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멸망을 삼킬 덫
#142
따악.
이마에 아릿한 고통이 직격함과 동시에 시야가 뒤집혔다.
그때처럼 각몽이 일어났다는 건 굳이 눈을 뜨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하여간 도움 안 되는 녀석. 더 잘 수 있었는데 깨우고 말이야.’
아침이라기엔 이른 새벽녘의 찬 공기가 뺨을 스쳤다. 뭔가 이상했다.
‘……내가 어제 창문을 열고 잤었나?’
나는 꾸무적거리며 이불을 뒤집어쓰려다 말고 벌떡 일어났다.
황제의 침실에서, 그것도 이 시간에 들려선 안 되는 발소리가 귓구멍에 제대로 꽂혔기 때문에.
‘어떤 간 큰 놈이 감히…!’
나는 급하게 손에 잡힌 촛대를 던졌다. 하지만 신음소리는커녕, 촛대가 바닥에 떨어지는 소란조차 돌아오지 않았다.
신체 어디든 가격했어야 할 촛대는 상대의 손아귀에 있었다.
어슴푸레한 어둠 속에 잠겨있던 인영이 한 발짝 앞으로 나왔다.
“메이블린.”
해도 완전히 뜨지 않은 이 새벽. 배짱 좋게 황제의 침실에 잠입한 침입자는, 다름 아닌 루치펠이었다.
서광 속에서도 그늘진 낯빛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답지 않게, 묘하게 묻어나는 초조한 기색.
나는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 곧장 창가로 다가갔다.
“루시. 무슨 일 있어?”
“마탑이 무너져도, 사람들이 다 죽어도, 설사 세계가 멸망해도.”
“……?”
“무서울 건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거 하난 무섭네. 많이.”
애써 태연을 가장하지만 어지럽게 일렁이는 시선이 내게 닿았다.
입술을 달싹이던 그는, 나를 한 차례 꼭 끌어안았다가 놓았다.
그리고 긴 이야기가 시작됐다.
내뱉은 한 줄기 숨이 바다가 될 때까지의 시간동안, 이 세계를 지배해온 이들의 이야기가.
보통 사람이라면 펄쩍 뛰다 못해 천장을 뚫을지도 모를 만큼 황당무계한 소리였다.
그러나 나는 차분하게 그의 이야기를 경청했다. 이상하게 낯설지 않았다. 오히려 익숙했다.
루치펠의 말이 끝났을 땐 어느덧 동이 트고 있었다.
나는 창가에 걸터앉은 채 루치펠과 하늘을 번갈아 가리켰다.
“그러니까… 루시는 사실 루시퍼라는 천사고, 천계엔 시나리온지 뭔지 개떡 같은 게 존재하는데, 그게 다 어그러졌기 때문에, 오늘 해가 질 즈음에 우릴 몽땅 죽이려는 천계 세력이 내려와서, 세계는 멸망한다는 거지?
“완벽한 요약이네.”
“정보를 알았으니, 그들에게 맞설 준비를 우리도 하고?”
“세계가 멸망한다고 해서 가만히 앉아 떨어지는 운석이나 구경할 순 없는 거니까. 안 그래?”
“그래, 그건 정말 잘했는데… 이런 적이… 혹시 전에도 있었어?”
아무리 소설 속에 들어왔다지만 이런 상황은 상상조차 못했다.
줄거리 좀 틀어졌다고 세계를 멸망시키려는 신과 대적하라니!
가망이 없단 걸 알면서도 루치펠은 담백하게 운을 뗐다.
“너 최초 좋아하잖아. 너는 특별하니까 한 발 더 가서 처음이자 마지막이라는 타이틀까지 달아버려.”
루치펠은 이제 굳이 말하지 않아도 내 속을 훤히 꿰뚫고 있었다.
나는 턱을 문지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하다하다 마족도 아니고 천족과 전쟁을 치르게 될 줄이야.’
그것도 기약 없는 싸움이었다. 계란으로 바위 치는 수준을 넘어섰다.
지금 상황을 굳이 비유하자면, 이미 결말이 정해진 책의 마지막 챕터를 읽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인간과 천족이라니.
차라리 개미가 사자 발을 물어 죽이는 게 더 신빙성이 있을 판이었다.
더구나 지금은 시스템 기간도 아니었다. 시스템이 활성화 되려면 시간이 좀 더 필요했다.
즉, 여태 그래왔던 것처럼 죽으면 사건이 터지기 전으로 회귀하는 것도 불가능하단 의미.
루치펠 역시 이를 알고 있었다. 다만 모로 가나 가로 가나 통하는 길이 하나뿐이라면, 결과는 그 때 가서 생각하자는 게 결론이었다.
그러니 물러설 수 없었다. 뒷걸음질 친다 한들 뒤는 낭떠러지.
앞에 펼쳐진 길이 치솟는 화염 속이라도 뛰어들어야만 했다.
