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
“벌써 시작됐나 보네요.”
퍽 놀란 에드먼드와는 달리, 메이블린은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는 반응을 보였다.
덕분에 란슬롯은 자세한 설명 없이 바로 본론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이제껏 느껴본 적 없는 기운이 거세게 요동치고 있습니다. 다른 나라 역시 마찬가지라고 합니다. 특히 이곳, 교황청에 위치한 신전에서 가장 큰 파동이 일고 있는 상황입니다. 만약 이 힘이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쌓인다면….”
한차례 입술을 짓씹은 그는 한껏 조여든 음성을 내뱉었다.
“이노아드 뿐 아니라 대륙 전체가 지도에서 사라질 겁니다.”
메이블린은 저도 모르게 짧은 침음을 흘렸다.
천계에선 벌써 준비를 마쳤는지 신력을 깔아두는 모양이었다. 그들의 군대가 인간계에 대거 강림할 수 있도록.
‘침공은 모로스의 신전에 석양이 내려앉는 때 즈음이라고 했던가.’
해가 질 무렵, 이노아드의 교황청에서부터 공격이 시작된다는 뜻이었다.
즉, 이 최전선이 뚫리면 끝이었다.
우후죽순으로 퍼져나간 천계의 부대는 이노아드를 무너뜨리고, 대륙을 집어삼키고, 끝내는 세계에 종말을 고할 것이었다.
‘존재하는 모든 걸 녹여서 저들만의 틀에 부은 뒤 완벽한 세계를 창조했다 자랑스레 말하겠지.’
메이블린은 그 참상만큼은 절대 보고 싶지 않았다. 결단코 막아야 했다.
‘일단 여길 정리하고서 에임을 들리고… 그 다음엔…… 그가 날 도와줄까…?’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계획을 정리해보고 있던 찰나, 이디스와 벤이 허공에서 나타났다.
“선생님!”
두 마법사가 발갛게 상기된 얼굴로 달려들었다.
마탑의 마법사들은 여전히 그녀를 선생님이라 불렀다.
메이블린이 먼저 그래 달라고 청하기도 했고, 다들 딱딱한 황제폐하 따위의 호칭보다는 선생님을 더 좋아했다.
둘을 보는 그녀의 눈이 반짝였다.
‘참, 루치펠이 보내준다고 했었지. 그럼 여기는 에디랑 란슬롯한테 맡기고…….’
머릿속으로 얼추 그려두었던 청사진이 마침내 완성되었다.
메이블린은 에드먼드와 란슬롯을 향해 몸을 틀었다. 그들은 자연스럽게 그녀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에디는 먼저 이 사실을 알려요. 사람들을 대피시키는 건 다니엘과 미하일이 알아서 맡을 거예요. 그리고 아까 얘기했던 대로 군사를 최대한 모아요. 노아가 제1기사단장이니까, 그와 함께 움직이면 수월할 겁니다.”
메이블린은 이어서 란슬롯에게도 지시했다.
“란슬롯은 성기사단을 정비하고, 전투에 능한 신관과 사제들을 추려요. 인원이 많으면 많을수록 좋겠지만, 타국엔 요청해도 소용없을 거예요. 다들 제 나라를 지키기 바쁠 테니까.”
“그럼…….”
“곧 마탑의 마법사들이 더 올 테니 그들의 도움을 받아요. 텔레포트로 지방 신전의 신관들을 소집해서 인력을 보충하도록 해요.”
“그리 하겠습니다.”
란슬롯이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다듬으며 돌아갈 채비를 했다.
산뜻한 아침 햇살이 감돌았지만 저마다 얼굴에 긴장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누구 하나 견주기 곤란할 만큼 치열한 날들을 버텨온 이들이었다.
그러나 세계의 종점이 될지도 모르는 순간에서까지 평정을 유지하기란 힘들었다.
단 한 사람만을 제외하고.
짝, 손뼉을 마주치는 경쾌한 파찰음이 울렸다.
“우리 끝나면 시원하게 승전파티나 열죠. 밤새 놀고 마셔도 아무도 뭐라 하기 없기, 어때요?”
명랑하게 떨어진 목소리가 긴장한 사내들을 파고들었다. 기어이 딱딱하게 굳은 안면근육을 풀게 만들었다.
끝나면.
후를 기약할 수 없는 이 전쟁이 끝나면.
당연스레 종말이 비껴간 세계를 담은 말.
그 한 문장이 고개를 들게 만들었다. 앞을 바라보게 했다.
확신할 수 있는 건 그 어느 것도 없었음에도, 결국 두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파르테아 지방의 백포도주가 좋네만.”
