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
눈앞의 갈색머리 여자는 증오스런 어조로 온갖 악담을 퍼부어댔다.
언제까지 귀 따가운 개소리를 듣고 있어야 하나 눈살을 찌푸리던 찰나. 별안간 시야가 홱 돌았다.
한 바퀴 뒤집어진 공간은 새로운 장면을 보여줬다. 정확히 말하면 직접 체험한 것에 가까웠다.
조금 전과 같이 몸은 제 의지를 반하고 알아서 행동했다.
마치 이미 일어났던 일을 재현하려는 연극처럼.
‘이렇게 생생한 꿈은 처음인데.’
그는 어느새 두 팔이 결박된 채 무릎을 꿇고 있었다.
수많은 인파가 그 앞에 몰려들었다. 그들은 손가락질과 함께 조롱으로 가득 찬 언사를 던졌다.
[더러운 배신자!]
[감히 아버지의 권능에 대항해?]
[지옥에나 떨어져라!]
끝도 없이 떨어지는 야유를 가르고, 금전에 대치했던 갈색머리 여자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여자는 루치펠 앞에 다다라서야 멈췄다. 그녀는 허리를 숙인 채 그의 턱을 잡아 올렸다.
차가운 조소가 공기를 터뜨렸다.
[티케는 이미 추방됐다. 가여운 것. 지금이라도 참회하고 내게 굽히는 모습을 보인다면, 심판을 중지시켜주마.]
분명 꿈일게 분명하건만. 루치펠은 그 손길이 그리도 역겨울 수가 없었다.
날카로운 일갈과 함께 루치펠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기실 몸이 알아서 먼저 손을 뿌리쳤다.
[같잖은 짓 그만두고, 이만 꺼져.]
여자는 손아귀가 휑해지자 이를 바득 갈았다.
[어리석은 놈. 구렁텅이에 제 발로 기어들어가는구나.]
뭐라 대꾸하고 싶었지만 불가했다.
여자와 야유소리가 물결처럼 일렁이며 흩어지고 또 다른 광경이 시야를 메꿨다.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자들이 루치펠을 중심으로 갈라져 길게 섰다.
인원이 더 많아졌을 뿐, 제게 조롱을 퍼붓는다는 사실엔 변함없었다.
이번엔 팔뿐만 아니라 거의 전신이 묵직한 사슬로 칭칭 감겨 있었다. 무릎은 여전히 꿇린 채였다.
아무리 생생해봤자 현실이 아님을 알기에 화가 나지는 않았다.
다만, 기묘한 기시감이 본능을 휘감았다.
‘어째서, 왜… 겪어본 일처럼 느껴지지?’
잔뜩 몰린 인영들 사이로 이따금 하얀 날개도 보였다. 구설로만 듣던 천사들이었다.
인간인 자신이 천족을 만나긴커녕 천계에 발을 붙이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될 터인데.
꿈은 마치 지금 겪고 있는 일이 사실인 양 너무도 뚜렷했다.
이것이 자신의 과거고, 숨겨진 진실이라는 듯이.
벌써 무의식을 감싼 몇 겹의 껍질이 벗겨졌다. 꼭 맞는 옷처럼 느껴지는 이 신체가 그런 느낌을 더욱 증폭시켰다.
루치펠은 억지로 고개를 쳐들었다. 지척에 선 한 남자가 두루마리를 꺼내 펼치고 있었다.
마침내, 억눌렸던 기억의 포문을 여는 첫 열쇠가 돌아갔다.
[타락천사 루시퍼를, 인간계로 추방한다. 이 시간부로 그대의 직위를 박탈할 것이며, 모든 기억을 지우고 인간의 몸에 가둠으로써 힘을 봉인한다. 그대는 스스로 그 죄를 자각하고 뉘우칠 때까지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둥, 둥, 둥.
최종 판결을 알리는 북소리와 함께 밑이 쑥 빠졌다.
루치펠은 삽시간에 현실로 곤두박질쳤다.
“허억, 헉.”
익숙한 풍경이 시야에 차츰 들어왔다.
그는 숨을 고를 새도 없이 바로 몸을 일으켰다. 갈 곳이 있었다.
풀벌레조차도 숨을 죽인 새벽. 본능이 이끄는 대로 떠밀린 몸이 도착한 곳은 에임 왕국의 작은 신전이었다.
지난 300년간 에임의 수호신이 잠적한 탓에 버려진, 아무도 찾지 않는 폐쇄된 신전.
두껍게 쌓인 먼지는 한밤중의 산처럼 고적했다. 루치펠이 지나간 자리마다 진한 발자국이 남았다.
이윽고 수호신의 조각상 앞에 다다른 그는 멀거니 상을 올려다보았다.