넋 놓고 최후를 기다리기엔 내가 영 참을성이 부족했다.
‘쏟아지는 운석에 대고 소원이나 빌며 앉아 있는 건 사절이야.’
혼란스러웠던 생각이 정리되자 나는 고개를 팩 쳐들었다.
“일단 차례차례 짚어볼게. 첫째, 이게 꿈이 아닌지 부터.”
쳐든 머리는 다짜고짜 창문으로 직격했다.
쾅!
황실 최고의 건축가가 직접 고안했다는 유리창은 과연 그 명성에 걸맞게 튼튼했다.
“음, 현실 맞네.”
내 이마만 불그스름하게 올라왔다. 나는 인상을 쓰며 이마를 문질렀다.
“그 다음은 우리 탑주님의 정체 문젠가? 이건 네가 루시퍼든 루치펠이든 어차피 애칭은 루시로 똑같으니 문제 될 게 없는데. 아, 혹시 애칭이 맘에 안 들어? 그럼 다른 거 생각해 볼게.”
속사포로 일어나는 일련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는지 마주한 루치펠의 눈동자가 꿈벅거렸다.
고장 난 시계처럼 잠시 멈춰있던 그는, 이내 사붓이 웃었다.
“네가 날 한심한 비둘기새끼라고 불러도 난 좋아.”
“그래? 나도 좋아, 패스.”
손을 대충 휘젓는 것으로 두 번째 문제까지 가뿐히 넘겼다.
이제 해결해야 할 사안은 마지막 하나만 남았다.
“그럼 셋째, 천족이랑 전투를 벌이는 건…….”
늘어지는 말미를 따라 루치펠의 붉은 눈이 한층 깊어졌다.
나는 방긋 웃으며 호기롭게 외쳤다.
“당근 직진이지! 까짓 거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시원-하게 맞짱 뜨자!”
결말이 정해져 있는 책이면 뭐.
그게 운명이면 뭐.
마지막 페이지를 찢어버리면 그만이다.
엔딩이 나지 않도록, 새로운 결말을 쓸 수 있도록.
‘벌써부터 끝판을 보기엔 이르지.’
강건한 내 태도에 루치펠이 턱에 힘을 주었다. 그는 다소 걱정스러운 낯빛이었다.
“정말이지 잔인할 만큼 한결같네. 당연히 이런 답이 나올 줄 알고 오긴 했는데… 한 번이라도 아니라고 말해주길 바랐어.”
“내가 그럴 수 없는 사람이란 거, 그동안 실컷 겪어봐서 알잖아.”
“……진심으로 얘기해줘. 정말 괜찮겠어? 물론 나야 널 지키는 데 최선을 다하겠지만, 천계에서 단단히 벼르고들 있어. 시나리오를 엉키게 만든 주범이 너라고.”
“언젠 뭐 해본 적 있어서 덤벼들었나. 간절하니까 어떻게든 버티고 막아서다 보니 여기까지 온 거지.”
나는 근심을 떨쳐주기 위해 부러 쾌활하게 굴었다.
“걱정 마, 루시. 이번에도 분명 그럴 거야. 승리의 신은 몰라도, 운명의 신은 내 편을 들어줄 거야. 그래서 우린 앞으로도 이 세계에서 살아갈 거야. 난 알아.”
“어떻게 그렇게 확신해?”
“글쎄…. 그냥 내 예감이 그래.”
나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어투와 표정으로 답했다. 그러자 줄곧 굳어있던 루치펠의 미간이 풀어졌다.
그는 천천히 손을 뻗어 내 손을 부드럽게 쥐었다. 곧 그 위에 발그무레한 입술이 내려앉았다.
서약을 하듯 경건한 동작을 마치고서 다시 올라온 시선은, 오롯이 나만을 담고 있었다.
“메이블린. 대체 얼마나 더 빛날 셈이야? 이젠 세계의 운명이 되겠어.”
“그럼 그 전엔 뭐였는데?”
“내 운명이었지.”
그가 상체를 숙여왔다.
“지금도 그렇고.”
옅은 숨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반나절 후 펼쳐질 피비린내를 찰나 잊을 수 있을 만큼 달콤한 음성이었다.
그래서 난, 세계의 종말을 앞두고서도 기꺼이 웃을 수 있었다.
웃는 이는 나 혼자만이 아니었다. 나직한 웃음소리가 내 뒤를 따라 울렸다.
“이상하게 네 곁에만 오면 마음이 편해져.”
가까이 밀착한 그는 내 팔을 잡고 목덜미를 지분거렸다. 어깨에 고개를 묻을 듯 굴던 방향이 살짝 틀어졌다.
지그시 내리누른 입술의 촉감이 온기와 함께 퍼져나갔다.
이윽고 더운 숨을 터뜨리며 입술을 뗀 루치펠은 몸을 물렸다.