“하면 저는 넥타르를 대접하겠습니다.”
메이블린의 입술이 매끄러운 호선을 그렸다.
란슬롯마저 농지거리를 다 내뱉는 걸 보니, 둘 다 각오를 차린 모양이었다.
분위기를 탈 줄 아는 그녀는 흔쾌히 농을 받아쳐주었다.
“백포도주는 에디가 알아서 가져오고, 넥타르는 넣어두세요. 하룻밤 유흥에 성유물을 날렸다간 신들이 다시 쳐들어올걸요.”
한결 유연해진 기류 위에 낭랑한 음성이 쏘아 올려졌다.
“그럼 6시까지 교황청 신전으로 집결하기로 하고.”
빙글 돈 메이블린은 이디스와 벤을 마주한 채 손을 까딱였다.
“둘은 날 따라와요. 갈 데가 있어요.”
아무리 타국들이 자기 나라 지키기 바쁘다지만, 도움을 요청할 왕국 하나 정돈 있었다.
* * *
“말도 안 돼!”
에임으로 텔레포트하는 그 짧은 순간에도 벤은 쉴 새 없이 통탄을 쏟아냈다.
“탑주님이 천사라니! 이건 정말 제가 30대처럼 보인다는 사실만큼 말이 안 돼요!”
당신 30대 맞잖아. 정신 차려, 이 아저씨야.
몇 달 전 서른 번째 생일을 맞이한 후로 벤은 틈만 나면 저 말을 달고 다녔다.
아무래도 그는 곧 세계가 멸망한다는 사실보다, 악독한 제 상사가 천사라는 사실이 더 기가 차는 듯했다.
“저는 당연히 악마일 줄 알았단 말이에요! 솔직히 선생님도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세요?”
“음, 뭐…….”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마지못해 수긍해줬다.
“빈말로라도 아니라곤 할 수가 없네요.”
“그죠? 그죠? 근데 더 어처구니가 없는 건 따로 있어요! 제가 결혼도 못 해보고 죽게 생겼단 거예요! 이렇게 허무하게 가게 될 줄이야! 머스트, 사라! 이 아빠는 어쩌면 좋으니! 흑흑!”
꼭 비극의 끝을 달리는 연극 한편을 관람하는 기분이 들었다.
근데 머스트, 사라? 아빠? 이건 또 뭔 소리야?
나는 따가운 귀를 후비며 이디스의 옆구리를 슬그머니 툭 쳤다.
“벤이 결혼은 안 했는데… 애가 있어?”
은밀하게 속삭이자 이디스는 이보다 더 한심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뇨. 그냥 벌써부터 2세 이름 지어서 부르는 거예요. 하여간 헛된 꿈은 혼자 다 꾼다니까요. 저 정도면 몽상가가 아니라 망상가예요, 망상가. 어휴.”
벤이 히끅히끅 딸꾹질까지 해대며 울부짖든 말든 이디스는 신랄하게 혀만 찼다.
현실 수용이 빠르다던 그녀는 벤과 달리 침착했다.
나는 손수건을 그의 손에 쥐여 주며-별로 내키지 않았지만- 던켈하이트의 광장으로 둘을 이끌었다.
“아무도 안 죽으니까, 그만 울어요.”
“흐읍, 흑… 머스트… 사라…!”
뚝뚝 흐르는 눈물은 그칠 줄을 몰랐다. 별수 없이 특별한 정신세뇌기법을 써야할 듯했다.
에휴. 내가 정말 이 방법까진 쓰고 싶지 않았는데….
들숨날숨으로 입 안을 한차례 적신 나는 속사포로 랩을 내뱉었다.
“계속 울면 평생 결혼 못함. 독수공방 60년이 깔린 탄탄대로가 당신의 미래. 머스클이 자식 데리고 소풍 가는 거만 손가락 쪽쪽 빨며 구경하다 눈물짓고 돌아서는 게 일과. 나중엔 무릎연골 아파서 그것도 못함. 옆구리 너무 시린데 이는 더 시림. 그 시린 이 딱딱 떨면 지나가던 다람쥐가 도토리 두드리면서 반주 맞춰주고 감.”
“으으, 으…!”
충격요법이 제대로 먹힌 모양이었다. 처절하다 못해 고통스럽게 일그러진 얼굴은 그 효과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물론 폭포처럼 새던 눈물 역시 더 이상 단 한 방울도 흐르지 않았다.
나는 똑부러지게 일갈했다.