여느 신들의 조각상과는 다르게 품에 뛰어드는 누구라도 꼭 안아줄 듯 활짝 벌린 두 팔.
루치펠은 그 자애로운 모습이 야속하게만 느껴졌다.
명확한 이유도 모르면서 그저 막연하게 슬펐고, 아팠다.
가슴이 욱신거리다 못해 숨을 제대로 쉬는 것조차 힘들었다.
느닷없는 통증은 빠르게 극한으로 치달았다.
“흐읍, 큭…!”
불에 데기라도 한 양 전신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등가죽을 닥닥 벗겨내는 듯한 통각 끝에, 새로운 감각이 성난 파도처럼 덮쳐왔다.
등 뒤에서 뭔가가 솟아나고 있었다.
뿌드득, 뿌득.
아득한 고통이 등줄기를 타고 퍼져나갔다.
허리가 고꾸라졌으나 무릎마저 꺾이는 꼴은 이를 악물고 버텨냈다.
오랜 세월 막혀있던 둑이 터지는 것처럼, 혹은 거대한 방벽이 무너져 내리는 것처럼.
천지를 뒤흔드는 소음과 함께 머릿속이 뒤집어졌다.
동시에 어떤 기억들이 물밀 듯 솟구치기 시작했다.
까마득한 세월과 시간들이 가차 없이 휘몰아쳤다.
비로소 자신의 존재를 선명하게 자각한 순간.
루치펠은 천천히, 무너졌던 상체를 들었다.
어느 때보다도 적요하게 타오르는 붉은 눈동자는 수호신 티케의 조각상에 박혔다.
펄럭-
그 정적인 동작을 따라 양쪽으로 기다란 그림자가 깔렸다.
“하, 빌어먹을.”
루치펠은 실소를 터뜨리며 거친 손길로 머리를 쓸어 넘겼다.
욕지거리에 화답하듯 얼룩덜룩한 날개 한 쌍이 펼쳐 올랐다.
일반적인 천사들과는 다르게 뭉그러지고 찢긴 깃이 힘없이 떨어졌다.
“이럴 거면… 차라리 기억하지 못하는 게 좋았을 텐데.”
꽉 말아 쥔 주먹 위로 푸른 핏줄이 도드라졌다.
애써 다문 잇새로 자꾸만 쓴웃음이 비집고 나왔다.
이제는 외면하래야 할 수 없었다.
자신의 또 다른 이름은 루시퍼.
300년 전 추방된, 타락천사였다.
* * *
겹겹이 쌓인 구름 위.
천계에선 중대한 사안을 놓고 회의가 한창이었다. 대천사와 수호신들은 물론, 회의의 결정권을 가진 주신들까지 자리를 차지했다.
천사들 중에서도 각 구역을 아우르는 대천사가 있듯이, 수호신 사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세계의 흥망성쇠를 오래 봐온 노신(老神)들 가운데 뛰어난 자를 선별해 주신(主神)으로 모셨다.
같은 신이어도 이 주신들은 좀 더 상위의 권한을 가졌다.
신과 천사부대가 인간계에 직접적인 간섭을 위해 나설 경우. 혹은 연관된 각종 중대사를 실행할 시, 반드시 주신들의 판결을 거쳐야 했다.
아무리 창세신이라도 그들의 결정을 번복하거나 파토시킬 순 없었다.
가장 최근에 열린 회의에선 에임 왕국 시나리오의 폐기처분이 떨어졌었다.
메이블린 슈트레커가 망친 시나리오를 엎고 새로운 시나리오에 돌입하기로.
현재는 동일한 이유로 이노아드 제국 시나리오의 차후를 결정하기 위해 모인 참이었다.
이노아드의 수호신인 모로스는 단상 밑 중앙부에 서서 처분을 기다렸다.
제출된 시나리오를 훑어보던 한 주신이 관자놀이를 짚었다.
“모로스 그대가 앞으로 노력하리란 건 잘 아네. 이제껏 문제 한 번 일으킨 적이 없다는 것도. 하나 이번엔 힘들겠어. 시나리오가 이미 상당히 꼬인 상태야. 잘 풀 수 있을는지 확신이 안 서는군.”
스크린을 가득 채운 각 나라의 시나리오를 보며 다른 주신도 말을 얹었다.
“에임의 시나리오는 이미 폐기 처분이 내려졌고. 제국까지 이 지경이니, 대륙이 전반적으로 불안한 상태지. 종국엔 이노아드 하나만의 문제로 끝나지 않을 가능성도 커.”
호시탐탐 끼어들 기회만을 엿보던 에리스는 냉큼 그 말을 이어받았다.
“주신. 꼬인 실타래를 풀자고 이리 시간을 끄실 필요 없습니다. 꽉 막힌 매듭은 잘라서라도 해결하는 게 도리지요.”