“이따 봐. 마탑이 갑자기 나타나도 너무 놀라진 말고.”
그가 딛고 선 바닥에 텔레포트 마법진이 덧그려졌다.
“에임을 오갈 인력이 필요할 테니까, 일단 이디스랑 벤 보내줄게. 폐하도 힘내.”
곧 시원한 체향을 남긴 채 그의 신형이 사라졌다.
나는 벙 찐 얼굴로 멀뚱히 서 있다가, 퍼뜩 고개를 저었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슬슬 준비해 볼까.’
나는 돌아다니기 가장 편한 옷을 걸친 뒤 머리를 질끈 올려 묶었다.
내 기침을 담당하는 시녀들이 오기엔 이른 시각이었으나, 먼저 문을 박차고 나섰다.
* * *
성큼성큼 복도를 가로지르는 메이블린 앞에 길쭉한 인영이 불쑥 끼어들었다.
“폐하. 아침부터 또 어딜 가십니까.”
에드먼드는 메이블린을 가로막고서 아이를 가르치는 선생의 말투로 훈계를 늘어놓았다.
“제게 걸린 이상, 빠져나가실 순 없습니다. 이스터 후작과 세르비아 왕국과의 무역 건으로 조찬을 함께 할 거라고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조찬이고 뭐고,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에요.”
“폐하의 일정을 책임지는 저로서는 중….”
“에디.”
말꼬리를 잘린 에드먼드가 불만스럽게 눈꼬리를 비죽 올렸다.
“내 말을 유일하게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사람이 그대라는 걸 알긴 아나?”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그는 냉큼 군신관계를 버리고 절친모드에 들어갔다.
메이블린은 신하의 가면을 던져버린 그의 양 어깨를 붙잡았다.
선명한 금안이 결연한 빛을 담고 있었다.
“이거 하나만 물어볼게요.”
에드먼드는 일단 황제폐하께서 말씀하시니 어디 얼마나 창의적인 핑계인지 들어는 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꾹 다물린 입술에서 불쑥 터져 나온 물음은, 변명과는 상당히 거리가 멀었다.
“나 믿어요?”
“……?”
이리도 생뚱맞을 수가 없는 질문이었다. 에드먼드가 눈살을 슬며시 찌푸렸지만 메이블린은 멈추지 않았다.
“긴 설명은 못해요. 오늘 밤, 이노아드 제국은 무너져요. 아니. 이 세계가 완전히 사라질 거예요. 우리가 세계를 멸망시키러 오는 천족들을 막지 못한다면요.”
“그 무슨…!”
“그들의 목적은 오로지 세계 멸망. 그 뿐이기에 무자비하게 짓밟을 거예요. 가망이 없어 보이지만, 최대한 버텨는 봐야죠. 지키고 싶은 게 많으니까. 그러니 당신도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해요. 가능한 많은 군대를 징집시켜요. 지금 당장.”
정신없이 쏟아진 정보에 에드먼드의 입이 떡 벌어졌다. 항시 능글맞게 느물거리던 상판이 단박에 뜨인 건 처음이었다.
메이블린은 그 앞에 손을 흔들었다.
“저기요, 에디. 내 말 듣고 있어요? 이럴 시간이 없는데.”
“메이블린. 또 얼토당토않은 농으로 빠져나가려고 하는 거라면…!”
“내가 이런 걸로 농담이나 할 사람 같아요?”
“그건 아니지만…….”
말끝이 뭉그러졌다. 에드먼드는 몹시도 혼란스러웠다.
물론 메이블린이 자신을 따돌리고 몰래 잠행을 감행하는 등 무모한 짓을 종종 벌이긴 했다.
그러나 함부로 농을 치는 이는 아니었다. 더구나 이렇게 후환이 큰일에 관련되어서라면 더더욱.
그녀같이 영리한 자가 갓 즉위한 상태에서 제 지위를 깎아먹는 짓을 하진 않을 터였다.
괜히 군사를 불러 모았다가 낭패를 보는 일 따윈 애초에 만들지 않을 것이다. 천계의 존재들을 들먹이면서까지.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갑자기 세계가 멸망한다니.
에드먼드가 영문도 모르고 이도저도 못하는 와중에 멀리서 한 남자가 다급하게 뛰어왔다.
“폐하!”
“……성하?”
당혹으로 물든 에드먼드의 눈이 더욱 커졌다.
지금 시각이면 아침 예배를 보고 있어야할 교황이 떡하니 나타난 탓이었다.
이쯤 되니 기묘한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교황이 미리 보낸 서신이나 일말의 언질도 없이, 그것도 직접 행차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었다.
국가에 재난 상황이라도 발생하지 않고서는.
어느새 지척까지 다다른 란슬롯은 숨을 고르지도 않고 말을 쏟아냈다.
“이노아드의 모든 신전에서 이상 현상이 동시에 발생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