세요.”
미하일이 조그맣게 웃었다.
그 희미한 미소를 만들어내려고, 배웅하는 모습이 웃는 얼굴이길 바라서. 안간힘을 쓰는 게 고스란히 느껴졌다.
나도 마주 미소 지으며 손을 흔들어주었다.
“그럼 다녀올게요.”
* * *
‘와… 아니, 이게…….’
신전이 자리 잡은 에스콰이아 숲에 당도해서, 나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몇 시간가량 여기저기 순회를 마치고 온 새 숲은 뭔가가 상당히 달라져 있었다.
굳이 콕 집어 말하자면… 조경이라고 해야 할까.
나는 벌린 입을 다물 생각도 않고 고개를 쳐들었다. 길고 긴 그림자가 얼굴 위로 드리워졌다.
교황청 옆에 떡하니 위용을 뽐내고 있는 높다란 건물은, 몹시도 익숙한 것이었다.
“이게… 뭐야?”
“뭐긴 뭐야. 마탑이지.”
지나가던 닭둘기를 가리키며 설명해도 이보단 덜 평평할 어조였다.
그래, 저게 마탑인 건 알겠는데. 그게 왜 여기서 나와, 응?
나는 설명을 요하는 눈으로 이 경관을 만든 주범을 올려다봤다.
루치펠은 어조만큼이나 평온한 낯으로 흐트러진 내 머리칼을 정돈해주었다.
“뭘 새삼. 탑이 갑자기 나타나도 놀라지 말라고 했잖아.”
“아니… 진짜로 탑을 뜯어올 줄은 몰랐지.”
마법사들을 전부 데리고 오겠다는 말인 줄 알았는데. 문자 그대로 마탑을 옮겨왔다.
왠지 모르게 근육이 더 우락부락해 보이는 머스클의 목격담에 의하면, 무 뽑듯 쑥 뽑아가지곤 아무렇지도 않게 콱 박아 넣었다고 했다.
‘능력치가 아무래도 인간을 뛰어넘은 것 같네.’
사실 인간이 아니기도 하고.
루치펠은 오늘 새벽, 본인 정체를 비로소 깨달았다.
그 후로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는 힘은 매 시간 업데이트되는 중이었다.
“걱정 마, 일조권은 침해 안 했어. 숲이 넓어서 마침 딱 이더라고. 그래도 맘에 안 들면 다른 곳으로 옮길게.”
내가 말없이 생각에 잠겨있는 게 여전히 마탑 때문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지난번 일조권 타령하며 둘러댔던 핑계는 또 어찌 기억했는지, 잘도 적당한 곳을 찾아냈다.
“앞으로도 계속 살 거니까 장소 선정은 잘해야지.”
그는 제 손길을 따라 결 좋게 늘어진 내 머리를 귀 뒤로 넘겨주었다. 포근한 미소가 붉은 입술을 맴돌았다.
‘앞으로도 계속 살 거니까, 라고…….’
이제껏 내가 먼저 안심시켜 주고만 다녔지, 타인의 입에서 듣는 것은 처음인 말이었다.
미래를 바라보는 말.
그런데 루치펠은 그 미래를 넘은 과거까지도 확언했다.
“어쩌면 널 만나기 위해서 날개가 꺾였나 봐. 멀쩡했으면 부러뜨려서라도 널 만났을 거야.”
“고작 나 때문에 이 종말까지 오겠다고?”
“종말이든 지옥이든, 억겁의 세월동안이라도 떨어질 수 있어.”
뜨거운 숨을 머금은 입술이 눈가에 한 번, 콧등에 한 번 짧게 부딪히더니 입술에 내려와선 오랫동안 머물렀다.
이윽고 애틋한 숨결을 남기며 떨어지고. 오로지 한 사람만을 가득 채운 시선이 날 향했다.
“널 안고, 네 목소리를 듣고, 네가 행복하게 웃는 모습을 볼 수만 있다면.”
그는 내 두 뺨을 감싼 채, 한 치의 흔들림도 얼굴로 말했다.
“얼마든지 그럴 수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