“에리스. 정녕 확신을 가지고 하는 말인가?”
“복잡하게 생각할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이도 저도 못한다면, 버리면 됩니다.”
“…….”
일순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주신들조차 섣불리 나서지 못할 만큼 파격적인 제안이었다.
그나마 가장 연륜이 깊은 주신이 그녀의 청에 화답했다.
“시나리오를 교체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를 아예 재건축하잔 말이오?”
세계를 재건축한다 함은 세계를 멸망시키겠단 의미와 동일했다.
그럼에도 에리스는 당당했다.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데 거침이 없었다.
스크린 속 화면이 그녀의 손짓을 따라 대륙의 지도를 띄웠다.
그녀는 나라를 하나하나 짚으며 시나리오를 파고든 균열에 대해 설명했다. 사소한 것부터 제법 커다란 것까지 모조리.
규모가 크든 작든 전부 메이블린으로부터 시작된 균열들이었다.
에리스는 쐐기를 박듯 마지막 말에 더욱 힘을 주었다.
“썩은 부분을 도려내고 새 살을 채워 넣다간 늦습니다. 그 사이 새로운 병폐가 발생할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는 실정입니다. 이 많은 위험요소를 부담하느니, 무너뜨리고 다시 짓는 방도가 최선이라고 사료됩니다.”
그러자 줄곧 잠자코 있던 모로스가 비웃음을 흘렸다.
“네게 가장 최선인 방도겠지. 안 그런가?”
에리스의 매서운 시선이 곧장 쏘아졌다.
“모로스. 이 회의가 어찌 열렸는지 안다면, 감히 발언할 염치는 없을 텐데.”
“염치라……. 나서려거든 알량한 자존심 따윈 버리라는 게지.”
모로스는 물러서는 대신 느긋한 미소를 입가에 걸쳤다.
“그래, 기꺼이 버려주고 말고.”
“……!”
다음 순간 주신들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이제 되었나, 에리스?”
모로스가 기어이 무릎을 꿇고 앉은 것이다.
아무리 무언의 위계질서가 존재한다곤 하나, 같은 신이었다.
스스로 굴욕을 자처하면서까지 급을 나눌 필요는 없었다.
주신들은 천사들을 시켜 서둘러 모로스를 일어나게 했다.
“우리는 사태를 해결할 방안을 얻고자 이 자리에 모인 것이지, 그대가 용서를 비는 모습을 보러 온 것이 아니오. 형벌이 아직 내려지지도 않은 상황에서 이럴 필요는 없소.”
“에리스. 그대도 자중하시오. 같은 신으로서 욕보일 짓을 해 얻는 것이 무어가 있소?”
묵중한 타박이 떨어졌다. 분했지만 에리스는 성난 표정을 갈무리하고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녀는 물러날 때와 나설 때를 구분하지 못할 만큼 어리석지 않았다.
그렇다고 한 번 펼친 의지 또한 굽힐 만큼 유하지도 않았다.
사뭇 결연함 마저 느껴지는 얼굴로 고개를 든 그녀는 앙칼지게 대꾸했다.
“소란을 야기한 점은 죄송합니다. 그러나 개미 한 마리 잡기 위해 언제까지고 이리 시간을 허비할 순 없는 노릇 아닙니까. 개미굴을 붕괴시키면, 개미는 자연히 죽습니다. 굴이야 또 다시 파면되는 일이고요.”
주신들이 한차례 술렁였다.
에리스의 제안이 다소 과격하긴 했으나, 영 틀린 말도 아니었다.
에임의 사례가 그를 확연히 보여줬다.
시나리오를 교체하기 위해 잠시 정리하던 몇 년 새.
죽은 줄로만 알았던 메이블린 슈트레커가 느닷없이 등장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마탑주를 꼬드기고 이노아드의 황제가 되어버렸다.
정복전쟁을 별 탈 없이 끝맺어준 덕분에 다른 시나리오가 곤두박질치는 것은 막았다지만, 임시방편에 불과했다.
이노아드가 본 시나리오에서 완전히 이탈했으니 타국 또한 그러지 말란 법은 없었다.
에리스의 말마따나 벌써부터 조금씩 틀어지기 시작한 나라들이 상당수였다.
대륙을 충분히 흔들 수 있는 세력인 제국과 마탑에 변수가 생긴 이상, 그 수는 나날이 늘어갈 것이었다.
요상한 신탁을 내린 모로스의 처벌은 불가피했고, 여타 시나리오를 위해서라도 하루빨리 대책을 내놓아야 했다.
이를 다시금 자각한 주신 대다수가 인상을 찌푸렸다.
개중 한 신이 가장 시급한 일을 내놓았다.
“일단 유일한 변수인 메이블린 슈트레커 먼저 제거해야겠군.”