“독거노인 미래가 무서운 걸 보니, 엄청 살고 싶나 봐요? 그러려면 일단 이 세계가 있어야 해요. 이제 내 얘기 들을 준비 됐어요?”
“네! 마, 맡겨만 주세요!”
“좋아요. 벤은 에스카로트 공작저에 들려서 공작님을 데리고 왕궁으로 가요. 그 다음엔 신수 가족에게 사태를 전한 뒤 그들이 수락하면 이노아드 신전으로 텔레포트 시켜주고요.”
“네, 선생님!”
“이디스는 바로 왕궁으로 가서 국왕에게 이 사실을 알려. 그리고 둘 다 끝나면, 다시 이곳으로 와요. 같이 할 일이 있으니까. 알겠죠?”
“최대한 빨리 올게요, 메이.”
고개를 끄덕인 두 인영이 광장에서 사라졌다.
그제야 내게로 잔뜩 쏠려있는 시선들이 느껴졌다. 벤의 울음소리가 의도치 않게 관심을 끌어준 모양이었다.
‘어차피 어그로 좀 끌어야 했었는데, 잘 됐네.’
나는 무수한 시선들을 제치고 단상 위로 올라갔다.
“모두 주목!”
다소 장황한 전체 공지를 띄울 시간이었다.
나는 마법으로 목소리를 증폭시키고도 있는 힘껏 소리쳤다.
종말론을 퍼뜨리는 사이비 신도처럼 보일 것이 분명했지만, 서두를 이렇게 시작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 세계는, 오늘 멸망합니다!”
* * *
“맙소사…….”
“살다 살다 세상의 종말을 다 보게 될 줄 누가 알았겠어.”
던켈하이트의 일원들도 사람인지라, 처음엔 몹시 당황했다. 그러나 다행히 곧잘 내 말을 믿고 현실을 받아들였다.
에임 역시 밤새 이상기류가 감지되었던 터라 멸망 사실을 납득시키는 덴 큰 노력이 필요하지 않았다.
“메이. 왕궁에 멸망 소식을 알렸어요. 신수들께선 교황과 함께 전투태세에 들어가기로 하셨어요.”
“에스카로트 공작께선 국왕과 같이 계시고요.”
단상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사이 이디스와 벤이 일을 끝내고 왔다.
생각보다 일찍 온 것을 보니, 다들 빠르게 상황 파악을 해준 듯했다.
나는 둘에게 다음 할 일을 일러준 뒤 지하로 내려갔다.
한바탕 소란을 마치고서 찾은 집무실엔 날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주군.”
대각선으로 옆에 앉은 클라인이 한 차례 마른세수를 했다. 시간이 촉박했기에 우린 바로 본론에 들어갔다.
“자정부터 전국의 신전에서 폭발적인 기류가 흘러나온다기에,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한데 그것이 천계가 침입하기 위한 작업이었을 줄은…….”
“차라리 꿈이었으면 좋겠지만, 안타깝게도 현실이네요.”
“주군께서 여기까지 오셨다는 건, 이미 결정을 내리신 상태겠지요. 저희는 무얼 하면 됩니까?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클라인…….”
그는 기다렸다는 듯 명을 받들 준비를 했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목숨을 내던지겠노라 말했다.
나는 쉬이 떨어지지 않는 입술만 달싹이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전과 차원이 다를 거예요. 모두가 살 수 있다고 장담할 수도 없어요. 준비해둔 함정도 없고, 상황을 전복시킬 계책도 없어요.”
마음과는 달리 나오는 말은 죄다 절망적인 것뿐이었다.
하지만 사실이었다. 지난 번 제국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던 것과 같을 수 없었다.
상대는 다름 아닌 천족이지, 시스템 기간이 아니라 회귀 포인트도 못 만들지, 딱 하나 걸고 있는 히든카드는 모 아니면 도인 상황.
지금까진 극복할 수 있는 척 했어도, 세계멸망을 막는 일은 확실히 불가능의 영역에 있었다.
묻어두었던 현실을 입 밖으로 끄집어내자 암울한 상황이 선명히 와 닿았다.
나는 침울한 기색을 애써 지워내며 말을 이었다.
“던켈하이트도 신경 써 줄 수 없어요. 당장 지금부터 자리를 비울 건데, 빈손으로 돌아올지도 몰라요. 저는…….”
“괜찮습니다.”
미세하게 흐트러진 내 낯빛을 그새 읽은 모양이었다.
클라인은 언제나처럼 담담하나 강직한 눈으로 날 살폈다. 부드러운 목소리도 함께였다.
“정말로 괜찮습니다, 주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